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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03:03:20

신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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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태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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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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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의정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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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정난공신(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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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11월 8일 단종에 의해 책록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
권람 김효성 박종우 박중손
이계전 이사철 이유 정인지
최항 한명회 한확 홍달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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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협책정난공신 (2등)
곽연성 권준 류수 류하
봉석주 신숙주 양정 엄자치
윤사윤 전균 홍윤성
수충정난공신 (3등)
강곤 권경 권언 김처의
류사 류서 류자환 설계조
성삼문 송익손 안경손 이몽가
이예장 이흥상 임자번 최윤
한명진 한서구 홍순로 홍순손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좌익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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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9월 5일 세조에 의해 책록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1등)
권람 신숙주 윤사로 이곤
한명회1 한확 이증2
수충경절좌익공신 (2등)
강맹경 권반 양정3 윤암
이계린 이계전 이사철 전균
정인지1 정창손1, 4 최항 홍달손
윤형5
추충좌익공신 (3등)
구치관 권공 권자신6, 7 박강
박원형 성삼문6, 8 원효연 윤사윤
윤자운 이극감9 이극배 이예장
이징석 이휘6 정수충 조득림
조석문 조효문 최유 한계미
한종손 황수신 황효원 홍윤성10
김질11
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58년 6월 29일 세조에 의해 책록
3 1466년 연회에서 세조에게 양위를 종용한 혐의로 인한 제명
4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3등에서 2등으로 책록
5 1455년 10월 22일 세조에 의해 책록
6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인한 제명
7 1699년 숙종 때 복권
8 1691년 숙종 때 복권
9 1504년 아들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0 1455년 11월 12일 세조에 의해 책록
11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책록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익대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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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 10월 28일 예종에 의해 책록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
신숙주 신운 류자광 한계순
한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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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보사정난익대공신 (2등)
박원형 박지번 심회 이극증
이복 이부 이서 이준
이침 정현조
수충정난익대공신 (3등)
강곤 권감 권찬 김효강
노사신 류한 박중선 서경생
신승선 안중경 어세겸 윤계겸
이존명 정인지 정창손 정효상
조득림 조석문 조익정 한계희
한백륜 홍응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좌리공신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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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 3월 2일 성종에 의해 책록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
권감 김국광 신숙주 윤자운
정현조 조석문 최항 한명회1
홍윤성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2등)
김질 송문림 심회 윤사흔
이정 이침 정인지1 정창손1
한계미 한계희 한백륜 구치관
순성명량좌리공신 (3등)
강곤 김겸광 강희맹 노사신
박중선 서거정 성봉조 신승선
양성지 윤계겸 이극배 이극증
이숭원 임원준 정효상 한계순
한치형1 홍응
순성좌리공신 (4등)
구문신 김교 김길통 김수녕
김수온 김순명 류수 류지
박거겸 선형 신정2 신준
심한 어유소 오백창 우공
윤필상1 이극돈3 이석형 이수남
이숙기 이승소 이철견 이현
이훈 정난종 정숭조 한보
한의 한치례 한치의 한치인
함우치 허종 황효원
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82년 성종의 인신을 위조해 남의 재산을 탈취한 혐의로 인한 제명
3 1504년 조카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511년 중종 때 복권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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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c00d45,#94153e> 태조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정종 익안대군
태종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성종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인종 홍언필, 김안국
명종 심연원, ■이언적
선조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효종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현종 정태화, 조경,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숙종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경종 이유, 민진후
영조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 이종성, 민백상
정조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철종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서배향)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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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98년
1월
신윤복
2월
안향
3월
이상화
4월
석주명
5월
이익
6월
송흥록
7월
조철호
8월
윤봉춘
9월
한성준
10월
정태진
11월
최제우
12월
이순신
1999년
1월
이중섭
2월
혜초
3월
유형원
4월
최한기
5월
김창숙
6월
권율
7월
맹사성
8월
황현
9월
김시습
10월
최세진
11월
정부인 안동 장씨
12월
이승훈
2000년
1월
남궁억
2월
나혜석
3월
김육
4월
서경덕
5월
진감국사(혜소)
6월
하규일
7월
정인보
8월
김좌진
9월
김수영
10월
류희
11월
김창하
12월
장승업
2001년
1월
김부식
2월
최용신
3월
강항
4월
함석헌
5월
지눌
6월
이병기
7월
이현보
8월
오세창
9월
허균 · 허난설헌
10월
설총
11월
의천
12월
송만갑
2002년
1월
정약종
2월
김환기
3월
이상재
4월
박두성
5월
박수근
6월
조지훈
7월
성삼문
8월
박효관
9월
김병연
10월
신숙주
11월
김승호
12월
손진태
2003년
1월
안확
2월
양주동
3월
이동백
4월
양팽손
5월
정지용
6월
정몽주
7월
김장생
8월
박세당
9월
유정
10월
월명
11월
이인성
12월
유길준
2004년
1월
조희룡
2월
신흠
3월
이항로
4월
이경석
5월
의상
6월
백광홍
7월
이첨
8월
김창조
9월
조헌
10월
최항
11월
장욱진
12월
박두진
2005년
1월
정정열
2월
이예
3월
강경애
4월
신동엽
5월
임윤지당
6월
김종직
7월
강정일당
8월
이규보
9월
나철
10월
이승휴
11월
효명세자
12월
최북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colbgcolor=#b82642><colcolor=#fff>
조선 영의정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신숙주
申叔舟
<nopad> 파일:Shin_Suk-ju.jpg
출생 1417년 8월 11일[1]
(음력 태종 17년 6월 20일)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
(現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
사망 1475년 8월 1일[A] (향년 57세)
(음력 성종 6년 6월 21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재임기간 제28대 영의정부사 → 영의정
1462년 6월 26일[3] ~ 1466년 6월 9일[4]
(음력 세조 8년 5월 20일 ~ 세조 12년 4월 18일)
제40대 영의정
1471년 12월 13일[5] ~ 1475년 8월 1일[A]
(음력 성종 2년 10월 23일 ~ 성종 6년 6월 21일)
봉호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시호 문충(文忠)
본관 고령 신씨
범옹(泛翁)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
부모 부친 - 신장
모친 - 나주 정씨 정유(鄭有)의 딸
부인 무송군부인(茂松郡夫人) 무송 윤씨(? ~ 1456)
자녀 슬하 9남 2녀
장남 - 신주(申澍, 1435 ~ 1456)[7]
차남 - 신면(申沔, 1438 ~ 1467)
3남 - 신찬(申澯, 1440 ~ ?)
4남 - 신정(申瀞, 1442 ~ 1482)[8]
5남 - 신준(申浚, 1444 ~ 1509)
6남 - 신부(申溥, 1446 ~ 1501)
7남 - 신형(申泂, 1449 ~ 1487)
8남 - 신필(申泌, 1454 ~ 1518)
장녀 - 신씨(申氏, 1455 ~ ?) 신명수(申命壽)의 처
9남(서자) - 신결(申潔) 측실 배씨(裵氏) 소생
차녀(서녀) - 숙원 신씨(淑媛申氏)[9] 측실 배씨(裵氏) 소생
서명
1. 개요2. 생애3. 평가
3.1. 부정적 평가3.2. 긍정적 평가
4. 가족과 후손5. 초상화6. 여담7. 대중매체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정치가, 학자, 외교관.

2. 생애

나주목에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에 올라왔다. 1438년(세종 20) 22세의 나이로 식년시 진사시에 1등 1위(장원)로 급제하였으며 1439년 친시(親試)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훗날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통상적으로 조선의 관료는 1품 승진에 3년이 걸렸는데 과거 합격도 합격이고 순전히 날짜만 채워서 종9품에서 정1품까지 오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많으면 51년이다.[10]

책을 읽으려고 집현전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으며, 소문난 수재이자 책벌레였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하루는 어느 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길래 세종이 자신의 옷을 덮어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이 신숙주다.[11] 이에 흡족해진 세종은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도 신숙주를 투입한다.[12] 세종은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아들인 문종에게 "신숙주는 크게 쓸 인물이다"라며 자주 칭찬했다고 한다.

세종 시절에는 일부러 책을 읽기 위해 남들이 기피하는 궁궐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하며 이 때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그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는데 세종이 이걸 보고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가 필원잡기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는 왕권이 서슬퍼렇던 시기였데다가, 곤룡포는 왕만 입을 수 있는 옷인지라, 곤룡포를 벗어 준다는 것은 곧 왕권의 이양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유로 임용한 박사는 실제로 곤룡포를 덮어주었다면 신숙주는 그 날로 처형감이라고 했으며, 그래서 곤룡포가 아닌 가죽옷이었을 거라고 설명했다. 왕 본인이 상관없다 하면 넘어갈 수 있기는 해도, 최소한 왕 수준의 책임을 짊어진다는 의미가 강하기에, 잠에서 깨어난 신숙주는 어느 쪽으로든 미칠듯한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13] 이 일화는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보통 훈훈한 미담으로 소개된다.

일본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몸이 아팠다가 나은 직후라 세종이 걱정했는데 신숙주는 "걱정하지 마십시오"라 하고는 일본에 갔다.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인들이 붓과 묵을 가져와서 글씨 좀 써달라고 요청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써 주어서 주위 사람들이 "매우 비범하다"고 평가했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려 쓰시마 도주와 담판을 했는데 도주가 "조선에 오는 무역선인 세견선의 수를 안 정하면 안 되는 거냐?" 고 하자 "이 사람아, 세견선 수가 정해지면 그만큼의 이익은 확실하게 당신에게 돌아가겠지만, 수를 안 정해놓으면 부하들이 당신 몰래 자기들 이익이나 챙길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란 말로 설득하여 조선에 오는 세견선의 수를 확실히 약정한 계해약조를 맺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경험은 뒷날 성종 때 대일 관계 등에 관한 주요 자료로 손꼽히는 《해동제국기》를 완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에서는 풍랑이 거세자 풍랑을 만나 선원들이 당황했던데 반해 신숙주는 "지금 일본도 갔다 왔는데 이 바람을 타고 중국까지 가는 것도 괜찮지 뭐"라며 태연히 앉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배에 탄 사람 중에는 왜구가 납치해 갔던 백성들이 많았으며 그 중 임신한 여인[14]이 있었는데 아이가 왜인의 아이였다. 선원들은 "임신한 여인이 배에 탔으므로 바다에 내던져 제물로 바쳐 용왕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했으나 신숙주는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해서야 되겠냐.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며 이를 막아서 죽을 위기에 처한 그 여인을 살려준 이야기도 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풍랑은 잠잠해졌다 한다. 이건 야사 이야기가 아니라 세종실록의 신숙주 졸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의 저서인 《해동제국기》는 무로마치 막부 때 일본에 대한 자세한 서술과 일본어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데 있는데 여기에서도 누가 당대 제일의 주당 아니랄까봐 너 술 먹었냐?, 이 술 맛있다 등 '술'과 관련된 기록이나 일본어 표현들을 꽤 많이 옮겨놓기도 했다[15].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 이게 명나라에 들어가면서 그 내용이 문제시되어 "너네 우리 불러서 전쟁하면서 뒤로는 일본하고 손잡은 거지?" 하는 식의 고발을 받은 적이 있다.[16] 일본으로 여러 차례 사행도 다녀오며 《해동제국기》를 저술한 일본통(日本通)답게 죽는 순간까지도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말라며 당부하였다. 숱한 경험으로 일본인들의 호전성을 간파한 듯한데 《해동제국기》의 서문에도 당시 일본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그들은 습성이 강하고 사나워 칼 쓰기에 능하고 배 타기에 익숙하며 우리와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처지이기에 잘 어루만져 주면 예로서 사신을 왕래하고 잘못하면 번번이 강탈을 자행하였다. (…) 일찍이 들으니 오랑캐를 대우하는 방도는 외부를 단속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내부를 닦는데 있으며, 변방의 방어에 있지 아니하고 조정에 있으며, 무력에 있지 아니하고 기강에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을 여기서 증험하였다. (…) 지금 우리나라는 그쪽에서 오면 어루만져서 선물을 넉넉히 주며 대우를 후하게 하는데도 그들이 보통으로 여기고 진위를 마구 속이며, 곳곳에서 머물러 시일을 지체하여 변명을 갖가지로 부리고 있으니, 그놈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문득 화를 낸다.
신숙주, 《해동제국기》 〈서문〉
집현전에서 같이 연구하던 성삼문과는 친하게 지냈으며 안평대군과도 두루 친하게 지냈다.[17] 단종이 즉위하여 수양대군명나라사신으로 갈 때 함께 가게 되면서 완전히 수양대군과 가까워진다. 정확히 말하면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사신으로 명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신숙주도 동행시키려 했다. 신숙주는 여기에 따르면서 했던 말이 "장부가 어찌 아녀자의 품에서 편히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마침 수양대군과 신숙주 두 사람은 1417년생 동갑내기다. 세조는 신숙주가 정승이 된 후에도 집현전 학사 시절의 호칭인 '신 수찬'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서장관으로 따라나섰을 때의 호칭인 '신 서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다만 계유정난 전후에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애매한 점이 많아 알 수가 없다.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의 위치는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언급할 정도로 큰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 신숙주가 다른 정파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이 많았기에 애초에 쿠데타 전에는 세조가 쿠데타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고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로는 완전히 수양대군의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단종의 양위를 주도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고 자신을 도운 좌익공신 중 1등공신으로 넣었다.

이런 행적 때문에 사육신들도 단종복위운동 중에 한명회, 권람, 윤사로와 더불어 신숙주를 처단 1순위로 올려놓았다. 성삼문은 신숙주만 따로 언급하면서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언급했다(세조실록 2년 6월 2일) .변절자로 낙인 찍힌 신숙주를 윤영손이 처단하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제지하고 거사를 연기하기로 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자 정승들과 함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의 신숙주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당대나 적어도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평가가 좋은 편이다. 김종직도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18] 이는 15세기까지의 사림들은 신숙주를 그리 나쁘게만 보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이기도 한다.

김종직이 대놓고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만일 진짜로 그런 말을 했다면 성종의 얼굴이 흙빛이 되는게 아니라 김종직의 눈에 흙이 덮혔을 것이다.[19] 이후 사림이 득세하면서 사육신이 복권되는 과정에서 신숙주의 평가는 점점 낮아져서 헌종은 "신숙주(申叔舟)는 어찌하여 육신(六臣)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건 헌종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세도정치기의 왕이라서 측근 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에 가깝다. 사육신 문서에도 있지만 진짜 신숙주가 뭘 했는지, 사육신이 뭘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도 이 전향이 충격적이었는지 오늘날에도 변절자의 대명사처럼 회자된다. 세조에게 협력하고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나머지 집현전 선배 최항, 정창손처럼 세조의 정변을 도운 집현전 선배들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신숙주보다는 더욱 명확한 배신자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세간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좀더 가혹하다. 그만큼 신숙주의 능력과 성품에 걸었던 기대와 믿음이 컸다는 반증일지도. 정인지, 최항, 정창손은 다 선배들로 세종 말엽에 이미 고위직 관료들이었고, 대체로 그보다 낮은 관료들이었던 신숙주의 동기급들인 사육신들은 단종을 복위하다가 사망했으나, 신숙주만 수양대군 편에 붙었으니 비판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3. 평가

3.1. 부정적 평가

신숙주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평가해야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그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군주를 배신했다는 점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문종은 세종의 적자이며, 그 아들인 단종은 세종의 적장손으로서 조선 전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다.[20]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반정이나 역성혁명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치명적인 폭정이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이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인물의 왕위를 빼앗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21]

즉,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는 명분이 없으며 당시의 유교적 관점으로는 물론, 유교 사회가 아닌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괜히 후대 조선 왕들이 중종을 시작으로 단종에 대해 무덤 수리 등을 하는 등으로 여론이 형성되다가 결국 단종 복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자 숙종이 총대를 매고 단종을 정식으로 복권한 것이 아니다.

신숙주 본인도 배웠으며, 신숙주가 속한 조선에서 통치 이념과 사상으로 삼은 유교, 성리학의 관점에서 단종 폐위와 세조 집권은 옹호하기에 쉽지 않다. 신숙주와 세조 한명회가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을 동안과 죽은 이후 한동안은 단종에 대해 사림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이후 사림에서 강대한 위세를 떨치던 서인, 노론에서 단종 복권을 적극적으로 성토하며 행동에 나선것도 이때문이다.[22] 물론 사육신들도 복권.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 노론의 거두 송시열.[23]

단종의 폐위와 단종 복위 움직임에 대해 세조측에 대해 일말이라도 이해의 여지나 명분거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사림들은 자칫 왕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단종 복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의 여지나 명분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정변의 주요 핑계거리인 실정과 폭정도 없었다. 폭정과 실정으로 명분이 있는 연산군과 광해군들의 폐위와 달리 단종은 17살에 살해당해서 애초 저런 폭정이나 실정을 펼칠 기회조차도 전혀 없었다.

신숙주에 대한 옹호가 점점 도를 넘어 신숙주에 대해 그가 없었더라면 더욱 암담한 시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도 쏟아지는데 조선시대의 발전은 한 사람에게 의존해서 될 사안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신숙주는 그 정도의 능력도 아니었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앉은 사람도 아니였다. 세조의 공신이자, 신숙주의 영의정 벼슬, 신숙주의 업적들과 일화들에 무작정 함몰돼서 오해가 자주 일어나는데 세조는 그렇게 막중한 권한과 역할 부여를 신숙주에게 하지 않았다. 애초에 세조를 도운 공신들은 한명회, 권람 등 더 많기도 했고. 그나마 신숙주가 한명회와 더불어 세조의 공신들 중 거두이긴 하다만 세조의 성향을 감안하면 당연히 신숙주에게 그렇게나 많은 권한과 역할을 줄 리가 없다.

하지만 신숙주 역시 유학자이기 이전에 한명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도 거사를 앞두고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여 배신했을 이유도 충분히 있다. 아무리 신념과 명예가 더 앞섰던 시대라고한들 목숨 앞에선 그 누구도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주변에서 배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는 편안하게 더 오래 사는 길을 선택할 정도로 신념보다 목숨을 더 중요시했을 수 있다.

신숙주에 대한 배신자라는 평가는 배신과 배신자라는 단어의 정의가 재정의되거나 바뀌지 않는 이상은 사라질 가능성이 없다. 오히려 신숙주에 대해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현대사회에서도 바뀌지 않아서 신숙주의 능력에 대해서는 재조명하고 인정하면서도 신숙주가 배신을 한 것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신숙주가 유능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고 신숙주가 배신한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이며 공으로 과를 덮을 수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신숙주는 그저 명재상과 부패한 관료라는 양면을 모두 가진 황희와 마찬가지로 명재상이라는 긍정적인 면모와 배신자라는 부정적인 면모를 모두 가진 사람인 것이다.

3.2. 긍정적 평가

후대에 지조 면에서 성삼문과 비교되었지만[24] 업적은 뛰어나다. 능력과 업적만 놓고보면 정도전, 조준,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의 반열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 조선의 많은 재상들 중에서 신숙주만큼 다재다능했던 인물도 드물다.

성삼문과 함께 한자음 정리에 관한 질의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여러번 찾아가기도 했으며[25]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에 조예가 있었다.[26] 그리고 그 나라들의 문화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겨 문화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또한 외교적 수완과 감각도 탁월해서 앞에서 언급했듯 쓰시마 섬에 갔을 때에는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고 대여진 외교도 담당하여 여진족과 반목이 있을 때 조선의 대표로 이를 조정하고 여진 추장들을 회합하는 역할도 했다. 이처럼 풍부한 국제적 경험 덕분인듯, 조선 역사상 외교를 관장하는 예조 판서 직을 제일 자주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가 본 것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조선 후기까지도 조선의 일본 이해에 기본적인 서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만큼 관련 분야에서는 당대 조선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신숙주는 당대에, 특히 유학자로서는 흔치 않게 민간 상업의 진흥을 지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성종실록을 보면 화폐의 유통과 이를 위한 시장의 발전에 대해 길게 논한 장면이 나온다. 요약하면 "화폐 유통을 위해서는 큰 도시나 백성의 유동성이 많은 지방에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해서 백성들의 상업활동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강제로 시키는 것보다 민심의 동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27] 이게 별것 아닌 이야기인것 같지만 신숙주의 이 의견은 조선에서 화폐 유통이 되지 않았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으며,[28] 농업이 근본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민간상업의 진흥을 지지했다는 것은 사회 구조 자체를 보는 눈이 달랐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제법 시대를 앞서간 면모도 있었다는 소리다. 다만 신숙주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친구 성삼문이나 후대의 조광조 같은 인물처럼 모든 것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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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3번째 그림인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신숙주가 여진족을 정벌할 때, 여진족이 야습하자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시를 읊었다는 일화를 묘사한 그림이다. 영채 안쪽에 녹색 옷을 입고 여유롭게 누워 있는 사람이 신숙주다. 이 때 신숙주가 읊었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虜中霜落塞垣寒 오랑캐 땅에 서리 내려 변방이 차가울사
鐵騎縱橫百里間 철기가 백리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누나
夜戰未休天欲曉 밤 싸움 그치지 않았는데 날 밝으려 하고
臥看星斗正闌干 누워 보니 북두성이 비끼네

또한 군사 전략가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어서 1460년에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귀환했다. 이 원정이 있었던 1460년이 간지로는 경진년이라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고 부른다. 이 때 적의 야습을 받자 본진에 태연히 누워서 쳐들어온 적을 걱정하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이때 신숙주 부대는 추장급 여진족 90여명과 일반인 여진족 430여명을 붙잡거나 살해했으며 9백여채의 집을 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전과 규모로 보면 세종 때 최윤덕의 파저강 정벌에 버금가는 큰 전과였다. 사실 파저강 정벌보다 더 큰 승리이기도 했는데 파저강 정벌 때는 군사 2만 5천명을 데리고 가서 170여명을 죽였지만 이때는 1/4의 병력을 데리고 가고도 두배가 훨씬 넘는 성과를 올렸다. 성공적인 북정 후에는 북방 방비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북정 기록인 《북정록》과 세조가 지은 병법서인 《병장설》 편찬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거기에 함선에 대한 안목도 뛰어나서 성종 실록에는 조선 함선과 일본 함선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논하고 있는 장면도 있을 정도다. 자세한 내용은 판옥선 참고.

이러한 여러가지 공로로 세조는 물론 예종 대에는 남이의 옥사를 해결했다는 이유로 공신에 또 올랐고,[29] 예종이 급사하자 가장 먼저 나서서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와 교섭, 성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30] 세조는 그를 당태종의 명신인 위징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위징은 당 태종에게도 거침없는 간언을 잘 했지만, 신숙주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예스맨에 가까웠다고 할까. 성종 실록의 사관은 신숙주의 이런 점을 단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 당 태종의 신하들에 비유하면 신숙주는 위징보다는 방현령과 비슷한 점이 많다.[31]

어쨌든 신숙주의 업적을 보면 행정, 군사, 외교, 정치적 감각까지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당대의 엄친아이다. 하지만 배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런 엄친아스런 면모는 대중에 잘 알려진 편이 아니다.

1475년에 59세로 생을 마감할 때 유언으로 "저승 가서 읽을 책 몇 권을 같이 관에 넣어 달라"고 했다. 역시 자타공인의 책벌레다운 유언이다. 마지막에 "인생이란 마침내 이에 그치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제법 적절한 때에 죽음을 맞아 한명회처럼 두 번 죽는 비운을 안 당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행운아였다. 세조의 공신 그룹 중에서 성종 7년(1476)에 죽은 홍윤성과 함께 정말로 퇴장 타이밍이 적절했는데, 같은 원상이었던 성종 1년(1470)에 죽은 구치관처럼 막 좋을 때에 죽은 것도 아니고, 성종 18년(1487)에 죽은 한명회처럼 폐비 윤씨가 죽는 것도 보지 않은게 행운이었다. 그가 죽은 성종 6년은 성종이 친정하기 딱 1년 전이었다. 특히 신숙주 사후 3년 뒤(1478)에 죽은 정인지마저도 갑자사화부관참시를 당한 걸 생각하면... 거기다 홍윤성은 신숙주보다 1년 더 살긴 했지만 정작 죽을 때 나이는 갓 50대에 접어든 나이였다.

또한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의하면 성종에게 죽기 직전에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소서."라고 진언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징비록의 본문이 시작되는 바로 첫머리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는 류성룡이 "일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했어야 한다"는 뜻으로 삽입한 기록이지만, 당시 신숙주 정도로 일본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던 일본 전문가가 드물었다는 이야기다. 징비록에만 기록된 말이 아니고 당연히 실록에도 남아있는 기록이다. 성종은 신숙주의 유언을 새겨 들어서 계속 사신을 보내서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당시 오닌의 난으로 일본에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신숙주 사망 직후부터 일본과 사신을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된다.[32] 이때 일본과의 연락이 끊긴 탓에 결국 100여년 후 전국시대가 끝난 일본 측의 사정을 파악하는데에 혼란을 겪다가 임진왜란 초기 대응에 실패했으니 신숙주의 충고는 꽤 통찰력이 있는 것이었다.

징비록이 일본에도 널리 퍼진 이유인지 이 말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서, 뒷날 에도 막부의 유학자이자 중신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가 1711년 조선 통신사 정사로 파견된 조태억에게 "신숙주 공의 그 말씀은 참으로 대신으로서 나라를 걱정한 말씀이라 하겠소"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

냉정하게 결과론적인 시각에서만 본다면 도덕성엔 문제가 있지만, 신숙주의 선택은 미래의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사육신과 함께 지조를 지켰어도 단종의 복위가 이뤄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본인 역시 죽음을 당했을 것이고 이후 신숙주의 업적들이 죄다 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훈구파 대신들이 문제[33]가 많은 거에 비하여 최항, 정창손처럼 딱히 비리를 저지르지도 않고 평상시엔 나름 검소하게 생활한 듯하다.

4. 가족과 후손

신숙주는 1417년 6월 20일에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에서 아버지 신장과 어머니 나주 정씨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태종의 과거 동기이자 공조참의를 지낸 신포시, 할머니는 경주 김씨로 김충한의 딸이며 증조부는 신덕린, 증조모는 정신호의 딸이며 고조부는 신사경이다.

공주의 남자에 등장하는 신면[34]은 실제로 신숙주의 차남이다. 신숙주가 가장 아낀 아들이었지만 이시애의 난함경도 관찰사로 함경도에 파견되었는데 이시애군에 악착같이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실록을 보면 "승지가 된지 5년이 되었어도 실수가 없었으며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자못 자상하고 명확하였다"는 평을 받는 것을 보아 제법 촉망받는 인재였던 모양이다. 이 때 신숙주는 세조의 의심 겸 견제 조치로 인해 옥에 갇혀 있어서 아들의 죽음을 옥중에서 들어야 했다. 위에서 언급된 신용개는 바로 신면의 아들이다.

신면 외에 신숙주는 아들이 많았는데 장남 신주, 삼남 신찬, 4남 신정, 5남 신준, 6남 신부, 7남 신형, 8남 신필이 있었다. 이 중 장남인 신주는 일찍 사망했고 4남인 신정이 특기할만한데 신정은 그야말로 호부견자였다. 성종옥새위조하여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아 죽었다. 바로 위의 형 신찬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는가 하면, 큰형 신주의 아들인 신종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판이 돌자 이를 시기해서 조카를 원수처럼 미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 본인 역시 신정을 두고 "우리 집안 말아먹을 놈은 바로 저놈이다"라고 고개를 내저었다고 하며 실록에서 찬평을 받고 있는 신면에 비해 신정은 실록에서도 막장이라고 인증하고 있을 정도다. 다만 그래도 아버지에겐 효자였다는 기록도 있다. 신정의 사사에 대해서는 신정 본인이 막장이기도 했지만 훈구파 영수의 자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성종 나름대로의 훈구파 견제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장남인 신주의 아내가 한명회의 딸로, 즉 신숙주와 한명회는 사돈이다.

고전에서 자주 회자되는 《기재기이》를 저술한 신광한은 신숙주의 손자다.

폐비 윤씨의 외당숙이며, 근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신규식, 민족 사학자로 유명한 신채호가 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5. 초상화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612호 613호 614호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신숙주 초상 사천 흥사리 매향비
파일:신숙주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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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초상화 얼굴 확대

1977년 11월 15일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 관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신숙주의 아들들과 같은 세대인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에 의하면 신숙주가 젊은 시절에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홍경손이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넣어서 '글씨는 누구처럼, 활쏘기는 누구처럼' 이런 식으로 나가는 시를 한 수 지었는데, 이 시를 보면 "눈매는 신숙주처럼 할 것이며"라는 구절이 있다. 초상화를 보면 눈매가 좀 특이하게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숙주의 눈매가 꽤 비범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6. 여담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룰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元) 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倭寇)를 지리산(智異山)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7. 대중매체

사극에서는 주로 줏대없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변절자라는 평가는 둘째치고 역사적으로 보면 행정, 외교, 군사와 정치 감각도 뛰어났던 만능 관료였지만 정치 모략이 주가 되는 사극에서는 동시대에 권세가이자 세조의 오른팔이었던 한명회 때문에 많이 묻히는 분위기다. 이 시대를 다룬 사극들이 계유정난이나 성종 시대의 궁중 암투에 비중을 두고 있는 나머지 세조의 치세를 상세히 묘사하지 않아서 신숙주의 활약상이 나올 기회가 없었다.

7.1. 대왕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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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율리우스력 8월 2일[A] 율리우스력 7월 23일[3] 율리우스력 6월 17일[4] 율리우스력 5월 31일[5] 율리우스력 12월 4일[A] [7] 부인은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장녀로, 장순왕후공혜왕후의 언니이다.[8] 태종의 11남 후령군의 사위.[9] 세조의 후궁.[10] 다만 장원 급제를 했다면 33년으로 확 준다. 장원 급제자는 종6품에 제수되기 때문이다. 사실 종9품에 제수되는 것도 과거 급제자 33인 중 최하위 등급을 받은 이들일 뿐 나머지는 등수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종9품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여기다가 조선 시대 관리가 되는 법은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버지가 고위 관직자라면 하급 관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다만 과거 급제를 하지 못한다면 청요직에 갈 수 없었고 당상관이 되는 길도 매우 어려웠다.(3년에 1번씩 보는 정규 시험 외에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과거를 열어서 33명씩을 선발하였는데 이 안에 들지 못한 사람이 왕의 선택을 받아서 당상관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선택을 받아도 대간들의 비판을 받아서 철회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하급 관리로 먼저 관리 생활을 시작하고 틈틈이 과거를 준비해서 시험보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이렇게 급제하면 하급 관리로서의 경력도 인정받아서 곧바로 종6품 이상으로 승진이 가능하였다.(조선은 정3품 당하관까지 일정 근무 일수를 채우고 근무 평가에 따라서 품계가 승진하는 방식으로 체제가 조직되어 있었다.)[11] 그 말인즉슨 세종은 더 늦게까지 안 자고 있었다는 소리다. 실제로 세종은 신숙주가 있는 걸 알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하는 심정으로 일부러 남아 있었다는 말도 있다.[12] 창제 작업에 직접 관련한 것은 아니다. 여러 이유로 중국에서 사신으로 갈 때 세종이 부탁한 자료를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훈민정음은 세종과 가족이 비밀리에 만든 프로젝트이고 신하들은 아무도 몰랐었다. 쉽게 말해 훈민정음은 세종과 그 가족이 만든 문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과 훈민정음 문서 참조.[13] 하지만 임 박사의 의견에 반론하자면 자기 이름을 공에 써서 차고 논 아이들을 대범하게 넘어가 주고 궁궐 구경하다가 잡히거나 심지어 자기 침전에 흘러들어온 사람까지 죄를 묻지 않고 방면해 준 태종의 일화나 신숙주가 술김에 왕에게 관절기(…)를 걸고도 넘어간 세조의 일화가 있었다. 앞의 예시들도 엄격한 유교 왕권 시대에 진지하게 걸고 넘어간다면 얼마든지 엄벌에 처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제아무리 옛날 조선시대라고 해도 그 때도 결국 사람이 사는 시대였다. 당시 왕이었던 세종이 기특한 마음에 해준 배려인데 그걸로 처벌하면 그 자체가 넌센스인지라 설령 정말 곤룡포를 덮었다 해도 그걸로 다짜고짜 사형을 하니마니 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4] 더욱이 이 임산부는 일본에 끌려갔다가 온 여자였다.[15] 다만 술 이야기는 조선 후기 통신사들의 《사행록》에도 왕왕 등장한다. 일본 측이 술을 보내왔는데 향기롭고 맛있었다거나, 무슨 술이 유명하다거나, 어느 마을을 지났는데 맛 좋은 술이 나는 곳으로 전국에 이름이 났다는 등등.[16]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천하창세〉에서 아이템으로 등장한 적도 있다. 다만 명나라 아이템으로 등장했는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는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해외 명품을 명나라산/남만(유럽)산 오직 두 종류로만 표기한다.[17] 단적으로 안평대군이 꾼 꿈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는 신숙주의 찬이 붙어 있다.[18] 서문을 써줬다는건 곧 "나는 이 사람이 쓴 이거 좋게 평가함"(사실상 이 사람의 학문적 성취가 좋다고 평가하는 것) 이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신숙주의 손자인 신용개는 김종직의 문인으로도 들어간다.[19] 실제로 김종직이 조의제문으로 단종을 옹호했다 부관참시당했다.[20] 원손(1441~1448) - 세손(1448~1450) - 세자(1450~1452) - 왕(1452~1455)을 차례로 거쳤다. 정통성과는 관련 없지만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1455~1457)이기도 했다.[21] "정통성이라는 것이 대수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정치에서 명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실적으로 덮을 수 없는 것이 명분이며, 실적을 쌓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권력을 행사하고 차지하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분권화되고 복잡해진 정치체제에서도 명분과 적법성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하물며 조선과 같이 왕의 정통성이 핵심인 국가에서 이를 뒤집어 엎었다는 것은 명분의 측면에서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이는 곧 해당 행위가 용납되기 어려움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유교, 특히나 성리학을 따르던 조선은 이 정통성이 극도로 중요시되던 나라였다.[22] 다만 서인, 노론 또한 과거 훈구파 집안 출신들이 많거나 훈구파를 흡수하여 생긴 붕당이다.[23] 신숙주의 후손이자 우의정까지 한 신익상도 본래 송시열과 꽤 가까웠지만 신익상의 조부인 신응구는 송시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신익상 또한 경신환국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소론 쪽으로 가담했고, 이후 송시열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24]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 신숙주의 시호는 문충(文忠). 시호까지도 정반대다. 허나 뜻은 같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25] 이걸 훈민정음 창제와 엮는 경우가 차고 넘치는데, 이 때는 이미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1년도 지난 뒤의 이야기다.[26] 신숙주가 중국어를 배운 것은 실록과 다른 기록에서 누차 확인되어 확실하고 보한재집 행장에는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4개 국어가 가능했다는 설명이 있으나 일상 회화 수준이 아닌 고급 어휘를 제대로 구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예겸 같은 중국 사신접대나 황찬을 찾을때 역관을 대동했고, 문종은 대놓고 신숙주가 한어(중국어)에 능하지는 않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행장에서조차 능통하게 대화했다는 기술 대신 가끔 역관 없을때 직접 대화를 나눴다는 기술만 존재한다.[27] 조선의 화폐 유통은 시장 경제의 미발달로 인해 태종, 세종대왕은 물론 뒷날의 왕이나 재상들도 번번이 실패했다. 화폐 유통은 뒷날 숙종 때에나 정착된다.[28]세종대왕조차 이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무리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가 피본 적이 있었다.[29] 하지만 남이의 옥사는 신숙주나 한명회가 자신들을 위해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 씌어 사형시킨 것이다. 신숙주는 1468년에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봉해졌다. 이것을 보면 적어도 그가 인격적으로 본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다만, 남이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남이 본인이 처신을 잘못해서 자초한 점이 훨씬 크다.[30] 이 때문인지 신숙주는 종묘에 '직속 주군'이란 이미지가 강한 세조가 아닌 성종과 함께 배향되어있다.[31] 둘 다 행정능력이 탁월하고 주군의 정권 장악에 큰 공을 세운 브레인이자 명재상이었으며, 자기가 모셨던 주군에게 순종적으로 처신해서 주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간혹 사소한 일로 면직된 적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32] 사신이 대마도까지 갔다가 대마도에서 지금 일본 내부는 난세라 제대로 된 중앙정부도 없고, 갔다가는 괜히 험한 꼴만 당할거란 충고를 듣고 그대로 돌아옴.[33] 한명회홍윤성 같이 부패한데다 인간성에 문제가 있거나, 학자 출신에 똑똑하다 평가받는 정인지 마저 돈놀이나 하고 있었다.[34] 실제로 공주의 남자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나쁘게 묘사된 인물이 신면이다. 신면과 관련된 장면의 90%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다. 오히려 이시애의 난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진정한 무인이 더 정확하다.[35] 왠지 물 건너의 모 바둑 귀신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어쩌면 스탠드 사용자였을지도.[36] 소위 '쫓겨난 왕자'에 대한 동정은 이 동정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를 떠나서 복잡하다. 심지어 전두환백담사에 갔을 때도 불쌍하다는 여론이 돌았던 것이 현실이라....[37] 그런데 단종애사는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쓴 다음에 발표한 소설이라서, 친일파 비판 그런거 없이 그냥 재미있으라고 쓴 것일 수도 있다. 단종애사와 역시 이광수가 쓴 소설 세조대왕만 놓고 비교하면 친일을 하면서 바뀐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에 민족개존론이 들어가면 해석이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덤으로 같은 친일파인 김동인은 세조를 영웅으로 묘사하는 대수양을 썼다.[38] 정상적인 국가의 고명절차이기 때문에 고명은 최고위직을 대상으로 한다. 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이 모두 당시 기준으로 정승이나 정승 후보군인 찬성인 것이 이 때문. 또한 정승이나 찬성이 아니라면 고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참찬이나 판서 뿐이다.[39] 애초에 문종은 단명했기 때문에 병약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과로와 병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일뿐 체격도 크고 건장한 사내였다. 세종 본인도 당뇨와 격무에 시달리면서 당시 기준으론 살만큼 충분히 살았는데, 병치레를 조금 할지언정 아직 젊은 아들이 금방 죽을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다. 게다가 문종은 즉위 전인 세자 시절부터 7년 이상을 국정을 총괄했던, 사실상 이미 군주였다. 또한 문종은 적장자로서 정통성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그 아들인 단종은 출생 당시부터 왕의 세손으로서 완벽한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즉, 세종이 죽을 당시 그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한창때고 능력도 뛰어난 적장자가 차기 왕으로 오를 예정이고,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적장자인 손주가 왕에 오를 예정이라 정통성에서 그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고, 나라도 잘 굴러가고 있는 시점이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의례적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고명 절차를 밟은 것은 실록에 남아있는 사실이나, 멀쩡히 잘 살아있는 아들을 내버려두고 신하들에게 손주를 부탁한다고 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아무리 뛰어난 신하라도, 단종에게 있어 태종이 탄탄하게 다져준 왕권을 누리고 있는 아버지 문종보다 든든한 보호자가 있을까?[40]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이야기에 얽힌 진실을 다룬 바 있다.[41] 김택영의 역사관이나 이전 역사서에서 보이는 한계 같은 것은 일단 넘어가자. 다만 일부 김택영 관련 서적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박은식, 신채호와 함께 구한 말 3대 역사가' 운운은 완벽한 과장이다. 이 사람 책에서는 일본의 근대 역사서를 생각없이 번역한 바람에 우리 나라 역사를 쓰면서 임나일본부를 긍정한 부분까지 존재한다.[42] 당시 중국에 망명 중이었던 김택영은 심지어 이성계조선을 세운 것을 고려에 대한 찬탈이라고 표현했다. 21세기에서 보는 제3자적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 때는 그 이성계의 후예 조선 왕가가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시기이므로 당연히 용납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이 때문에 김택영은 당시 한국 유림에게서 사적(史賊)이라고 불리면서 매장당한다.[43] 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 1월 15일 무오 1번째기사[44]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윤임 역,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