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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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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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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군부 수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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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친일파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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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박열
朴烈 | Park Yeol
파일:박열열사.pn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902년 3월 12일[1]
경상북도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 311
(現 경상북도 문경시 모전동 311)[2][3]
사망 1974년 1월 17일 (향년 71세)
평양시
묘지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혈액형 A형
본관 함양 박씨
초명 박혁식(朴赫植)
아명 박준식(朴準植)
직업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4]
학력 함창공립보통학교(현 함창초등학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중퇴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전문학교 중퇴
(사후 1984년 명예 졸업장 추서)
조직 혈권단
흑도회
흑우회
불령사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가족 부친 박영수
큰형 박정식, 작은형 박영식[5]
첫 번째 부인 가네코 후미코
두 번째 부인 장의숙
아들 박영일[6], 딸 박경희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파일:attachment/Bakyeol.jpg
▲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주요 간부들과 함께. 가운데 앉은 이가 박열.
파일:attachment/박열/park_yeol.jpg
▲ 박열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

1. 개요2. 생애
2.1. 해방 이전2.2. 해방 이후2.3. 장의위원회 구성2.4. 추도위원회 구성
3. 학계연구
3.1. 연구자3.2. 평전3.3. 후세 다쓰지의 기록
4. 기타
4.1. 대중매체에서
4.1.1. 소설4.1.2. 영화4.1.3. 뮤지컬
5. 어록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죽어갈 것이다.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고, 평화가 있다.
참으로 선량하고 아름다운 허무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박열의 선언[출처1]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며 동시에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시인이며 재일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 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 생애

2.1. 해방 이전

파일:270px-Park_Yeol.jpg
▲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청년기의 박열
[clearfix]
1902년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가난한 농민 박영수(朴英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 아명은 준식(準植)이었다고 한다. 박열의 집안은 본디 삼난가(三難家)[8]라고 불리는 명문가였으나 그의 대에는 몰락했다. 4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렸을 때는 서당에 다녔으나 지역에 첫 신식 학교인 함창보통학교가 세워지자 그곳에 입학했다. 이후로는 경성으로 유학(遊學),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해 수학했다.[9] 그러다 3.1 운동에 참여해 독립선언서 유인물을 돌리는 등의 활동을 했고, 그로 인해 퇴학당한 뒤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고학했는데 이때 그가 학업과 병행하면서 한 노동은 신문 배달, 제병 공장 직공,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식당 배달원, 야경꾼, 점원, 인삼 행상, 조선엿장수 등등 다양하다.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조선을 모욕하는 일본인을 응징하는 '혈권단'과 '의권단'을 조직했고, 고학생동우회와 흑양회를 거쳐 1920년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참여했다. 이때 한 대표적인 활동은 니가타 현 시나노가와 댐 공사현장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엄청난 혹사와 그로 인한 극심한 산업재해, 심지어 일본인 현장감독들에 의한 타살이 만연하다는 소문을 듣고 위장취업으로 잠입해 참상을 조사하고 발표한 것이다. 실제로 이곳의 노동자들은 새벽 4시부터 저녁 8,9시까지 하루 15시간 이상을 식사 시간을 빼놓고 1분의 휴식도 없이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며, 특히 힘든 일은 모두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그러면서도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70%밖에 안 됐고, 그나마도 하청 조합에 빼앗겨 실제 손에 쥐는 돈은 명목상 임금의 절반 이하였다.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결사대'라고 불리는 파수꾼들이 잡으러 다녔다. 그들은 칼과 권총을 늘 갖고 다니며 고문과 살상을 밥 먹듯 했다. 희생자들은 공사장에 그대로 암매장되거나 강물에 던져져 하류에서 틈만 나면 떠밀려온 사체가 발견되었고, 잡히지 않은 사람들도 가까운 민가가 10km도 넘게 떨어져 있는 고립된 산속에서 조난당해 굶어죽거나 얼어죽기 십상이었다. 밝혀진 대표적인 희생자들은 이렇다.

이렇게 100여명이 죽어나갔다는 자세한 상황을 조사한 흑도회는 그해 9월 간다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시나노가와 댐 조선 노동자 학살사건 조사회 연설회를 열었다. 일본 경찰은 오스기 사카에 등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조선인 운동가들을 연사로 나서지 못하도록 구속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 5백명, 1천여명의 인파가 운집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21년 정견 차이로 말미암아 김약수를 위시한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북성회와 박열을 위시한 아나키스트가 이끄는 풍뢰회(이후 흑우회로 개칭)로 분리되었다. 이후 일시 귀국하여 조선 최초의 아나키즘 단체인 '흑로회(黑勞會)'를 조직하였다. 흑우회는 기관지〈후데이센진(太い鮮人)〉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일본 당국이 '조선인 불온분자'를 일컫는 "불령선인(후테이센진)"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로, 일종의 말장난을 이용한 조롱이었다.

1923년 4월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를 위시해 여러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반일 활동을 더욱 적극으로 주도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착복한 장덕수와 사회주의자를 욕한 동아일보 기자 김형원을 사적제재했고, 민중화가 모치즈키 카츠라를 초청해 일본노동사를 듣고, 민중예술론을 주창한 가토 가즈오를 초청해 혁명사상을 배우기도 했다. 백정해방운동을 벌이던 조선형평사에 응원 전보를 보내고, 파업을 지도하다 투옥된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출옥 환영회를 개최하는 등. 쉽지는 않았는데 도쿄에서 검속 구류를 당한 횟수가 50회 이상이며, 미행이 따라붙었다. 박열이 사는 집 앞에 경찰서 파출소가 설치되어 출입하는 사람을 일일이 검문했다. 발간하는 잡지는 제본되어 나오자마자 검열당국에 압수되어 발매금지 처분을 받기 일쑤였다. 인쇄소를 비밀로 하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비밀반포도 해 봤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잡지를 만들어도 거의 팔 수가 없어 수입이 없고, 생계를 위해서는 인삼 행상 일을 했지만 형편은 늘 어려웠다. 광고비와 후원금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그러다 후원을 얻어 작은 식당을 열 수 있게 되었는데, 성사되었다면 생계와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러기 직전 관동대지진이 발발하고 체포되면서 이루지 못한다.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 학살을 피해 기타 잇키[10]에게 도움을 받아 피신하였으나 9월 3일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24시간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다음날 '경찰범 처벌령'으로 대체되었고, 결국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에 의한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매 계획이 알려졌는데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것을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였다. 이것을 '대역 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재판 과정에서 보인 모습도 비범한데 4가지 요구를 했다. 피고라고 부르지 말 것[11], 공판정에서 조선 예복 착용을 허락할 것, 재판장과 동일한 높이의 좌석을 마련할 것(이건 거절되었다), 선언문 낭독을 허락할 것이었다. 박열뿐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도 "조선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첫 공판 당시 박열은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 관대를,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였다. 이 옷은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인 조헌영 씨가 제공했다고 한다.[12] 그리고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재판 과정에서 낭독한 선언문을 일부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신체, 생명, 재산,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유린하는 조직적 대강도단인 국가의 틀 속에 있는 재판관이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릴 리가 없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재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선언하기 위해서다!
'소위 재판에 대한 나의 태도' 중.
지배자와 부자의 민중에 대한 수탈, 타민족에 대한 강대국의 지배, 피압박 민족인 조선 민족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백정에 대한 차별 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고참 노동자와 신참에 대한 압정 등, 극히 무의미하고 강렬한 우월감, 정복욕, 지배욕, 따라서 가장 우매하고 추악한 약육강식! 이것만이 인류의 빼놓을 수 없는 참된 본성이며 자연의 대법칙이다. 나는 너희들의 증오에 사랑을 가지고 보답할 만큼 천진난만하지 않다. 또한 나는 너희들의 이기심에 대해 양보를 할 정도로 미친 사람은 아니다. 나는 너희들의 폭행에 무저항으로 보답할 만큼 선량하지도 않다. 그것은 모두 추악한 위선이다. 이와 같이 비굴한 태도는 용서받지 못할 너희들의 죄악을 묵인하고, 그에 대해 암흑의 조력을 주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
'나의 선언' 중.
천황이란 국가라는 강도단의 두목이다. 약탈 회사의 우상이며 신단(神壇)이다. 나는 폭탄으로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가진 모든 계급 및 간판을 전멸시키려 했지만, 이것이 가능하지 않았기에 천황과 황태자를 투탄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첫째, 일본 민중에 대하여 일본 황실의 진실을 알리고 그 신성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함이며 둘째, 조선 민중에 대하여 일본 황실을 무너뜨려서 조선 민중의 독립에 대한 열정을 고취하기 위해서이며 셋째, 침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의 사회 운동에 대한 혁명적인 기운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 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일본에 대한 조선 민중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표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법률이나 재판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형법 73조[13]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없다. 그건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어느 불령선인이 일본의 권력자에게 주는 글' 중.
두 사람에게는 1926년 3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확정판결 11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결혼을 하였다.

이때 일본에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스캔들이 터지기도 했다. 일본 언론이 보도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도저히 중범죄자의 모습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황은 조선에서도 1926년 8월 25일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보도 내용을 보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였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회유하려고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해당 사진. 그뿐만 아니라 판사 타테마스 카이세이는 박열에게 홍차를 권하고 만년필을 빌려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판사 타테마스 카이세이를 대상으로 해 "원래 열정가로 유명했다"고 평했고 다테마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열이 '우리 가족이 가네코 후미코의 얼굴을 모르니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을 가족에게 보내고 싶다'고 여러 번 애원해서 촬영했다"며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박열과 후미코가 갑자기 이상한 모습을 해서 사진이 그렇게 촬영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진 원판을 그대로 버렸고 박열에게도 사진을 주지 않았는데도 왜 사진이 세상에 유포됐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1926년 8월 29일동아일보에 보도된 다테마스의 해명은 다음과 같았다.
그 사진은 1925년 4월 9일에 촬영한 것이다. 취조는 4월 7일 끝났지만, 그로부터 2일 후 박열이 "우리 형에게 보내겠다"고 해서 촬영한 것이다. "모리 대역범이라고 해도 형제 간까지 죄가 있겠느냐" 싶어서, 나는 다만 인간애로 사진을 촬영했을 뿐이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진을 준 일이 절대로 없다.

이 스캔들은 타테마스 판사가 해임되었고 정치 공세 탓에 1927년 당시 일본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총사퇴를 부를 정도로 파장이 컸다.[14]

이와는 별개로 일본 우익들은 이 사진을 가지고 아주 신나게 아래와 같은 가관인 찌라시를 작성해서 퍼뜨리는 등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박열과 가네코는 황실에 대해 위해를 가하고자 한 극악무도한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국사(國士) 이상으로 대우해 옥중 특별실에 기거하게 하며 결혼에 이어 동서 생활까지 시키고도 모자라 감형의 은전까지 베풀었다. 이런 조처를 취한 정부 자체가 '국적'이 된것이 아닌가?
불령선인 박열은 책을 들고 있는 반역자 가네코를 포옹하고 있다. 박열의 한쪽 팔은 책상에 턱을 괴고 있지만 다른 한쪽은 가네코의 젖가슴을 누르고 있다. 하루의 취조를 마친 후 타테마스는 예심 법정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두 사람만을 남겨놓은 채 변소에 간다는 핑계로 퇴정하여, 감시도 없이 문을 잠그고 약 30분 동안 내버려두었다. 해방된 30분 사이 인적 없는 법정 안에서 불령한 남녀가 무슨 짓을 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 후부터 박열과 가네코는 생리적인 어떤 기능이 조절되어 점차 유순해졌고, 그들은 타테마스를 이해자이자 동정자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

얼마 지나지 않은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인데 자살이라는 설과 당국의 암살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후미코의 시신은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수습하여 박열의 가족을 거쳐 경상북도 문경시에 안장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해방 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다.

한편 학계에서는 박열이 수감 도중인 1934년 전향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는 박열이 형무소장에게 제출했다고 알려진 공순상신서, 감상록 등의 사료와 이를 보도한 각종 신문기사에 따른 것이다. 특히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쓴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전 교수는 박열의 전향을 확실시하여 끝까지 지조를 지킨 가네코의 사상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이들 전향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저 역시 천황 폐하의 적자(赤子)로서…응분의 책무와 분담의 광영을 부여받은 것을 생각하면 매우 기쁘다"(1935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
  2. "신속히 내지(일본)인과 합체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고 빨리 내선융화를 완성하여 한일합병의 결실을 거둘 필요가 있다"(1938년 6월 제출 감상록 중)
  3. "전향 이후 일본인으로 살기로 맹세한 이상 사회가 받아들여주지 않더라도 나는 일본인으로 살고 싶다…이것은 폐하의 능위에 따른 것"(1945년 10월 27일 야마가타신문)[15]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는데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전향서의 문투가 박열의 문체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2. 문서들에 전향에 이르게 된 경위가 설명돼 있지 않고, 너무 갑작스럽게 발표됐다는 점.
  3. 박열의 사상전향은 그야말로 화젯거리이며 그만큼 일제의 선전성 역시 다분하였을 텐데 일간신문이나 대중 교양지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
  4. 감형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5. 출옥 후 김구 등 동지들이 별 반감 없이 박열을 환영, 추앙했다는 점이다.[16]

이처럼 그의 전향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2.2.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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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옥 당시 그를 환영하는 재일교포 인파
1945년 10월 27일 일본 아키다 감옥에서 22년만에 석방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 일본 패망 후 연합군 사령부가 모든 정치사상범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통고했지만 박열만은 일반 정치사상범과는 다른 대역범이라는 이유로 석방이 늦어졌는데, 재일본조선인동맹이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연합군사령부에 석방 탄원서를 넣는 등 애쓴 끝에 두 달여 늦게나마 출옥할 수 있었다. 세계 감옥사상 단일범죄로 최장기간 수감된 기록을 세운 상태였다.

이후 도쿄로 돌아와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였고 김구 선생에게 부탁받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 송환을 책임지기도 했다.[17] 이후 반공주의 노선의 신념을 밝혔고[18] 신조선건설동맹은 타 우파 단체들과 통합되어 재일조선인거류민단(지금의 민단)이 발족하였다. 그리고 박열은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다만 박춘금 항목에 의하면 당시 민단은 구 친일파나 파시스트들이 제법 많았고, 박열은 초대 단장이 되었지만 이들과 갈등 끝에 결국 민단을 나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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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양근환, 김구, 박열
1948년 8월 15일에 일시 귀국하였고 다음날인 8월 16일 대한민국 국회에 출석하여 '재일거류민단대표인'으로 재일동포에 대한 상황 보고를 하였다.

이듬해에는 영구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다 6.25 전쟁 도중 납북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진주한 북한 보위부가 납북했다고 한다. 자진 월북한 인사들도 있었고[19] 반동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북한군과 보위부 고위 관계자들이 와서 "선생, 이곳은 위험하니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다"라며 설득하여 북한으로 데려간 예도 있었다. 조소앙김규식, 이광수가 이러한 모시기 공작으로 북으로 넘어가게 된 예이고 박열도 북한이 연행한 예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박열은 주위의 피난 권고에도 "국민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 사람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며 서울에 잔류했다고 한다. 아마 사진에서도 보이듯 당시 김구양근환 등과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꽤 우려한 듯.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20]장을 맡고 있다가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1세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묘지는 평양 신미리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 묘지에 있다.[21] 남한에선 다른 납북자들이 언급 자체가 금기시된 사례가 많은데 박열은 그래도 해방 5년 이후 반공 노선을 탔던 만큼 자진월북한 게 아니라 북한 당국에게 강제로 납북당했다는 인식이 오랫동안 정설이었다. 그래서인지 박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짧게나마 이것을 보도했고 사회장 수준으로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22]

2.3. 장의위원회 구성

2.4. 추도위원회 구성

3. 학계연구

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연구자들이 박열에 대해 연구하였다.

3.1. 연구자

3.2. 평전


그 외 독립기념관 관장 김삼웅안재성이 쓴 평전이 존재하니 참고하여도 좋다.

3.3. 후세 다쓰지의 기록

4. 기타

4.1. 대중매체에서

4.1.1. 소설

4.1.2. 영화

4.1.3. 뮤지컬

5. 어록

세상에 어떠한 것이 정말로 무서워해야 할 것인가? 그것을 나는 놈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생각건대 그들이 내 목을 단두대에 걸 수 있을지언정 내 손으로 뿌린 씨앗을 태워 부술 순 없을것이다. 일본에게 입힌 상처를 낫게할 수는 없다. 내가 뿌린 씨앗은 후세에 남아 딱딱한 지각을 깨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그리고 종국에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승자다. 영원한 승리자다.
알려진 명언 중 가장 유명한 명언이다.

6. 관련 문서


[1] 음력 2월 3일[2] 1906년 8월에 지금의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로 이주했다.[3] #[4] 박열을 완전한 아나키스트로 보기는 힘들다. 박열이 아나키스트 활동을 했다고 알려진 1920년대에 대해서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에서는 그의 말, 행동을 보고 박열에 대해 ‘아나키즘과 염세주의가 뒤섞인 것’이라 서술하였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해외 여론에서마저 ‘염세주의’라고 묘사하였다. 또 한국의 일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기 민망하다고 할 정도로 아나키즘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가진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되는 여론이 형성되는지라 박열이 아나키스트라는 여론에 대해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말도 있다. 단, 영화 박열을 가지고 실제 인물 박열을 평가하는 사례도 있으니 섣부른 결론은 내릴 수 없다.##[5] 제수가 되는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를 일본에서 수습해 선산에 안장해준 이들이다.[6] "아들을 나라에 바쳐라"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스스로 육군사관학교에 임관하여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출처1] 이호룡, 제45권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99쪽에서 재인용.[8] 아들 다섯을 낳기도 어렵고, 다섯 아들이 급제하기도 어렵고,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그 모두를 이룬 집안이라는 뜻. 20대조 5형제가 모두 급제해서 붙여진 별명이다.[9] 사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 공부하라고 세운 학교라, 기껏해야 일본 기준으로는 실업교육 수준의 내용이나 가르치는 학교였다. 수업 내용은 저급한 것도 모자라 황국신민화 교육과 우민화 교육의 반복으로, 일본어 보급을 위한 일본 역사와 지리 등으로 채워졌고 영어나 상업 과목은 아예 없었다. 조선인에겐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또 조선인의 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의 중학교는 학제 자체가 달라서, 조선인은 그 이상의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고등전문교육을 받을 길이 아예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게다가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교외 활동은 물론 교내에서도 집단 활동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적개심이나 경쟁심을 아예 근절하기 위해 운동회에서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같은 단체 대항 시합을 하는 것마저 금지되는 숨막히는 곳이었다.[10] 아이러니한 게 기타 잇키는 국가사회주의자, 즉 파시즘의 거두였다. 다만 기타 잇키는 사상적으로 단순히 파시스트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 복잡한 사람이다. 기타 잇키 본인이 분명하게 사회주의자였고 아나키스트들과 사상적으로 교류했으며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했고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비판하고 최후에는 중일전쟁을 막겠다며 중국으로 건너가려던 와중 잡혀서 처형되는 등 여려모로 복잡한 인물.[11] 자신은 죄인이 아니니 법정에서 천황제 국가를 대표하는 재판장과 대등한 입장에서 자기주장을 펼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소치라(그대)'라고 불렸고 박열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 사법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12] 조지훈은 수필인 〈나의 시작(詩作) 노트〉에서 "박열이 입었던 사모관대를 집에서 직접 보고 만져 본 적이 있다"고 회고하였다.[13] 당시 일본 형법 기준 '절대 신성한 일본 황실에 대한 반역사건'. 천황, 태황, 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혹은 황태손에 대하여 위해를 가하거나 또는 가하고자 했던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었다. 단심제로, 항소와 상고가 불가능했다.[14] 정확히는 야당이 1927년 1월에 내각탄핵안을 제시했으나 그 이전인 1926년 12월에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여 국상 중에 정쟁을 일으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야 3당의 당수가 모여 휴전을 합의함에 따라 내각불신임이 벌어지진 않았다. 다만 이전부터 예산안도 와카쓰키 레이지로 본인의 퇴진을 야당과의 협상 조건으로 내걸어 통과시켜야했을 정도로 내각의 입지는 불안했고, 이후 3월에 쇼와 금융공황이 터져서 결국 내각총사퇴하게 되었다.[15] 이상 서경덕 칼럼에서 인용함 #[16] 참고자료: 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이학사, 2008, 287~289쪽[17] 세 사람의 유해는 현재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18] 이게 전향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아나키즘 사상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역시 권위주의적 독재이며 우익적 관점과 무관한 아나키스트적 반공의식이었는지는 현재로선 미지수. 실제로 러시아 내전 당시 적군/소비에트 세력은 우크라이나 등지의 아나키스트들 또한 학살하거나 억압하였으므로 아나키즘적 신념에서 반공(정확히는 반소련-반마르크스레닌주의-반스탈린주의) 성향을 띠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본래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 신념에 따른 것일수도 있다. 연구들에 따르면 아나키즘 수용 전이나 후나 박열의 기본 사상은 민족주의였기 때문이다.[19]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자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케이스 혹은 대한민국의 파시즘스러운 체제보다는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낫다고 판단한 케이스. 당시만 해도 북한은 아직 김일성 1인 독재가 아닌 여러가지 파벌이 횡으로 연대한 연립정권 형태였다. 이후 김일성이 본인한테 쏟아지는 전쟁 책임을 다른 파벌에게 물려 대대적인 숙청을 할 때 같이 갈려나간다.[20] 이 단체에 대한 내용은 북한/정치 문서 참조.[21]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위패가 안장되어 있다.[22] 박열의 납북 후 행적[23] 박열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 독립운동 자체가 보통 성격으로 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었던지라 당연한 일이다.[24] 1927년생으로, 생전 박열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25] 이 초등학생들의 편지가 방송 말미에서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