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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2:06:52

매일신보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일제강점기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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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每日申報
<colbgcolor=#fff,#1F2023><colcolor=#b0313f,#ce4e5c> 국가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제국령 조선
전신 대한매일신보
후신 서울신문
모기업 경성일보(1910~1938)
창간 1910년 8월 30일
정간 1945년 11월 10일
설립 및 운영 주체 파일:고시치노키리.svg 조선총독부
상장 여부 상장 기업
종류 기관지,(機關紙),

1. 개요2. 역사3. 역대 경영진4. 자매지5. 여담6. 관련 문헌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1945년 8월 15일 매일신보.jpg
<colbgcolor=#ffffff,#1F2023> 1945년 8월 15일 자 《매일신보》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조선어, 일본어판 기관지였으며 이외에 일어판인 《경성일보》와 영어판인 《서울 프레스》도 있었다. 후신은 《서울신문》이다.

2. 역사

이 신문의 전신은 양기탁, 어니스트 베델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단 하루만에 동시에 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제호에서 '대한'을 뺀 뒤 경성일보의 자매지로 재출범하여 1910년 8월 30일자부터 발행을 시작했다. 창간 초기에는 경성일보와 경영 및 편집업무를 공유해왔고, 초기에는 경성부 중부 포전 병문 이궁가의 2층짜리 양옥을 쓰다가 태평정 1정목 35번지를 거쳐 동년 12월 31일부터 대화정에 있던 《경성일보》 사옥으로 들어갔다.

일제에게 강제로 인수 합병당한 신문사이다. 우선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베델양기탁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이후[1] 약화된 상태에서 한일합방 이후 인수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가 국채보상운동 횡령 사건을 조작한 다음 베델과 양기탁의 위치를 흔들었고, 이후 베델은 일본과 영국의 비밀 외교로 영국영사관에서 체포당해 옥살이를 살았기 때문.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가장 반일적인 논조를 가졌던 《대한매일신보》였던 만큼 일제에겐 큰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신문을 인수하여 오히려 이를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바꾼 것도 일제이다.

1920년 민족계 신문인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의 창간으로 이들과 논조에서 대립했고, 1921년부터 경성일보의 부설 편집국으로 승격한 뒤 1938년부터 《경성일보》로부터 법인이 분리됐다. 1939년에는 《경성일보》 근처 1,038평짜리 부지에 4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한 뒤 1940년에 조선 및 동아일보의 폐간으로 기자들 및 영업권을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해방 이후에 저 위의 이미지(8월 15일호)[2]를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가 해체되면서 좌익 계열 사원들이 자치 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던 중, 미군정과 충돌을 빚어[3] 그해 11월 10일 정간되었다.

이후 1945년 11월 22일 속간하면서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었지만, 1959년 3월 23일에 갑자기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로 이어지던 지령을 폐기했다.

1998년 11월 11일에는 《대한매일신보》 지령은 다시 추가했다. 그러면서도 친일 기관지 시절이던 《매일신보》 시절은 자신들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매일신보》 지령은 빼고 계산하는 괴상한 계산법을 선보였다. 일종의 친일 역사 세탁. 2020년 현재까지도 이 희한한 지령 계산법을 쓰고 있는 중이다.

1910년 ~ 1945년 8월 14일까지 매일신보

3. 역대 경영진

1938년 분리 이전까지 본사의 사장은 경성일보 사장이 맡았다. 대체로 일본인이 사장을 맡았으나 분리 이후에는 조선인도 사장을 맡았다.
- 출처: 《서울신문 100년사》 p. 284 ~ 289, 관훈클럽 《관훈저널》 - 〈제2의 조선총독부: 경성일보 연구〉

4. 자매지

5. 여담

6. 관련 문헌

7. 관련 문서



[1] 양기탁은 이후 동아일보 창간 멤버가 된다.[2] 아베 노부유키 조선 총독의 논고가 실려 있다. '경거를 엄계하야 냉정침착하라'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논고에서는, 직접적으로 조선인에게 경고하지는 않았지만 내지(일본)와 조선의 긴밀한 관계대동아전쟁 협력을 상기시키면서 경거망동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지 말라고 설득하고 있어,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이 맞이할 고된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3] 해방일보로 제호를 바꾸려다 저지당했다. 그러나 또다른 《해방일보》라는 신문사도 있는데, 이는 조선 공산당 기관지. 이 《해방일보》는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탄압받아 정간당했다.[4] 1928년까지는 '편집장'이었다.[5] 1918년 8월 20일자 사설 <귀족부호의 빈민구제에 대하여>를 통해 조선귀족 및 부호들을 비판하다가 한달여 뒤 경질됨.[6]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 편집국장 등을 맡다가 1934년에 매일신보로 복귀함.[7] 이미 음독 당시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기사가 실린 바 있기는 하나 그 시절에도 기레기들은 있었고 , 사생활 보호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스캔들 등은 최대한 과장 보도하던 시절이었다. 사망했으면 사망기사와 함께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후속편으로 나왔을 텐데 그것이 없으므로 어찌어찌 소생한 것으로 보이긴 하나, 그 이후부터 자세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다.[8] 다만 이 신문은 국한문 중에서도 한자가 많이 쓰인 편이기에, 국한문이 아니라 한문에 한글을 끼얹은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9] 20-30년대 신문 중 조선일보가 가장 순한글 위주였으며 《동아일보》는 매일신보 수준으로 한자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