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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3:51:29

이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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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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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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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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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각(李覺)
자 / 호 덕윤(德潤) / 일몽(一夢)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1]
출생 1891년 2월 17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2]
사망 1927년[3] 7월 4일 (향년 36세)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88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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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항진은 그의 조카이다.

2. 생애

이수택은 1891년 2월 17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4]에서 아버지 이정환(李珽煥)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기(金沂)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약목면 소재 동락의숙(同樂義塾)과 경성부 소재 보혜학교(普惠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13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항일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했으나 동지들이 체포되어 활동을 중단하였으며, 같은 해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채기중·한훈·유창순·유장렬 등과 더불어 광복단(光復團)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금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박중화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같은 해 11월 10일 길림성 길림현에서 김원봉·곽재기·이종암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으나, 그해 겨울 모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후 국내에서 자금 조달과 무기 관리를 맡았으며, 1920년 3월 곽재기·이성우(李成宇) 등과 더불어 밀양군김해군 하계면(下界面)[5]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려고 폭탄권총을 밀반입하려다가 발각되자,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1920년 12월 이종암·구영필(具榮泌)·김상윤 등과 더불어 밀양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모의하고, 같은 달 27일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순사부장(巡査部長)에 상처를 입혀 죽게 하였다. 이 사건 직후 피신한 그는 부산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벙어리 행세를 하여 7일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계속 의열단원으로서 활동하던 중 이종암·김상윤·서상락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1924년 1월 2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및 다이쇼 8년(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19일경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끝내 그해 7월 4일 칠곡군 자택에서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같은 달 10일에는 왜관면 각 사회단체의 연합장으로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일제 당국의 금지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8.15 광복1951년 12월 9일 사회부에서 그의 유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7년 5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1세 수(壽) 항렬.[2] 인근의 매원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항진도 이 마을 출신이며, 이수일은 관터마을 출신이다.[3]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24년에 별세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4]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5] 1928년 진영면으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