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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1935년 4월 16일 자 《경성일보》 | |||
1924년 이후 경성일보사 사옥[1] | |||
국가 | [[대한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일제강점기 조선 | ||
소재지 | 경기도 경성부 대화정 (現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 경기도 경성부 태평통1정목 31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10) → 경기도 경성부 태평통1정목 25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4) | ||
창간 | 1906년 9월 1일 | ||
종간 | 1945년 10월 31일 | ||
설립 및 운영주체 | 한국통감부 → 조선총독부 | ||
종류 | 기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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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6년(광무 10년) 9월 1일 창간하여 1945년 12월 11일까지 발행한 신문.2. 역사
《한성신보》와 《대동신문》을 합병하여 1906년(광무 10년) 9월 1일에 창간한 통감부 ·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이다. 1945년 12월 11일까지 발행되었다.[2] 처음엔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을 동시에 발간했으나 한국어판은 1907년(광무 11년) 4월 21일에 발간을 중단했다.1920년대 민간지가 발행되기까지 독점적 지위를 누렸으며, 최대의 조선인 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3]까지 인수해 《경성일보》의 자매지인 《매일신보》로 개편해 조선총독부의 한국어판 기관지로 변모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시스템을 보면, 일본어로 '경성일보', 국한문으로 '매일신보', 영문으로 'The Seoul Press'[4]의 3개지가 발행되었다.
이한수가 펴낸 《친일 매일신보·경성일보 대해부》에 따르면, 당대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민간지에 비해 방대한 규모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며, 1921년부터 《매일신보》만 전담하는 편집국을 따로 두고 1938년에 그 신문을 독립법인으로 분사시켰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가 끝나면서 이 신문도 자연히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일본 본토에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이 들어서서 이 소식을 조선에 있는 일본인에게도 전해야 했으나, 조선인 직원들이 일본 경찰과 조선총독부의 으름장에도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으며 태업을 하는 바람에, 결국 신문사 사장이 손글씨로 쓴 신문을 등사해서 일일이 서울 곳곳에 붙이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경성일보에는 미군정으로부터 관리인이 파견되었고, 사장은 동년 10월 1일까지 미군정의 보호를 받으며 계속 신문을 발행했으나, 결국 조선인 종업원에게 신문사를 이양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945년 9월경, 조선일보는 옛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로부터 압수해서 경성일보에 양도했던 윤전기를 반환받고자 했으나, 미군정 측이 이를 거부하고 우선 매일신보의 시설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 윤전기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동아일보는 이후 미군정의 허락으로 경성일보의 시설 일부를 이용해서 신문을 인쇄할 수 있었다. 1946년 경성일보의 나머지 시설들은 한성일보에 귀속되었음이 확인된다.[5] 폐간 전까지 경성일보에 실린 기사들은 "일본의 패전 원인은 통수부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담화 내용을 싣거나, "조선신궁은 전부 헐어 불사르고 땅은 한국 정부에 돌려 보내도록 규정" 등의 내용을 전하는 등, 신문의 주 독자층인 히키아게샤들에게는 굴욕적인 내용들이었다. 일본어로 간행되긴 했지만 이미 신문 발행인들이 한국인으로 바뀐 상태였으니 이러한 논조 변화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초창기의 사옥은 경성부 대화정에 있다가 1914년 태평통 1정목(현 태평로)에 있는 구 대한제국 경위원 터[6]로 옮겼다. 그러나 1923년 기존 사옥이 화재로 절반이나 소실되자, 그 자리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터에 위치했던 경성부청이 이쪽으로 옮겨지기 위한 부지로 선정되었고, 이에 경성일보사는 경성부와 협의하여 인근 땅(현 한국프레스센터 터)에 기존 건물을 철거한 후 그 자리에 신축해서 1924년에 완공을 보았다. 그 건물은 현관이 작은데 의열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얘기가 있었다. 1945년 8.15 광복 뒤 미군정으로부터 관리인이 파견된 후 이듬해 '서울공인사'가 차려져 《조선일보》 등의 인쇄를 도맡았고, 《한성일보》도 이 건물을 썼다가 1950년 6.25 전쟁으로 안재홍 사장이 납북당해 사실상 문을 닫았다. 1953년부터 대한공론사(현 헤럴드)가 차지했다가 1982년 그 자리에 한국프레스센터 건물을 신축하면서 철거됐다.
화재 등으로 원본 일부가 소실되어 1912년도 일부와 1915년 9월부터 1945년까지만 남아 있다.
3. 역대 경영진
- 고문
- 도쿠토미 소호 (1910~1918)
- 대표취체역(대표이사) 사장
- 이토 유칸 (1906~1908)
- 오오카 쓰토무 (1908~1910)
- 도쿠토미 소호 (1910)
- 요시노 다자에몽 (1910~1914)
- 아베 미쓰이에 (1914~1918)
- 가토 후사구라 (1918~1921)
- 오하라 토시타케 (1921, 직무대행)
- 아카츠키 사토오 (1921~1924)
- 소에지마 미치마사 (1924~1927)
- 마츠오카 마사오 (1927~1931)
- 이케다 히데오 (1931~1932)
- 도키사네 아키호 (1932~1936)
- 다카다 도모이치로 (1936~1938)
- 미다라이 다쓰오 (1938(직무대행) / 1939~1942)
- 다구치 노리카즈 (1938~1939)
- 타미야 타이헤이 (1942~1945)
4. 자매지
- 경일소국민신문 (1938~1945): 구 경일소학생신문.
- 연성화보
- 조선연감 (1935~1945)
5. 참고 자료
[1] 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2] #[3] 《서울신문》의 전신.[4] 희한하게 '서울'이라는 조선어 이름을 그대로 싣고 있는데, 이는 1905년(광무 9년)에 영국인이 세운 신문사를 일본인이 인수해 그대로 운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구미권 외국인들에게 이 명칭이 일본어 이름 '게이조'보다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계속 저 이름을 유지한 측면도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황성'같이 대놓고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옛 명칭이 아니면 이런 식의 명칭 사용은 맥락에 따라 용인했다.[5] 한성일보는 한때 대한민국의 5대 일간지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으나, 1950년 6.25 전쟁으로 사장 안재홍이 납북되면서 다시는 속간되지 못했다.[6] 현 서울도서관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