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8px -3px -11px" | 수작 | 공작 |
- | ||
후작 | ||
박영효 · 윤택영 · 이재각 · 이재완 · 이해승 · 이해창 | ||
백작 | ||
자작 | ||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 ||
남작 | ||
김가진[4] · 김병익 · 김사철 · | ||
거부 | 김석진 · 민영달 · 유길준 · 윤용구 · 조경호 · 조정구 · 한규설 · 홍순형 | |
습작 | 공작 | |
- | ||
후작 | ||
박찬범 · 윤의섭 ·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이병길 | ||
백작 | ||
고중덕 · 고흥겸 · 송종헌 · 이영주 | ||
자작 | ||
고희경 · 권태환 · 김호규 · 민병삼 · 민충식 · 민형식 · 민홍기 · 박부양 · 윤강로 · 이규원 · 이종승 · 이창훈 · 이충세 · 이택주 · 이해국 · 이홍묵 · 임낙호 · 임선재ㆍ조대호 · 조용호 · 조원흥 · 조중수 | ||
남작 | ||
김교신 · 김덕한 · 김세현 · 김석기 · 김영수 · 김용국 · 김정록 · 남장희 · 민건식 · 민규현 · 민병억 · 민영욱 · 민철훈 · | ||
승작 | 백작 → 후작 | |
이완용 | ||
자작 → 백작 | ||
고희경 · 송병준 | ||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b0313f> 대장 大將 | |
육군 陸軍 | 시라카와 요시노리 | 우가키 가즈시게 | 미나미 지로 | 아베 노부유키 | 야마나시 한조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도이하라 겐지 | 마쓰이 이와네 | 야마시타 도모유키 | 이타가키 세이시로 | 이마무라 히토시 | 기무라 헤이타로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 오카무라 야스지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 다치바나 요시오 | 아나미 고레치카 | 가와베 마사카즈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 |
해군 海軍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스즈키 간타로 | 사이토 마코토 | 나구모 주이치† | 요나이 미쓰마사 | 이노우에 시게요시 | 오카다 게이스케 | 시마다 시게타로 | |
중장 中將 | ||
육군 陸軍 | 창덕궁 이왕 은 | 홍사익 | 무토 아키라 | 이시이 시로 | 스즈키 데이이치 | 도미나가 교지 | 무타구치 렌야 | 이시와라 간지 | 사토 겐료 | 사토 고토쿠 |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 히구치 기이치로 | 이병무 | 조동윤 | 혼마 마사하루 | 오시마 히로시 | |
해군 海軍 | 야마구치 다몬† | 오자와 지사부로 | 우가키 마토메 | 모리 쿠니조 | 기무라 마사토미 | |
소장 少將 | ||
육군 陸軍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 이희두 | 조성근 | 왕유식 | 김응선 | 어담 | 이치키 기요나오† | |
해군 海軍 | - |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 † : 사후 추서 | ||
※ 둘러보기 | 일본군 원수 | ||
}}}}}}}}} |
조선귀족 남작 | |
<colbgcolor=#b0313f><colcolor=#fff> 일본군 중장 조동윤 趙東潤 | Cho Tong-yun | |
이름 | <colbgcolor=#fff,#1f2023>조동윤 (趙東潤) |
본관 | 풍양 조씨 (豐壤) |
자 | 우생(雨生) |
호 | 혜석 (惠石) |
출생 | 1871년 (고종 8년) |
사망 | 1923년 (향년 52세) |
직업 | 군인, 관료, 정치가 |
종교 | 유교 (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남작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clearfix]
1. 개요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군인이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대한제국군 부장(중장), 일본군 중장.[1]
2. 생애
1871년 태어났다. 집안은 풍양 조씨였고 아버지 조영하는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게 살해되었다. 1887년(고종 24)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했고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조선군이 대한제국군으로 근대화되자 1897년 참령(소령)으로 진급했다. 육군법원장과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2] 등을 지냈다. 1899년에는 부장(중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여러 무관직을 겸임하며 고종의 측근 중 한명이 되었다. 그는 을사늑약 당시 을사오적의 처벌 상소를 올리는 등 나름 항일의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날로 거세지자, 친일파로 변질하여 한일병합에 적극 협조했고 일진회에서도 활동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남작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고종의 장례 때 치러진 일식 장례에서 부제관(제관 다음의 장례책임자)을 지냈다. 아들인 조중구가 작위를 습작했으며 자녀들이 사치를 일삼다 집안이 패가망신했다. 당시 부채가 무려 1만 4천엔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