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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4:51:54

논개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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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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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논개
論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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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표준영정 (제79호/ 2008.02.04. 지정/ 윤여환)
출생 ?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現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계면 의암로 558)
사망 1593년 (선조 26년) (향년 19세?)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現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진주성)
사인 익사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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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기생이였으며 옥반지를 끼고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 장군을 안은 채 강에 뛰어들어 장군과 함께 죽었다.

2. 생애

전라북도 장수군 출신. 성은 주(朱)씨라고 하지만(신안 주씨) 이는 양첩설과 함께 유포된 것으로 지방 전승이 출처라 근거가 희박하다. 이름인 논개를 '놓은(낳은)+'라고 해석하여 4갑술인 술년 술월 술일 술시(1574년 음력 9월 3일 밤)에 태어났다고 보기도 하고 논개라는 이름 자체가 본명이 아니라 일본군이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인 별명[1]이라는 설도 있다. 의기 주씨(義妓朱氏), 의암 주논개(義巖朱論介)라고도 불린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투신한 지역인 진주시의 대표 캐릭터로 사용되는데 논개가 태어난 곳인 장수군도 논개를 캐릭터로 사용해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까지 벌어져 국사편찬위원회에 논개가 어디 사람이냐는 민원까지 제기된 바 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최초로 등장하고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논개 관련 기록이 없다. 사실 《어우야담》의 언급이 최초의 기록이라서 주요 기록으로 전하기는 하지만 《어우야담》은 야담집의 효시로 꼽히는 서적이므로 정식 사서로서는 물론이요 야사집으로도 많이 부족하다. 다만 어차피 사서 기록이 없고 이후 일화와 일치되는 점이 많기 때문에 이걸 주요 자료로 꼽을 뿐이다. 특히 《어우야담》은 선조 시기에 원본이 쓰이고 200년이 지나서 순조 시기에 활판본이 나왔으며 필사본만 30종이 넘어서 이 책에 대한 연구는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논개양첩설 같은 것의 신뢰도와는 별로 상관없다. 논개가 기생이었는지, 아니 애초에 이런 기생이 실존하기는 했는지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확인은 안 된다는 이야기다.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계사년(1593)에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연약한 몸을 잡자 논개는 왜장을 힘껏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두 사람은 모두 익사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2]
적장을 안고 뛰어내릴 때 손가락이 풀어지지 말라고 아는 사람들로부터 반지를 빌려 열 손가락에 끼운 후에 손을 엇갈려 끼우고 뛰어내렸다고도 한다. 남강을 가르는 진주교에 가보면 논개를 기리기 위해서 교각에 가락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고 아름다운 가락지다. 진주에 놀러가면 확인해 보자.
婦人之性輕死。然其下者,或不耐忿毒,幽鬱而死,其上者義不忍汚辱其身而死,及其死,槩謂之節烈。然皆自殺其軀而止。至若娼妓之屬,自幼導之以風流淫蕩之物,遷移轉變之情,故其性亦爲之流而不滯,其心以爲人盡夫也。於夫婦尙然,矧有能微知君臣之義者哉?故自古兵革之場,縱掠其美女者何限,而未嘗聞死節者。昔倭寇之陷晉州也,有妓義娘者,引倭酋對舞於江中之石,舞方合抱之,投淵而死,此其祠也。嗟乎,豈不烈烈賢婦人哉!今夫一酋之殲,不足以雪三士之恥。雖然,城之方陷也,鄰藩擁兵而不救,朝廷忌功而樂敗,使金湯之固,失之窮寇之手,忠臣志士之憤歎恚恨,未有甚於斯役者矣。而眇小一女子,乃能殲賊酋以報國,則君臣之義,皦然於天壤之間,而一城之敗,不足恤也。豈不快哉!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인 사람은 분독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이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는 자기 혼자 죽는데 그친다. 창기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네의 성품은 흘러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가 진주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이는 왜장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왜장을 껴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이의 의절을 기리는 사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 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을 하였으니 군신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3]
'논개는 기생이고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첩'이라는 주장은 조선 후기에 기록되었음을 볼 수 있다.
論介長水妓。爲崔慶會妾。癸巳慶會爲慶尙右兵使。入晉州。倭攻晉州急。天又大雨城潰。倭附上。慶會自投矗石之淵。論介聞慶會死而不慽。卽盛粧具佩之餙。就江上巖婆娑以眩倭。倭酋就。論介故要帛束腰而舞。因俱墜淵死。至今穪其巖曰義巖。

논개는 장수군의 기생으로 최경회의 첩이다. 계사년 경회가 경상우병사로 임명되고 진주에 들어왔다…(후략)
성해응의 《연경재전집[4]
논개양첩설의 요지는 논개는 원래 양첩인데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죽이기 위해서 '스스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KBS에서 단막극으로 1980년대 방영했으며 이규태도 이 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최경회와 논개를 엮는 것은 1987년 최경회의 집안인 해주 최씨 가문에서 발간한 《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서 최경회의 부인이 왜장을 유인해서 자살했다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기생 출신은커녕 천첩이라는 묘사마저 없다. 현재 최경회와 같이 무덤이 있다.

논개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불분명하지만 의암주논개정신선양회처럼 지방자치단체나 관련 사업하는 곳에서 괜히 아는 척 좀 한답시고 논개가 기생인지 아닌지를 단언하거나 "실존인물인지도 불분명함"이라고 하면 봉변을 당하니 주의를 요한다. 특히 논개와 관련이 깊은 고장인 진주나 장수 가서 저런 소리 하면 크게 곤욕을 치를 수 있다. 장수군과 논개 가지고 다투는 진주시는 논개양첩설을 채용해서 써먹기도 했지만 현재는 쓰지 않고 있다.

논개의 죽음에 알려진 일화는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진주가 함락되고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을 때 아름답게 치장하고 왜군의 승전 축하연으로 들어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적장을 해치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이때 죽었다는 기록은 한국 쪽의 주장이며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료가 부족하고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는 일본 쪽의 기록과도 맞지 않아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아니, 논개의 실체가 불분명하듯이 투신 일화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계월향에게 끔살당했다는 전설이 유포된 것과 같은 이치.[5]

아무튼 논개의 의거는 전후 진주 사족 및 주민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면서 너무나 유명해져서 1722년 국가에게서 정식으로 '의기' 칭호를 받게 된다.[6] 진주기생들은 매년 6월 29일, 즉 진주성 함락일이자 논개의 기일에 모여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행사가 그대로 진행되었다. 현재까지도 매년 춘추제를 지내며 6월 중 길일을 잡아 사흘 동안 제전을 연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그렇게 따지면 "논객"이랑 어감도 의미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2] 어떤 판본에는 이름 없는 기생이라고 되어 있고 후일에 논개라는 이름이 덧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에서는 이름 없는 기생이라고 했고 논개라는 이름은 없다.[3] 원문 출처[4] 원문 출처[5]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유몽인 같은 이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왜장 혹은 나름의 지휘관급의 장수를 안고 투신한 것은 실제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 단지 후대에 이야기가 윤색된 것으로 보인다.[6] 다만 이러한 기록은 국가의 정식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순조 대에 간행된 충렬실록에 수록되었다.[7] 2016년 4월 9일자 채널A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142회)[8] 김은호 그림 철거가 얼마나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받았냐면 진주에서 논개 그림을 철거할 때 42개 시민단체가 연합했고 남원시의 YMCA와 불교계가 같이 합동으로 성춘향 그림 철거하라고 발표했다.[9] 복제본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0] 사실 이런 방법의 원조는 손빈이다. 전차경주에서 이기는 방법(항목 참조)으로 "하급 전차를 상대의 상급 전차와, 중급 전차를 상대의 하급 전차와, 상급 전차를 상대의 중급 전차와 붙이는" 방법.[11] 참고[12] 실제로 가 보면 물에 발 담그기 좋아 보이는데 바위가 약간 높다. 따라서 발만 좀 담그려고 슬슬 내려가다 미끄덩 하면 훅 가게 되고 마니 물놀이할 때는 항상 안전사고 조심하자.[13] 당시 전쟁 중이긴 했으나 조선시대에는 열녀가 하나 나오면 그 집안은 물론 그 지역 자체에 특혜가 내려지는 게 당시 법도였다. 이 때문에 사실상 가문에 의해 살해당한 과부도 나오는 등 부작용도 상당했다. 그리고 작중 논개의 설정만 보면 최경회의 후처로 들어가며 신분을 상승한 상황인데 관기로 이름을 올리는 건 스스로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