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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9: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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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절차3.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4. 여담5. 재혼 경력이 있는 사람
5.1. 실존 인물5.2. 가상 인물
6.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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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remarriage, deuterogamy

처음으로 누군가와 결혼하였다가(초혼) 이후 다시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과 공식으로 다시 결혼하는 것.

재혼의 사유로는 초혼 때부터 생활했던 배우자의 사망(사별), 상호간의 이혼, 여러가지 사정 등으로 다시 한 번 결혼을 했거나 바람둥이 근성과 기질 등으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있지만, 초혼 배우자와의 이혼 및 사별 등으로 인해서인 경우가 많다.

가끔 가다가 이혼으로 헤어졌던 배우자와 화해하고 다시 한 번 부부의 연을 맺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보통 '재결합'이라고 부른다.[1][2]

2. 절차

초혼자가 이혼을 했거나 사망 또는 별거 등으로 동거가 어려워졌을 때 또는 상대방이 새로운 사람과 생활을 하고 싶은 의사가 적극적으로 밝혀지거나 혼인 의사가 진정적인 경우 재혼이 성립되는 편이다.

만약 배우자가 이혼이나 사별 등을 하지 않고 아직 배우자 관계로 있는데(즉, 기존 배우자와의 혼인관계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그냥 재혼을 해 버리면 중혼(重婚)이 된다. 한국의 경우 일부일처제로, 법적으로도 중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법 제810조)

배우자의 이혼, 사별 등으로 인해 혼인관계가 종료되었을 경우 한국에서는 예전엔 민법 제811조의 규정에 의해 남자는 바로 재혼할 수 있지만 여자는 혼인관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재혼하려면 혼인관계 종료 후 출산했거나 임신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이는 민법 제정 때 일본 민법[3]을 참고해서 정한 규정으로, 6개월 이내 재혼 후 바로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재산 상속 등의 문제에서 그 자녀를 누구의 자녀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시대 흐름에 뒤떨어진 규정이라는 지적에 의해 사문화되다가 2005년에 폐지되어 현재는 남자나 여자나 혼인관계 종료 후 바로 재혼할 수 있다. 다만 금지만 하지 않을 뿐 이혼 후 300일 내에 아이를 출산하면 기본적으로 전남편의 자식으로 간주된다(친생추정). 다른 사람의 아이라면 친생부인의 소를 통해 정정해야 한다.

본인이 전 배우자와의 자식이 있는 상황에서 재혼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출산하게 되면 그 아이들의 관계는 '이복형제 / 이부형제' 관계가 된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재혼자도 이미 전 배우자와의 자식이 있었고 그들이 모두 가족으로서 같이 살게 된다면 그 아이들의 관계는 (표준어는 아니지만) '의붓형제' 관계가 된다.

본인이 재혼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재혼자와 전 배우자와의 자기 자식은 입양을 하지 않는 이상 법적으로는 서로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다. 연장선상에서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등록부에도 단순한 인척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동거인으로 기재되거나 기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입양을 하든 하지 않든 자녀의 성본변경이 불가능해서, 여성이 전 배우자와의 자식을 데리고 재혼했을 경우 엄마와 아빠 자식의 성이 전부 다른 가족이 되기 때문에 자녀에게 상처가 되는 등 문제가 컸다. 현재는 법 개정으로 (입양과는 별개로) '자녀의 복리를 위한 경우에 한해서' 성씨 변경 신청이 가능하며 '친양자 입양'이라는 것도 생겨나서 전 부모와의 관계를 지우고 성도 바꾸고 완전히 그 부모의 자식으로 들어갈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혼을 하게 되었을 때 친양자입양의 파양을 원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한 번 입양 혹은 친양자입양이 성립되는 경우 각종 서류에 자녀로 기재됨은 물론이고 이혼시 양육비지급의무가 발생되고 최우선상속인으로서의 지위와 최우선부양자로서의 의무가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를 진행하기 전 혹시라도 만약에 재혼한 배우자와의 혼인관계에 변동이 생기더라도 의붓자녀를 마음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지 충분한 숙고의 시간을 거치고 그 절차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자기 자신과 그 의붓자녀 모두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3.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이지만, 반대로 사별한 사람에게는 재혼하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4] 꼭 갈등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이 어렸을 땐 몰라도 다 크고 나서 새아빠나 새엄마가 생기면 이들을 호부호모해야 할 지 애매해져서 심히 뻘쭘해진다. 특히 재혼 전부터 아는 사람들이라면... 게다가 정도가 심해지면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스트레스가 되고, 부부간의 갈등 등을 이해하기 힘든 아이들 입장에서는 꽤나 큰 심리적·내적 스트레스가 된다. 지속되면 애정결핍 등으로 발전될 수 있으니, 두 부모 모두 가능하다면 사랑으로 보듬어주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인생 최악의 적을 스스로 만드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사람이다. 재혼의 과정에서는 대개 연애가 이루어지며, 늦연애가 주는 두근거림 때문에 자녀를 소홀히 대하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제법 나이를 먹었든, 심성이 깊든 해서 자녀가 이러한 분위기를 참아줄 수 있다면 낫지만, 실제로는 어떤 형태로든 자녀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좋다. 심지어 성인 자녀가 부모가 재혼 상대와 사이가 좋은 것을 보고 '재혼 상대에게는 깨가 쏟아지네? 왜 내 엄마 혹은 아빠한테는 저렇게 한 해줘서 이혼했어? 기분 더럽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존재한다.[5] 이는 '나쁜 배우자'라 해서 '나쁜 부모'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즉, 자녀에게 소홀한 정도가 과하거나, 자녀를 납득시키는 것에 실패할 경우 자녀는 부모의 재혼을 최악의 배신행위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으며 불화, 감정결여, 애정결핍, 의절, 강력범죄 등 어떤 형태로든 파멸을 가져온다.

앞서 사별한 부모가 자녀를 위해 재혼하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하였으나, 실제로는 양날의 칼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무던히 넘어가는 자녀도 많지만 '엄마(혹은 아빠) 돌아가신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른 사람하고 붙어먹고 사냐? 진심으로 역겹다.'라고 생각하며 부모에게 학을 떼는 자녀도 결코 적다 할 수 없다. 이런 인식 때문에 자녀가 재혼 후 금방 태어난 이복형제, 이부형제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초기 상황 조성에 실패하여 앞서 언급된 환경이 현실화되었다면 이전의 좋은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버리는 편이 좋다. 소위 부모자식간 관계는 '천륜'이라는 말로 요약되며 그 결합력은 배우자와의 관계보다 깊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장 기본적인 인륜을 부모가 먼저 틀어버린 상황에서 관계를 다시 회복하겠다고 나서봐야 자녀에게 이기적으로 구는 것 밖에 안 되며 부모에게는 '막장 부모'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 이미 이전의 화목한 가정은 없다. 그저 세월이 약일 뿐.

일단 이렇게 관계가 틀어졌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적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자녀도 부모에 대해 잘 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법적 관계는 자녀가 어릴 때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적 우위를 갖도록 만들어주지만(친권), 부모가 노쇠한 후에는 자녀가 부모에게 절대적 우위를 갖게 만든다(부양). 가정폭력을 일삼던 부모가 노쇠한 후 자녀의 손에 의해 열악한 정신병원, 요양병원에서 사실상의 감금생활을 하다가 무연고자 장례로 끝을 맞이하는 것은 현대에 와선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부모의 쇠퇴기는 자녀의 전성기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배신당한 자녀는 자신이 가장 강할 때, 부모가 쇠약해지기 시작한 그 때 배신한 부모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을 것이며, 이복형제이부형제에게 복수를 할 가능성도 적잖다. 그야말로 적악여앙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경우가 없지 않았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와 조선 태종 이방원의 예가 대표적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후처(신덕왕후 강씨)와의 자식인 이방석을 왕세자로 앉혔다. 이성계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에 따라 공이 큰 전처(신의왕후 한씨)의 자식을 무시하고 후처의 자식을 우대하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더 나아가 이성계가 전처를 부정하고 후처를 더 높이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방원은 물론이거니와 전처인 신의왕후 한씨의 자식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셈으로, 꽤나 효심이 강한 조선 정종 이방과조차 이방원이 저지른 1차 왕자의 난을 반쯤 묵인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결국 이성계의 일탈 아닌 일탈은 신덕왕후 강씨의 위패가 종묘에서 퇴출되는 상황[6], 이방석이방번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선조광해군의 사례도 특기할 만하다. 선조는 권력욕의 화신이었고, 자신의 후계자인 광해군에게도 결코 넘기려 들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양위소동을 벌이며 광해군을 끝까지 괴롭히던 선조는 결국 인목왕후와 재혼하여 영창대군을 낳기에 이른다. 자식이야 낳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선조가 영창대군을 이용해 끝까지 광해군을 견제했고 처세술이 부족한 인목왕후는 손을 놓고 있었던 것에 있었다. 결국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폐모살제'를 저지른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으나, 보복 하나는 화끈하게 한 셈이다.

왕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일반 여염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모의 재혼을 주제로 한 고전 소설, 설화로 장화홍련전, 콩쥐팥쥐가 있는데 당시에 만연한 재혼 여성에 대한 거부감, 남존여비, 비뚤어진 효 의식을 감안하고 보더라도[7] 재혼한 부모와 그 자녀가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갈등과 투쟁을 벌였는지를 알 수 있다.

재산 분배 문제도 심각한 문제이다. 한쪽의 경제력이 우월한 상황에서 결혼할 경우 자녀들은 당연히 이를 우려할 수 밖에 없다. 재산 분배의 몫이 줄어들어서 불만이 생기는 것이야 당연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소외되고 새로 들어온 새아빠, 새엄마가 재산을 더 많이, 심지어 전부 가져갈 수도 있다는 결코 무시못할 걱정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재혼한 상대측에서 자기 자식들까지 데리고 오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어느 회사, 어느 상담가를 막론하고 성공적인 재혼을 하고 싶으면 자신의 사후 재산 분배를 명확하게 확정해서 미리 끝내놓으라고 조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재산 분배가 명확하게, 서로 납득이 가도록 조율을 하여 결정되면 오히려 서로 싸우지 않고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경우가 매우 많다.[8][9]

재혼자의 친자가 있을 경우, 일부러든 무의식적으로든 친자식과 아닌 자식을 차별하는 경우도 있다. 무의식적인 경우에는 일부러 한 게 아닌지라 매우 미묘한 차별이지만 이를 실제로 경험하는 아이들은 이러한 차별들을 바로 캐치해낸다. 당연히 아버지쪽 자녀들과 어머니쪽 자녀들간 갈등의 원인이 되며, 기껏 한 재혼이 이렇게 자녀들간의 갈등을 봉합하지 못해 다시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아내인 변중석이 엄청 대단한 여성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있는데 변중석은 남편이 밖에서 데려온 사생아도 차별없이 키운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은 입양 풍토가 잘 정착되지 않을 정도로 부모와의 혈연 관계에 대해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회이다. 입양에 대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친자식도 아닌 남의 아이를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물론 인간은 이성의 존재라 모두 저렇게 험악한 관계는 아니다. 특히 자녀의 연령이 높으면 높을수록 관계는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확률이 높다. 재혼 대상이 사려깊고 사랑을 많이 주는 사람이라면 자녀와 친부모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경우도 많다. 앞서 재혼으로 인한 가정 파탄의 사례로 조선 태종을 들었는데, 조선 태종도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가 왕세자 책봉 문제로 일탈하기 전에는 새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와 매우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정몽주를 죽이고 태조에게 꾸지람을 바가지로 먹던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에게 '제 편 좀 들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이에 신덕왕후 강씨가 태종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일본의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의 아버지 모리 오키모토도 정실부인 후쿠바라 부인을 잃은 후 첩이었던 스기노카타와 재혼했는데, 이 스기노카타는 전 부인의 둘째아들로 다섯살에 친어머니를 잃은 모토나리를 자기 친아들처럼 양육했고 모토나리도 스기노카타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명심하자. 재혼 상대와 당신의 자녀와의 접점은 당신 뿐이다. 중간에서의 관계 조율은 꼭 필요한 과정 중 하나다.

4. 여담

고려 시대까지는 과부의 재혼에 별로 제한이나 편견이 없었다고 한다. 과부의 '재혼', 고려시대에는 신경도 안 썼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어서 한 번 왕후였던 여자는 왕이 일찍 죽더라도 다시는 재혼할 수 없었다. 헌정왕후와 사통한 안종 왕욱이 귀양을 간 것도 선왕의 왕후와 관계했다는 이유였다. 반대로 이미 혼인했다가 사별한 여자가 왕후가 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부부간의 정절을 매우 강조해서 재혼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커졌다. 특히 여성은 재가한 뒤의 후손이 영구히 관직에 나갈 수 없도록 하는 등 법적으로 재혼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남성은 법적으로 재혼이 가능했고 실제로 재혼한 사례가 많다. 재혼한 아내인 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도 적자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남성의 재혼 역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재혼하는 남성과 결혼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한동안 재혼 자체를 꺼린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한 것. 심지어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재혼한 사실이 동네에 퍼지면 '첩년' 이라며 욕을 먹기도 했다.

예외로 남성 중 왕녀(공주, 옹주)와 결혼한 부마는 아내가 사망한 뒤에도 재혼이 불가능했다. 다만, 혼인 준비 중에 왕녀가 사망한 경우는 혼인을 허락해 주었다.[10] 그나마 사별하여 홀아비가 된 후에 정실이 아닌 으로 여자를 들이는 것은 묵인해 줬단다.[11]

왕실은 왕비의 관할이었던 내명부의 안정을 매우 중요시 했으므로 왕비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고, 정비가 사망하면 대부분의 왕이 재혼하여 계비를 책봉하였다. 그래서 간혹 정비의 아들인 세자새어머니라 할 수 있는 계비 사이에 간혹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예외가 세자시절 아내인 현덕왕후가 죽은 후에도 계비를 책봉하지 않은 문종 정도이다.[12]

재혼의 이혼은 초혼의 이혼과 큰 차이가 나지 않으나, 삼혼이 되면 갈라서는 경우가 크게 줄어든다.

아무래도 삼혼 정도 하게 되면 당사자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 매력이 떨어져서 다시 재혼하기 힘들기도 하고, 삼혼 자체의 무게도 가볍지 않아서 그런 듯 하다.

드물게는 재혼한 배우자와 이혼/사별하고 초혼 배우자와 재결합하는 경우도 있다.

천주교에서는 재혼 후에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기존 혼인성사에 대해 혼인무효를 해야 한다. 재혼이 수반되지 않는 단순 이혼은 별거로 보아 신앙생활에 큰 지장을 끼지지 않지만 혼인무효를 하지 않고 사회법으로 이혼한 후 재혼하는 것은 간음으로 보기에 재혼하는 순간 영성체, 고해성사 둘 다 못하는 조당에 걸려 버린다. 심지어 이혼 후 재혼한 비신자가 천주교 세례성사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물론 사별 후 재혼은 가톨릭 혼인교리를 악용할 목적으로 이전 배우자를 살해한 경우가 아닌 이상 아무 문제 없다. 이전 배우자의 사망과 동시에 혼인 유대가 자동으로 소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1코린 7,39)

남성이 재혼했을 때 그 아내인 여성을 계처(繼妻) / 후처(後妻), 영어로는 'second wife'(세컨드 와이프)라고 부르는데 속어로서의 , 정부를 뜻하는 '세컨드'와는 전혀 다르다. 위에 언급한 재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재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가치관이 한결 자유로워지면서 '재혼남녀 표준스펙'까지 등장했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거대 양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13]조 바이든[14]이 모두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 재혼 사유는 둘 다 차이가 있는데 트럼프는 이혼 후 재혼이지만, 바이든은 사별 후 재혼이다.

결혼을 했다가 금방 이혼하고 얼마 안 돼서 또 재혼할 경우 보통은 부조금을 받지 않거나 내더라도 밥값 정도만 낸다. 부조금도 보통 준 만큼 받는 것이라서[15] 재혼에 축의금을 두 번 받으면 장사 하는 거냐고 욕을 먹는다. 힘들게 결혼을 골인했는데 다시 재혼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기 때문이다.

중학생 아들 혼자 두고 재혼한 친모에게 '아동 학대 혐의' 유죄가 떴다. 아들을 혼자 냅두고 가끔 들러 청소 빨래와 돈을 주는 정도만 했다고 한다. 중학생인 아들은 혼자서 주변 교회와 학교 관계자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중학생 아들 혼자 두고 재혼…친모 '아동학대 혐의' 유죄

아는 변호사에 의하면 이혼 후 3년도 채 되기 전에 재혼할 경우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5. 재혼 경력이 있는 사람

5.1. 실존 인물

5.2. 가상 인물

6. 참고 문서



[1] 한국에선 가끔이지만, 외국에선 연예계만 봐도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재결합 후 재이혼하는 경우도 있다.[2] 이와 관련된 고사성어로는 파경중원(破鏡重圓)이 있다.[3] 2015년에 최고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아 100일로 단축되었다. 평화헌법 제정 이래 11번째 위헌 판결이었다.[4] 특히 자녀가 어렸을 때 아내랑 사별한 남편의 경우 자녀가 어릴 때 남편과 사별한 아내보다 재혼하는 빈도가 높은 편이다. 아무래도 아이는 본능적으로 엄마를 찾으니까. 대표적으로 쿨의 김성수김성욱이 있다.[5] 변복수, 박승민, 숭실대학교, 한국심리학회지: 상담 및 심리치료, 2015, vol.27, no.3, pp. 721-748 (28 pages) '재혼 가정 성인 자녀들의 적응 과정' 출처.[6] 정통성 있는 왕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리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현충원에서 묘를 파버렸다는 것과 비슷하다.[7] 항상 나쁜 것은 계모이며, 그 계모가 전횡하도록 방치한 친아버지는 벌을 받지 않고 계모만 벌을 받는다. 나쁜 계모가 나오는 것에서 재혼여성에 대한 거부감과 선입견을 확인할 수 있으며, 남편이 벌을 받지 않는 것에서 남존여비를 확인할 수 있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계모는 일단 남이기 때문에 처벌과 복수의 대상이 되지만, 친아버지는 일단 피가 이어진 아버지라서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8] 물론 본인이 기존의 자녀보다 새로운 반려자와 반려자의 자식들에게 더 많은 재산 분배를 원한다면 기존의 자녀들이 새로운 반려자와 반려자의 자식들과 잘 지낼 것이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포기하는게 좋다. 나중에 나타난 반려자와 반려자의 자식이 재산분배를 더 많이 받아가는 것에 누가 좋아하겠는가? 이렇게 할 경우 애초부터 재산분배를 빠르게 하고 서로 남남으로 지내는 것이 차리라 더 나을 정도.[9] 사실 본인이 안줘도 완전 빈털털이가 아닌 이상은 어차피 기존 자녀들이 유류분 권리로 일정 부분은 받아간다.[10] 현종의 딸들인 명선공주, 명혜공주의 예비 부마가 이 케이스였다. 현종은 두 딸이 약혼한 상태에서 사망하자 예비 부마들의 재혼 허락을 안 해 주려고 했는데(특히, 첫째딸 명선공주의 약혼자에게 상복을 입히고 명선공주의 장례에 참석하게 해서 정식 부마로 확정지으려 했다.), 신하들은 정식으로 부부가 된 것이 아니니 허혼을 해줘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결국 예비 부마들의 혼인을 허락해주었다.[11]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혼인 한지 3개월만에 부인인 영혜옹주가 죽어버리자 왕실에서 직접 궁녀를 보내 첩으로 들이게 해주었다.[12] 사실 현덕왕후 한 명만이 왕비로 추존되어 그렇지, 문종은 삼혼까지 한 경우이다. 첫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와 2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불미스런 일로 각각 폐서인된 후 승휘(세자의 후궁) 신분이었던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13] 결혼을 3번 했다.[14] 결혼을 2번 했다.[15] 부조금이 많이 들어오면 받은 쪽도 부조금을 많이 한 곳에 많이 내야 한다.[16] 조선의 법도에 따르면 부마는 아내인 왕녀와 사별해도 재혼할 수 없었고, 이후 다른 여인을 맞아 자녀를 낳아도 그들은 서자로 취급되었다. 다만 왕녀와 사별한 후 이렇게 첩을 두는 것은, 왕실에서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조선의 법도는 일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어, 범씨와 그녀 소생의 아이들은 아내와 적자 대우를 받으며 재산과 작위를 계승했다고 한다.[17] 2번째 재혼은 미셸 맥쿨과 했다.[18] 2번째 재혼은 베스 피닉스와 했다.[19] 사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를 비롯한 4명의 후궁이 있었다. 다만, 제1후궁 정빈 이씨는 정성왕후 보다도 일찍 요절했고, 그걸 떠나 영조의 부왕 숙종희빈 장씨 이후 후궁의 왕비 승격을 법으로 금지해 버려 사실상 다른 집안의 규수를 계비로 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20] 도르곤과는 1살 차이 나는 시조카이다.[21] 이 때문에 조 바이든은 병원에서 취임선서를 해야 했다.[22] 심씨는 최진실과의 이혼 과정에서 조성민의 연인으로 지목된 적이 있었다.[23]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은 다이애나와의 결혼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결혼 11년만인 1992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3년 뒤인 1995년 다이애나는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 관계에 대해 폭로했다.[24] 랠라 워드는 닥터 후에서 로마나 역으로 나왔다.[25] 2번째 부인 프란시스 포드 셰이모어와 사이에서 제인 폰다피터 폰다를 낳았다.[26] 풀네임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기 때문에 편의상 이렇게 작성하지만 참고로 '랭'은 전 남편 스콧의 성이며 현 남편 팩스턴과 재혼 후에는 '팩스턴' 성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27] 근데 어찌보면 마리아와 결혼한 게 신의 한수였을지도 모른다. 작중에 슈레이더 부인이 7명의 아이들과 공던지며 놀아주는데 전혀 재밌게 놀아주지 않았다. (물론 애초에 아이들은 슈레이더 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것과, 마리아가 말없이 떠나자 아이들이 속상해한 것도 있다.) 그리고 기숙학교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만약 슈레이더 부인과 재혼 했다면 트랩가 7자녀들은 전보다 더 암울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28] 참고로 이 사람 또한 오래전에 아내를 잃고 탈라스와 재혼한 것이라고 한다. 그도 탈라스에게 호감을 가진 것 같았으나, 그녀의 사연을 듣고 헨리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엄청난 대인배.[29] 참고로 아니스의 남편은 일부다처제가 당연한 사회에서 아니스만 아내로 삼아 사랑해주는 애처가다. 애초에 시린을 두번째 부인으로 삼게 된 것도 아니스의 부탁이어서였다.[30] 그러나 현재는 본인의 자업자득으로 인해 불륜으로 만난 후처와의 사이가 파탄나며 아직 이혼 신고만 안 했지 거의 이혼이나 다름없는 상태다.[31] 실제로 사망한 것은 주단태의 첫 부인이자 파트너였던 나애교.[32] 사랑하지 않아서 이혼한 것이 아니라 하윤철의 친딸 하은별에 대한 부성애와 미안함, 오윤희와 배로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하윤철이 오윤희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놓아 준 것이다. 재혼 전후로 하윤철은 오윤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그녀를 도왔으며, 이후 천서진에 의해 사망한 그녀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다가 마찬가지로 천서진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오윤희도 하윤철을 돕고 심지어 그의 딸을 목숨을 걸고 지켰으며 본인은 결국 사망했다.[33] 결혼식 직전 일어난 하은별의 배로나 살인 미수 사건으로 인해 천서진이 주단태의 본심을 깨닫고 파혼을 요구하였으나, 주단태가 사건 현장에서 찾은 배로나의 피가 묻은 하은별의 목걸이를 증거로 가지고 있어 협박 당해 억지로 결혼하였고 결혼 후에도 몇 개월 간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34] 천서진의 대사 중 "한때나마 그런 인간을 좋아했던 게"라는 대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주단태는 몰라도 천서진은 주단태의 본심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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