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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창군가 역사 시작 | ← | 1대 경창군 이주 | → | 2대 창원군 이준[1]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선조의 왕자 경창군 | 慶昌君 | |||
출생 | 1596년 11월 12일(음력 9월 23일) | ||
사망 | 1644년 2월 23일(음력 1월 16일) (향년 47세) | ||
묘소 |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가좌골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주(珘) | ||
부왕 | 선조 | ||
생모 | 정빈 홍씨 | ||
형제자매 | 14남 11녀 중 9남 | ||
배우자 | 군부인 창녕 조씨(郡夫人 昌寧 曺氏) | ||
자녀[2] |
| ||
작호 | 경창군(慶昌君) | ||
시호 | 효헌(孝獻) |
[clearfix]
1. 개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서9남이다. 어머니는 후궁 정빈 홍씨이다. 정정옹주의 친동생이며, 광해군과 원종(정원군) 등의 이복동생이자[3] 영창대군의 이복형이다.2. 생애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선조 29년) 음력 9월 23일에 평안도 평양 행궁[4]에서 태어났다. 8살 때인 1603년(선조 36년)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고, 15살 때인 1610년(광해군 2년) 창녕 조씨 조명욱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5] 이후 1617년(광해군 9년) 음력 11월 인목왕후[6]에 대한 폐비론이 불거졌을 때는 폐비에 찬성했다.[7]인조 즉위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대우받으며 살았다. 1625년(인조 3년) 음력 1월 21일에 있었던 소현세자의 관례를 주관했고, 그 공으로 안구마[8] 1필을 하사받았다. 1628년(인조 6년)에는 역모 혐의를 뒤집어 쓴 인성군에 대한 처벌을 요청했으나, 1631년(인조 9년)에는 경창군 자신이 이귀와 김자점 등으로부터 폐단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1632년(인조 10년) 음력 10월 16일에는 아들 양녕군이 회은군의 상소로 인해 역모에 휘말리는 일이 있었다. 당시 양녕군이 경창군의 이복 형 임해군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경창군이 이러한 양녕군을 위해 남몰래 역모를 꾸민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국청까지 열렸으나, 역모 고변이 거짓으로 판명나면서 경창군은 무사했다. 한편, 1636년(인조 14년)에는 방한용 모피를 헐값에 사들여 매점매석을 저지르는 바람에 사헌부로부터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이에 대해 별 다른 처벌을 하지 않고 지나갔다.
3. 사망
1644년(인조 22년) 음력 1월 16일에 경기도 남양 사저에서 향년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광해군, 인조 때 많이 희생된 다른 형제 및 친척들과 달리 그는 정치적으로 희생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4. 여담
- 충청북도 제천시 천남동 일대를 개간하여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은 천남동 뜰에 석탑을 세웠다. 이후 마을 개발 과정에서 석탑 이전 문제가 불거지자, 1956년 의림동으로 신축 이전한 제천경찰서에[9] 후손들이 석탑을 기증했다. 기증 이유는 경찰서가 석탑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석탑은 제천경찰서 정원에 남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으며, 복원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5. 가족 관계[10]
- 정부인 : 군부인 창녕 조씨(郡夫人 昌寧 曺氏, 1594 ~ 1648) - 부사(府使) 증(贈) 좌의정(左議政) 조명욱(曺明勗)의 딸
- 적장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613 ~ ?)
- 사위 : 익찬(翊贊) 이후걸(李後傑)
- 외손녀 : 이혜숙(李惠淑, 1631 ~ ?)
- 외손녀 : 이말숙(李唜淑, 1634 ~ ?)
- 외손녀 : 이애숙(李愛淑, 1638 ~ ?)
- 외손자 : 이재악(李載岳, 1647 ~ ?)
- 외손자 : 이진악(李鎭岳, 1650 ~ ?)
- 외손녀 : 이만애(李晚愛, 1655 ~ ?)
- 적장남 : 창원군(昌原君) 이준(李儁, 1614 ~ 1639)
- 며느리 : 현감(縣監) 한사덕(韓師德)의 딸 군부인 청주 한씨
- 손자 : 청평군 이전(淸平君) 이천(李洤)
- 손자 : 청흥정 이헌(淸興正) 이헌(李瀗)
- 손자 : 청풍군 이옥(淸豊君) 이옥(李沃)
- 적차남 : 양녕군(陽寧君) 이경(李儆, 1616 ~ 1644) - 임해군의 양자로 출계
- 적차녀 : 이옥란(李玉蘭, 1619 ~ ?)
- 사위 : 류연(柳㝚, 1621 ~ ?)
- 외손녀 : 류초원(柳初媛, 1638 ~ ?)
- 외손녀 : 류현원(柳賢媛, 1639 ~ ?)
- 외손자 : 류창운(柳昌運, 1642 ~ ?)
- 적3녀 : 이말란(李唜蘭, 1622 ~ ?)
- 사위 : 심약하[11](沈若河)
- 외손녀 : 심여취(沈女翠, 1643 ~ ?)
- 외손녀 : 심여용(沈女容, 1647 ~ ?)
- 외손자 : 심방(沈滂, 1652 ~ ?)
- 외손자 : 심장(沈漳, 1654 ~ ?)
- 적3남 :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 1624 ~ 1662) - 신성군의 양자로 출계
- 적4남 : 창성군(昌城君) 이필(李佖, 1627 ~ 1689) - 영창대군의 양자로 출계
- 측실 : 일은(日隱) - 양민 출신
- 서장남 : 창림군(昌臨君) 이일(李佾, 1629 ~ 1690) - 의창군의 양자로 출계
- 며느리 : 신경진(忠翼) 신경진(申景禛)의 딸 군부인 평산 신씨
- 손자 : 영풍군(永豐君) 이항(李沆)
- 손자 : 영평군(永平君) 이완(李浣)
- 측실 : 득환(得環) - 속(贖) 양민
- 서장녀 : 이백덕(李百德, 1630 ~ ?)
- 사위 : 구취형(丘就衡)
- 서차남 : 창흥군(昌興君) 이수(李脩, 1638 ~ 1704)
- 며느리 : 박세유(朴世裕)의 딸 군부인 고령 박씨
- 손자 : 고평군(高坪君) 이철(李澈)
- 손자 : 고성군(高城君) 이석(李氵+奭)
- 손자 : 고릉수(高陵守) 이즙(李濈)
- 손녀 : 정세혁(鄭世爀)의 처
- 측실 : 애운(愛雲) - 속(贖) 양민
- 서차녀 : 이천금(李千今, 1634 ~ ?)
- 사위 : 순흥 안씨 현감(縣監) 안집(安㙫)
5.1. 후손
경창군은 창녕 조씨 조명욱의 딸과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었으며, 측실에게서도 2남 2녀를 두었다. 조씨 부인은 경창군보다 5년 먼저인 1639년에 사망했다.조씨 소생의 차남 양녕군은 임해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요절하였고, 3남 평운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1659년에 수릉관에 임명되었다. 4남은 창성군으로[12] 전해진다.
세 딸 중 장녀는 이후걸에게, 차녀는 류연에게, 3녀는 심약하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의 두 아들은 창림군과 창흥군이다.[13]
따라서, 현재 전주 이씨 임해군파 및 신성군파 구성원의 대부분은 경창군의 후손이다.[14]
조선 말 춘생문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인 이도철과[15] 의병장 이소응이[16] 경창군의 후손이다.
5.2. 조선 후기 왕실을 이루다
경창군의 후손 중 일부는 조선 후기와 말기에 정식으로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이는 효종 이후 왕손들의 단절이 잦아지면서, 왕실에서 후사를 잇기 위해 다른 왕자 후손들에게 양자를 들였는데, 이 과정에서 입양된 인물들의 상당수가 경창군의 후손들이기 때문이었다.조선 제14대 왕 선조는 슬하에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이 중 8명[17]은 후손이 단절되었다.[18] 반면, 6명[19]은 후사를 남겼다.
이들 중, 왕위를 계승한 원종의 가계를 제외하면, 가장 번성한 집안이 경창군파였다. 이에 따라, 본가에서는 양자를 보내더라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으며, 많은 경창군 후손들이 양자로 입적되었다.[20]
서열상으로 보면, 경창군보다 윗세대인 인성군의 후손들이 우선될 수도 있었으나, 인성군은 역모 사건에 연루된 전력이 있었고, 후손들의 세대 진행도 늦어 적절한 항렬의 후손을 입적시키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고종과 같은 항렬의 선조 왕자 종손들을 비교하면, 경창군파 종손 이재곤은 고종과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관료로 활동했다. 반면, 인성군파 종손인 이재형은 1980년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지냈을 정도로, 고종과 약 70~100년 정도 활동 시기가 차이가 났다.
- 숙종의 6남(사실상 실질적 3남) 연령군의 양자는 경창군의 적장자 창원군의 5대손 낙천군 이온이다.(연령군파)[21]
-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양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자는 경창군의 서장남 창림군의 8대손 완평군 이승응이다.(은전군파)[22]
- 흥선대원군의 둘째 형 흥완군의 양자는 경창군의 9대 종손 이신응의 아들 완순군 이재완이다.(연령군파 - 흥완군계)[23]
- 철종의 이복형 영평군 이경응의 양자는 경창군의 서차남 창흥군의 9대손 청안군 이재순이다.(은언군파 - 전계대원군계)[24]
5.3. 역대 종주(宗主)
- 1.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
- 2. 창원군 이준(昌原君 李儁). - 경창군파 1대 사손. 사손(嗣孫)의 댓수는 종주의 댓수에서 '-1' 하면 된다.
- 3. 청평군 이천(淸平君 李洤).
- 4. 서천군 이황(西川君 李榥).
- 5. 이정욱(李廷煜).
- 6. 이기(李垍).[25]
- 7. 이유병(李惟秉).
- 8. 이술초(李述初).[26]
- 9. 이도본(李道本).
- 10. 이신응(李愼應).[27]
- 11. 이재곤(李載崑).[28]
12. 이원용(李源鎔).[29]- 12. 이해국(李海菊).
- 13. 이해석(李海釋). - 현재 종주.[30]
[1] 임해군의 양자로 출계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실은 고려 대상이었던 적이 있을 뿐 입양이 실행되진 않았다. 《선원록》이나 《선원계보기략》에는 양자로 들어간 부분이 나타나지 않으며 《경창군파보》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창원군이 경창군의 장남인 관계로 가독을 이어야 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임해군의 양자는 경창군의 차남 양녕군 이경이었다.[2] 선원록_출처[3] 조카 인조보다 1살 어리다.[4] 현 평양시 중구역 외성동[5] 당시의 혼례는 정원군(원종)이 주관하였다.[6] 선조의 계비. 경창군에겐 적모(嫡母).[7] 반면, 친누나인 정정옹주 부부는 인목왕후 폐비론에 반대하였다.[8] 안장을 지운 말.[9] 현재의 한국전력 자리.[10] 선원록[11] 광주부윤 심총의 아들 , 응교 심광세의 손자 , 증 영의정 심엄의 증손자, 병조판서 심의겸의 고손자[12]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 1874년판에 따르면, 영창대군 사후 양자로 지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3] 경창군 아들들의 봉호는 조씨 부인의 본관인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따왔다. 다만, 양녕군과 평운군은 각각 양어머니의 본관에서 따왔다. 양녕군은 경기도 양천군(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에서, 평운군은 황해도 평산군에서 유래한 봉호를 받았다.[14] 다만, 일부 구성원은 다른 파에서 입계한 사례도 있다.[15] 서장남 창림군의 7대손.[16] 서차남 창흥군의 8대손.[17] 임해군, 광해군, 의안군, 신성군, 순화군, 의창군, 영창대군, 영성군.[18] 광해군은 아들 한 명을 두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했고, 영성군 역시 아들 한 명을 두었으나, 대가 끊겨 광평대군파에서 양손을 입적했다.[19] 원종(정원군), 인성군, 경창군, 흥안군, 경평군, 인흥군.[20] 흥안군은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처형되었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양자로 고려되지 않았다.[21] 단, 낙천군 또한 친자식이 없어 양자로 은신군을 들였으며, 은신군 역시 후손이 없어 인평대군파의 남연군 이구를 입적시켜 가계를 유지했다.[22] 원래 풍계군의 양자는 원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8대손인 경평군 이호(이세보)였으나, 1860년 세도가를 비판하다가 눈 밖에 나서 파양당했다.[23] 단, 흥완군 이정응에게는 친아들 완림군 이재원이 있었으나, 큰형 흥녕군 이창응이 후사가 없어 그 대를 잇도록 양자로 보냈다. 이후, 흥완군도 일찍 사망하여 정작 자신의 대를 이을 후계가 없었다. 원래는 흥선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이 양자로 들어갔지만, 고종 즉위 후 흥선군의 대를 잇기 위해 친가로 돌아갔기 때문에, 다시 들인 양자가 완순군 이재완이었다. 참고로, 완순군의 양고조부인 낙천군 이온은 이재완의 생가 6대조 이정욱의 동생 이정수의 손자로(쉽게 말해 친고조부의 6촌), 친가와의 연관이 있다.[24] 단, 청안군 이재순 또한 친자가 없어 소현세자파에서 양자 풍선군 이한용을 입적했다. 그러나, 풍선군 역시 후손이 없었고, 결국, 덕흥대원군파인 청풍군 이해승을 입양하여 가계를 유지했다. (다만, 이해승은 본래 월산대군의 후손으로, 월산대군파에서 덕흥대원군파로 입적된 집안 출신이었다.)[25] 원음은 '게'인데, 경창군파 족보에는 독음이 '기'로 되어 있다.[26] 6대 종주 이기의 동생 이재의 아들 이유수의 생자. 7대 종주 이유병과는 5촌 당숙 - 당조카 사이다.[27] 흥선대원군의 둘째 형 흥완군의 양자가 된 완순군의 생부다.[28] 원래 형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의 둘째 형 흥완군의 양자가 되어 나갔기에 그가 사손이 되었다. 참고로 정미칠적 중 한 명인 친일파이다.[29] 11대 종주 이재곤의 아들로 원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주가 될 예정이었으나 아버지보다 4달 일찍 죽었다.[30] 12대 종주 이원용의 양자이자 이원용의 동생 이운용(李沄鎔)의 친자. 이재곤 사후, 이미 죽은 이재곤의 장남 이원용의 첫째 아들 이해국(李海菊)이 종주 자리를 바로 물려받았으나, 6.25 전쟁 때 실종되었고, 친동생 이해백(李海栢)마저 북한군에게 피살당했는데, 둘 다 후손이 없어 부득이 이해석이 이원용의 사후 양자가 되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