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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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每日申報 | |||
<colbgcolor=#fff,#1F2023><colcolor=#b0313f,#ce4e5c> 국가 | 일본 제국령 조선 | ||
전신 | 《대한매일신보》 | ||
후신 | 《서울신문》 | ||
모기업 | 《경성일보》 (1910~1938) | ||
창간 | 1910년 8월 30일 | ||
정간 | 1945년 11월 10일 | ||
설립 및 운영 주체 | 조선총독부 | ||
상장 여부 | 상장 기업 | ||
종류 | 기관지,(機關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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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ffffff,#1F2023> 1945년 8월 15일 자 《매일신보》 |
2. 역사
이 신문의 전신은 양기탁, 어니스트 베델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단 하루만에 동시에 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제호에서 '대한'을 뺀 뒤 경성일보의 자매지로 재출범하여 1910년 8월 30일자부터 발행을 시작했다. 창간 초기에는 경성일보와 경영 및 편집업무를 공유해왔고, 초기에는 경성부 중부 포전 병문 이궁가의 2층짜리 양옥을 쓰다가 태평정 1정목 35번지를 거쳐 동년 12월 31일부터 대화정에 있던 《경성일보》 사옥으로 들어갔다.일제에게 강제로 인수 합병당한 신문사이다. 우선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베델과 양기탁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이후[1] 약화된 상태에서 한일합방 이후 인수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가 국채보상운동 횡령 사건을 조작한 다음 베델과 양기탁의 위치를 흔들었고, 이후 베델은 일본과 영국의 비밀 외교로 영국영사관에서 체포당해 옥살이를 살았기 때문.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가장 반일적인 논조를 가졌던 《대한매일신보》였던 만큼 일제에겐 큰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신문을 인수하여 오히려 이를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바꾼 것도 일제이다.
1920년 민족계 신문인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의 창간으로 이들과 논조에서 대립했고, 1921년부터 경성일보의 부설 편집국으로 승격한 뒤 1938년부터 《경성일보》로부터 법인이 분리됐다. 1939년에는 《경성일보》 근처 1,038평짜리 부지에 4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한 뒤 1940년에 조선 및 동아일보의 폐간으로 기자들 및 영업권을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해방 이후에 저 위의 이미지(8월 15일호)[2]를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가 해체되면서 좌익 계열 사원들이 자치 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던 중, 미군정과 충돌을 빚어[3] 그해 11월 10일 정간되었다.
이후 1945년 11월 22일 속간하면서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었지만, 1959년 3월 23일에 갑자기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로 이어지던 지령을 폐기했다.
1998년 11월 11일에는 《대한매일신보》 지령은 다시 추가했다. 그러면서도 친일 기관지 시절이던 《매일신보》 시절은 자신들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매일신보》 지령은 빼고 계산하는 괴상한 계산법을 선보였다. 일종의 친일 역사 세탁. 2020년 현재까지도 이 희한한 지령 계산법을 쓰고 있는 중이다.
1910년 ~ 1945년 8월 14일까지 매일신보
3. 역대 경영진
1938년 분리 이전까지 본사의 사장은 경성일보 사장이 맡았다. 대체로 일본인이 사장을 맡았으나 분리 이후에는 조선인도 사장을 맡았다.- 고문
- 도쿠토미 소호 (1910 ~ 1918)
- 대표취체역(대표이사) 사장
- 발행인 겸 편집인[4]
- 편집국장
- 나카무라 겐타로 (1921 ~ 1922)
- 나가노 나오히코 (1922 ~ 1924)
- 즈노타 히로시 (1924 ~ 1926)
- 가사카미 시즈노부 (1926 ~ 1929)
- 김상회 (1929 ~ 1930)
- 편집국장대리
- 이익상 (1930 ~ 1935)
- 출처: 《서울신문 100년사》 p. 284 ~ 289, 관훈클럽 《관훈저널》 - 〈제2의 조선총독부: 경성일보 연구〉
4. 자매지
- 《월간매신》 (1934 ~ 1935)
- 《국민신보》 (1938년 창간)
- 《매일신보사진특보》 (1939년 창간)
- 《새소식》 (1945년 창간)
5. 여담
- 문학평론가 임종국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를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 관보》와 함께 참조한 자료이다. 현재에도 어떤 인사에 대한 친일 행적 관련 자료를 예시할 때 자주 매일신보 내용이 인용, 언급된다.
- 한국 언론 최초의 여기자인 이각경이 활동했다. 여성 계몽 기사, 가정 방문 기사, 인터뷰 등을 썼으나 1921년 기사를 끝으로 기사를 쓰지 않아 한동안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1925년 여러 언론 매체에서 수면제를 치사량이나 복용했다는 기사들이 실린 후 제적부 기록에는 1936년 사망했다고 나와 있다.[7] #
- 흔히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창간, 폐간 전후로는 한글 신문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고, 이 사실이 거짓이라는 말 또한 퍼져 있지만, 관점에 따라 전자와 후자 둘 다 옳은 말이다. 《매일신보》는 국한문(한문 + 한글)으로 작성되었고 일본어가 약간 섞여있었다. 따라서 "순한글로 작성된 신문"이란 기준으로는 한글 신문이라 할 수 없으며, 단순히 한글이 쓰인 신문이라면 한글 신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8][9]
-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에 대해 직접적으로 처음 소개한 주요 언론 매체로 한동안 추정되어 왔었다.# 이후에 최초로 소개한 언론 매체는 1906년(광무 10년)에 소개한 《조양보》라는 잡지로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세이구스비아'라고 소개했음이 밝혀졌다. 일본식 발음에 가깝게 소개하긴 했지만, 친일과는 상관없고 1907년(광무 11년)까지 12권을 발행하고 폐간되어서 《매일신보》에 비해선 규모가 작은 매체라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듯 싶다. 그리고 이후 《소년》이란 잡지에서 1909년에 그나마 영어식 표기에 가깝게 '쇠익쓰피여'라고 소개했다. 《소년》이란 잡지도 1908년에서 1911년까지 23권을 끝으로 폐간되었으니 결국 《매일신보》가 최초는 아니다. 대형 언론 매체 중에서는 《매일신보》가 최초로 소개했을 수도 있긴 하지만.(애초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1920년에야 창간되었다.)
- 의외로 꽤 많은 소설이 연재되어 화제가 되었다. 1917년 이광수의 《무정》, 《개척자》가 대표적이다. 1938년 최린이 사장이 된 이후로 월탄 박종화가 역사소설가로 거듭나 《금삼의 피》 등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2년부터 1930년까지는 번안, 번역 문학 연재가 주를 이루었다. "일반 대중을 위한 번역물들은 국문체로 연재했지만, 지식인을 위한 번역물들은 국한문체로 발표되었다." 장편소설 모집, 즉 일종의 신춘문예도 행했는데 최대 걸작은 1930년대 후반 박계주의 작품 《순애보》이다. 《매일신보》는 대중 취향의 소설을 주로 연재했지만, 역사소설의 경우 지식인 독자를 겨냥한 국한문체로 연재되었다. #
6. 관련 문헌
7. 관련 문서
[1] 양기탁은 이후 동아일보 창간 멤버가 된다.[2] 아베 노부유키 조선 총독의 논고가 실려 있다. '경거를 엄계하야 냉정침착하라'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논고에서는, 직접적으로 조선인에게 경고하지는 않았지만 내지(일본)와 조선의 긴밀한 관계와 대동아전쟁 협력을 상기시키면서 경거망동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지 말라고 설득하고 있어,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이 맞이할 고된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3] 해방일보로 제호를 바꾸려다 저지당했다. 그러나 또다른 《해방일보》라는 신문사도 있는데, 이는 조선 공산당 기관지. 이 《해방일보》는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탄압받아 정간당했다.[4] 1928년까지는 '편집장'이었다.[5] 1918년 8월 20일자 사설 <귀족부호의 빈민구제에 대하여>를 통해 조선귀족 및 부호들을 비판하다가 한달여 뒤 경질됨.[6]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 편집국장 등을 맡다가 1934년에 매일신보로 복귀함.[7] 이미 음독 당시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기사가 실린 바 있기는 하나 그 시절에도 기레기들은 있었고 , 사생활 보호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스캔들 등은 최대한 과장 보도하던 시절이었다. 사망했으면 사망기사와 함께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후속편으로 나왔을 텐데 그것이 없으므로 어찌어찌 소생한 것으로 보이긴 하나, 그 이후부터 자세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다.[8] 다만 이 신문은 국한문 중에서도 한자가 많이 쓰인 편이기에, 국한문이 아니라 한문에 한글을 끼얹은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9] 20-30년대 신문 중 조선일보가 가장 순한글 위주였으며 《동아일보》는 매일신보 수준으로 한자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