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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제4대 궁주 | |||
<colbgcolor=#29176e><colcolor=#ffffff> 대한제국 흥선헌의대원왕의 3대손[1] 이우 | 李鍝 | |||
출생 | 1912년 11월 15일 | ||
일본령 조선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사망 | 1945년 8월 7일 (향년 32세)[2] | ||
일본 제국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남쪽 니노시마섬 병원(해군소속 검역소)[3] | |||
묘소 | 흥원(興園) | ||
재임기간 | 운현궁 제4대 궁주 | ||
1917년 5월 28일 ~ 1945년 8월 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우(鍝) | ||
조부모 | 조부 고종 태황제 조모 귀인 장씨 | ||
부모 | 양부 영선군 이준용 양모 광산 김씨[4] 생부 의친왕 이강 생모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仁)[5] | ||
형제자매 | 12남 9녀 중 차남 | ||
배우자 | 군부인 반남 박씨 | ||
자녀 | |||
신체 | 156cm, 46kg | ||
아명 | 성길(成吉) | ||
아호 | 염석(念石) / 상운(尙雲) | ||
칭호 | 흥영군 이우(興永君 李鍝)[A] 이우 공(李鍝 公)[7] | ||
사시 | 흥영군(興永君)[A]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 육군대학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33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중좌 | ||
명예 계급 | 대좌(사후 추서)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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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9]이며 운현궁 궁주 영선군의 양자이다. 즉 흥선대원군의 실질적인 증손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남계 후손들은 전부 의친왕계만 남아있다. 흥선대원군의 친아빠인 남연군의 남자 직계후손도 모두 의친왕계만 남아 있어서 현재 그의 아들과 손자가 장손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이준용의 양자로 출계하면서 친부 의친왕의 후계자는 친동생 이곤이 이어받아 대한제국 사동궁의 적통을 이어가고 현재는 이곤의 아들 이준이 의친왕가의 종손으로서 대한황실 사동궁을 이끌고 있다.2. 생애
유약한 성격인 데다가 일제에 순종적이었던 형 이건은 광복 후 구 황족과 아예 연을 끊고 창씨개명 후 일본인으로 귀화한다. 일본식 이름은 모모야마 켄이치. 이 때문에 황족들은 이건은 인정하지 않아 의친왕의 후계자는 이곤이 계승하였다. 이우는 일제에 반항적이었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 의친왕이 총애했다. 만 4세 때인 1917년 3월 23일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의 양자가 되었기에, 일제 때 왕가의 일원으로서는 양아버지 영선군 이준용이 갖고 있던 공(公)의 지위를 계승했다.[10] 따라서 친아버지와 지위가 같아진 셈이다.어렸을 때는 '이우 공자'로 불렸고, 운현궁에 양자로 입적하여 공위를 계승한 뒤에는 '이우 공(公) 전하'로 불렸다. 생전에 왕자로 불린 적은 없다. 의친왕 계열의 이복 여자 형제들은 '운현궁 오라버니'로 불렀다. 사망 이후에는 '흥영군'으로 추증되었지만 이미 조선 왕조가 망한 이후였기 때문에 이는 나라에서 내려준 공식적인 시호가 아닌 댱시 문화재청장(당시 구황실재산관리총국장)이었던 친동생 이수길에 의해 황실 문중에 올린 사시(私諡)일 뿐이다. 언론 등에서는 통칭 '황손 이우'로 부른다.
일제에 대한 반발심이 강했던 이우는 일본인을 아내로 맞기를 극도로 싫어했고, 조선인과 결혼하기를 고집했다. 일제가 이우를 일본 황족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 여왕[11]과 결혼시키려 하자, 선수를 쳐서 친일파 박영효의 서손녀인[12] 박일서의 딸과의 결혼을 확정한다. 일본이 혼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이우 쪽에서 박찬주와의 결혼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버렸다. 친아버지 의친왕도 친일파라도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했기에 성사된 약혼이라고 한다. 일본은 크게 화를 내고 약혼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박영효가 겨우 일제를 달래고 설득했기 때문에 무사히 결혼했다고 한다. 약혼녀 박일서의 딸과는 결혼 전에 한국과 일본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 편지도 주고 받았다. 부부 금슬도 좋아서 매년 결혼 기념일이면 뉴 그랜드 호텔 양식부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colbgcolor=#29176e> 부인 반남 박씨와 찍은 사진 |
<colbgcolor=#29176e> 이우와 장남 이청의 단란한 모습 |
이우의 장남 이청이 직접 연재한 회고록을 보면, 이우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링크
당시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그랬듯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육사 45기로 졸업한 이우는 포병 병과 교육을 1년간 받고 1936년 도쿄 주둔 제8 포병 연대에서 일본군 복무를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소속 연대가 만주로 파견되어 1년간 근무했으며, 1938년 대위 진급 후 포병 학교 교관으로 전임했다가 동년 12월 육대에 입학했다. 이후 1941년에 육군 대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황족 신분으로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을 순시했다. 1944년 3월에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일본군의 만주 일대 후방 경계 부대였던 제1군 사령부 참모 장교로 1945년 5월까지 근무했다.
이후 1945년 6월 일본 본토 결전에 대비해서 히로시마 제2총군[14] 교육 참모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일단 부임 전 휴가차 들른 서울에서 갑자기 병이 나고, 이우가 병에서 회복되자 이번에는 아들이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이를 돌보느라 부임을 1달 늦추어 7월 초순에야 히로시마에 부임했다.[15] 이우는 히로시마로 전출되기 직전 운현궁과 사동궁 식구들 앞에서 "이제 일본으로 들어가면 나는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손으로 처와 두 아들을 모두 죽이고 가겠다."라고 말하였고, 동생들과 사동궁, 운현궁 식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를 말렸다고 이우의 둘째 여동생이 증언하였다.[16] 하지만 히로시마로 부임되기 직전에 환송식 이후 건강이 악화된 장남[17]을 놔두고 혼자 히로시마로 가게 된다.
이우가 히로시마 주둔 제2총군 교육 참모로 부임하고 한 달 뒤인 1945년 8월 6일, 이우는 정시에 기마 헌병 2명의 호위를 받으며 애마를 타고 출근 중,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곳에서 방사선에 피폭당했다. 이우의 시종 무관이었던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 소좌는 핵 공격 사실을 알고 서둘러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이우가 발견된 것은 폭격으로부터 8시간이 지난 오후 4시경이었다. 발견 당시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어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날아간 상태였다. 서둘러 인접 해군 병원[18]으로 후송하자 얼마 가지 않아 의식을 회복했다. 그를 진찰한 해군 군의관은 외상이 없다고 진단했고 이우 본인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기뻐했다.[19]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폭 증상[20]을 보인 후 피폭 다음 날인 8월 7일 오전 5시경 사망하였다. 독살설은 인터넷상에 떠도는 설일 뿐, 공식적인 이우의 사인은 피폭사이다.[21]
<colbgcolor=#29176e> 1945년 8월 9일자 〈매일신보〉의 사망 기사[22] |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이우가 피폭당한 채 발견된 자리에 맨 처음 세워졌는데, 지금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로 이전됐다. 정면 위령비 글귀의 왼쪽에 「이우 공 전하 외 이만여 영위(李鍝公殿下外貳萬餘靈位)」가 전서로 새겨져 있다. |
일본 제국 패전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오후 5시 서울 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23] 무덤은 흥선대원군 묘역인 흥원[24]과 가까운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14에 있는데, 2004년경 이우의 묫자리에 흩어져 조성되어 있던 운현궁 일가[25]의 유골을 화장해서 납골탑의 형식으로 안치했다. 각 묘에 있던 비석을 비롯한 석물들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경내에 전시되어 있는 이우의 신도비는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백비(白碑)인데 이는 이우의 사망 당시 사회적 혼란상 때문으로 추정된다.
1959년, 야스쿠니 신사에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신위가 모셔졌다. 이우의 장남 이청에게 신사를 방문하라고 초대장까지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청은 매체에서 이를 두고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라고 인터뷰했다.
이우 사후에 운현궁이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판명되어 장남 이청 명의로 사유화되자, 이승만이 "여길 경무대로 쓰지 못하는 게 아쉽다"며 그 대가로 이우의 차남을 자신의 양자로 요구했다. 다행히 이승만의 양자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출처
3. 유언비어
3.1. 독립운동 루머
<colbgcolor=#29176e> 정범준, 《제국의 후예들》, 492쪽[26] |
이우가 했다는 말은 사실 '의친왕의 친서'에 나온 내용이다. |
이우가 정신적으로 민족 의식을 갖고 있었던 건 맞지만, 구체적으로 행동한 건 없다.
송우혜(마지막 황태자 시리즈 저자) 기사
송우혜(마지막 황태자 시리즈 저자) 기사
이우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설이 나오는 건, 민족 의식이 강했던 그가 아버지 의친왕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면 어땠을까 라는 대중의 바람이 작용한 것이다.
서영희(한국공학대학교 교수) 기사
이우가 독립운동을 했거나 지원했다는 직접적인 물증이나 증언은 아직 없다. 후술된 그의 항일 의식과 결합되어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했었을 것이라는 "~카더라"식 추측성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서영희(한국공학대학교 교수) 기사
한때 인터넷상엔 이우가 중국 태원 지역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지만, 실제로 이우가 중국에서 근무한 기간은 3년이 아닌 1년이었다. 또한 이우가 일본군에서 얻은 정보를 전해주었다고 주장되는 조선의용군은, 이우가 중국으로 오기도 전에 태원을 떠나 중국 내륙 지방인 연안으로 이미 이동하고 없었다. 결국 근무 시기도 겹치지 않는 낭설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본군의 도로 건설로 피해를 보게 된 조선인들을 위해 일본군 장교에게 총을 들이댔다는 이야기도, 출처가 불분명한 검증되지 않은 일화이다.
이우가 말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 "독립한 조선은 민국이 되어야 된다"라는 식의 얘기는 이우가 아니라 그의 친아버지 의친왕이 한 말이다. 의친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한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한국 임시 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이야기가 이우가 한 말로 와전된 것이다.
다만, 이우는 10살 때부터 일본에 볼모로 강제로 끌려가 성장했음에도 조선인으로서의 민족 의식이 뚜렷했다는 술회는 많이 남아있다. 그와 관련된 증언들도 여럿 있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45기 동기생인 일본 구 황족 아사카 다카히코[27]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 가정교사였던 가네코도 "당시 이우 공은 일본의 모든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는 증언을 한 바 있다.
- 영친왕비 이방자는 "이우 공은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라고 평하였다.
- 이우의 아들 이청의 회고록에서도 "일본 오키나와가 미국에 함락되었다는 신문을 읽으며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는데, 어릴 땐 왜 웃는지 이유를 몰랐다가 성장해서 깨달았다"는 언급이 나온다.
- 서대문구에 위치한 중앙여자중학교와 중앙여자고등학교도 당시 운현궁에 교육사업을 위해 부지를 하사해 달라는 간청이 들어오자 이우가 "조선인이 교육사업을 하겠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며 이우 소유의 부지와 하사금을 내려 설립하게 된 학교이다.
3.2. 독립운동가 딸과의 약혼 루머
<colbgcolor=#29176e> 정정화, 《녹두꽃》, 105쪽 ~ 106쪽 |
안천과 이초남이 주장하는 이우와 유정순이 혼담이 있었고, 이우가 독립운동 자금을 유정순에게 건네주었다는 주장은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가 1987년 출판한 《녹두꽃》에 나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황실은 살아있다》는 1994년에 출판되었다.) 정정화는 단신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고 이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으며, 그의 시누이인 김가진의 딸 김영원이 의친왕 이강의 아들과 혼담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친왕의 약혼자였다가 파혼당한 후 독립 운동에 투신한 민갑완의 이야기와도 매우 유사한데 민갑완에 관련된 기록은 수십 건이 남겨져서 현재도 전해오지만 유정순에 관한 기록은 단 1건도 없다. 2010년 5월에 《주간동아》는 이초남의 주장이 DNA 검사 결과 거짓으로 밝혀졌고, 행방이 묘연한 상태라고 보도하였다. 2010년 6월에 이초남은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이 2005년 이후 '이초남은 가짜'라고 언론 등에 발표하였다며 고소장을 접수하였으나 스스로 소장을 취하하였다.[28]
오히려 이우가 김가진의 딸과 혼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혼담이 오간 것이 확실히 이우인지는 불분명하다. 조선귀족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망명하였던 김가진은 의친왕과 친분이 있었고,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는 《녹두꽃》에서 "시아버님은 당시 의친왕과 친근한 사이였으며, 사돈까지 맺기로 약속된 관계였다. 시누이 김영원이 한때 의친왕의 차남[29]과 약혼했던 사이였는데,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혼사가 깨진 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압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회고하였으며, 김가진의 손자 김자동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라가 망한 후에 의친왕과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나라 걱정을 하였고 친분이 있었지요. 의친왕의 아들이 많죠. 어떤 아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의친왕 아들하고 작은 고모하고 약혼까지 했대요."라고 인터뷰한 내용은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이우를 주인공으로 한 '운현궁 오라버니'라는 제목의 연극 작품이 있었다. 배우 김영민이 이우 역을 연기했다.
5. 여담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미남이었다. 당대에도 유명했던지, 김을한이 "과연 듣던 대로 동탕[31]한 인물이었다", "李鍝 공은 과연 소문에서 듣던 바와 같이 왕실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이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두 눈에는 영채가 도는 것이 그는 밤중에 만져보아도 귀공자임이 틀림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덕분에 21세기 인터넷상에선 '얼짱 황족'으로 유명해져 뉴스에 실렸을 정도이며, 커뮤니티에서도 종종 화제가 되곤 한다.
- 중앙여자중학교와 중앙여자고등학교는 이우가 부지를 제공하고 막대한 하사금을 내려서 세운 학교다. 1938년경에 반남 박씨의 피아노 가정교사였던 안영자를 통해서 당시 교육운동을 하던 황신덕이 이우가 소유하고 있던 당시 경성부 서대문구 죽첨정 일대의 부동산을 교육사업을 위하여 하사해줄 수 있는지 운현궁에 문의하였고 이우는 "한국인이 교육사업을 하겠다는 것은 너무 반가운 것"이라 하며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 때의 인연을 계기로 하여 이우의 부인인 반남 박씨가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 1945년 피폭사로 요절했다 보니, 이우가 엄청 옛날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망 당시가 고작 30대 초반이였기 때문에 만약 이우가 이때 사망하지 않았다면, 2000년대까지도 90대의 나이로 살아있었을 확률이 있다. 실제 그의 형인 이건도 1990년까지 살았고, 7살 더 많던 김을한도 1992년에 사망했다. 이우와 동갑인 유명인으로는 김일성과 손기정 등이 있는데 각각 1994년, 2002년까지 살아있었다.
- 아버지 의친왕은 이우와 그의 형 이건을 대놓고 차별했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은 자서전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차남 이우는 총애했음에도 이건은 미워했다"고 술회했다. 술을 마시면 이건에게 "일본으로 가서 살라"며 화를 냈으며, 이우가 귀국할 때는 직접 경성역으로 마중 나가놓고 이건이 귀국할 때엔 일부러 피하는 등, 노골적인 차별 대우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만큼, 일제에 부정적이었던 이우와 달리 일제에 순종했던 이건이 마땅치 않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이건은 1947년 '모모야마 켄이치'라는 이름으로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아버지와 인연을 끊으려고 그랬다, 왜!"식의 이유를 댔다.
- 이우의 친모 수인당 김흥인 여사는 상민 출신 가문으로 11세에 입궁했고 이후 의친왕의 가장 총애를 받는 후실이 되었다. 이해경 여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의친왕이 인력거로 기생을 부르는 척하고 독립투사들을 그 인력거꾼으로 꾸며 여러 독립운동 기밀들을 전달했는데 그 일을 수인당 김씨가 도왔다고 한다. 기사. 또 의친왕이 일본에 끌려갔을때나 상하이로 탈출할때 의친왕을 모시며 중요한 서류와 증서를 대신 맡았던 이도 수인당 김씨라고 한다. 이렇게 힘든 상황을 함께 겪고 신뢰가 깊었다보니 그녀와 사이에서 낳은 이우도 편애 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 항일 의식이 있었음에도 일본 황족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괜찮았던 듯하다. 일본에서 발간된 조선 왕공족 관련 책자인 《조선왕공족 ~ 제국일본의 준황족》에 의하면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32] 자신의 일기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대신 이우 공의 원폭사에 대해서 쓸 정도였다고 한다. 앞서 증언에도 나오는 구 황족 아사카 다카히코[33]와도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의 형 이건에게는 그런 평이 없고 친분도 없었던 것을 보면 비록 조선은 망했지만 자신의 나라와 왕실에 긍지를 가지려 했던 모습에서 국적을 떠나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 일본 유학 시절 고국이 그리울 때 황성의 적을 부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이우의 시종 무관이었던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 소좌는 무좀을 앓고 있어서 이우와 함께 말을 탈 수 없어서, 이우는 요시나리가 이우의 관용차를 타고 출근하도록 하였고, 1시간 먼저 출근해 있었던 요시나리 소좌는 건물 안에 있어서 피폭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시나리 소좌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이우의 유해가 조선으로 옮겨진 8월 8일에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 이우의 장남 이청이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 연재한 웹 회고록에 의하면 승마를 매우 좋아해서 도쿄에 마굿간을 두고 말, 조랑말 3마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녀들에게 엄격하게 승마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또한 혹자의 발언을 인용해서 일본군 포병대에 들어간 건 당시 말을 주로 사용하는 병과였기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이청씨의 생각은 달라서 이우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했던 나폴레옹에 흥미를 느꼈고 그 영향으로 포병을 선택한 게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물론 진실은 이우만 알고 있겠지만. 그 외 이청의 회고록에는, 이우는 기성 제복은 절대 입지 않고 재단사를 고용해 맞춤복만 입었다고 한다. 이는 일본의 친왕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 광복 후 이승만은 운현궁을 압류해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이우 왕자의 부인인 반남 박씨의 노력과 장남인 이청 명의로 운현궁이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인정받아 사유재산화 되면서 대통령 관저로 쓰지 못하게 되자, 이승만은 그 대가로 이우의 둘째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보낼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운현궁에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등의 무례를 범했다.
[1] 실제로는 대한제국 고종의 친손자이다. 후술하겠지만, 그가 고종의 친조카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고 흥선대원군은 1907년 왕으로 추존되었기에 흥선헌의대원왕 기준으로 적는다.[2] 사인은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의한 피폭사(정확히는 피폭 후유증으로 사망)[3] 히로시마 시내로부터 남쪽으로 4킬로 떨어진 곳으로 원래는 청일전쟁에서 귀환한 병사들의 전염병 여부를 검역하긴 위한 육군 휘하 검역소로서 설치되었다. 이후 육군과 해군이 번갈아 관리를 맡았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당시, 섬 검역소는 대부분 폭격을 당한 시내 병원들에 비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약품이 상당량 보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우는 이곳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다 다음날 사망하였다.[4] 1878~1955. 김재정(金在鼎)의 딸[5] 이수길과 이곤의 친모이기도 하다.[A] 사후에 황실 문중에서 당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이사장이자 문화재청장이엇던 친덩생 이수길에게 받은 사시(私諡). 양조부 흥친왕(興親王)과 양부 영선군(永宣君)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기관에서 정한 것이 아니기에 공식적인 시호는 아니다.[7] 생전 불렸던 칭호. 비록 일제가 부여한 왕공족의 호칭이긴 하지만, 그는 생전에 '이우 공' 말고 불렸던 공식 호칭이 없었기에 부득이 넣는다.[A] [9] 의친왕의 서자들 중 적통으로 인정받은 자녀는 장남 이건과 차남 이우 둘뿐이다. 일본이 이 둘만 의친왕의 아들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의친왕에겐 적자가 없으며, 언론에 가장 잘 알려진 황족 이석도 서자이다.[10] 일본 정부가 조선귀족들에게 수여한 오등작 제도의 공작이 아니라 별도의 계급이다. 그러므로 이우는 '공작'이 아니라 그냥 '공'이다. 이우를 공작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대한제국의 직계는 왕족(王族)으로, 방계는 공족(公族)으로 분류되었고 이들을 합쳐 왕공족이라 일컬었으며, 비록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받았지만 이들의 신분상 위치는 대략 황족과 화족의 중간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11] 메이지 덴노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成久) 왕의 딸. 즉 메이지 덴노의 외손녀이며, 고준 황후와 이방자 비의 6촌 여동생이다. 아키히토 상황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었던 기타시라카와 하츠코가 그녀의 조카이다.[12] 박영효는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의 남편, 즉 철종의 부마였다. 조선의 법도상 부마는 사별해도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영혜옹주가 결혼 3달만에 요절했다는 것. 원칙대로라면 박영효는 재혼도 못 하고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 했고 당연히 후사도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고종은 그를 배려하여 특명으로 영혜옹주가 하가할 당시 몸종으로 데려갔던 궁녀들을 첩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었고, 그 중 한 명인 나인 범씨가 낳은 아들이 군부인 반남박씨의 아버지 박일서(朴日緖)다. 어디까지나 본처가 아닌 첩의 자식이므로 박일서와 그 자녀들도 원칙적으로는 서자, 서손이 되어야 했지만, 본처와 사별하고 재혼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박영효의 유일한 후사였기 때문에 사실상 적장자로 대우받았고 신분과 재산도 상속받을 수 있었다. 비단 이런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을 경우에 서자를 법적으로 본처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은 민간 양반가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 후사를 이은 서자는 당연히 그 집안의 적장자로 취급받았다. 이는 민간뿐 아니라 왕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 경종 등이 대표적인 사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효는 사망한 후 생전에 고작 3달간 부부로 살았던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다.[13] 국립고궁박물관 사이트[14] 총군은 일본군에서 집단군을 뜻한다. 데라우치 히사이치 원수가 맡았던 남방군이 대표적 예이며, 남방군은 필리핀, 미얀마, 태국 등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역을 맡았다. 야전군은 방면군, 군단은 '군'으로 불렀다.[15] 당시 이우를 인터뷰한 언론인 김을한이 전후에 출간한 회고록에 의하면, 일본 본토는 폭격 대상이 될 게 뻔하므로 괜히 사지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과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선에 잔류하려 한 것이라고 한다. 이 회고록 이외에도 이 시기에 "근무지를 제2총군이 아닌 조선 주차군 사령부로 바꾸어 달라"는 청원을 여러 차례 제출했다는 일본군 관련자들의 회고가 다수 존재한다.[16] 이상현 작가의 《조선의 낙조》에서 증언한 내용.#[17] 이후 회고록에 의하면 실제로 자신도 히로시마로 갈 짐까지 다 싸두고 있었으나 갑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져서 못 간 건데 혹자는 이걸 두고 이우공이 의도적으로 한 게 아니냐는 말을 했다면서 이를 부정한다.[18] 인접한 모든 육군 병원 및 민간 병원이 이미 만원 상태 아니면 다 파괴되어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해군 병원으로 후송한 것이었다. 그나마 군인이자 왕족이어서 서둘러 후송된 것이었으며, 동 병원이 히로시마의 다른 피폭자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다음날부터였다.[19] 3도 화상을 입을 경우 해당 부분의 신경이 파괴되어 고통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20] 피폭 후 수 시간 동안 양호한 상태였던 환자가 갑자기 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일으킨 후 혼절하고 단시간에 사망하는 것은 10시버트 이상 피폭되었을 때 종종 보이는 현상이다.[21] 핵 공격에 사망한 한국인은 한둘이 아니지만 대표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히로시마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도 '이우 공 전하 외 동포 2만여 위'라고 적혀있다.[22] 제목: '이우공 전하, 7일 광도(廣島)서 어전사(御戰死).' '이우 공, 7일 히로시마에서 전사'라는 뜻이다.[23] 이때 조선 총독을 비롯한 수많은 당시 총독부 관료들이 참여했고 조선인들도 조문했다. 바다 건너에서 옥음방송이 송출되어 항복했다는 걸 모른 채, 그래서 조선에서 8월 15일 당일에는 장례식 분위기로 해방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그 다음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 총독에게 전권을 이양받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던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석방하면서 그때부터 조선이 해방되었음을 온 국민이 알게 되었다.[24] 흥선대원군의 묘인 흥원은 본래 경기도 파주시에 있었으나 1966년에 주한미군 군사 시설이 조성되면서 남양주시의 현재 위치로 천봉하였다.[25] 낙천군, 은신군, 흥친왕, 이문용, 영선군, 이우, 이종.[26] 첫머리에 나오는 '안천'이라는 인물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 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 교수를 역임한 안희천(현재는 퇴임, 안천은 필명)을 가리킨다.[27] 난징대학살 주범 중 하나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의 장남.[28] 그 이초남은 후안무치하게도 2013년 8월 의친왕 제향 때 모습을 드러내 근왕주의 단체들을 충공깽에 빠트렸다. 배향 후 이석 황손이 직접 챙겨 하산한 것으로 보아 모종의 암약이 있었다는 게 중론.[29] 몇째 아들인지 확실하지가 않다.[30] 특별출연으로 등장했으며, 조연에 가까운 포지션인 관계로 그닥 큰 비중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31] 動蕩: 사물이 흔들리고 움직인다, 즉 주변에 큰 영향을 줄 만큼 잘생겼다는 뜻.[32] 쇼와 덴노의 동생이다.[33] 신적강하 전에는 아사카노미야 다카히코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