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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 |
<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민영소 閔泳韶 | Min Yeong-so | |
| |
이름 | <colbgcolor=#fff,#1f2023> 민영소 (閔泳韶) |
본관 | 여흥 민씨 |
자 | 순약 (舜若) |
출생 | 1852년 (철종 3) 3월 21일 |
경기도 양주군 (현 경기도 양주시) | |
사망 | 1917년 3월 10일 (향년 65세) |
직업 | 관료, 정치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주요 경력 | 호조판서 궁내부 대신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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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의 관료이자 정치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순약(舜若)이다.
민씨 일족에 속해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타는 일이 있었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를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 때까지 요직을 거쳤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2. 일생
1852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 본래 민철호(閔哲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후 민규호(閔奎鎬)에게 입양되었다.1878년 문과에 급제해 여흥 민씨 가문의 일원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1881년 대교에 임용되어 남학교수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이조참의, 조사오위장 겸 보덕, 대사성, 춘천부사 등을 지냈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목숨은 건졌으나 살고 있던 가옥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는다. 2년 후인 1884년에는 갑신정변을 무난히 극복한 공을 인정 받아 계속해서 빠른 승진을 이어나가게 된다.
1886년 종2품으로 승진하여 이조참판, 예조참판,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공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889년에는 정2품으로 승진하여 형조판서, 내무협판, 이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홍문관 제학, 궁내부 특진관, 규장각 학사 겸 일강관, 전선사 제조, 양지아문 총재관, 판돈녕, 학부대신, 궁내부 대신, 농상공부대신, 중추원 의장, 규장각 지후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894년 홍종우를 통해 망명 중이었던 김옥균을 암살했다. 같은 해 6월 23일부터 28일까지 한성판윤을 지냈다. 하지만 7월 갑오개혁 때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97년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1909년 일본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시찰을 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7년 3월 10일, 6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자작 작위를 민영소의 아들인 민충식에게 습작되었다.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두 명단에는 민영소의 자작위를 습작한 민충식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