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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0:36:45

홍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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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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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홍경래
洪景來
파일:external/pds23.egloos.com/e0017672_501f71783fc99.jpg
▲ 상상화
출생 1771년[1] (영조 47)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
사망 1812년(순조 12) 5월 29일 (향년 41세)
본관 남양 홍씨
복무 조선 농민군
1811년 ~ 1812년
신장 140cm[2]
부인 최씨
자녀 슬하 1남
후손 홍기조 (추정)

1. 개요2. 생애
2.1. 홍경래의 난 이전2.2. 홍경래의 난
3. 여담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의 주도자.

2. 생애

2.1. 홍경래의 난 이전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 조상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할머니들의 본관도 알 수 없다. 아버지 홍씨와 어머니 유씨 사이 4형제 중 셋째다.

외숙부 유학권에게 학문을 배워 평양 향시를 통과한 이후 1798년 사마시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가 덜했던 김조순 대에 일어난 것까지 감안하여 세도 정치보다는 당시 서북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을 등에 업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3][4]

그는 유교적 교양은 물론 병서, 제반 술서, 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했다고 한다. 홍경래의 신분은 대개 몰락 양반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결국 홍경래는 과거에 실패한 뒤 출세를 포기하고 집을 나와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당시 과거 제도의 부패상,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홍경래는 당시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 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희망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감록의 '정진인'을 봉기의 이념으로 제시하고, 정진인의 수하를 자처했다. 신라 말기에 미륵이 나타난다며 봉기했던 궁예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2.2. 홍경래의 난

1801년 홍경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우군칙을 만나 비밀리에 반란을 모의했다. 이희저, 홍총각, 김창시, 김사용 등 동지들을 모은 홍경래는 가산 다복동에 광산을 경영하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모았고 밤마다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렇게 10년 동안 준비한 홍경래는 1811년 12월 18일 스스로를 대원수라 칭하고 정진인의 뜻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병했다.

봉기 초반에는 각 관아의 내통자들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홍경래의 반란군은 반란 초기 10일간 청천강 이북의 여덟 고을을[5] 함락했다. 하지만 안주 공략 때부터 반란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는데, 홍경래는 남진군을 지휘하여 영변을 먼저 치고 그 다음에 병영이 있는 안주를 공략하려 했지만 반란군에 가담한 김대린은 안주를 먼져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경래가 참모 우군칙의 의견을 받아들여 김대린의 주장을 기각하자 김대린은 앙심을 품고 밤중에 홍경래 암살을 시도했다. 우군칙의 대처로 김대린은 죽었지만 홍경래도 칼을 맞는 바람에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다복동으로 군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영변과 안주는 반란에 대처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분란을 수습한 홍경래는 안주를 공략하려 했지만 이미 관군도 충분히 병사를 모은 뒤였다. 결국 홍경래는 안주를 눈앞에 두고 박천 송림리 전투에서 관군에게 대패하였다. 패퇴한 홍경래는 정주성으로 대피했고 비슷한 시기 김사용이 지휘하는 북진군도 정신차린 관군과 의병에게 박살나면서 난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다. 홍경래의 군은 거병 초기만 해도 향임와 상인 등 지역의 유지들이 대거 참가했지만, 반란군이 흔들리자 이들이 재빨리 발을 빼는 바람에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관군이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약탈, 학살, 방화 등 온갖 전쟁범죄를 일삼았고 그 때문에 가산과 박천의 농민들이 홍경래를 따라 정주성에 들어갔다. 덕분에 이전에 비해서 반란군의 결집력이 더 강해졌고 홍경래는 정주성에서 농성하며 한편으로는 외부로 사람을 보내 각종 소요사태를 유발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정주성 전투에서 홍경래는 네 달을 버티며 관군의 대공세를 무려 네 번이나 격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모든 총공세가 실패하자 관군은 목책으로 정주성을 크게 둘러 반란군을 고사시키려고 하였고, 홍경래는 출성하여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였으며 몇 번 승리를 거두었지만 관군의 포위진을 깨지 못했다. 식량과 무기가 부족해졌지만 홍경래는 끝까지 관군에 항복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항전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관군이 4월 19일 정주성 밑에 대량의 폭약을 매설한 뒤 터트리면서 정주성은 무너지고 반란은 실패로 돌아간다. 홍경래는 끝까지 싸우다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1] 1780년 생이라는 설도 있다.[2] 키가 4척 5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조선에서 1척이 31.1cm인 것을 보아 31.1*4.5=140cm라는 신장이 나온다. 이는 161cm가량으로 추정되는 당시 조선 남성 평균키보다 확연히 작은 키다.[3] 일부 야사에서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서북출신이라는 이유로 김조순이 취소시켰다고 한다.[4] 영조 이후 문과급제자 통계를 내보니 평안도 출신이 16%나 되는 등 한양을 제외한 지역 순위 1위였지만 집안 출신을 강조했던 조선 후기 사정상 평안도 출신은 고위직은커녕 임관도 되기 어려웠다. 집안이 좋으면 과거 급제를 못해도 벼슬을 하는데 집안이 안 좋으면 문과 급제를 해도 관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던 시절이었다. 평안도는 청나라 무역의 주요 관문으로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반면 푸대접은 여전했다.[5] 가산, 박천, 정주, 곽산, 선천, 용천, 철산, 태천.[6] 치부책에 2만냥을 가져간 내역을 적어놓았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 반란이 성공하더라도 임상옥의 도움을 받았다는 근거로 써서 임상옥을 살려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관군 입장에서는 난에 가담한 역적처럼 보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