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17:49:15

한성판윤

1. 개요2. 상세3. 연혁4. 여담

1. 개요

한성부의 판윤. 조선 초기에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불렸으나, 1466년(세조 12) 관제 개편으로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고쳤다. 이후 1469년(예종 1)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를 다스리던 정2품의 관직으로서, 품계는 자헌대부 이상의 품계에 해당되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과 비슷하나 행정 업무 외에 사법 업무까지도 겸한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2. 상세

한성부의 으뜸 벼슬로, 정원은 1인이고 행정과 사법 업무를 겸하였다. 6조(六曹)의 판서, 좌참찬, 우참찬과 함께 9경(九卿)으로 불린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지만 관할 업무를 보면 서울고등법원장과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서울경찰청장을 겸임하는 직책이었다.

한성판윤의 성격은 독특했는데, 관직 경력상 출신 등의 이유로 삼사의 언관직을 거치지 못해서 정승이라든지 판서로 진출할 수 없지만 대감급으로 승진한 고위 관료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은 관직이었다. 청요직을 거치지 않고 고위직으로 진출한 문관은 사실상의 승진상한선이 한성판윤이다. 물론 정2품 대감이고 한성 성저십리 이내의 행정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은데다가 여러 고관들의 편의를 봐줄 수도 있는 자리인지라 다른 대감급에 비해 한직이란 것이지 만만하지 않은 자리다. 한성부판윤은 구경, 즉 의정부의 정2품 좌우참찬, 육조의 판서, 한성부판윤에 속할 정도로 고위직이고 조선의 관리 경력에서 더 높은 등급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일정 기간 거쳐야 하는 외관직(外官職)이면서 서울에 있기 때문에 관리에게 유리한 자리였다.

이런 청요직과 대비되는 탁직의 대표적인 예로 천얼 출신의 반석평(潘碩枰, ?~1540)을 들 수 있는데, 중종 31년(1536년) 3월, 반석평은 호조 참판에 임명되고 그로부터 7개월 후엔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지만 대간이 "반석평은 시종이나 대간을 역임하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추천을 받지 않았으니 불가하다."고 반대하자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공조 판서가 되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몇년 지나지 않아 동지중추부사, 형조 참판, 한성부 판윤을 역임한 후에야 비로소 판서직을 역임할 수 있던 것이 그 예시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3. 연혁

1394년(태조 3) 11월 26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수도명을 한양부(漢陽府)라 하였으며, 한양부를 관할하는 총책임자를 판한양부사(判漢陽府事)[1]라 하였다.

1395년(태조 4) 6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라 개칭함과 동시에 최고 관직인 판한양부사(判漢陽府事)를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2]로 개칭하였다. 초대 한성판윤(판한성부사)은 성석린(成石璘)으로 1395년(태조 4) 6월 13일 임명되었다.

이후 1466년(세조 12) 1월 15일 관제를 개혁하면서 판한성부사를 부윤(府尹), 즉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고쳤다. 부윤 밑에 종2품인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을 두고 그 아래에는 종4품인 서윤(庶尹)을 두었다.[3]

이후 1469년(예종 1) 6월 29일 부윤을 판윤(判尹), 즉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개칭하면서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다.[4]

이후 1894년(고종 31) 8월 13일 관제 개혁에 따라서, 정2품직인 판윤(判尹)을 감하(減下)하고 소윤(少尹)[5]부윤(府尹)으로 개칭했다. 부윤은 3품 주임관(奏任官)으로 임명하였다. 즉 판윤을 없애고 하위직인 소윤을 부윤으로 개칭하여 한성부를 총괄하게 한 것이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에는 지방제도를 개혁하여 전국 팔도제도(八道制度)를 23부(府) 337군(郡)으로 개정할 때 한성부를 한성군(漢城郡)으로 격하하여 수도를 관할하는 관부(官府)가 일개의 군과 같이 되었다. 단, 한성군을 관할하는 상급 기관은 ‘한성부’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당시 한성군은 한성부장관이 관할하는 11개 군 중의 하나인 한성군으로 격하되었고 판윤은 참사관(參事官)으로 개칭되었다.

1896년(고종 33) 8월 4일 다시 전국의 지방제도를 개정할 때 한성군을 한성부로 다시 격상하였고 총책임자를 다시 판윤(判尹)으로 돌려놓았다.

1905년(고종 42) 일제의 침략으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모든 관제가 개정됨에 따라서 동년 12월 28일 한성부의 책임자를 (尹)으로 하고 칙임관(勅任官)[6]으로 임명하였다.

1907년에는 윤(尹)을 다시 부윤(府尹)이라 하였고, 1910년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함에 따라서 수도 한성부의 명칭도 없어졌고 한성부의 총책임관이었던 한성부 부윤의 명칭도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한성부를 대체한 경성부가 설치되면서 경기도 경성부 직이 신설되었고,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에는 서울특별자유시가 설립되어 서울특별자유시이 역할을 대신한다.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서울특별시로 명칭이 확정되면서 현재의 서울특별시장으로 이어진다.

4. 여담


[1] 한양부의 판사라는 뜻이다.[2] 한성부의 판사라는 뜻이다.[3] 조선왕조실록 세조 12년 1월 15일 기사. 링크 참조. 모바일 기준 2문단 14째줄.[4]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 6월 29일 기사. 링크 참조.[5] 1887년(고종 24)에 한성부 판윤(判尹)이 직접 외국 영사들과 문부를 주고받는 것이 불편하므로 한성부 서윤(庶尹)을 없애고 당상관(堂上官, 정3품 상계 이상의 품계)인 소윤(少尹)을 새로 설치한 상태였다.[6]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개혁으로 관제를 대폭 개편하였는데, 기존에 당상관, 당하관, 참상관으로 대별하면서 18품급으로 나누었던 것을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으로 대별하고 11품급으로 축소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 3월 관료제도를 다시 대폭 개편하면서, 11품급이던 관료 등급을 칙임관 1∼4등, 주임관 1∼6등, 판임관 1∼8등으로 모두 18등급으로 개정하였다. 칙임관은 상위 1~4등급에 해당한다.[7] 중간에 한성부판윤으로 있던 김광욱(金光煜), 윤강(尹絳), 허적(許積)의 재임기간이 불분명하기에 이완의 재임기간을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정확한 임기를 알 수 없는 김광욱, 윤강, 허적의 재임기간을 1일로 가정했을 때 최장 10년 4개월에 이를 수 있다.[8] 중간에 한성부판윤으로 있던 김진구(金鎭龜), 이현석(李玄錫)의 재임기간이 불분명하기에 이언강의 재임기간을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정확한 임기를 알 수 없는 김진구, 이현석의 재임기간을 1일로 가정했을 때 최장 3년 5개월에 이를 수 있다.[9] 중추부의 판사. 종1품 관직. 위로 정1품의 영사, 즉 영중추부사가 있다.[10] 의금부의 으뜸 벼슬인 판사. 종1품 관직.[11] 중간에 한성부윤으로 있던 이서(李墅)와 윤자(尹慈)의 재임기간이 불분명하기에 이석형의 재임기간을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정확한 임기를 알 수 없는 이서와 윤자의 재임기간을 1일로 가정했을 때 최장 8년 5개월에 이를 수 있다.[12] 이것이 한성판윤을 9번이나 역임했지만 재임기간이 1년 3개월에 불과한 이유일 것이다.[13] 실록에서는 당시 명칭에 따라 '판한성부사' 또는 '한성부윤'(세조 12년 관제 개편 이후)으로 기록되어 있다.[14] 숙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15] 숙종 때 영의정을 비롯하여 삼정승을 모두 역임. 도합 10번 입상(入相)함.[16] 고종 때 한성부판윤, 중추원의관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