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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17년 8월 11일[1] (음력 태종 17년 6월 20일) |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 (現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 | |
사망 | 1475년 8월 1일[A] (향년 57세) (음력 성종 6년 6월 21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재임기간 | 제28대 영의정부사 → 영의정 |
1462년 6월 26일[3] ~ 1466년 6월 9일[4] (음력 세조 8년 5월 20일 ~ 세조 12년 4월 18일) | |
제40대 영의정 | |
1471년 12월 13일[5] ~ 1475년 8월 1일[A] (음력 성종 2년 10월 23일 ~ 성종 6년 6월 21일) | |
봉호 |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고령 신씨 |
자 | 범옹(泛翁) |
호 |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 |
부모 | 부친 - 신장 모친 - 나주 정씨 정유(鄭有)의 딸 |
부인 | 무송군부인(茂松郡夫人) 무송 윤씨(? ~ 1456) |
자녀 | 슬하 9남 2녀 장남 - 신주(申澍, 1435 ~ 1456)[7] 차남 - 신면(申沔, 1438 ~ 1467) 3남 - 신찬(申澯, 1440 ~ ?) 4남 - 신정(申瀞, 1442 ~ 1482)[8] 5남 - 신준(申浚, 1444 ~ 1509) 6남 - 신부(申溥, 1446 ~ 1501) 7남 - 신형(申泂, 1449 ~ 1487) 8남 - 신필(申泌, 1454 ~ 1518) 장녀 - 신씨(申氏, 1455 ~ ?) 신명수(申命壽)의 처 9남(서자) - 신결(申潔, 1457 ~ 1537) 측실 배씨(裵氏) 소생 차녀(서녀) - 숙원 신씨(淑媛申氏, 1458 ~ 1533)[9] 측실 배씨(裵氏) 소생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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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정치가, 학자, 외교관.2. 생애
신숙주는 태종 17년(1417) 나주목에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에 올라왔다. 세종 20년(1438) 22세 나이로 식년시 진사시에 1등 1위(장원)로 급제하였으며 세종 21년(1439) 친시(親試)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훗날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통상적으로 조선의 관료는 1품 승진에 3년이 걸렸는데 과거 합격도 합격이고 순전히 날짜만 채워서 종9품에서 정1품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많으면 51년이다.[10]책을 읽으려고 집현전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으며, 소문난 수재이자 책벌레였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하루는 어느 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길래 세종이 자신의 옷을 덮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이 신숙주다.[11] 이에 흡족해진 세종은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도 신숙주를 투입한다.[12] 세종은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아들인 문종에게 "신숙주는 크게 쓸 인물이다"라며 자주 칭찬했다고 한다.
세종 시절에는 일부러 책을 읽기 위해 남들이 기피하는 궁궐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하며 이 때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그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는데 세종이 이걸 보고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가 필원잡기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는 왕권이 서슬퍼렇던 시기였던 데다가, 곤룡포는 왕만 입을 수 있는 옷인지라, 곤룡포를 벗어 준다는 것은 곧 왕권의 이양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유로 임용한 박사는 실제로 곤룡포를 덮어주었다면 신숙주는 그 날로 처형감이라고 했으며, 그래서 곤룡포가 아닌 가죽옷이었을 거라고 설명했다. 왕 본인이 상관없다 하면 넘어갈 수 있기는 해도, 최소한 왕 수준의 책임을 짊어진다는 의미가 강하기에, 잠에서 깨어난 신숙주는 어느 쪽으로든 미칠듯한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13] 이 일화는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보통 훈훈한 미담으로 소개된다.
일본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몸이 아팠다가 나은 직후라 세종이 걱정했는데 신숙주는 "걱정하지 마십시오"라 하고는 일본에 갔다.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인들이 붓과 먹을 가져와서 글씨 좀 써달라고 요청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써 주어서 주위 사람들이 "매우 비범하다"고 평가했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려 쓰시마 도주와 담판을 했는데 도주가 "조선에 오는 무역선인 세견선의 수를 안 정하면 안 되는 거냐?" 고 하자 "이 사람아, 세견선 수가 정해지면 그만큼의 이익은 확실하게 당신에게 돌아가겠지만, 수를 안 정해놓으면 부하들이 당신 몰래 자기들 이익이나 챙길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하는 말로 설득하여 조선에 오는 세견선의 수를 확실히 약정한 계해약조를 맺고 돌아왔다. 이때의 경험은 뒷날 성종 때 대일관계 등에 관한 주요 자료로 손꼽히는 《해동제국기》를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지도를 그려오는 성과도 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에서는 풍랑이 거세자 선원들이 당황했던 데 반해 신숙주는 "지금 일본도 갔다 왔는데 이 바람을 타고 중국까지 가는 것도 괜찮지 뭐"라며 태연히 앉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배에 탄 사람 중에는 왜구가 납치해 갔던 백성들이 많았으며 그중 임신한 여인[14]이 있었는데 아이가 왜인의 아이였다. 선원들은 "임신한 여인이 배에 탔으므로 바다에 내던져 제물로 바쳐 용왕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했으나 신숙주는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해서야 되겠냐.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 하며 이를 막아서 죽을 위기에 처한 그 여인을 살려준 이야기도 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풍랑은 잠잠해졌다 한다. 이는 야사가 아니라 세종실록의 신숙주 졸기에도 기록되었다.
신숙주의 저서인 《해동제국기》는 무로마치 막부 때 일본에 대한 자세한 서술과 일본어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데 있는데 여기에서도 누가 당대 제일의 주당 아니랄까봐 너 술 먹었냐?, 이 술 맛있다 등 '술'과 관련된 기록이나 일본어 표현들을 꽤 많이 옮겨놓기도 했다[15].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 이게 명나라에 들어가면서 그 내용이 문제시되어 "너네 우리 불러서 전쟁하면서 뒤로는 일본하고 손잡은 거지?" 하는 투로 고발을 받은 적이 있다.[16] 일본으로 여러 차례 사행도 다녀오며 《해동제국기》를 저술한 일본통(日本通)답게 죽는 순간까지도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말라며 당부하였다. 숱한 경험으로 일본인들의 호전성을 간파한 듯한데 《해동제국기》의 서문에도 당시 일본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그들은 습성이 강하고 사나워 칼 쓰기에 능하고 배 타기에 익숙하며 우리와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처지이기에 잘 어루만져 주면 예로서 사신을 왕래하고 잘못하면 번번이 강탈을 자행하였다. (…) 일찍이 들으니 오랑캐를 대우하는 방도는 외부를 단속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내부를 닦는데 있으며, 변방의 방어에 있지 아니하고 조정에 있으며, 무력에 있지 아니하고 기강에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을 여기서 증험하였다. (…) 지금 우리나라는 그쪽에서 오면 어루만져서 선물을 넉넉히 주며 대우를 후하게 하는데도 그들이 보통으로 여기고 진위를 마구 속이며, 곳곳에서 머물러 시일을 지체하여 변명을 갖가지로 부리고 있으니, 그놈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문득 화를 낸다.
신숙주, 《해동제국기》 〈서문〉
집현전에서 같이 연구하던 성삼문과는 친하게 지냈으며 안평대군과도 두루 친하게 지냈다.[17] 단종이 즉위하여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가게 되면서 완전히 수양대군과 가까워진다. 정확히 말하면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사신으로 명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신숙주도 동행시키려 했다. 신숙주는 여기에 따르면서 했던 말이 "장부가 어찌 아녀자의 품에서 편히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마침 수양대군과 신숙주 두 사람은 태종 17년(1417)생 동갑내기다. 세조는 신숙주가 정승이 된 후에도 집현전 학사 시절의 호칭인 '신 수찬'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서장관으로 따라나섰을 때의 호칭인 '신 서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신숙주, 《해동제국기》 〈서문〉
다만 계유정난 전후에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애매한 점이 많아 알 수가 없다.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의 위치는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언급할 정도로 큰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 신숙주가 다른 정파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이 많았기에 애초에 쿠데타 전에는 세조가 쿠데타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고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로는 완전히 수양대군의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단종의 양위를 주도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고 자신을 도운 좌익공신 중 1등공신으로 넣었다.
이런 행적 때문에 사육신들도 단종복위운동 중에 한명회, 권람, 윤사로와 더불어 신숙주를 처단 1순위로 올려놓았다. 성삼문은 신숙주만 따로 언급하면서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언급했다(세조실록 세조 2년1456 6월 2일). 변절자로 낙인 찍힌 신숙주를 윤영손이 처단하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제지하고 거사를 연기하기로 했다.
세조 2년(1456) 성삼문, 박팽년 등이 꾸민 단종복위계획이 발각되자 정승들과 함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다.
성종 6년(1475)에 59세로 생을 마감할 때 유언으로 "저승 가서 읽을 책 몇 권을 같이 관에 넣어 달라."라고 했다. 역시 자타공인의 책벌레다운 유언이다. 마지막에 "인생이란 마침내 이에 그치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제법 적절한 때에 죽음을 맞아 한명회처럼 부관참시되는 안 당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행운아였다. 세조의 공신 그룹 중에서 성종 7년(1476)에 죽은 홍윤성과 함께 정말로 퇴장 타이밍이 적절했는데, 같은 원상이었던 성종 1년(1470)에 죽은 구치관처럼 막 좋을 때에 죽은 것도 아니고, 성종 18년(1487)에 죽은 한명회처럼 폐비 윤씨가 죽는 것도 보지 않았음이 행운이었다. 그가 죽은 성종 6년(1475)은 성종이 친정하기 딱 1년 전이었다. 특히 신숙주 사후 3년 뒤(1478)에 죽은 정인지마저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음을 생각하면... 거기다 홍윤성은 신숙주보다 1년 더 살긴 했지만 정작 죽을 때 나이는 갓 50대에 접어든 나이였다.
3. 평가
3.1. 조선시대의 평가
《조선왕조실록》의 신숙주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당대나 적어도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평가가 좋은 편이다. 그러나 그 역시 신숙주의 학문적 역량이나 능력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김종직도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18] 이는 15세기까지 사림들은 신숙주를 그리 나쁘게만 보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인다.김종직이 대놓고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만일 진짜로 그런 말을 했다면 성종의 얼굴이 흙빛이 되는 게 아니라 김종직의 눈에 흙이 덮였을 것이다.[19] 이후 사림이 득세하면서 사육신이 복권되는 과정에서 신숙주의 평가는 점점 낮아져서 헌종은 "신숙주(申叔舟)는 어찌하여 육신(六臣)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3.2. 부정적 평가
역사적으로도 전향이 충격적이었는지 오늘날에도 변절자의 대명사처럼 회자된다. 세조에게 협력하고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나머지 집현전 선배 최항, 정창손처럼 세조의 정변을 도운 집현전 선배들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신숙주보다는 더욱 명확한 배신자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세간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좀더 가혹하다. 그만큼 신숙주가 다른 변절자들보다 인지도가 큰데다 능력과 성품에 사람들이 걸었던 기대와 믿음이 컸다는 반증일지도. 정인지, 최항, 정창손은 다 선배들로 세종 말엽에 이미 고위직 관료들이었고, 대체로 그보다 낮은 관료들이었던 신숙주의 동기급들인 사육신들은 단종을 복위하다가 사망했으나, 신숙주만 수양대군 편에 붙었으니 비판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신숙주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평가해야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그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군주를 배신했다는 점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문종은 세종의 적자이며, 그 아들인 단종은 세종의 적장손으로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다.[20]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반정이나 역성혁명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치명적인 폭정이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이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인물의 왕위를 빼앗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21]
즉,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는 명분이 없으며 당시의 유교적 관점으로는 물론, 유교 사회가 아닌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괜히 후대 조선 왕들이 중종을 시작으로 단종에 대해 무덤 수리 등을 하는 등으로 여론이 형성되다가 결국 단종 복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자 숙종이 총대를 메고 단종을 정식으로 복권한 것이 아니다.
신숙주 본인도 배웠으며, 신숙주가 속한 조선에서 통치 이념과 사상으로 삼은 유교, 성리학의 관점에서 단종 폐위와 세조 집권은 옹호하기에 쉽지 않다. 신숙주와 세조, 한명회가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을 동안과 죽은 이후 한동안은 단종에 대해 사림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이후 사림에서 강대한 위세를 떨치던 노론에서 단종 복권을 적극적으로 성토하며 행동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22] 물론 사육신들도 복권됐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다.[23]
만약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에 대해 세조 측에게 일말이라도 이해의 여지나 명분거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림들은 자칫 왕의 노여움을 살 수 있고 조선 왕실의 정통성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단종 복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의 여지나 명분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정변의 주요 핑계거리인 실정과 폭정도 없었다. 폭정과 실정으로 명분이 있는 연산군과 광해군의 폐위와 달리 단종은 17살에 살해당해서 저런 폭정이나 실정을 펼칠 기회조차 전혀 없었다.
신숙주에 대한 옹호가 도를 넘어 신숙주에 대해 그가 없었더라면 더욱 암담한 시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발전은 한 사람에게 의존해서 될 사안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신숙주는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지 않았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앉은 사람도 아니었다. 세조의 공신이자 영의정 벼슬에 올랐다는 점, 그리고 신숙주의 업적들과 일화들에 무작정 함몰돼서 그런 오해가 자주 일어나는데 세조는 그렇게 막중한 권한과 역할을 신숙주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애초에 세조를 도운 공신들은 한명회, 권람 등 계유정난을 같이 일으킨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신숙주가 한명회와 더불어 세조의 공신들 중 거두이긴 하다만 세조의 성향을 감안하면 당연히 신숙주에게 그렇게나 많은 권한과 역할을 줄 리가 없다.
아무리 신숙주의 업적이 많다고 한들 결국 그의 변절은 유학하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길과는 명백히 떨어져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며, 무엇보다 본인이 은혜를 입은 왕의 손자이자 자신이 충성해야 할 주군인 왕의 권위를 명분없이 무력으로 제압하고 그를 허수아비로 만든 반정세력에 가담하고 나아가 그 왕을 폐위하고 사사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동조한 사실은 성리학적 질서가 통하지 않는 현대에 와서도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24]
신숙주에 대한 배신자라는 평가는 배신과 배신자라는 단어의 정의가 재정의되거나 바뀌지 않는 이상은 사라질 가능성이 없다. 오히려 신숙주에 대해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현대사회에서도 바뀌지 않아서 신숙주의 능력에 대해서는 재조명하고 인정하면서도 신숙주가 배신을 한 것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신숙주가 유능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고 신숙주가 배신한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이며 공으로 과를 덮을 수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신숙주는 그저 명재상과 부패한 관료라는 양면을 모두 가진 황희와 마찬가지로 명재상이라는 긍정적인 면모와 배신자라는 부정적인 면모를 모두 가진 사람인 것이다.
3.3. 긍정적 평가
후대에 지조 면에서 성삼문과 비교되었지만[25] 업적은 뛰어나다. 능력과 업적만 놓고보면 정도전, 조준,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의 반열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 조선의 많은 재상들 중에서 신숙주만큼 다재다능했던 인물도 드물다.성삼문과 함께 한자음 정리에 관한 질의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을 여러 번 찾아가기도 했으며[26]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에 조예가 있었다.[27] 그리고 그 나라들의 문화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겨 문화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또한 외교적 수완과 감각도 탁월해서 앞에서 언급했듯 쓰시마 섬에 갔을 때에는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고 대여진 외교도 담당하여 여진족과 반목이 있을 때 조선의 대표로 이를 조정하고 여진 추장들을 회합하는 역할도 했다. 이처럼 풍부한 국제적 경험 덕분인듯, 조선 역사상 외교를 관장하는 예조판서 직을 제일 자주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가본 것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조선 후기까지도 조선의 일본 이해에 기본적인 서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만큼 관련 분야에서는 당대 조선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는다.
《국조보감》, 《동국통감》의 편찬에도 참여했고 농업 작물 기술을 적은 《농산축목서》를 저술했다.
그리고 신숙주는 당대에, 특히 유학자로서는 흔치 않게 민간 상업의 진흥을 지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성종실록을 보면 화폐의 유통과 이를 위한 시장의 발전에 대해 길게 논한 장면이 나온다. 요약하면 "화폐 유통을 위해서는 큰 도시나 백성의 유동성이 많은 지방에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해서 백성들의 상업활동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강제로 시키는 것보다 민심의 동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28] 이게 별것 아닌 이야기인것 같지만 신숙주의 이 의견은 조선에서 화폐 유통이 되지 않았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으며,[29] 농업이 근본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민간상업의 진흥을 지지했다는 것은 사회 구조 자체를 보는 눈이 달랐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제법 시대를 앞서간 면모도 있었다는 소리다. 다만 신숙주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친구 성삼문이나 후대의 조광조 같은 인물처럼 모든 것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3번째 그림인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
虜中霜落塞垣寒 오랑캐 땅에 서리 내려 변방이 차가울사
鐵騎縱橫百里間 철기가 백리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누나
夜戰未休天欲曉 밤 싸움 그치지 않았는데 날 밝으려 하고
臥看星斗正闌干 누워 보니 북두성이 비끼네
鐵騎縱橫百里間 철기가 백리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누나
夜戰未休天欲曉 밤 싸움 그치지 않았는데 날 밝으려 하고
臥看星斗正闌干 누워 보니 북두성이 비끼네
군사 전략가의 능력도 갖추어서 세조 6년(1460) 군사 8천을 이끌고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귀환했다. 이 원정이 있었던 세조 6년(1460)의 간지가 경진년이라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고 부른다. 이때 적의 야습을 받자 본진에 태연히 누워서 쳐들어온 적을 걱정하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이때 신숙주 부대는 추장급 여진족 90여 명과 일반인 여진족 430여 명을 붙잡거나 살해했으며 집 9백여 채를 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전과 규모로 보면 세종 때 최윤덕의 파저강 정벌에 버금가는 큰 전과였다. 사실 파저강 정벌보다 더 큰 승리이기도 했는데 파저강 정벌 때는 군사 2만 5천명을 데리고 가서 170여 명을 죽였지만 이때는 1/4의 병력을 데리고 가고도 2배가 훨씬 넘는 성과를 올렸다. 성공적인 북정 후에는 북방 방비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북정 기록인 《북정록》과 세조가 지은 병법서인 《병장설》 편찬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거기에 함선에 대한 안목도 뛰어나서 성종 실록에는 조선 함선과 일본 함선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논하고 있는 장면도 있을 정도다. 자세한 내용은 판옥선 참고.
이러한 여러 가지 공로로 세조는 물론 예종 대에는 남이의 옥사를 해결했다는 이유로 공신에 또 올랐고,[30] 예종이 급사하자 가장 먼저 나서서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와 교섭, 성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31] 세조는 그를 당태종의 명신인 위징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위징은 당 태종에게도 거침없는 간언을 잘 했지만, 신숙주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예스맨에 가까웠다고 할까. 성종 실록의 사관은 신숙주의 이런 점을 단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 당 태종의 신하들에 비유하면 신숙주는 위징보다는 방현령과 비슷한 점이 많다.[32]
어쨌든 신숙주의 업적을 보면 행정, 군사, 외교, 정치적 감각까지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당대의 엄친아이다. 하지만 배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런 엄친아스런 면모는 대중에 잘 알려진 편이 아니다.
또한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의하면 성종에게 죽기 직전에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소서."라고 진언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징비록의 본문이 시작되는 바로 첫머리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는 류성룡이 "일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했어야 한다"는 뜻으로 삽입한 기록이지만, 당시 신숙주 정도로 일본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던 일본 전문가가 드물었다는 이야기다. 징비록에만 기록된 말이 아니고 당연히 실록에도 남아있는 기록이다. 성종은 신숙주의 유언을 새겨 들어서 계속 사신을 보내서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당시 오닌의 난으로 일본에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신숙주 사망 직후부터 일본과 사신을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된다.[33] 이때 일본과의 연락이 끊긴 탓에 결국 100여 년 후 전국시대가 끝난 일본 측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에 혼란을 겪다가 임진왜란 초기 대응에 실패했으니 신숙주의 충고는 꽤 통찰력이 있는 것이었다.
징비록이 일본에도 널리 퍼졌기 때문인지 이 말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서, 뒷날 에도 막부의 유학자이자 중신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숙종 37년(1711) 조선 통신사 정사로 파견된 조태억(趙泰億)에게 "신숙주 공의 그 말씀은 참으로 대신으로서 나라를 걱정한 말씀이라 하겠소."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른 훈구파 대신들이 문제[34]가 많은 거에 비하여 최항, 정창손처럼 딱히 비리를 저지르지도 않고 평상시엔 나름 검소하게 생활한 듯하다.
4. 가족관계
신숙주는 태종 17년(1417) 6월 20일에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에서 아버지 신장과 어머니 나주 정씨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태종의 과거 동기이자 공조참의를 지낸 신포시, 할머니는 경주 김씨로 김충한의 딸이며 증조부는 신덕린, 증조모는 정신호의 딸이며 고조부는 신사경이다.부인은 무송 윤씨인데 윤경연의 딸이자 윤회의 손녀, 윤소종의 증손녀이다.
- 장남 신주 :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아내가 한명회의 딸이었다.
- 차남 신면 : 신숙주가 가장 아낀 아들이었지만 이시애의 난 때 함경도 관찰사로 함경도에 파견되었는데 반란군에 악착같이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실록을 보면 "승지가 된 지 5년이 되었어도 실수가 없었으며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자못 자상하고 명확하였다." 하는 평을 받는 것을 보아 제법 촉망받는 인재였던 모양이다. 이때 신숙주는 세조의 의심 겸 견제 조치로 옥에 갇힌 참이라 아들의 죽음을 옥중에서 들어야 했다. 아들로 신용개가 있다.
- 3남 신찬
- 4남 신정 : 작은형 신찬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였고 큰형 신주의 아들인 신종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판이 돌자 이를 시기해서 조카를 원수처럼 미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 본인 역시 신정을 두고 "우리 집안 말아먹을 놈은 바로 저놈이다"라고 고개를 내저었다고 하며 실록에서도 막장이라고 인증하고 있을 정도이나 아버지에게는 효자였다는 기록도 있다. 성종의 옥새를 위조하여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아 죽었는데 본인이 막장이기도 했지만 훈구파 영수의 자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성종의 훈구파 견제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 5남 신준
- 6남 신부
- 7남 신형
- 8남 신필
- 손자 신광한 : 고전에서 자주 회자되는 《기재기이》를 저술했으며 폐비 윤씨의 외당숙이다.
5. 초상화
대한민국의 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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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 신숙주 초상 | 사천 흥사리 매향비 |
신숙주 초상화 | 얼굴 확대 |
1977년 11월 15일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 관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신숙주의 아들들과 같은 세대인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에 의하면 신숙주가 젊은 시절에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홍경손이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넣어서 '글씨는 누구처럼, 활쏘기는 누구처럼' 이런 식으로 나가는 시를 한 수 지었는데, 이 시를 보면 "눈매는 신숙주처럼 할 것이며"라는 구절이 있다. 초상화를 보면 눈매가 좀 특이하게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숙주의 눈매가 꽤 비범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6. 실제와 달리 알려진 이야기와 기록들
신숙주의 변절을 비판하는 수많은 민간 설화와 글들은 세조 이후의 왕들이 모두 세조의 후손인지라 세조를 대놓고 비판할 수는 없기에 대신 신숙주를 타겟으로 삼은 측면이 없잖아 있다. 다만 이 설화들이 실제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졌는지는 불명이다. 진짜 민간 설화 중에서 조선 시대 기원이 밝혀진 것은 없다. 사림들이 단종을 동정했다는 증거만 많을 뿐[35].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자를 까기 위해 역사 속의 변절자 캐릭터 신숙주를 가져와서 비판하는 소설들이 나왔다. 오늘날 알려진 신숙주의 변절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남효온의 '육신전'이나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알려진 설화들에 기초한 것들이 많다.[36]- 성삼문과 함께 "세손(단종)을 잘 부탁한다"고 한 세종대왕의 당부를 받았다는 말이 성삼문 문서에도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고명 절차는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정식 절차이고, 당하관이었던 성삼문과 신숙주는 고명 운운하기에는 직급이 너무 낮으며[37], 왕이 죽으면서 세자인 문종이 아니라 손자를 부탁하는 것은 지극히 불길한 행동이다. [38]
- 쉬기 쉬운 녹두나물을 신숙주의 지조없음을 본떠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지만 녹두나물이 숙주나물이라 불린 기록은 적어도 일제강점기 이후다. 맹꽁이 서당 보물섬 연재분에서도 이렇게 나왔던 것으로 보아 의외로 오랫동안 이렇게 알려진듯.
- 사육신이 꾸미던 음모가 발각되어 국문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집에 돌아온 신숙주에게 아내가 사육신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세조실록(세조 2년1456 1월 23일)을 보면 사육신 사건 당시 신숙주의 아내는 그로부터 몇 달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박종화의 단편소설 〈목 매이는 여인〉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광수의 단종애사에 채용되어 정설처럼 알려졌다.
- 김택영의 《한사경》에 신숙주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미모에 끌려 노비로 달라고 청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것을 이광수가 소설 단종애사에 실으면서 유명해졌다. 《한사경(韓史綮)》은 분명 역사책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택영[39]은 대한제국 시대의 인물로 이 책은 저자 본인도 역사서라고 하기는 애매하다고 '사(史)'로 끝내는 대신에 '경'을 더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의도가 굉장히 강하게 드러나는데[40] 이중 하나가 세조의 왕위 찬탈 비판이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단종조차 죽였던 세조가 정순왕후를 노비로 만들려는 시도조차 하지않은걸 보면 오류가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실제 있었던 사실로 보기 어렵다.
- 신숙주의 남동생 신말주(申末舟: 1429~1503)는 형과는 달리 단종에 대하여 충성을 내보이며 낙향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말주는 성종 때까지 벼슬을 하였으며, 세조 12년(1466)에는 신숙주가 영의정에 오를 때 대사간[41]이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1990년에 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이 신말주가 세조의 즉위를 반대하여 상소를 한다. 그런 연유로 세조가 형은 공신, 동생은 역신이냐면서 불쾌해하나 신숙주를 봐서 처벌은 불문에 붙인다.
7. 여담
- 신숙주의 호인 '보한재(保閑齋)'는 한명회의 호인 '압구정'과 비슷하게 별장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보한재라는 별장 역시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처럼 한강변에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이것은 신숙주가 단종 즉위년(1452)에 친분이 있던 명나라 학자 예겸(倪謙)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는데 동쪽으로는 노량진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양화진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별장 이름을 보한(保閑: 한가로움을 보전한다)이라고 지은 이유는 '명예를 멀리하고 한가로이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뜻이라고 예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별장 이름도 한명회가 '압구정'이라고 이름한 의미와 비슷한데 사실은 한명회의 압구정보다 신숙주의 보한재가 더 먼저 지어졌다.
- 신숙주 집안은 주벽이 참 심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신장도 당대 제일의 술꾼이어서, 죽었을 때 당대의 대신 허조가 "이 훌륭한 사람을 술이 데려갔구나"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손자로써 중종 때 정승을 지낸 신용개도 술꾼으로 유명했다. 신숙주는 술을 매우 좋아하는 술고래였는데 술버릇도 특이해서 세종 시절 곤룡포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아무리 술에 취해도 자고 일어나면 꼭 책을 읽었다고 한다. 또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세조가 술기운에 신숙주의 팔을 꺾었고, 세조가 똑같이 해 보라 하여 세조의 팔을 세게 꺾었다. 세조는 신숙주가 취기를 빙자하여 일부러 팔을 세게 꺾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날 밤, 신숙주가 밤에도 책을 읽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아는 한명회는 그가 책을 읽지 못하도록 촛대를 치웠고, 신숙주는 그냥 잤다. 세조는 신숙주가 밤에 책을 읽고 있는지 보러 갔고, 신숙주가 그냥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세조는 신숙주가 정말 취해서 실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숙주는 한명회 덕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사랑의 학교에서 '벌주와 팔씨름'으로 각색되어 소개되었다.
- 야사 《해동야언》에 따르면 신숙주가 우의정에서 영의정이 되고 구치관이 새로 우의정이 되자 세조가 둘을 불러서 술 자리를 가졌다. 세조가 "오늘 두 분 정승 분들께 물어볼 말이 있는데, 잘 대답하면 좋고 못 대답하면 벌주를 내리겠소"이라고 운을 떼고 '신 정승'이라고 불렀다. 신숙주가 대답하자 "나는 신(新: 새 신) 정승을 불렀지 신숙주 대감을 부른 것이 아니오"라며 신숙주에게 벌주를 내렸고, 다음에는 '구 정승'을 불렀는데 당연히 구치관이 대답하자 이번에 세조는 "나는 구(舊: 옛 구) 정승을 불렀지 구치관 대감을 부른 게 아니오"이라며 구치관에게 벌주를 메겼다. 다시 한번 '신 정승'을 부르자 이번에는 구치관이 대답했는데 세조 왈, 이번에 나는 성으로 불렀거든?"이라며 구치관에게 벌주를 주었다. 세조가 '구 정승'이라 부르자 신숙주와 구치관 둘 다 대답을 안 했는데 세조는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않다니 불경하다! 둘 다 벌주를 마셔라!"라고 하며 두 정승 모두에게 술을 먹여버렸다. 간단히 말해 신숙주, 구치관의 성과 신(新), 구(舊)가 동음이의어인 것을 이용한 세조의 말장난이었다. 군신 간의 훈훈한 장면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세조가 유치해보이기도 하는 일화다. 심지어 판본 중에는 이것과 위의 저 팔 꺾기 일화를 이어 붙여서 이것 때문에 열이 받은 신숙주가 술에 취한 척하고 세조의 팔을 꺾어버렸다는 스토리가 있다.
- 《대동기문속》 한 전설에 의하면 신숙주에게는 '청의동자'라는 수호령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청의동자는 신숙주가 과거를 보던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신숙주를 수호했는데, 신숙주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한다든가 신변을 보호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귀신인데도 보통 사람처럼 밥을 먹었는데, 식사를 하면 먹는 소리는 나도 음식은 전혀 줄지 않았다고 한다. 뒷날 신숙주가 죽을 때 수명이 다해서 따라 소멸했는데 신숙주가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내 제사상에 청의동자의 상까지 차리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숙주의 무덤 옆에 청의동자의 자그마한 묘를 하나 더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이 동자의 모습은 신숙주만 볼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의 기록에서 신숙주의 지조없음을 비난하기 위해 사육신을 국문할 때 세조 옆에 서있다가 성삼문이 "이 변절자야!"라고 일갈하자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해서 세조가 옆으로 숨게 해주었다는 대목이 있다. 후일 생육신 김시습의 "이놈! 선왕의 신신당부를 어긴 이 못난 놈!"이라는 호통에도 아무 대꾸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는 일화도 있다.
- 경기도 의정부시에 그의 묘가 있는데, 2006년에 이런 일#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 표지판은 제대로 세워 놓았다. 참고로 안내판이 있는 저 지점에서 신숙주 묘를 찾아가려면 2.2km이라는 거리가 말해주듯이 한참 들어가야 한다. 신숙주 묘역은 영의정까지 지냈던 인물답게 상당히 넓고 봉분 크기도 큰 편이다. 부인 윤씨와 나란히 묻혀 있으며 신숙주 부부의 묘역 위편에 일찍 죽은 장남 신주의 묘가 있다. 묘역 주변에 신숙주의 후손들이 살고 있어서 묘역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편이다.
- 의외로 호방하고 태평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수양대군의 회유를 받아들이면서 했던 발언 등 신숙주의 성격에 대해 "활달했고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한 것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거침이 없었던 인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룰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元) 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倭寇)를 지리산(智異山)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威化島)에서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룰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元) 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倭寇)를 지리산(智異山)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威化島)에서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8. 대중매체
사극에서는 주로 줏대없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변절자라는 평가는 둘째치고 역사적으로 보면 행정, 외교, 군사와 정치 감각도 뛰어났던 만능 관료였지만 정치 모략이 주가 되는 사극에서는 동시대에 권세가이자 세조의 오른팔이었던 한명회 때문에 많이 묻히는 분위기다. 이 시대를 다룬 사극들이 계유정난이나 성종 시대의 궁중 암투에 비중을 두고 있는 나머지 세조의 치세를 상세히 묘사하지 않아서 신숙주의 활약상이 나올 기회가 없었다.- 《단종애사》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등장한다. 세종의 고명을 받고도 단종을 배신하고 수양대군 편에 붙은 것만으로도 죽일 놈인데 안평대군을 죽이는 것도, 단종을 귀양보내는 것도, 마지막에 사약을 보내는 것까지 죄다 신숙주가 앞장서서 실행하는 것으로 나온다. 작중 사육신도 다른 놈들보다 신숙주를 제일 먼저 쳐죽여야 한다고 분개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단종애사》의 다른 대목은 대부분 근거가 없는데 신숙주를 먼저 죽여야 한다는 것은 성삼문의 실제 증언이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맨 위의 초상화를 참고하기는 했는데(본문에도 신숙주가 초상화와 비슷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컷이 있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상당히 냉정해 보이는 인상으로 묘사되었다.
-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배우 이효정[42]이 연기했다. 주연급 중 하나인 신면의 아버지로서 기존의 변절자 이미지가 아닌 능력과 야심을 겸비한 인물로 그려진다. 수양대군 편을 든 것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현전을 박차고 나와 조선을 경영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아들에게 "나는 이 나라를 훌륭하게 경영할 자신이 있다. 나는 수양대군을 성군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하는 장면은 나름대로 멋지다. 이제까지의 사극 속 신숙주처럼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권력 지향적이고 냉정한 기회주의자로 묘사한다. 다만 수양대군에게 그런 신숙주의 냉정함과 야심은 좋은 도구일 뿐이다.("대나무는 곧지만 속이 비어 있다.") 신숙주의 후손들이 단체로 〈공주의 남자〉에 묘사된 신숙주의 모습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패소했다.
-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성삼문이나 박팽년은 나오는데 이들의 집현전 동료이자 훈민정음 보급에도 일익을 담당한 신숙주가 나오지 않는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시청자들이 많았는데, 신숙주는 원작 소설에서 일본에 가 있는 설정으로 언급만 되고 등장하지 않는다.
- 2013년 개봉한 영화 〈관상〉에서는 주인공인 관상가 김내경이 문종의 명령을 받아 주변 대신들의 관상을 평가할 때 등장했는데 이 때 신숙주에게 내린 평가는 "머리가 좋아서 관직에 오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듯하고 지금으로서는 권력보다는 아녀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이다.
- 대체역사물에서는 언어학에 천재적이었다는 점을 살려, 매우 높은 확률로 인간 번역기가 된다.
8.1. 대왕 세종
자세한 내용은 신숙주(대왕 세종) 문서 참고하십시오.9. 관련 문서
[1] 율리우스력 8월 2일[A] 율리우스력 7월 23일[3] 율리우스력 6월 17일[4] 율리우스력 5월 31일[5] 율리우스력 12월 4일[A] [7] 부인은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장녀로,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의 언니이다.[8] 태종의 11남 후령군의 사위.[9] 세조의 후궁.[10] 다만 장원 급제를 했다면 33년으로 확 준다. 장원 급제자는 종6품에 제수되기 때문이다. 사실 종9품에 제수되는 것도 과거 급제자 33인 중 최하위 등급을 받은 이들일 뿐 나머지는 등수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종9품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여기다가 조선 시대 관리가 되는 법은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버지가 고위 관직자라면 하급 관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다만 과거 급제를 하지 못한다면 청요직에 갈 수 없었고 당상관이 되는 길도 매우 어려웠다. (3년에 1번씩 보는 정규 시험 외에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과거를 열어서 33명씩을 선발하였다. 이 안에 들지 못한 사람이 왕의 선택을 받아서 당상관이 되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설혹 선택받아도 대간들에게 비판을 받아서 철회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하급 관리로 먼저 관리 생활을 시작하고 틈틈이 과거를 준비해서 시험 보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이렇게 급제하면 하급 관리로서의 경력도 인정받아서 곧바로 종6품 이상으로 승진이 가능하였다. (조선은 정3품 당하관까지 일정 근무 일수를 채우고 근무 평가에 따라서 품계가 승진하는 방식으로 체제가 조직되어 있었다.)[11] 생각해보면 세종은 더 늦게까지 안 자고 있었다는 소리다. 실제로 세종은 신숙주가 있는 걸 알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일부러 남아 있었다는 말도 있다.[12] 창제 작업에 직접 관련한 것은 아니다. 여러 이유로 중국에서 사신으로 갈 때 세종이 부탁한 자료를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훈민정음은 세종과 가족이 비밀리에 만든 프로젝트이고 신하들은 아무도 몰랐었다. 쉽게 말해 훈민정음은 세종과 그 가족이 만든 문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과 훈민정음 문서 참조.[13] 하지만 임 박사의 의견에 반론하자면 자기 이름을 공에 써서 차고 논 아이들을 대범하게 넘어가 주고 궁궐 구경하다가 잡히거나 심지어 자기 침전에 흘러들어온 사람까지 죄를 묻지 않고 방면해 준 태종의 일화나 신숙주가 술김에 왕에게 관절기(…)를 걸고도 넘어간 세조의 일화가 있었다. 앞의 예시들도 엄격한 유교 왕권 시대에 진지하게 걸고 넘어간다면 얼마든지 엄벌에 처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제아무리 옛날 조선시대라고 해도 그 때도 결국 사람이 사는 시대였다. 당시 왕이었던 세종이 기특한 마음에 해준 배려인데 그걸로 처벌하면 그 자체가 넌센스인지라 설령 정말 곤룡포를 덮었다 해도 그걸로 다짜고짜 사형을 하니마니 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4] 더욱이 이 임산부는 일본에 끌려갔다가 온 여자였다.[15] 다만 술 이야기는 조선 후기 통신사들의 《사행록》에도 왕왕 등장한다. 일본 측이 술을 보내왔는데 향기롭고 맛있었다거나, 무슨 술이 유명하다거나, 어느 마을을 지났는데 맛 좋은 술이 나는 곳으로 전국에 이름이 났다는 등등.[16]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천하창세〉에서 아이템으로 등장한 적도 있다. 다만 명나라 아이템으로 등장했는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는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해외 명품을 명나라산/남만(유럽)산 오직 두 종류로만 표기한다.[17] 단적으로 안평대군이 꾼 꿈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는 신숙주의 찬이 붙어 있다.[18] 서문을 써줬다는건 곧 "나는 이 사람이 쓴 이거 좋게 평가함"(사실상 이 사람의 학문적 성취가 좋다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신숙주의 손자인 신용개는 김종직의 문인으로도 들어간다.[19] 실제로 김종직이 조의제문으로 단종을 옹호했다 부관참시당했다.[20] 원손(1441~48) - 세손(1448~50) - 세자(1450~52) - 왕(1452~55)을 차례로 거쳤다. 정통성과는 관련 없지만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1455~57)이기도 했다.[21] "정통성이라는 것이 대수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정치에서 명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실적으로 덮을 수 없는 것이 명분이며, 실적을 쌓기 역시 궁극적으로는 권력을 행사하고 차지하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분권화되고 복잡해진 정치체제에서도 명분과 적법성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하물며 조선과 같이 왕의 정통성이 핵심인 국가에서 이를 뒤집어 엎었다는 것은 명분의 측면에서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이는 곧 해당 행위가 용납되기 어려움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유교, 특히나 성리학을 따르던 조선은 이 정통성이 극도로 중요시되던 나라였다.[22] 다만 노론의 뿌리인 서인은 과거 훈구파 집안 출신들이 많거나 훈구파를 흡수하여 생긴 붕당이다.[23] 신숙주의 후손이자 우의정까지 한 신익상도 본래 송시열과 꽤 가까웠지만 신익상의 조부인 신응구는 송시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신익상 또한 경신환국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소론 쪽으로 가담했고, 이후 송시열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24] 게다가 애초에 계유정난은 사전에 고변자 한 명만 나왔어도 시도조차 못하고 진압될 가능성이 높았던, 역사적으로 극히 드물게 제대로 된 명분도 세력도 없이 그냥 다 죽여버리는 방식으로 성공한 반란이었다.[25]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 신숙주의 시호는 문충(文忠). 시호까지도 정반대다. 허나 뜻은 같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26] 이걸 훈민정음 창제와 엮는 경우가 차고 넘치는데, 이때는 이미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1년도 지난 뒤의 이야기다.[27] 신숙주가 중국어를 배운 것은 실록과 다른 기록에서 누차 확인되어 확실하고 보한재집 행장에는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4개 국어가 가능했다는 설명이 있으나 일상 회화 수준이 아닌 고급 어휘를 제대로 구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예겸(倪謙) 같은 중국 사신접대나 황찬을 찾을 때 역관을 대동했고, 문종은 대놓고 신숙주가 한어(중국어)에 능하지는 않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행장에서조차 능통하게 대화했다는 기술 대신 가끔 역관 없을 때 직접 대화를 나눴다는 기술만 존재한다.[28] 조선의 화폐 유통은 시장 경제의 미발달로 인해 태종, 세종대왕은 물론 뒷날의 왕이나 재상들도 번번이 실패했다. 화폐 유통은 뒷날 숙종 때에나 정착된다.[29] 그 세종대왕조차 이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무리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가 피본 적이 있었다.[30] 하지만 남이의 옥사는 신숙주나 한명회가 자신들을 위해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 씌어 사형시킨 것이다. 신숙주는 예종 즉위년(1468)에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봉해졌다. 이를 보면 적어도 그가 인격적으로 본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다만, 남이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남이 본인이 처신을 잘못해서 자초한 점이 훨씬 크다.[31] 이 때문인지 신숙주는 종묘에 '직속 주군'이란 이미지가 강한 세조가 아닌 성종과 함께 배향되어있다.[32] 둘 다 행정능력이 탁월하고 주군의 정권 장악에 큰 공을 세운 브레인이자 명재상이었으며, 자기가 모셨던 주군에게 순종적으로 처신해서 주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간혹 사소한 일로 면직된 적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33] 사신이 대마도까지 갔다가 대마도에서 지금 일본 내부는 난세라 제대로 된 중앙정부도 없고, 갔다가는 괜히 험한 꼴만 당할거란 충고를 듣고 그대로 돌아옴.[34] 한명회나 홍윤성같이 부패한 데다 인간성에 문제가 있거나, 학자 출신에 똑똑하다 평가받는 정인지마저 돈놀이나 하고 있었다.[35] 소위 '쫓겨난 왕자'에 대한 동정은 이 동정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를 떠나서 복잡하다. 심지어 전두환이 백담사에 갔을 때도 불쌍하다는 여론이 돌았던 것이 현실이라....[36] 그런데 단종애사는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쓴 다음에 발표한 소설이라서, 친일파 비판 그런거 없이 그냥 재미있으라고 쓴 것일 수도 있다. 단종애사와 역시 이광수가 쓴 소설 세조대왕만 놓고 비교하면 친일을 하면서 바뀐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에 민족개존론이 들어가면 해석이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덤으로 같은 친일파인 김동인은 세조를 영웅으로 묘사하는 대수양을 썼다.[37] 정상적인 국가의 고명절차이기 때문에 고명은 최고위직을 대상으로 한다. 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이 모두 당시 기준으로 정승이나 정승 후보군인 찬성인 것이 이 때문. 또한 정승이나 찬성이 아니라면 고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참찬이나 판서뿐이다.[38] 문종은 단명했기 때문에 병약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과로와 병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일 뿐 체격도 크고 건장한 사내였다. 세종 본인도 당뇨와 격무에 시달리면서 당시 기준으론 살만큼 충분히 살았는데, 병치레를 조금 할지언정 아직 젊은 아들이 금방 죽을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다. 게다가 문종은 즉위 전인 세자 시절부터 7년 이상을 국정을 총괄했던, 사실상 이미 군주였다. 또한 문종은 적장자로서 정통성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그 아들인 단종은 출생 당시부터 왕의 세손으로서 완벽한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즉, 세종이 죽을 당시 그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한창때고 능력도 뛰어난 적장자가 차기 왕으로 오를 예정이고,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적장자인 손주가 왕에 오를 예정이라 정통성에서 그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고, 나라도 잘 굴러가고 있는 시점이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의례적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고명 절차를 밟은 것은 실록에 남아있는 사실이나, 멀쩡히 잘 살아있는 아들을 내버려두고 신하들에게 손주를 부탁한다고 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아무리 뛰어난 신하라도, 단종에게 있어 태종이 탄탄하게 다져준 왕권을 누리고 있는 아버지 문종보다 든든한 보호자가 있을까?[39] 김택영의 역사관이나 이전 역사서에서 보이는 한계 같은 것은 일단 넘어가자. 다만 일부 김택영 관련 서적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박은식, 신채호와 함께 구한 말 3대 역사가' 운운은 완벽한 과장이다. 이 사람 책에서는 일본의 근대 역사서를 생각없이 번역한 바람에 우리 나라 역사를 쓰면서 임나일본부를 긍정한 부분까지 존재한다.[40] 당시 중국에 망명 중이었던 김택영은 심지어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것을 고려에 대한 찬탈이라고 표현했다. 21세기에서 보는 제3자적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 때는 그 이성계의 후예 조선 왕가가 아직 멀쩡히 유지되던 시기이므로 당연히 용납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이 때문에 김택영은 당시 한국 유림에게서 사적(史賊)이라고 불리면서 매장당한다.[41] 세조실록 세조 12년(1466) 1월 15일자 첫 번째 기사#[42]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윤임 역,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