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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1:12:37

갑오개혁

김홍집 내각
(갑오개혁을미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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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배경4. 1차 갑오개혁
4.1. 내용
5. 2차 갑오개혁
5.1. 내용
6. 을미개혁7. 의의8. 한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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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고종 31년) 음력 7월 초부터 1896년 (고종 33년) 2월 초까지 군국기무처의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조선서구화·근대화 개혁. 정치, 경제, 군사, 법률, 사회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넓은 범위의 개혁이었다. 총 2차례에 걸쳐 개혁이 이뤄졌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추진된 제3차 개혁은 을미개혁으로 따로 분류한다. 삼국간섭을 전후하여 일어났다. 일본 측 학설에서는 갑오개혁을 한국 근대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때문에 일본 학설로 공부 배운 사람들은 '근대의 시작 갑오경장'이 나온다. 현대 한국 학계에서는 근대의 시작을 보통 흥선대원군의 집권기로 보며 갑오개혁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2. 명칭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경장()은 "다시 당긴다"는 뜻이다. "거문고 소리가 조화롭지 못하면 반드시 그 줄을 풀어서 다시 조여야 한다"는 한서의 동중서전에서 유래한 말로 이것은 고사성어 '해현경장'의 유래가 된다. 거문고의 줄을 고르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단어이다.[1] 김홍집은 "대저 경장이란 바로 정치의 병폐에 대해 이를 변통하여 그 마땅함에 맞게 하는 것으로 곧 당시에 취해야 할 조치라는 뜻이다"라고 풀이한 바 있다. 쉽게 말하자면 "옛날 정책에 파묻혀 있으면 게을러지니 고쳐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포털 국어 사전에서는 경장을 "정치적ㆍ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함"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경장은 주로 봉건 체제의 틀 내에서의 보강을 의미하는 전통적 용어로 간주되는 편이다. 완전히 갈아엎는 '개혁'과 비교하면 여러가지 변화를 주지만 전반적인 틀은 바꾸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3. 배경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청나라는 1894년 5월 5일 군대를 아산만[2]에 파병한다. 이에 질세라 일본은 톈진 조약의 규정을 빌미로 5월 6일 일본군도 파병한다.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자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5월 7일 화약(和約)을 맺은 다음 청·일 양국에 퇴군을 요구 했으나 청과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다음날인 5월 9일 2차 본진을 인천으로 파병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에게 개혁을 권고하고 있었고 6월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3차례 노인정[3] 회의에서 내정 개혁안 5개조를 제시하면서 이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 조선에서는 일본의 요구를 주권 침탈로 받아들이고 이를 거부한다. 대신 6월 11일 동학농민군과 화약에 따른 개혁기관으로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체적으로 개혁을 시도했다. 교정청 일본은 6월 21일 새벽에 기습을 감행하여 전투 끝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서울 내의 조선군 병영들[4]도 공격하여 이들을 제압하고 무기, 탄약을 모두 빼앗아 사실상 수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5]을 불러들여 흥선대원군을 섭정에 앉혀놓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정부(제1차 김홍집내각)를 만든다.# 이후 6월 23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청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위 문단에 나온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7월 27일(음력 6월 25일), 김홍집 내각은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김홍집이 총재관을 겸임하였으며 위원 17인과 서기 2인을 두었다. 그해 12월까지 군국기무처에서 200여 개의 각종 안건들이 통과되었다. 이 군국기무처는 얼굴 마담인 흥선대원군은 물론 고종도 간섭할 수 없는 초정부적 기구였으므로 사실상 독재나 다름없었다.

1차 갑오개혁 후 흥선대원군이 실각되고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가 소환되어 2차 김홍집 내각을 설립하였다. 2차 갑오개혁으로 의정부를 개편한 내각이 설치되고 개혁 작업이 계속 추진되었으나, 1895년 3월 29일(음력)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이 일어나 일본의 영향력도 일시 축소되었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시해 음모 혐의로 일본으로 추방되면서 개혁이 중단되었다.

4. 1차 갑오개혁

1차 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의 이름으로 시행했던 개혁의 내용을 말한다. 이 시기의 개혁안들은 '장정존안'이라 하여 따로 모아놓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대체적으로 일본이 청일전쟁을 치르고 동학농민운동 진압으로 힘을 기울이지 못했던지라 개혁만 강제했을 뿐.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지 않고 너희들 알아서 개혁하라고 일을 맡겨 놓은 것에 불과하기에 어느 정도 간섭이 심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기에 세 번의 개혁 중 유일하게 자주적인 성향을 띠는 개혁이라 배우기도 한다.

이 시기의 내각을 제1차 김홍집 내각이라 한다.

4.1. 내용

5. 2차 갑오개혁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하자 본격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일본 공사로 부임하고 있었던 이노우에 가오루20개의 조항을 내세웠다.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실각, 왕실과 정사의 분리, 조세의 탁지 아문으로의 통일, 지방관의 권한 제한 등이 있다.

결국 그동안 얼굴 마담으로 내세웠던 흥선대원군실각당하고,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의 요구에 맞춰서 칙령 제1호부터 제8호까지 발표되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가 있었던 박영효가 내무 대신으로 전격 임명되면서 2차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제2차 김홍집 - 박영효 연립 내각' 시기라 부르기도 한다.

개혁을 펼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 독립(自主獨立)의 터전을 튼튼히 세운다.

1.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의 본분과 의리를 밝힌다.

1. 임금은 정전(正殿)에 나와서 시사(視事)를 보되 정무(政務)는 직접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재결(裁決)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1. 왕실에 관한 사무와 나라 정사에 관한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

1. 의정부(議政府)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와 권한을 명백히 제정한다.

1.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모두 법령(法令)으로 정한 비율에 의하고 함부로 명목을 더 만들어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다.

1. 조세나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경비를 지출하는 것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할한다.

1. 왕실의 비용을 솔선하여 줄이고 절약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 관청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

1. 왕실 비용과 각 관청 비용은 1년 예산을 미리 정하여 재정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1. 지방 관제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전습 받는다.

1.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徵兵法)을 적용하여 군사 제도의 기초를 확정한다.

1. 민법(民法)과 형법(刑法)을 엄격하고 명백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하거나 징벌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1. 인재 등용에서 문벌에 구애되지 말고 관리들을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이전에 이노우에 가오루가 요구했던 20개 조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일본의 요구가 확실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개혁을 시행하였다.

5.1. 내용

6. 을미개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을미개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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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동아시아 최대 무역항인 요동(다롄)을 일본이 양도받자 삼국간섭이 일어나 일본은 다롄을 러시아에 양도하였다. 국내에서도 친일파가 실각하고 친미/친러 내각이 수립되는데 이것이 '3차 김홍집 내각'이다. 이에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다시 친일파가 새 내각을 조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4차 김홍집 내각'이다.

이 내각은 을미개혁[7]이라고 부르는 조처를 실시하는데, 단발령 등을 밀어붙이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고종은 일본의 주의가 분산된 틈을 타 아관파천하여 내각은 붕괴하고 개혁은 파기된다.

7. 의의

파일:갑오개혁 반영내용.png
폐정 개혁안과 갑오개혁에 반영된 내용.

조선시대 500년동안 이어진 각종 제도와 관습을 시대 변화에 따라 바꾸고 노비 제도를 포함한 신분제도 철폐되었다.[8] 다만 인식은 바뀌지 않아서 그나마 젊은 노비들은 해방된 뒤 도시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대부분의 노비들은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던 집에서 신분만 머슴으로 바뀐 채로 법적인 제재를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봉급을 받아가며 이전과 똑같이 험한 일을 했으며 대우 역시 기존 노비 시절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노비가 반발하면 과거에는 팼지만 노비제도가 철폐된 뒤엔 그냥 해고하면 그만이었다. 부릴 머슴은 넘쳐났고 피고용인 보호는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시골 등지에서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법보다는 유력자가 더 힘이 강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신분제가 완전히 사라진 건 6.25 전쟁으로 인해 전국토가 초토화된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9]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으로 일어난 신분제 타파의 의의를 부정할 순 없다. 법적으로 신분제가 타파되었다고 갑자기 낮은 계급 사람들이 잘살게된 사례는 역사상 없으며[10] 법적으로 철폐했다고 해도 민간 관습적으로 남은 사회적 인식을 단기에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구 체제의 잔재 자체가 갑오개혁 내의 신분개혁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양반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공포로 다가온 조치는 바로 과거제의 폐지였다. 과거제는 천년 가까히 이어져온 시스템이자 당대 유일한 출세길이었다.[11] 특히 양반은 그 지위를 유지하는 수단 중 하나가 과거급제였기 때문에 과거제는 가문의 중대사였다. 그래서 한창 과거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젊은 유생들과 그 부모들은 과거제 폐지 소식을 듣고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12] 당시 막 성인이 되었던 이승만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과거제 폐지로 정신적 혼란을 일으킨 자신과 아버지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승만의 아버지는 과거제의 폐지 소식을 듣자 손바닥으로 방바닥과 책상을 치고 자기 무릎까지 치면서 일본과 개화파를 욕했다고 하며, 이승만은 자서전에 "이 조치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 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였다."고 술회했다. 지금도 과거제도의 잔재로 타락한 일부 공무원이 공무원 시험을 관존민비의 사상적 근거로 여기는 현상[13], 학벌을 유사 신분제로 생각하는 식의 정서[14]가 남아 있으나 그나마 그 문제를 지금도 완화시키려는 시도를 도와준 조치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가장 쉽게 와닿을 만한 변화는 바로 전국 광역행정구역이 8도에서 23부를 거쳐 다시 광무개혁으로 13도로 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광역자치단체 영역과 명칭은 이 시기의 광역시특별시 등을 더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갑오개혁의 신분제 철폐, 사법 행정 정부 기관 등의 상당수 조치들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뒤에도 유지 및 보완하였다. 연좌제 철폐도 유지되었지만 이후 김홍륙 독차 사건에서 국왕 암살 미수범 김홍륙 처형 당시에도 가족에 대한 고문과 사형수 시신의 고의적인 유기는 법적으로 금지된 것을 고종은 모른 척 했다.

8. 한계

조항들 대부분이 근대국가 기틀을 닦을 개혁들이었지만[15] 시대적 배경이 일본의 무력과 간섭이 있던 시기인 만큼 일본의 입맛에 맞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또한 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것을 바꾼 나머지 시행 과정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으며 후속 작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16]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홍집, 정병하 등 오히려 친일 성향이 비교적 약했던 대신들은 죽고[17], 친일 성향이 강했던 인물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튀어서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돌아왔다.[18]

신분제도의 경우 국가적으로 공식상 폐지는 되었지만 이후에도 극보수 사상을 가진 양반들 사이에서 여전히 정서적으로 양천을 가리는 성향이 남아있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경술국치를 거쳐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서적으로도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 선조율곡 이이가 주창했던 '경장론'도 바로 이 경장이다.[2] 이것 때문에 청일전쟁도 여기서부터 일어난다.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청일전쟁은 청나라나 일본이 아닌 조선에서 시작했고, 러일전쟁도 러시아나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 인천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시작했다.[3] 민영익의 별장이다.[4] 신식 군대인 장위영, 통위영, 총어영, 경리청 등.[5] 9월 20일 약 3개월 만에 강제사임되어 은퇴한다.[6] 현대 대한민국에서 미국 달러유로제세공과금을 납부한다면? 해당 통화의 국내 유통이 매우 자연스러워지면서(예컨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4,000/US$3.5처럼 표기하는 게 일반화된다) 거부감을 줄인다. 즉, 이때의 일본은 경제적으로 조선을 장악할 방법으로 엔화 유통을 선택한 것이다. 조선의 근대 화폐가 없는 틈을 타서 일본 화폐로 통화 체계를 장악하려는 시도.[7] 을미년이기에 갑오개혁이라 부를 수 없다.[8] 이걸 두고 친일파나 일본 우익들이 "일본이 조선의 노비를 해방시켜 줬는데 조선인들이 멍청해서 일본을 욕한다."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노비 해방은 이미 1894년 동학농민군의 요구에 나타난 것이고, 8년 전인 1886년에 노비의 세습제도 폐지되었다. 또한 1801년에는 이미 관아에서 부리던 6만 명의 공노비들이 해방되었다. 더구나 정작 일본 당국은 조선의 사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가령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백정들이 차별을 없애달라고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형평운동을 벌였으나 탄압했다.[9] 다만 북한은 개전 전부터 이미 정리된 상태였다. 지지 기반이 약한 김일성은 정치 세력을 키우기 위해 토지개혁을 활용했고, 그 과정에서 악덕지주 뿐만 아니라 부유한 상인, 민족운동가나 기독교인 같은 지식인까지 숙청시켜 기존 지배계층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그러나 관존민비적 정서와 독재에 따른 필요로 당 간부가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했다.[10]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 폐지와 미국의 노예제 폐지 당시에도 농노와 노예의 법적 신분이 사라졌을지언정 해방자들은 도시 노동자와 농장 노동자, 머슴 등이 되었다.[11] 물론 벼슬아치를 하지 않아도 상업, 농업과 농업에 뛰어들어서 거상이나 대지주가 되어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농공상의 계층으로 나뉜 조선 사회에서 양반들이 자신보다 낮게 여기는 농부와 상인 노릇을 하기에는 당시 시대상 체면 등 여러 문제가 있어 쉽지 않았다. 특히 과거제 준비를 할 정도면 어느정도 재력이 받쳐줘야 했고, 대과를 준비한다면 십중팔구 양반이었다.[12] 오늘날에 비유하면 사법시험을 준비하거나 행정고시 1차 준비 중인데 갑자기 사법시험이 로스쿨로 바뀌거나 행시 1차 시험 과목이 객관식 전공 과목에서 PSAT로 뒤바뀌고 행시, 입시에서 유예 제도가 폐지된 상황에 놓인 고시생의 입장인 것이다. 더욱이 과거 시험 준비는 상당수 사법시험, 행정고시, 입법고시 준비생보다 더 일찍 시작하고 더 오랜 기간동안 준비한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13] 2020년대에도 '공공봉사동기'가 약해도 시험만 잘 보는 사람들은 공무원이 될 수 있어 시험 위주의 채용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존재한다. #[14] 블루칼라 직업처럼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높은 학벌이 필요 없는 직업은 천시받았고, 노동 인권도 상당히 열악했다. 연예인도 딴따라라는 멸칭이 있듯이 이러한 인식이 있었지만 고학벌 연예인들이 꾸준히 등장하면서 문제를 완화시켰고, 사회적 운동도 병행하면서 한류 같은 명성으로 그런 인식이 줄어들었다.[15] 예를 들어 각 관청의 직무를 명백히 정하라는 조항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대신들과 관청들은 대체로 전문성이 덜하고 직무가 제멋대로인 편이었으며 한 관청에 맡겨진 직무들도 그 성격에 있어 일관성이 부족했다. 가령 사헌부는 관리의 기강을 감찰하고 사간원은 왕에게 간하며 홍문관은 왕의 자문 및 교육기관이라는 것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나 통하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사간원이 감찰을 하거나 사헌부가 왕에게 간하거나 홍문관이 이 둘을 하거나 하는 일이 수시로 있었다. 물론 경전 등등 공부를 한 사람들이니 어떻게든 일처리는 했지만 전문성을 길러 한 기관의 장을 맡는 것과는 매우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16] 애초에 개혁한다고 한번에 바뀌는 것도 아닌게 제국주의 시대에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인 일본마저도 여러 부조리가 있었다. 21세기 현재도 부라쿠민 차별 등을 비롯한 전근대적 면모가 있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만 봐도 이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가 맞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부조리한 면이 많이 존재했다. 일본 육군과 해군은 그냥 서로 다른 나라로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화합이 되지 않았다.[17] 김홍집의 경우 친일 성향이 약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파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많다. 정병하의 경우는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의 침입을 숨겼다는 의혹을 받는다. 일본의 영향이 가장 컸던 을미개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고종의 머리를 직접 잘랐다는 것도 의심 요소 중 하나.[18] 어윤중은 몸을 피하기 위해 처갓집인 용인으로 가다가 그곳 주민들 손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