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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 이달의 문화인물 (1998-2005)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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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신윤복 | 2월 안향 | 3월 이상화 | 4월 석주명 | 5월 이익 | 6월 송흥록 | |
7월 조철호 | 8월 윤봉춘 | 9월 한성준 | 10월 정태진 | 11월 최제우 | 12월 이순신 | |
1999년 | ||||||
1월 이중섭 | 2월 혜초 | 3월 유형원 | 4월 최한기 | 5월 김창숙 | 6월 권율 | |
7월 맹사성 | 8월 황현 | 9월 김시습 | 10월 최세진 | 11월 정부인 안동 장씨 | 12월 이승훈 | |
2000년 | ||||||
1월 남궁억 | 2월 나혜석 | 3월 김육 | 4월 서경덕 | 5월 진감국사(혜소) | 6월 하규일 | |
7월 정인보 | 8월 김좌진 | 9월 김수영 | 10월 류희 | 11월 김창하 | 12월 장승업 | |
2001년 | ||||||
1월 김부식 | 2월 최용신 | 3월 강항 | 4월 함석헌 | 5월 지눌 | 6월 이병기 | |
7월 이현보 | 8월 오세창 | 9월 허균 · 허난설헌 | 10월 설총 | 11월 의천 | 12월 송만갑 | |
2002년 | ||||||
1월 정약종 | 2월 김환기 | 3월 이상재 | 4월 박두성 | 5월 박수근 | 6월 조지훈 | |
7월 성삼문 | 8월 박효관 | 9월 김병연 | 10월 신숙주 | 11월 김승호 | 12월 손진태 | |
2003년 | ||||||
1월 안확 | 2월 양주동 | 3월 이동백 | 4월 양팽손 | 5월 정지용 | 6월 정몽주 | |
7월 김장생 | 8월 박세당 | 9월 유정 | 10월 월명 | 11월 이인성 | 12월 유길준 | |
2004년 | ||||||
1월 조희룡 | 2월 신흠 | 3월 이항로 | 4월 이경석 | 5월 의상 | 6월 백광홍 | |
7월 이첨 | 8월 김창조 | 9월 조헌 | 10월 최항 | 11월 장욱진 | 12월 박두진 | |
2005년 | ||||||
1월 정정열 | 2월 이예 | 3월 강경애 | 4월 신동엽 | 5월 임윤지당 | 6월 김종직 | |
7월 강정일당 | 8월 이규보 | 9월 나철 | 10월 이승휴 | 11월 효명세자 | 12월 최북 | |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 |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1974 조택원 무용가 | 1975 안수길 소설가 | 1976 홍종인 언론인 | 1977 최석채 언론인 | 1978 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
1979 고유섭 미술사학자 | 1980 전봉초 음악가 | 1981 김소월 시인 | 1982 이효석 소설가 | 1982 조지훈 시인 | |
1983 홍승연 언론인 | 1983 천관우 언론인 | 1983 이육사 독립운동가, 시인 | 1984 이원수 아동문학가 | 1984 장발 미술가 | |
1985 강소천 아동문학가 | 1986 홍진기 언론인 | 1987 김남중 언론인 | 1990 모윤숙 시인 | 1990 주시경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 |
1994 김상만 언론인 | 1994 나운영 음악가 | 1994 이숭녕 국어학자 | 1995 공병우 한글연구가 | 1995 김소희 국악인 | |
1995 문신 미술가 | 1995 정명훈 음악가 | 1995 이대원 미술가 | 1995 류경채 미술가 | 1996 송석하 민속학자 | |
1996 신용호 기업인 | 1996 조병화 시인 | 1997 신순남 미술가 | 1997 홍두표 언론인 | 1997 최창봉 언론인 | |
1997 정진숙 출판인 | 1997 고병익 역사학자 | 1998 방우영 언론인 | 1998 김연준 작곡가 | 1999 방일영 언론인 | |
1999 방종현 국어학자 | 1999 김세형 음악가 | 1999 이유태 미술가 | 1999 김흥수 미술가 | 1999 장준하 독립운동가, 언론인 | |
1999 송건호 언론인 | 2000 황순원 소설가 | 2000 백남준 미술가 | 2000 서정주 시인 | 2001 김기창 미술가 | |
2001 김천흥 국악인 | 2001 장우성 미술가 | 2001 김수영 시인 | 2001 최영희 역사학자 | 2002 임권택 영화감독 | |
2002 오지호 미술가 | 2003 박동진 국악인 | 2003 윤석중 아동문학가 | 2004 구상 시인 | 2004 이혜구 음악사학자 | |
2005 박성용 기업인 | 2005 정세영 기업인 | 2006 신상옥 영화감독 | 2006 김동원 연극인 | 2006 차범석 극작가 | |
2006 조남철 바둑기사 | 2007 송도균 언론인 | 2007 노성대 언론인 | 2007 송범 무용가 | 2008 박경리 소설가 | |
2008 이청준 소설가 | 2008 김영랑 시인 | 2009 유현목 영화감독 | 2010 전숙희 수필가 | 2010 앙드레 김 패션 디자이너 | |
2010 김영환 군인, 6.25전쟁기 해인사 폭격명령 거부 | 2011 박완서 소설가 | 2012 지관 해인사 주지 | 2012 이건희 기업인 | 2012 허동수 기업인 | |
2012 김형규 국어학자 | 2013 이우환 미술가 | 2014 호머 헐버트 선교사, 한글 체계화 공헌 및 한글 보급·한글 홍보 공로 | 2014 전형필 문화재수집가 | 2014 이은관 국악인 | |
2016 백성희 연극인 | 2016 임영웅 연극인 | 2017 박맹호 출판인 | 2018 최인훈 소설가 | 2018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 |
2018 정지용 시인 | 2018 황병기 국악인 | 2020 서세옥 미술가 | 2019 김성환 시사만화가, 대표작《고바우 영감》 | 2020 손창근 미술품소장가 | |
2021 윤여정 영화배우 | 2021 이어령 문화부장관, 작가, 정치인 겸 문학평론가 | 2021 박서보 화가 | 2022 송기숙 작가 | 2022 송해 희극인 | |
2022 김우창 문학평론가 | 2022 김지하 시인 | 2022 이정재 배우 | 2022 황동혁 감독 | 2023 이미자 대중음악인 | |
2023 조수미 성악가 | 2023 이미경 기업인 | 2024 이문열 소설가 |
청록파 | |||||
박목월 | 조지훈 | 박두진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대한민국의 시인 조지훈 趙芝薰 | |
본명 | 조동탁(趙東卓) |
아호 | <colbgcolor=white,#292a2d>지훈(芝薰) |
본관 | 한양 조씨[1] |
출생 | 1920년 12월 3일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2]# | |
사망 | 1968년 5월 17일 (향년 47세) |
서울특별시 | |
학력 | 혜화전문학교[3] (졸업) |
등단 |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
상훈 | 금관문화훈장 |
부모 | 아버지 조헌영, 어머니 류노미(柳魯尾) |
가족 | 3남 1녀 중 차남[4] 부인 김난희(金蘭姬) 장남 조광렬(趙光烈), 차남 조학렬(趙學烈), 장녀 조혜경(趙惠璟), 삼남 조태열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대학 교수, 한국학자.본명은 '동탁(東卓)'으로, '지훈(芝薰)'은 그의 아호이다.
2. 생애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조헌영과 어머니 전주 류씨 류노미(柳魯尾)(류진희(柳進熙)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고 1939년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서 '고풍의상(古風衣裳)'이라는 시로 등단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있다.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보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민족 전통을 연구하고 그것을 시로 써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고 검정고시를 쳐서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합격했으므로 일제식 교육을 일절 받지 않았다.
1939년에는 영주 무섬마을의 독립운동가 김성규(金性奎, 1904-1946)의 딸, 김위남(金渭男)과 결혼했는데 결혼 직후 조지훈은 아내의 이름이 남자 같다고 난희(蘭姬)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부터 사망시까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재직 당시 지은 고려대학교의 교가와 '호상비문', 이 호상비문에서 따온 민족의 아리아라는 응원가가 고대생들 사이에 사랑받고 있다. 1960년에는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제자들의 4.18 의거를 지켜보고는 같은 해 4월 20일에 지은「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헌시(獻詩)를 고대신문에 투고하여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켰다.[5] 고려대 교정 내에 있는 4.18 기념비문도 그가 지었으며, 고려대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조론'이라는 수필을 통해 이승만 정권 및 정치인들의 지조 없음을 꾸짖은 전례가 있을 정도로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후배 문인 중엔 대선배인 서정주보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민권 수호 국민 총연맹, 공명 선거 추진 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김수영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적이었다면 조지훈은 그 반대로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과거 조선 시대의 선비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근데 그 지조론에서 레전드 숭일파 박중양을 치켜세우기도 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
1968년 5월 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며 기관지 확장증 합병증으로 인해 만 47세 젊은 나이에 메디컬센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여담으로 그를 디스했던 김수영 시인도 한달 뒤인 6월 16일, 46세의 나이로 교통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사망하기 얼마 전 어머니의 묘를 서울과 가까운 남양주 화도읍 마석우리로 이장했는데 몇 달 뒤 본인도 사망하면서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지에 따라 조지훈의 묘와 어머니의 묘과 같이 있다.
1982년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성향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지조론 중에서
지조론 중에서
그는 과거 같은 민족을 탄압했던 친일 세력이 광복이 되자 미국에 달라붙어 친미 세력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혐오했고 그 중심에 있던 이승만의 자유당을 뒤엎어버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4.19 혁명 때 앞장서서 학생 운동을 지지했고 학생이 앞장서 혁명의 선두가 되기를 요청했고 4.19 이후 권력 공백기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에 처음에는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 세력이 없던 박정희가 같은 일본 군인 출신들과 친일 자유당 인물들을 주축으로 공화당을 만들고 결정적으로 한일협정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극명하게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학문에의 침잠을 방패 삼아 이 참혹한 민족적 현실에 눈감으려는 경향은 없는가? (중략)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여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우리는 민족의 지사, 구국의 투사로서 자임해야 할 시기가 왔다.”
-조지훈이 고대신문에 기고한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중에서
-조지훈이 고대신문에 기고한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중에서
정치적 성향 자체는 진보가 아니라 정통적인 보수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 때문에 김수영 시인에게 비판 당했다. 김일성 만세 참조. 신경림 시인에 의하면 생전의 지론이 '부도덕하고 경박한 진보주의자보다 도덕적이고 성실한 보수주의자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정부와 대립하면서 강경하게 나가는 진보적 문인들에게도 한 소리 했다는 말도 있다. 종합적으로 개인적 정치 성향은 보수적이지만 그럼에도 당시 정권들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그 정도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4. 가족 내력
조지훈의 집안은 조광조의 후손으로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 마을에 종가가 있으며 상당한 명문가로 통한다. 조지훈의 증조 할아버지는 독립유공자 조승기(趙承基)이며 할아버지 조인석(趙寅錫)은 구한말 성균관과 사헌부 대간을 지낸 후 낙향했는데 6·25 전쟁 당시 주실마을이 좌우 이념으로 문중끼리 갈등을 빚자 이를 개탄하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은 한의사 출신으로, 남한 제헌의원으로서 한의학계에 남긴 업적이 엄청나다. 1950년 보건의료 행정법안의 제1장 총칙의 의료인 규정에 서양 의사 제도만 두고 한의사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앞장서서 폐지에 힘썼다. 6.25 전쟁 중 납북됐는데 북한에서도 최초로 동의학(남한의 한의학에 해당) 박사가 되었으며, 동의보감 국역을 주도하기도 하는 등 현재의 한의학이 있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고, 북한 내에서도 여러 고위직책을 맡으며 대접받았다. 게다가 1988년까지 살았으니 1968년에 사망한 조지훈보다 20년은 더 살았다.
조지훈의 집안은 6.25 전쟁으로 많은 곡절을 겪었는데 할아버지 조인석은 집안에서 일어난 이념 싸움으로 자결했고, 아버지 조헌영과 매제(妹弟) 이상달(李相達) 서울대 농대 교수는 납북됐으며, 막내동생 조동위는 서울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사망했다. 일련의 사건들로 홧병을 얻은 어머니 류노미도 1953년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부인 김난희는 생년월일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2024년 현재에도 생존 중이며 102~103세 정도의 나이인 것으로 추정된다.참고기사
조지훈의 자녀 3남 1녀 중 막내아들 조태열은 외교부 차관을 역임하고 2019년 10월까지 주UN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를 지낸 후 공직을 떠났으나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외교부장관 후보에 지명되며 2024년 1월부터 제41대 외교부장관으로 재직 중이다.
사촌여동생 조동원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아내이다. 박준규 의장이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인척관계임을 생각하면 조지훈 집안은 혼맥을 통해 몇다리 건너 삼성그룹과도 연결되는 셈이다.
5. 작품
- 풀잎 단장
- 파초우
- 주도 18단
- 승무 : 이 시에 등장한 '나빌레라'라는 어구가 발표 77년 후 매우 유명해졌다. 나빌레라란 '나비 같구나'라는 뜻으로, '나비'에 '-ㄹ레라'가 붙어 만들어진 시어다.
- 완화삼
- 낙화
- 호상비문[6]
- 고려대학교 교가 작사 [7]
- 동물원의 오후
- 고풍 의상 : 2018학년도 수능 6월 모의평가 국어 영역에 출제되었다.
- 마음의 태양 :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라는 구절이 2020학년도 수능 9월 모의평가 필적확인란 문구로 나왔다.
- 사모: H.O.T.의 4집에서 강타의 목소리로 낭독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3일에 나온 문어잡이 어부의 낭독으로도 유명하다
- 멋 설
- 석문(石門) : 민간설화를 바탕으로 지어진 시로, 동일한 설화를 바탕으로 지어진 다른 시는 서정주의 '신부' 가 있다.
- 영양군민의 노래 : 조지훈 시인의 고향 영양군의 공식 군가(郡歌)이다. 작사를 맡았으며, 작곡은 조동건이 맡았다.
- 산상의 노래: 2021학년도 수능 6월 모의평가 국어 영역에 출제되었다.
- 현충일 노래
- 마을: 제2회 MBC 대학가곡제(1982년)에서 연대 작곡과 2학년생인 박영주가 이 시에 곡을 쓰고 같은 대학 성악과 4학년생 강무림이 불러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 은익의 노래
- 경기여자고등학교 교가 작사 작곡은 김순애
- 경주고등학교 교가 작사[8]
6. 여담
- 야사 중에는 매우 해괴한 장난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시전설들인 '교수의 독특한 시험문제' 중 '시험지를 날려서 멀리 날아가는 순서에 맞춰서 채점하기' 방식을 쓴 사람 중에 조지훈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아나키스트 독립 운동가인 박열과 약간 접점이 있다. 박열의 대역 사건 재판 당시 박열이 입은 조선 관복(사모관대)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조지훈의 아버지인 조헌영이다. 또한 조헌영은 북한에서 박열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였다. 조지훈 본인도 '나의 시작(詩作) 노트'라는 수필에서 '박열이 입었던 관복을 집에서 어린 시절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회고하였다.
- 바둑의 급수에 빗대어 술꾼의 등급을 매긴 주도 18단이란 글이 유명하다.
- 그의 작품 봉황수는 용은 황제의 상징, 봉황은 조선국왕의 상징이라는 루머를 퍼트리는데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궁궐정전천정과 답도에 제후국이어서 용대신 봉황을 세겼다는 것인데 사실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상징하는것으로서 조선국왕이 가져야할 유교적 정치철학을 상징하는것이지 군주의 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특히 일본에서는. 헤이안시대부터 천황의 상징으로 쓰였으며 봉황은 천상계 즉 하늘을 뜻하기도 한다
[1] 양경공파-병참공파 27세손 동○(東○), ○식(○植) 항렬.(족보)[2] 인근의 도계리, 가곡리와 함께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조헌영 전 국회의원, 역사학자 조동걸, 조근해 공군참모총장, 조운해 강북삼성병원장, 조태열 전 외교부 차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특히 이 곳은 강원도 춘천시 서면(춘천),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과 더불어 작은 시골마을에서 박사를 많이 배출했다 하여 이른바 '국내 3대 박사마을'로 불린다.[3] 現 동국대학교[4] 장남 조동진(趙東振), 차남 조동탁(조지훈), 장녀 조동민(趙東敏), 삼남 조동위(趙東衛)[5] 2000년대 초에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의 시비가 고려대 문과대학 부근에 설치되었으나 얼마 안 가 '승무'의 시비로 교체되었다. 교체된 시비 뒤에는 해당 시가 있다고 한다.[6] 바로 그 유명한 민족의 아리아 원문이다.[7] 작곡:윤이상[8] 작곡:윤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