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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446e><colcolor=#fff> 국가 | [[대한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소재지 | 한성부 중부 수진방 수진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봉로 43) | ||
창간 | 1909년 6월 2일 | ||
종간 | 1910년 8월 21일 | ||
설립단체 | 대한협회 | ||
사장 | 오세창 | ||
총무 | 장효근 최영목 | ||
종류 | 일간신문 |
<colbgcolor=#07446e> 《대한민보》 창간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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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9년(융희 3년)에 대한협회에서 창간한 신문.2. 역사
1907년(융희 원년) 8월에 통감부에서 애국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약 3개월 뒤에 남궁억 등이 대한자강회를 계승을 표방한 대한협회를 세웠다.대한협회에서는 1908년(융희 2년)부터 월간으로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했다. 그러다 1909년(융희 3년)에 《대한협회회보》를 종간하고 같은 해 6월 2일부터 《대한민보》를 창간하여 발행했다. 《대한협회회보》와는 달리 《대한민보》는 일간이었다. 글은 국한문혼용체로 썼다. 타블로이드 판 4면마다 1단에 45행 씩 6단을 사용했으나 나중에 7단으로 바꾸었다.
신문의 목표는 민족 단결과 지식 보급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일진회가 발표한 〈한일병합성명서〉에 대해 비판하는 등 친일단체와 맞서면서 항일운동에 힘썼다.
<colbgcolor=#07446e> 1910년(융희 4년) 6월 23일 자 《대한민보》 만평. 통감부 깃발을 든 일본 관료 양 옆의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만평을 그린 화가 이도영은 "한쪽에서 울며 청하고, 한쪽에서 구걸하는 상황이 참 가관이다"라고 적어두었다. |
1910년(융희 4년) 6월에는 연재 소설 《금수재판》을 실었는데 이 소설의 내용 역시 반일 풍자적이었다. 같은해 8월 29일에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다음날 8월 30일부터는 '대한(大韓)' 두 글자를 떼고 《민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인해 불과 그 하루 뒤인 8월 31일에 폐간당했다. 마지막 호수는 357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