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淸要職중국의 관직이나 조선의 관직중 일부를 묶어서 말하는 것으로, 청렴해야 하는(淸) 중요한(要) 자리(職)라는 뜻이다.
2. 중국에서의 청요직
구품관인법의 탄생과 함께 등장한 관직 구분법이다.구품관인법에서는 인재로 천거된 사람을 원래 추천받은 품계보다 낮은 품계로 임용시켜 관직생활을 하면서 승진하여 원래 평가된 품계까지 진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낮은 품계'에는 그곳이 진급의 한계인 사람과 진급의 출발점인 사람이 겹치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자 같은 품계 안에서도 진급이 멈출 사람이 가는 자리와 진급이 사실상 보장된 사람이 가는 자리가 따로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청요직이다.
청요직이라는 이름만 보자면 뭔가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오인하기 쉬운데, 황당하게도 상설 업무가 적고 숙직을 하면서 천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가벼운 업무인 낭관(郞官)[1] 같은 것이 주로 청요직으로 대접받았다. 이렇게 한 이유도 가관인데, 높으신 분들이 될 사람들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중대 업무를 맡겼다가 실수나 사고라도 쳐서 경력에 금이 가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방지하려면 위험성이 적고 한가한 업무에 종사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반면에 상설 업무가 있어서 일이 바쁜 직책은 탁직으로 여겨저서 꺼려졌다. 청요직이 아니니 고위직 승진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물건너간 셈이고, 고위급 관료라도 탁직을 담당하게 되면 업무만 많아지지 승진은 사실상 멈추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탁직으로 발령난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황제에게 간접적으로라도 항의하거나, 황제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청요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새로 담당한 탁직이 기존 청요직보다 품계가 높고 녹봉을 많이 받으며, 권력도 있는 경우에도 그런 경우가 발생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이런 관행이 정착되자 어느 순간 청요직은 귀하고 탁직은 천하다는 인식이 관료들 사이에 뿌리박혀 버렸다. 청요직에 앉은 사람들은 경험이 쌓이면 언젠가 제대로 된 업무를 맡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뒷배가 받쳐 주는 한 벼슬살이 기간 내내 청요직만 탐하게 된다. 놀고먹는 놈이 더 대접받는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 완성된 것이다. 반대로 탁직을 맡은 사람들은 자신이 진급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최대한 부패하는 길로 나서게 되니 관료들의 업무 능력이 전반적으로 수직하락하게 된다.
이런 막장사태는 문벌귀족이 몰락하고 과거 제도가 제대로 도입되면서 어느 정도 완화된다. 하지만 청요직이라는 구분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고, 청요직의 중요한 특성인 큰 사고만 안치면 고위직 승급을 사실상 보장받는다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의 왕조에서도 청요직 자리를 놓고 파벌간의 다툼 같은 것은 항상 존재했다.
3. 고려시대의 청요직
사실 이름만 청요직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뿐이지, 고려시대에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거의 유사한 형태이다. 고려의 중앙정치기구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나뉘는데, 중서문하성이 실질적 최고 통치기구라면 조선시대의 6부를 모두 합쳐놓은 것 같은 상서성은 실질적인 모든 행정을 담당했다. 정말 노골적인 청직과 탁직이다.[2] 그리고 중서문하성이 최고 통치기구라도 고위직인 재신과 하위직 낭사로 나눌 수 있는데, 3품 이하의 하위직인 낭사들에 관리 감찰을 하는 어사대를 더한 것이 대간이다. 하는 것은 간쟁, 봉박, 서경으로 조선시대의 삼사, 청요직과 똑같다.4. 조선시대의 관직 직별 중 하나
말 뜻 그대로 청렴해야 하는(淸) 중요한(要) 자리(職)라는 뜻이다. 삼사 인원들이 청색 관복을 입어 청(靑)요직이라는 오해가 있었으나 잘못된 것으로 청요직의 청은 깨끗할 청(淸)을 쓴다. 청색 관복은 품계 중 당하관을 뜻하는 것이지, 삼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들을 일컫는 말. 그러나 반드시 삼사 관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시기에 따라 달라지지만 6부의 전랑(정랑, 좌랑)도 거의 반드시 청요직에 포함된다. 특히 이조전랑(吏曹銓郞)은 직급은 정5품에서 정6품 밖에 안 됐지만[3] 대신인 이조판서를 견제하기 위해 4품 이하 관리의 인사권을 이조전랑에게 위임한 탓에 실세 자리가 되었다. 재상으로 올라가는
당상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청요직의 경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는 역할 역시, 관료들의 내무 감찰(사헌부) 또는 왕의 정책 비판(사간원) 등 "누군가 꼭 맡아야 하고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걸 맡는 관원들은 정계에서 왕따가 되기 쉬운" 관직들이었다. 그 때문에 품계에 비해서 매우 예우를 해주고 고위직으로 승진할 때 이 직별의 경력이 반드시 필요하도록 만든 것이다.
단 이들의 실제 품계는 맡은 일에 비해 매우 낮았다고 한다. 애초에 레지던트 느낌으로 운영하기도 했겠지만, 높은 직위의 사람한테 이 일을 맡기면 정치 기반이 사라질 걸 걱정해서 몸을 사리게 되기 때문에 애초에 잃을 정치 기반이 없는 초임관료들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실제 행정업무와는 별로 상관이 없으므로 실무적인 능력을 요구하지 않고, (남들 한 일에 이빨까는 거랑 자기가 직접 실무를 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능력의 소관이다.) 이 자리에 임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으로 고위관직으로 승진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므로 완벽한 엘리트 코스의 시작이 되었다. 지방관으로 나도는 경우나[4] 행정실무를 맡아보는 직책으로 들어간 경우는 청요직으로 가기도 어렵고 당연히 고위 관직으로 갈 수도 없으므로 승진코스가 완전히 갈라지게 만들었다. 고위관료의 실무능력 약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는 것이 조선중후기 청요직의 문제점이다.
또한 왕이랑 높으신 분들에게 찍혀서 해를 당할 위험을 방지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라는 의도로, 청요직은 하나 같이 일정수준 이상 제도적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그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삼사의 대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면 2가지가 대표적이다.
- 풍문거핵 (風聞擧劾) : 소문만 들은 것으로도 고위 관료를 탄핵할 수 있다.
- 불문언근 (不問言根) : 자신이 주장한 것의 근거를 대지 않아도 무방하다.
현대의 국회의원들의 면책 특권보다 더 강력한 권한이다. 말이 좋아서 탄핵이지 싫은 놈 있으면 그냥 말하나 지어내서 때려도 되고, 그에 대한 근거는 대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좋은 저격수가 없다. 거기다가 당대 유교 윤리에 의하면 주작으로 유언비어가 돌아서 까였다는 게 밝혀진다고 해도 "그런 주작 소문이 돌게끄름 행실을 잘못한 그 본인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애먼 사람을 저격한다고 해도 삼사에겐 별 피해가 없었다!
이처럼 부담없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성리학이 강조되고 붕당이 정착될수록 이 자리를 노리는 대결구도가 강화되었다. 각 붕당의 주역들이 자신의 붕당 소속 청요직 낭관 등을 동원해서 자신들은 방어하고 상대는 공격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위진남북조시대의 문벌귀족들의 관직생활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청요직의 주요 업무가 황제의 자문에서 언론기능으로 변했다는 것 뿐이지 상당히 유사한 형태로, 조선시대 관료제에서 실무성이 약한 배경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다.
[1] 낭관의 업무도 중요성은 있긴 하나 상설 업무가 많아서 바쁜 다른 직책에 비하면 업무 난이도나 업무량에서 혜택을 받는 자리임은 명확했다.[2] 다만 기껏해야 육두품이 나오는 고려시대 문벌귀족들은 중서문하성의 관직과 상서성을 실직을 겸직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문벌귀족 체제가 그대로 한 500년을 갔으면 분리가 일어났을 수도 있으나, 무신정권과 몽골 간섭기를 거치면서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3] 이조정랑과 좌랑을 통틀어 이조전랑이라고 부른다. 정랑이 정5품, 좌랑이 정6품.[4] 단 조선은 경외관순환제 때문에 고위직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방관으로 몇번 나가야 했다. 그러나 지방관도 맡는 군현의 중요도와 직책에 따라서 급이 달랐기 때문에, 계속 승진할 사람들이 파견되는 고을과 직책은 사실상 정해져있었다. 이것도 후대로 갈수록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데, 누가 봐도 앞으로 계속 승진할 사람들이 가는 고을로 부임할 경우 인사고과에 흠이 가지 않도록 처신하고 통치도 가급적 원망을 사지 않도록 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고을의 수령으로 파견될 경우 본전 뽑아내기에만 집중하는 폐단이 생길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