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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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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왕자에 대한 내용은 경평군(160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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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은전궁의 역대 종주
1대
은전군 이찬
1.5대
경평군 이호
[1]
2대
완평군 이승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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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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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이인응
李寅應
파일:2017-08-09 12-50-07.jpg
<colbgcolor=#94153E><colcolor=#ffffff> 본명 이세보(李世輔) → 이호(李晧)
→ 이세보(李世輔) → 이인응(李寅應)
좌보(左輔)
출생 1832년 7월 11일
(음력 임진년 6월 14일)
사망 1896년 1월 7일 (향년 63세)
(음력 을미년 11월 23일)[2]
본관 전주 이씨[3]
생부 이단화
생모 해평 윤씨
부인 연안 김씨
반남 박씨
자녀 양자 1남
대표 작품 신도일록》, 《풍아》 등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초기3.2. 파양과 유배3.3. 고종 즉위 이후
4. 사망과 이후5. 대중매체에서6. 후손과 일족

[clearfix]

1. 개요

조선종실 출신 문신, 시조 작가이다.

2. 이름

이름은 '이세보(李世輔)'였다.[4] 풍계군양자가 된 후 '이호(李晧)'로 바꿨고, 파양당한 뒤 다시 이세보로 돌아갔다가 1868년(고종 5년)에 마지막으로 '이인응(李寅應)'으로 다시 개명했다. 자세한 경위는 후술.

따라서 이 문서에서는 이름을 해당 시대에 맞게 '이세보', '경평군 이호', '이인응'을 혼용해 적는다.

대중들에게는 가장 오래 사용했던 이름 '이세보'로 잘 알려져있다.

3. 생애

3.1. 초기

1832년(순조 32년) 6월 14일에 군수 이단화(郡守 李端和)와 해평 윤씨 윤응선(尹應善)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조선 원종의 2남이자 인조의 동생인 능원대군 이보의 8대손으로, 조선 왕실 직계와는 원종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200여 년이 지난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의 본 가계는 다음과 같다.
능원대군 이보 - 영춘군 이정 - 창은군 이권 - 안풍군 이영 - 이후근 - 이복현 - 이제로 - 이단화 - 이세보(이인응)
그러나 20살(만 19살)이던 1851년(철종 2년) 7월 14일 풍계군의 사후 양자로 입적하여 왕족이 되었다. 이 때 작호 경평도정(慶平都正)을 받고 이름도 이호(李晧)로 고쳤다. 그 해 9월 경평군(慶平君)으로 승격했다.

풍계군은 은전군의 양자이기 때문에 호적 상으로 철종8촌 형제가 되었는데[5], 풍계군은 원래 은언군의 친자식이었기 때문에 철종은 '실제 큰아버지의 양자'[6] 이호를 사실상 사촌처럼 대했다.

이후 오위도총부(中義大夫兼五衛都摠府) 부총관[7]이 되었다. 1853년(철종 4년)에는 철종의 수라상을 감독, 관리[8]하는 직책을 맡았다. 안동 김씨세력이 절정에 달한 상황에서 철종이 그나마 안심하고 맡길 만한 사람이 가까운 종친이었기에 그를 임명한 것이다.

1857년(철종 8년)에는 동지사은정사(冬至謝恩正使)[9]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철종은 그를 통해 청나라와 국제 정세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지만 당시 기세를 떨치던 세도가들의 농간에 별 일 없다는 거짓 정보만 알리고 말았다. 이때는 아편전쟁서구권 열강동아시아 침탈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3.2. 파양과 유배

철종 시절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왕족으로 경원군 이하전, 흥선군 이하응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다. 경평군은 세도가들과 사이가 안좋았고, 자연히 그들은 경평군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860년(철종 11년)에 일이 터졌다. 경평군의 생가 친동생 이세익(李世翊)[10]이 충량과에 발탁되어 특명으로 한림[11]에 임명받았으나, 세도가 안동 김씨들이 부당하다고 반대함으로써 임명이 힘들어졌다. 이에 철종이 크게 노여워했는데, 이를 두고 세도가 쪽 신하들은 경평군이 친동생을 위해 철종에게 몰래 청탁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제히 도성 밖으로 나가 경평군에게 벌을 주라 청했다.

그러자 화가 난 경평군은 판중추부사 김좌근, 영은부원군 김문근(金汶根)[12]안동 김씨세도를 대놓고 비난했는데, 이 때 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였다.[13]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던 세도가들은 이를 오히려 역공의 기회로 삼았다. 대사헌 서대순(徐戴淳)을 시켜 경평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으며 아예 신하들에게 경평군을 사형시키라고 까지 권하라고 부추겼다.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철종은 어쩔 수 없이 경평군을 결국 한성 밖으로 쫓아냈다. 하지만 대간들은 탄핵을 끈질기게 계속했다.

결국 같은 해 11월 4일 풍계군의 양자에서 파양당했다. 왕족 신분으로 받은 경평군은 즉시 폐작되었으며 이름 역시 종친 자격으로 얻은 이호에서 예전 이름 이세보로 돌아갔다. 다시 대가 끊어진 은전군 - 풍계군의 후사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 완평군 이승응이 새로 입양와서 이었다.
<colbgcolor=#94153E> 완도군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이세보의 눈물〉
이후 전라남도 강진군신지도유배를 떠났다. 유배지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수많은 시조를 썼다. 대표적으로 일기인 《신도일록》과 시조집인 《풍아》 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각 문서 참조.
파일:1174837833_2.jpg
<colbgcolor=#94153E> 이세보 문학 기념비
시조의 소재는 부정부패 비판과 애정, 도덕, 기행, 옛 일에 대한 고찰(考察), 그리고 여행지를 두루 지나며 느낀 감흥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제와 내용의 다양함은 다른 시조와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세보 시조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이렇게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조들을 많이 썼기에 현재 신지도를 관할하는 완도군에선 완도읍 장좌리 수석공원에 이세보 문학 기념비를 세워 그의 문학성을 기리고 있다. 신지도에서 적은 시조는 77수, 평생에 걸쳐 쓴 시조가 총 458수로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시조를 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무렵 그가 지은 노래 《농부가》가 《2018 EBS 수능특강》에 실렸다. 아마 저 걸로 이 사람 알게 된 학생들 많을 거다.
파일:AKR20180125061100805_02_i.jpg
<colbgcolor=#94153E>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이세보가 유배온 뒤 서울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한 맺힌 눈물을 흘리던 모래사장이 있었다. 이세보가 나중에 서울로 돌아간 뒤 그 곳 모래를 밟을 때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해서, 이름이 명사십리([14]沙十里)[15], ‘울모래(鳴沙場)’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3.3. 고종 즉위 이후

유배지에서 고생을 하던 중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16]고종이 즉위하며 안동 김씨 세도의 절정기는 막을 내렸고 곧 신정왕후 조씨흥선대원군의 배려로 풀려났다.

이후 이세보는 1865년(고종 2년)에 벼슬 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성부우윤 · 한성부좌윤[17]이 되었고, 1866년(고종 3년)에 병조참판[18] · 동지돈녕부사[19] · 형조참판[20] · 공조참판[21]을 지냈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름을 이인응(李寅應)으로 개명했다. 그 뒤로도 여주목사[22] · 오위도총부 · 한성부판윤[23] · 공조판서[24] · 형조판서[25] · 판의금부사[26]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지냈다. 특히 여주목사 등 지방관을 지낼 때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민심을 얻기도 했다. 그가 떠날 때는 백성들이 제발 가지말라고 애원했다고.

4. 사망과 이후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이인응은 크게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했다. 그러다 중병에 걸려 1896년(건양 원년) 1월 7일, 향년 6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묘소는 충청남도 천안시 거재마을에 있다.

1997년 7월에 대한민국 문화체육부[27]에서 그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5. 대중매체에서

파일:풍운 경평군.png}}} ||
<colbgcolor=#94153E> 〈풍운〉의 이인응
1982년 KBS1풍운〉에서는 반문섭이 연기했다. 철종(임혁 분)의 병이 깊어지자 이하전(김봉근 분)을 찾아가 시국을 논하며 다음 보위는 그가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하전은 흥선군(이순재 분)을 찾아가라 하는데 경평군은 궁도령, 상갓집 개와 무슨 의논을 하냐며 역정을 냈다. 김병기(김진해 분)의 행차를 보고 침을 뱉으며 안동 김씨 가문을 욕했는데, 이 때 옆에 있던 행인과 말싸움을 하다가 위에 소개한 말[A]을 살짝 각색한 "김가가 어디 왕족이라더냐!"란 말을 한 뒤 행인에게 얻어맞고 하옥당했다. 이후 조정의 일을 험담하고 백성들을 충동질했다는 죄목으로 위리안치 형벌을 받았다. 고종 즉위 후엔 한성부로 돌아와 흥선대원군에게 척신들을 척결하는 일을 맡겨달라고 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를 멸문까지 할 생각이 없었던 흥선대원군은 그를 우승지에 봉했고 이에 이세보는 반발했으나 씹혔다.(...)
파일:경평군 이호.jpg}}} ||
<colbgcolor=#94153E>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의 이인응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에서는 이동신[29]이 연기했다. 왕실 종친일 때도 이름이 이세보로 나왔다.[30] 역사대로 안동 김씨와 대립하며 파락호 생활을 하는 흥선군(임동진 분)을 찾아가 종친의 품위를 지키라고 역정을 냈다. 여기서는 안동 김씨들이 종친들의 대궐 출입을 제한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 위에 소개한 말[A]을 살짝 각색한 "김가 성으로 이씨 왕실을 짓누르려 하는가!"란 말을 하여 귀양을 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유배 길에서 마주친 흥선군에게 "백성들도 다 아는 걸 대감만 모르는게 말이 되오이까!" "나라가 망하는 걸 보고만 계실 것이오이까!", "지금 나서지 않으면 천벌 받을 것이오!"라며 읍소했다. 고종 즉위 후엔 한성부로 돌아왔다. 여담으로 철종(최수종 분)이 경평군을 '형님'으로 불렀는데 실제로는 경평군이 1살 아래이기 때문에 오류이다.
파일:찬란한 여명 경평군.png}}} ||
<colbgcolor=#94153E> 〈찬란한 여명〉의 이인응
1995년 KBS1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임병기가 연기했다. 병인양요 당시 병조판서로서 흥선대원군(변희봉 분) 및 기타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에서 나왔다.

6. 후손과 일족

부인으로 4살 연상의 연안 김씨와 동갑인 반남 박씨가 있었다. 그러나 자식이 없어서 16촌 동생 뻘인 이원응(李元應)[32]의 아들 이재형(李載馨)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이재형은 남대문교회와 승동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냈다.#
파일:dlgofkddltpqh.png
<colbgcolor=#94153E> 이인응 일족 사진. 가운데 흰 수염을 기른 사람이 이인응의 양자 이재형이고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해랑이다.[33]
그의 친사촌동생 이종응(李宗應)[34] 역시 아들이 없어 이인응의 양자인 이재형의 친동생 이재영(李載榮)을 입양했다. 이재영의 손자가 한국 연극의 1세대로 연극계의 대부로 유명한 배우 이해랑이다. 쉽게 말하면 이인응에게 이해랑은 4촌의 양증손자이다.

[1] 본문 참조.[2] 고종이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쓴다는 태양력 반포를 했기 때문에 이세보의 사망 년을 1895년으로 적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음력에는 원칙적으로 서력 기원을 쓰지 않는다.[3] 능원대군파. 덕흥대원군 기준 11대손 '응(應)' 항렬. 파는 다르지만 효명세자, 철종,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이다.[4] 상단 표에 적혔듯이 그는 원래 능원대군의 후손으로, 능원대군파에서 1868년 흥선대원군이 '항렬자 통일령'을 내리기 전의 이세보 세대 항렬자는 '세(世)O' 였다.[5] 철종의 법적 가계: 영조 - 효장세자(진종) - 정조 - 순조 - 철종.
경평군의 법적 가계: 영조 - 사도세자 - 은전군 - 풍계군 - 경평군.
[6] 철종은 은언군의 아들이자 풍계군의 동생 전계대원군의 친아들이다.[7] 조선 시대 중앙군 조직인 오위(五衛)를 총괄한 최고 군령(軍令) 기관이며 부총관은 최고 지휘관인 총관의 다음가는 서열이다.[8] 이를 '감선(監膳)'이라고 한다.[9] 조선 시대 중국에 정기적으로 보내던 사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지 즈음에 보낸다.[10] 1868년 이택응(李宅應)으로 개명.[11] 翰林, 조선 시대 예문관 검열의 별칭.[12] 철인왕후의 아버지.[13] 단, 이 말 자체는 경원군 이하전이 했다는 설도 있다. 물론 둘 다 안동 김씨를 고깝게 본 것은 맞다.[14] 울 명.[15] 울음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린다는 뜻.[16] 양력 1864년 1월.[17] 지금의 서울특별시 부시장 격.[18] 현재의 국방부차관 격.[19] 종친부에 속하지 않는 왕의 친족을 관리하던 곳인 돈녕부의 수장.[20] 현재의 법무부차관 격.[21] 현재의 국토교통부차관 격.[22] 현재의 여주시장 격.[23] 현재의 서울특별시장 격.[24] 현재의 국토교통부장관 격.[25] 현재의 법무부장관 격.[26] 의금부를 총괄하는 관직이며, 품계는 종1품이다. 주로 6조의 판서나 좌우참찬, 좌우찬성이 겸직했고 또 우의정이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주로 의금부를 총괄하며 위급한 사건을 수사할 때 왕에게 보고하기도 했다.[27] 현재 문화체육관광부[A]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29]제4공화국〉에서 박선호, 〈무신〉에서 살리타이 역을 맡았다.[30] 한국 사극은 특별히 중요한게 아니라면 시청자의 몰입을 해치지 않기 위해 인물의 개명을 잘 반영하지 않는다. 고증대로면 이성계도 즉위 후 '이단'으로, 이방과도 '이경'으로 바꿔야하지만 그러지 않는 것처럼.[A] [32] 이인응은 능원대군의 4남 영춘군의 7대손이고 이원응은 능원대군의 장남 영풍군의 7대손이다.[33] 사진 출처 - 《주간한국》.[34] 이인응과 이종응은 원래 친 사촌 사이인데 이인응의 숙부이자 이종응의 아버지 이문화가 자신의 숙부 이제은의 양자로 입양갔기에 법적으로는 6촌 지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