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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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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대 34대 35대 36대
박남수 이정희 송범두 박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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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손병희
孫秉熙 | Son Byong-hi
파일:독립운동가 손병희.png
초명 손응구(孫應九)[1]
이명 손규동(孫奎東)·이상헌(李祥憲)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 의암(義菴)
본관 밀양 손씨[2]
출생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 385-2)[3]
사망 1922년 5월 19일 (향년 61세)
경기도 경성부 숭인동 상춘원(常春園)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직업 독립운동가
종교 천도교
가족 아버지 손두흥(孫斗興), 어머니 경주 최씨[4]
형 손병곤(孫秉坤), 첫째 남동생 손병흠(孫秉欽)
둘째 남동생 손병권(孫秉權)[5], 여동생 손조이(孫召史)[6]
첫째 부인 현풍 곽씨, 둘째 부인 홍응화
셋째 부인 주옥경[7][8]
슬하 딸 5명[9], 조카 손천민(孫天民)[10]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 동학천도교의 지도자,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1919년의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중 한명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장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에서 청주목 아전인 아버지 손두흥(孫斗興)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경주 최씨 최정성(崔正成)의 딸 소생이었으므로 서자였다. 가난과 주위의 냉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면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다. 1877년[11] 괴산군에서는 배짱 좋게 수신사를 때렸는데 이유는 수신사가 하인을 학대한다는 것이었다.[12] 1882년 동학에 입도한 후 양아치 짓은 그만두고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성실하게 수도하다가 이윽고 충주를 근거지로 한 충의포 도소의 대접주에까지 올라간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제2차 봉기에 북접의 총 지휘자로 활동하면서[13] 남접전봉준이 이끈 호남 창의군과 공동 작전을 벌여 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후 손병희는 최시형 등 살아남은 북접 간부들과 원산으로 피신해서 숨어지내는 신세가 된다. 1898년 2대 교주 최시형이 붙잡혀서 처형당한 후 동학 북접의 도통을 이어받았는데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이 때 도쿄에서 당시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던 역관 오세창과 교류하면서 기존의 존왕양이 사상을 버리고 개화론자로 전향한다. 본래는 청나라망명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본에 재정착한 후 유학생을 유치하고자 조선과 일본을 왔다갔다 했는데 이 때 사용하던 가명이 이상헌(李祥憲)이다.

망명 시절 신분을 숨기고 충주 출신의 조선인 부호로 행세하던 손병희는 정치 활동에도 적극으로 나서서 이 시기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구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안면을 익혔다. 이 때 이용구는 손병희의 명령으로 국내에 돌아와 1904년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단발령 등 급진 개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돕는 등 손병희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진보회가 동학이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져 정부에게 탄압당할 위기에 처한 때 이용구에게 친일파였던 송병준이 접근하여 자신들의 어용 조직인 일진회와 진보회를 합치면 일제의 힘으로 탄압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유령 조직이나 다름없던 초기 일진회에 진보회가 합쳐지면서 회장 자리를 얻은 이용구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불과했던 <한일합방론>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합방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손병희는 이용구의 변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이용구와 갈등을 빚게 되고 정교 분리를 내세워 동학에서 일진회 세력을 모조리 처내고 조직을 분리한다. 이후 출교당한 친일성향의 일진회는 이용구를 교주로 하는 시천교를 세우게 되고 손병희가 이끌고 있는 원조 동학은 1906년 손병희를 교주로 하는 천도교로 개칭한다.

1908년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를 박인호에게 넘기고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손병희는 교육이 독립하는 열쇠라고 판단해 1910년 보성전문학교, 1911년 동덕여자의숙 등 본격적으로 애국지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립 학교들을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선다.

이후 천도교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 회의에 참석해 1919년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 기소되어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후 병보석으로 석방되고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임종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파일:제1공화국 손병희.png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파일:투명 1x10.png파일:고려대학교 심볼.svg파일:투명 1x10.png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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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교주(校主)[1]
초대

이용익
2대

이종호
3대

손병희
<nopad>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2]
<nopad>
1932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인수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초대

김성수
1-4대

이활
5-8대

김상만
9대

김용식
10대

채문식
11·12대

김병관
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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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대

김정배
16-19대

김재호

[1] 학교의 주인 또는 경영자를 지칭하는 말[2] 1921년 김기태와 박인호 등 58명의 공동명의로 재단법인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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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등장인물 및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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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1] 자 또한 응구(應九)였다.[2] 국자진사공파 역승공계 44세 병(秉) 항렬.족보명 손상현(孫祥鉉).[3] 현재도 이 지번에 청주손병희생가가 남아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4] 최정성(崔正成)의 딸이다.[5] 큰아버지 손두성(孫斗星)에 입양되었다.[6] 손소사(孫召史)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소사(召史)는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말인 조이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이후 손시화(孫時嬅)로 개명했으며,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과 혼인하였다.[7] 주병규(朱炳圭)의 딸이다. 명월관 기생이었다. 1914년 손병희와 결혼하였다.[8] 1894년 ~ 1982년 (향년 88세)[9] 그중 셋째 딸 손용화(1901~1992)는 독립유공자 방정환과 혼인하였다.[10] 형 손병곤의 장남이다. 손병희보다 4살 연상이었다.[11] 천도교 측에서 1877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수신사 파견 연도를 보면 1876년이 맞는 듯.[12] <계몽사 위인전>에는 수신사가 하인의 머리를 말총에 묶어 끌고 다니다 이를 목격한 손병희에게 맞았다고 한다.[13] 이 시기 북접의 성향은 남접과 판이했다. 초기 북접과 남접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북접의 거병 이유를 남접군을 때려잡기 위해서였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실제로 동학농민운동 초기의 활약은 남접에서 다 했으며 북접과 같이 활동한 시기는 오히려 쇠퇴기이다. 자세한 것은 동학 농민 혁명 항목 참조.[14] 이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어차(등록문화재 제319호)가 원래는 손병희의 차였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5] 21세기 현재에도 최고급 리무진은 운전석과 유리벽으로 분리되어 있다.[16] 민족 대표들이 전부 변절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민족대표 33인 문서 참고.[17] 서울에서 대구까지만 기차를 탔고 대구에서 경주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두 도시의 거리는 200리, 현재 단위로 무려 80km 가까이 되는 먼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