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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의 시도등록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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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통계국 청사 | 경향신문 | 서울시립대학교 구 본관 및 교사 |
경향신문 京鄕新聞 | ||
<colbgcolor=#2c4a79><colcolor=#fff> 국가 | [[대한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창간 | 1906년 10월 19일 | |
폐간 | 1910년 12월 30일 | |
본사 소재지 | 한성부 남부 명례방 종현 성당[1] | |
설립 | 천주교 조선대목구[2] | |
발행인 겸 주필 | 플로리안 드 망주[3] | |
편집 겸 실무 | 김원영 | |
서울특별시 시도등록문화재 제2호 | ||
경향신문 京鄕新聞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 |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 | |
수량 / 면적 | 1건 220점 | |
지정연도 | 2020년 11월 5일 | |
시대 | 1906년 ~ 1910년 |
<colbgcolor=#2c4a79> 《경향신문》[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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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시기의 신문. 현재 대한민국에서 발행되는 종합일간지 《경향신문》이 이 신문의 계승을 표방하며 창간되었다.2. 상세
1906년(광무 10년) 10월 19일에 천주교 조선대목구에서 창간했다. 《경향신문》을 만든 목적은, 당시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에 저항하여 일어난 애국계몽운동에 힘을 보태면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 및 시사 문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발행인과 주필은 프랑스인 신부 플로리안 드 망주(Florian Demange)가 겸했다. 왜냐하면 드 망주 신부의 치외법권을 방패막이삼아 통감부의 간섭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京鄕新聞)' 뜻은 '서울(京)과 시골(鄕) 백성들 모두에게 소식을 전한다'이다. 《경향신문》 측에서는 창간사를 통해 신문 이름의 뜻을 설명하면서, "서울이든 시골이든 상관없이 공정한 보도와 지식 보급이 우리 신문의 사명"이라 했다.
처음에는 타블로이드판 4면과, 부록 《보감》을 발매했다. 《보감》은 국면 크기의 8면이며, 타블로이드 판 신문 본지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내용 위주였다면, 《보감》은 조금 더 천주교 신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교리 논설, 법률해설, 천주교회 역사 등)이 대부분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7년(융희 원년) 10월 18일 제53호부터는 지면 크기를 배대판으로 늘려서 지금과 같은 신문 크기로 바꾸었다. 지방 소식 취재 및 보급은 전국 각 교구에 파견된 신부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발행 당시 독자들에게 평이 좋았으며, 특히 논설은 《대한매일신보》에 까지 전재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렇게 점점 구독자가 늘어나 1907년에는 정기구독자만 4,2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인을 발행인으로 두고 민족적 논조를 싣는 신문을 일제가 좋게 볼 리 없었다. 결국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 12월 30일에 제220호를 끝으로 폐간당했다. 그리고 그 다음 제221호부터는 부록 《보감》을 《경향잡지》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했다. 《경향잡지》는 오로지 종교적인 내용만을 다루었으며 매달 2번 발간했다.
현재 《경향신문》은 광복 이후인 1946년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창간한 신문이다. 현 《경향신문》은 구 《경향신문》의 역사를 계승한다고 표방했다. 다만, 창간사에서 과감하게 "속간(續刊)이 아닌 창간"이라고 규정했으므로, 현 경향신문의 역사는 1946년부터 센다.
[1] 現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명동2가)[2]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3] 프랑스인 신부. 한국명은 안세화(安世華).[4] 첫 번째 사진 출처 - 국립한글박물관.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