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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3:10:42

홍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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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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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홍경래
洪景來
파일:external/pds23.egloos.com/e0017672_501f71783fc99.jpg
▲ 상상화
출생 1780년[1] (정조 4)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
사망 1812년(순조 12) 5월 29일 (향년 32세)
본관 남양 홍씨
복무 조선 농민군
1811년 ~ 1812년
신장 140cm[2]
부인 최씨 부인
자녀 슬하 1남
후손 홍기조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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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의 주도자.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 선조는 알 수 없으며 아들만 4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한 명을 두었다.

2. 생애

외숙부에게 학문을 배워 평양 향시를 통과한 이후 1798년 사마시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가 덜했던 김조순 대에 일어난 것까지 감안하여 세도 정치보다는 당시 서북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을 등에 업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3]

영조 이후 문과급제자 통계를 내보니 평안도 출신이 16%나 되는 등 한양을 제외한 지역 순위 1위였지만 집안 출신을 강조했던 조선 후기 사정상 평안도 출신은 고위직은커녕 임관도 되기 어려웠다. 집안이 좋으면 과거 급제를 못해도 벼슬을 하는데 집안이 안 좋으면 문과 급제를 해도 관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던 시절이었다. 평안도는 청나라 무역의 주요 관문으로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반면 푸대접은 여전했다.

그는 유교적 교양은 물론 병서, 제반 술서, 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했다고 한다. 홍경래의 신분은 대개 몰락 양반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결국 홍경래는 과거에 실패한 뒤 출세를 포기하고 집을 나와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당시 과거 제도의 부패상,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홍경래는 당시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 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희망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신라 말기에 미륵이 나타난다며 봉기했던 궁예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고 전한다. 차별 받던 서북민들을 규합해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최후의 전투인 정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1] 1771년 생이라는 설도 있다.[2] 키가 4척 5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조선에서 1척이 31.1cm인 것을 보아 31.1*4.5=140cm라는 신장이 나온다. 이는 161cm가량으로 추정되는 당시 조선 남성 평균키보다 확연히 작은 키다.[3] 일부 야사에서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서북출신이라는 이유로 김조순이 취소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