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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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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리학자
김정호
金正浩
파일:김정호 표준영정.jpg

김정호의 표준영정.
출생 <colbgcolor=#fff,#191919>1804년(?)[미상]
황해도 토산군
(現 황해북도 토산군)
사망 1866년(?)[미상] (향년 62세)
한성부 성저십리 만리재
(現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
이름 김정호(金正浩·金正皡)
고산자(古山子)
백원(伯源) / 백온(伯溫) / 백지(伯之)
본관 청도 김씨 (淸道 金氏)
자녀 딸 김순심?[3]
국적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종교·이념 유교 (실학)
직업 실학자, 지도학자, 측량학자, 지리학자
파일:attachment/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전도.jpg
대동여지도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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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정호는 자신의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다. 본디 공교한 재주가 많았고, 특히 여지학(輿地學, 즉 지리학)에 깊이 열중하였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地球圖)’를 제작하고 또 ‘대동여지도’를 손수 판각하여 세상에 인포했다. 세상에 그 정밀하고 상세한 것은 고금에 그 짝을 찾을 수 없다.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동국여지고(東國輿地攷)’ 10권을 편집했는데 탈고하기 전에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이향견문록
조선 후기의 지도학자, 측량학자, 지리학자. 자는 백원(伯源), 백온(伯溫), 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

서유럽에서 발로 걸어 측량지도를 확립한 지도학자의 대명사가 장 도미니크 카시니로 알려져 있듯이, 한국에서는 지도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다만 시기상으로는 카시니가 150년 정도 앞선다. 한편 김정호는 직접 지도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편찬된 국내외의 자료를 집약하여 새로운 지도와 도법을 고안하기도 한 학자였다. 한국의 지도 외에 세계지도 역시 제작한 바가 있다.

오늘날 김정호와 관련된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한성부 종로 쪽에 살았던 듯하다. 강북 종로학원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석재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읽어보면 김정호가 이쯤 살았던 것 같다고 시사하는 문장이 적혀 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고려대역~성동구 성수대교 일대를 지나는 도로명으로 김정호의 호를 딴 고산자로가 있다.

2. 생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서 오늘날 현존하는 자료는 많지 않으며 김정호의 태생은 좋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잔반이나 중인 출신으로 추정된다. 김정호는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미루어보아 실학을 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정호는 최한기와도 교류하였는데 최한기가 편찬한 세계 지도인 지구전후도를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맡았고 최한기는 김정호가 편찬한 청구도의 서문을 써주었다. 김정호를 후원한 인물로는 여도비지를 편찬한 최성환, 대동여방도 서문을 썼으며 김정호에게 지도 제작을 의뢰한 신헌[4] 등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김정호가 어릴 적 산세를 살펴보려고 산을 헤매다가 선인을 만났는데 선인이 대뜸 "산에 함부로 들어와 뭐하는 거냐"하고 호통을 치자 처음에는 겁을 먹었다가 슬그머니 심통이 나서 "대장부가 하려는 일을 어찌 경솔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선인이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김정호에게 '산의 뿌리를 찾는 자'라는 뜻으로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는데 '고산자'였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Foot_Draws_Kim.jpg

자신이 이전에 편찬한 지도인 청구도와 동여도, 이전의 각종 지도와 지리지를 참고해서 대동여지도를 편찬했다. 보통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정호 자신이 전 국토를 유람하며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짜로 김정호가 그러한 방법으로 지도를 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정호가 한반도를 3번 돌고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며 정확하게 실측 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설명은 '지도가 흥선대원군 때문에 사라졌다'고 당당히 사기를 쳤던 최남선의 글에 처음 등장[5]하기 때문이다. 이 최남선의 말이 퍼진 듯하다.

객관적으로 김정호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들은 모두 김정호가 실측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3가지인데 청구도에 대한 서문인 최한기의 '청구도 제'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찾고 수집, 열람하였다",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에는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며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였고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는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디에도 직접 답사했다는 기록은 없는데[6] 당연히 몇몇 부족한 곳은 직접 답사를 했겠으나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지 못했던 김정호가 전 국토를 답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도 안에 담긴 정보는 너무나 상세하기 때문에 직접 그 정보를 전부 스스로 모아서 지도에 담을 수는 없다. 대동여지도 실물의 크기는 높이 7미터에 가로 3미터 반인 만큼 거대하며 여러 판으로 나뉘어 있고 여러 판들을 펼쳐 놓아야 비로소 거대한 지도가 완성되기 때문에 지도 전체를 전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직접 보고 싶으면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국토지리정보원국립지도박물관을 방문해 보라. 대동여지도 전체를 박물관 바닥에 전시해 놓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10리마다 표시를 해 두어서 실용적인 목적을 꾀하였고 여러 지방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삽입하는 등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조선 시대 당시의 생활상을 꼼꼼하게 알 수 있는 훌륭한 정보지이기도 하다. 10리는 직선 거리 10리가 아니라 실제 거리 10리이고 산이 험할수록 촘촘하게 찍혀 있다. 김정호는 "대동지지"라는 지리지도 서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도 숭실대학교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대동여지도의 목판 일부가 남아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대동여지도 목판 11매가 보관 전시되어 있는데, 이 유물은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부터 소장해온 것이다.[7] 국립중앙박물관 목판은 초창기 해당 목판에 잘못된 기록을 수정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정호가 직접 만든 초판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는 더 많이 있었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대중들에게는 대동여지도만이 알려져 있지만 김정호는 그 외에도 <청구도>, <수선전도>, <지구전후도>, <대동지지>, <동여편고> 등 수많은 지도를 제작하고 지리지를 편찬했다. 그야말로 지리덕후.

3. 기타

김정호가 지도 제작과 지리학에 재능이 많았으나 국가는 지도 제작에 전혀 뜻이 없어 김정호 자신이 직접 전 국토를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지만, 쇄국 정책을 취하던 흥선대원군이 이에 분노하여 나라의 기밀을 누설했다며 대동여지도를 압수하고 김정호 부녀를 감옥에 가뒀고 결국 김정호는 옥사했다. 이후 조선어 독본에서는 일본에서 대동여지도를 입수 러일전쟁 때와 이후 토지조사사업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했다.(출처:#)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파일:런던 지하철_김정호 대동여지도.png}}}||
이를 국까들이 서양에 비해 '훨씬 뒤떨어지는' 조선을 보고 '유교(동양 사상)가 논리적 사유와 자연과학 발전을 태생적으로 거부한 습성'의 결과물이므로 뒤쳐진 만큼 더 열심히 발전에 힘써야 하는 교훈이라고 국뽕을 까는데, 일단은 당시 철도 건설과 지리 측량을 100% 동치해 일반화한 것이라 어폐가 약간 있다. 당시에도 측량은 어쨌든 발로 뛰고 수기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긴 했다. 또한 유기(그릇)같이 기존 기술보다 나은 것이 나오기도 한다. 한편 유교도 까이는데, 정작 한강의 기적도 유교 가치관인 상명하복 하에 노동자들이 갈려나갔던 결과인 것을 보면 논리가 얕은 주장이다. 무엇보다 대동여지도는 국가가 아닌 개인의 산물이다. 즉 동양, 조선 자체가 못났다고 하려면 차라리 당시 무능한 지배층을 까는 것이 낫다.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미상] 생몰년도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아 학계의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미상] [3] 조선어 독본에서 김정호에게 딸이 있었다고 기록하나 조선어 독본의 신빙성을 감안하면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4]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병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일본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는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김정호가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신헌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5] "팔역의 산천을 샅샅이 답사함을 사양치 아니하였으며 백두산 만을 닐곱 번 올라갓으며 이를 위하여 수십 년 과객질을 하얏다" -고산자를 회함-, "그동안, 팔도를 돌아다닌 것이 세 번, 백두산에 오른 것이 여덟 차례라 한다." -조선어독본-[6] 전국을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마도 일본의 '이노 타다타카'를 모델로 쓴 듯한 느낌이 든다. 에도 근방의 상인 출신이었던 이노 타다타카는 수차례 실측 여행을 떠났고 남쪽의 규슈부터 북쪽의 홋카이도에 이르는 지역을 직접 측량하여 일본 최초의 실측 지도인 <대일본연해여지도>를 편찬하였다.[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판의 경우 1932년 경성제국대학 개교 기념전에 전시된 전력이 있고, 지하 보관소에 버젓이 남아 있었음에도 박물관 사람들조차 있는 줄 몰라서 한동안 공식적으로 '망실'로 처리됐고, 학계에서도 6.25 때 훼손된 것으로 봤다. 그러나 1995년 12월에 박물관 이전 작업 중에 유물을 정리하다 보니 그제서야 있다는 걸 발견한 것.[8] 사실 최초는 지도에 관심이 많았던 최남선이 1925년 <동아일보>에 투고한 '고산자를 회함'인데 최남선이 10년 후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독본에 참여했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다.다만 목판이 불태워졌다는 주장은 조선어독본에도 없다고 한다.[9] 신헌은 나중에 판중추부사까지 올라 강화도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 등을 맺는 등 중요 관료로 승승장구한다.[10] 위스콘신대에서 소장 중인 대동여지도[11] 즉, 다수의 제작자들이 있었다는 말.[12] 극본은 오재호, 연출은 이기하 PD가 맡았다.[13] 며느리 역은 한혜숙이 맡았으며 그 외 역할들은 문오장, 이종만 등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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