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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22:44:08

오자와 지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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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함대사령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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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연합함대사령장관 (1894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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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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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연합함대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小澤治三郞 | Ozawa Jisaburō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zawa11.jpg
<colbgcolor=#b0313f><colcolor=#fff> 출생 1886년 10월 2일
미야자키현 코유군 타카나베정
사망 1966년 11월 9일 (향년 80세)
도쿄도 세타가야구
묘소 다이키치사(大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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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서훈 내역 서보장(瑞宝章, 2등급)
군사 경력
복무 일본제국 해군
1910년 12월 15일 ~ 1945년 10월 10일
최종 계급 중장
주요 보직 해군대학교장
남견함대사령장관
제3함대사령장관
연합함대사령장관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남방 작전
필리핀 해전
레이테 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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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어린시절2.2. 장교 시절2.3. 남방함대사령장관2.4. 필리핀 해 해전2.5. 레이테 만 해전2.6. 연합함대사령장관2.7. 패전 이후2.8. 죽음
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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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敗戦の責任はあるが、開戦の責任はない。 私は最後の連合艦隊司令長官としてその最期を注視する。
패전의 책임은 있지만 개전의 책임은 없다. 나는 최후의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서 그 최후를 지켜보겠다.
일본제국 해군제독이다.

2. 일생

2.1. 어린시절

전직 타카나베번 번사[1]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폭력소년으로 소문나 시비 거는 불량배를 다리 밖으로 던져(!)버렸는데[2] 이 일로 그는 중학교에서 퇴학당하게 된다. 실의에 빠져있는 지사부로에게 일본 육군에 입대해 있던 의 상관인 육군 장교가 열심히 공부해서 장교가 되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니 마음을 바로잡고 공부하여 제7고등학교 조사관(造士館)에 합격하였다. 얼마 안있어 오자와 지사부로는 해군병학교에 합격하였고 예전에 뜻한대로 해군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2.2. 장교 시절

졸업한 후 소위후보생으로 순양함 소야(宗谷)에 탑승하였다. 이 때 함장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의 수상이 되는 스즈키 간타로 대좌, 후보지도사관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위였다.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전까지 제1항공전대의 사령관으로서 기동부대를 육성해냈다. 원래는 겐다 미노루 중좌가 항공전대의 창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을 그가 해군중장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에게 건의하면서 창설되었고 이로 인해 1항전과 2항전이 창설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이 두 항공전대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미드웨이에서 제대로 말아먹게 된다.[3]

2.3. 남방함대사령장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isaburo_Ozawa_1941.jpg
1941년 남방함대사령장관 재직시의 오자와 제독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말레이 부대 지휘관 겸 남파함대사령관을 맡았다.

남방작전 당시에도 오자와 제독은 여타 일본장성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는데, 남방작전에서 육군을 지휘한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이 수송함대 호위의 빈약함(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을 우려해서[4] 호위함대 증원을 상부에 건의했으나, 해군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었던 남방총군 사령부는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마무라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남방함대사령관인 오자와 제독을 만나 호위함대 증강을 요청했다.[5]

이에 오자와 제독은 호위함대를 대폭 증강(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3척, 경항모 2척, 구축함 19척)하고 거기다 추가 타격함대까지 편성해서 파견했고, 증강된 일본 함대는 자바 해전에서 연합군 함대를 격파해서 육군의 자바섬 공략을 효과적으로 엄호했다. 이 조치는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고, 상술했듯 이 덕분에 일본 육군은 이마무라 장군이 탄 수송선이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의 어뢰 오인사격으로 격침당했을 때, 작전 종료 이후 수송선 격침건을 사죄하러 온 해군 장교들에게 이마무라 장군이 영국 해군 순양함에서 발사한 어뢰로 인해 격침된 것으로 하자고 말하면서 없던 일로 해버렸다.[6] 일본 육군 장군이 일본 해군 제독의 약점을 덮어준 셈이다. 육군과 해군 사이가 그렇게나 좋지 않았던 당시 일본군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7] 이때의 인연으로 이마무라와 오자와는 평생의 막역한 지기가 된다.

그리고 1941년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Z기동부대 소속의 전함인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함과 순양전함 HMS 리펄스 함을 오직 1,000km가 넘는 거리에서 출격한 뇌격 무장과 폭탄을 장착한 쌍발 폭격기만으로 격침시켜 버린다.[8] 이때 그는 중순양함 초카이[9]에서 지휘하였으며 잠깐 동안 영국 함대와 거리가 가까워져서 야간전이 벌어질 뻔 했으나 영국 해군이 일본 해군을 발견하지 못하여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 후 1942년 3함대사령장관으로 복귀하였고,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암호문 노출을 강하게 의심했다는 기록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전훈을 강하게 의식하여 필리핀해 해전에서 정찰을 더욱 강화하는 등 틀리지는 않은 방향성을 보였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군에서 노력하는 것과 관계 없이 미군의 정보수집 능력과의 격차가 너무 컸던 터라 아래에도 있듯이 유의미한 전환으로 이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2.4. 필리핀 해 해전

1944년 나구모 제독의 후임으로 제1기동함대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가 제대로 항모기동부대를 잡자마자 처음으로 맞는 전투가 재수없게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으로 불리는 필리핀 해 해전이었다.[10] 이때 그는 아웃레인지 전술[11]을 사용해서 미 해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때의 일본 해군은 도저히 이 전술을 수행할 정도로 제대로 경험이 쌓이지않은 데다가 태반수가 제대로 훈련도 못 받은 조종사들이었다.[12] 거기에 미 해군 조종사들은 이미 베테랑에 뛰어난 기동부대가 있었던 덕에 공격하기도 전에 말 그대로 녹아 버렸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기함인 항공모함 다이호[13]와 쇼카쿠 등을 잃고 패배하게 된다.

이 해전에서 오자와 제독은 기동함대를 이끌기에는 너무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항공기 운용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이 조종사의 기량을 무시한 무리한 작전이라며 아웃레인지 작전에 반대했지만[14] 듣지 않았고, 이후 칠면조 사냥에서 어렵사리 살아돌아온 조종사들도 '최소한 이 작전의 절반 정도 거리에서 출격했다면 공격기가 3배는 살아남아서 적 항모에 도착했을거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항공참모였던 오쿠미야 마사타케 대좌는 '오자와 제독은 항모전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라며 맹렬히 디스. 야마구치 다몬 제독이나 하다못해 나구모 주이치 제독[15]쯤만 됐어도 이것보다는 제대로 된 작전을 세웠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있다. 어쨌든 역사에 남을 참패를 당했으니 욕을 먹을 수밖에 없기야 하다.

의외로 오자와 제독이 미 해군측 지휘관이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의 행동을 대부분 예측한 건 사실이다. 실제로 스프루언스 제독의 움직임은 오자와의 예측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스프루언스 제독이 미 해군 최고의 명장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이건 대단한 일이다.[16]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적을 먼저 발견하고 공격을 시작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다만 스프루언스 제독도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의 방어계획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함대를 정박지에서부터 감시하고 견제했으며, 오자와 제독처럼 자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적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자와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의 행동을 예측하긴 했어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함재기의 중간 착륙지로 삼은 괌이 불바다가 되고, 항모전단이 개박살나고, 함재기가 수백 대씩 추락하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당시 미 해군 기동부대는 규모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자신있게 세계 최강이라고 할만한 수준이었고 햇병아리 조종사들과 훨씬 작은 규모의 기동부대를 가진 일본 해군이 정면승부를 했다면 항모 셋 가라앉는 것으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웃레인지로 공격을 건 것 때문에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을 정말 쫓아가도 되는가를 두고 참모진들이 토론까지 했었고 이 이후 복귀과정에서 잃은 항공기 피해도 굉장히 컸음을 봤을 때 절반 거리에서 출격했다면 아마 오자와 제독은 지금보다도 더 욕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싸움은 오자와의 커리어에서 최악의 오점으로 일본 해군의 완벽한 참패로 끝났으나, 냉정히 말해 누가 지휘하든 승산이 거의 없는 싸움에 가까웠다.

2.5. 레이테 만 해전

1944년 10월 25일 세계 최대의 해전이었던 레이테 해전에서는 함대를 이끌고 윌리엄 홀시 제독의 제38기동부대를 끌어내는 미끼 역할을 맡았다. 실제로 오자와는 끌고 나간 항공모함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17] 미끼 역할을 담당한 항공모함 네 척은 모두 가라앉았지만, 홀시 제독의 38기동부대가 오자와 부대에게 제대로 낚이면서 본연의 임무는 제대로 수행했다.

2.6. 연합함대사령장관

1945년 그는 최후의 연합함대사령장관이 되었다.[18] 그러나 이때는 군함들이 이미 전부 침몰하고 없어서 지휘할 전력이 없었다. 그가 최후의 연합함대사령장관을 맡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패전의 책임은 있지만 개전의 책임은 없다. 나는 최후의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서 그 최후를 지켜보겠다." 한 마디로 그도 다 포기했다는 소리다.

참고로 그의 최종계급은 중장이었다. 그의 마지막 지위였던 연합함대사령장관은 사실상 일본해군의 핵심 전투함 전부를 지휘하는 위치인 만큼 진급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진급할수 있는 위치였고, 여러 번 대장으로 진급할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거절했다고 한다.

미국에 대한 세균병기 공격을 주장하기도 했다. 센토쿠급 잠수함을 이용해 미국 서해안부에 생물재해를 일으키자는 발상이었는데, 정작 생물병기를 연구하고 있던 육군쪽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전세계가 일본의 적으로 돌아선다'며 극구반대한 끝에 무산됐다.[19]

2.7. 패전 이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그는 조용히 자신의 저택에 칩거하였다. 간간히 태평양 전쟁의 전사(戰史)를 조사하러 온 미군 관계자의 방문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지사부로는 주당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위스키고 사케고 말(斗)술로 비워내니 주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이 아닌가 의심을 할 정도였다.

2.8. 죽음

1941년부터 지속된 다발성 경화증으로 80세의 나이로 1966년 사망하게 된다. 죽을 때까지 "부하들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장례식 때 당시 천황 히로히토가 후한 조의금을 보내주었다.

3. 평가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무능한 장성들이 넘쳐나는 일본 제국군에서 그나마 유능했던 군인으로 평가된다. 구시대적인 거함거포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대다수의 제독들과 달리 항공전력을 중시하고 항공기만으로 최신예 전함을 격침시켜버릴 수 있다는 점을 사상 최초로 보여준 선진적인 인물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 좀 더 충분한 준비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던 점. 야마구치 제독과 함께 항모를 중앙에 두고 그 외곽에 전함, 순양함, 구축함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3개의 항공전대는 투입하여야 한다고 간언하기도 한 점, 마리아나와 레이테에서 두번 연속으로 미 함대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성공한 것을 보면 충분히 유능한 제독이었다.[20] 그가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하는 자리를 맡았을 시기에는 이미 항공전력이 사실상 와해된 다음이었던 게 문제였던 것. 필리핀 해 해전에서 무리한 아웃레인지 공격으로 참패를 자초했다 하여 비난을 받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아웃레인지 공격때문에 졌다고 하기에는 이미 미일 양측의 전력차가 승산이 없는 수준으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

자살특공을 반대했다는 소리가 있지만, 진짜로 그랬는가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오자와 제독 자신이 자살특공 작전의 실행과 특공병기를 양성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고, 폭주하는 우가키 마토메 제독을 막아야한다는 해군부의 요청이 있었으나 의욕있는 자를 막아서는 안된다며 오히려 감싸고 돌기도 했으며 8월 4일까지 카미카제 훈련단에 격려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육군이 해군에게 식량수송함의 사용허가를 요청했을 때 특공작전에 지장이 생긴다며 반대한 것도 오자와 제독, 그런거에 쓸 연료가 없다며 반대의견이 거샜던 야마토급 전함의 특공에 허가를 내준 것이 오자와 제독이었다.

한편 오자와가 14일 저녁 공격 중지를 명령하고 8월 15일 옥음방송이 나간 후 우가키 제독이 카미카제를 하러 출격하자 사령장관인 본인 명령으로 공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는데 부하를 데리고 카미카제를 한 것에 대해 할거면 자기 혼자 해야 됐다고 비판하는 말을 한점, 카미카제 2천만을 쓰면 이긴다는 오니시 해군 중장에 대해 남자 이천만을 특공으로 죽이면 나라는 누가 재건하냐는 말을 한점 등을 고려하면 카미카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히로히토의 의중이 무조건 항복으로 기울어 종전이 확실해진 시점에선 구태여 할 필요를 못느낀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키가 6피트 6인치, 즉 대략 198cm의 장신이었으며 못생긴 외모 때문에 별명이 오니가와라(鬼瓦)였다. 심지어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Battle of 360''에서마저 그를 가고일이라고 부른다. [21]

필리핀 해 해전 당시 다이호가 폭침 당하고 구축함에 옮겨탄 직후 본인의 담뱃불도 본인의 손으로 붙이지 못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1] 번에 소속된 사무라이.[2] 후술하겠지만 그는 키가 엄청나게 컸다.[3] 여러모로 봤을때 오자와가 항공전대 사령장관으로서 능력이 분명했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오자와가 컨트롤이 안된다고 생각해 불편한 사이지만 다루기는 더 쉬운 나구모쪽을 택했단 이야기가 있다. 일각에선 야마모토가 오자와의 능력을 두려워한게 아닌가란 추측을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후에 오자와가 미드웨이 해전서 보여준걸 감안하면 그럴듯한 추측이다.[4]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었다. 자바를 방어하던 연합군 함대의 전력이 더 강했기 때문에 이 호위함대만으로 남방작전이 진행됐다면 호위전력은 순삭당하고, 이마무라의 병력은 자바 해역에 수장될 운명이었다.[5] 말했듯이, 이대로 가면 이마무라 부대는 그대로 수장될 운명이었다.[6] 사실 오자와가 매우 빈약했던 호위전력을 대폭 증강해 줘서 이마무라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마무라는 자기가 탄 배가 오인사격으로 격침당했다고 해서 무작정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7] 이마무라 히토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마무라 장군이 상당히 개념인이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8] 당시 일본 해군은 소련 해군과 함께 해군에서 육상 발진하는 쌍발 폭격기를 자체적으로 운용했는데, 이때 활약했던 기체가 바로 G4M 베티다.[9] 현재는 공고급 이지스함이 이 함명을 계승했다.[10] 이 해전을 끝으로 일본항모세력은 재기불능이 되었다.[11] 말 그대로 적의 사거리 밖에서 선제공격을 날리는 전술이다.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일본의 함재기들이 지닌 유일한 이점이 바로 항속거리였는데 이를 이용해서 함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술이었다.[12] 다만 이 전투에서 오자와 제독 본인의 실수도 좀 있다. 그건 바로 일본 해군과 미 해군의 전력차를 과소 평가해서 함재기를 네번에 걸쳐 나누어서 보냈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공격이 몰릴 경우 일부의 중요목표물에 공격이 집중하게되 전체적인 공격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공격부대를 나눠서 시간차를 두고 공격이 이루어지게 보내는게 보통이지만 당시 일본 해군으로서는 공격의 극대화를 생각하기전에 얼마나 많은 기체가 공격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단적인 예로 해전 당시 일본 해군의 모든 함재기를 합친 것보다 미 해군의 전투기가 더 많았었던 상황이었다.[13] 이 항모의 최초의 출진이자 최후의 출진이기도 했다.[14] 당시의 비행대장들은 '만약에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베테랑 에이스들이 전부 되살아나더라도 불가능하다'라는 소리까지하며 이 아웃레인지 공격에 부정적이었다.[15] 최소한 자신이 항공기 운용에 무지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지라 작전 입안에 항공참모와 조종사들의 의견을 중시했다.[16] 그런데 스프루언스 제독의 부하 중 하나인 항공전의 마술사 마크 미처 제독은 달랐다.[17] 즈이가쿠 등에서 이륙한 함재기들에게 미군 함대를 공습한 이후 모함으로 복귀하지 말고 루손 섬으로 날아가라고 명령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오자와 함대는 38기동부대에게 얻어맞을 때 대응할 함재기가 없었다.[18]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시찰 나갔다가 격추당하고, 고가 미네이치 제독이 실종되고, 토요다 소에무 제독이 해군군령부총장으로 승진하면서 자리가 비어 태평양 전쟁 당시 네번째의 사령장관이었다.[19] 전쟁 말기로 갈수록 일본군의 맹목적인 저항으로 미군의 인명손실이 늘어나자 일선 지휘관들 뿐 아니라 특히 자녀를 군대에 보낸 부모를 중심으로하여 민간에서도 일본군에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자는 의견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다만, 루스벨트 대통령이 생화학 무기 사용에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일본군 또한 미군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생화학 무기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미군이 생화학 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해군이 미본토에 생물병기를 선제 사용한다면 미국의 보복여론이 크게 자극받을 것이고 일본에 생화학 무기 사용을 자제해야한다는 의견은 당장에 설득력을 잃을 것이 자명하다.[20] 레이테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마리아나의 경우 상대가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21] 국내 자막에선 '괴물'로 번역되었다. 이 별명을 모르던 사람들은 '오 그렇게 실력이 좋은가?'하고 착각했다던 후일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