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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5:42:43

신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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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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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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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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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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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2년[1]
경기도 양근군
(현 경기도 양평군)[2][3]
사망 1945년[4]
중화민국 충칭시
본관 고령 신씨[5]
이명 이동화(李東華)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6]
상훈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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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892년 경기도 양근군(현 양평군)에서 아버지 신병휴(申炳休, 1854 ~ ?)와 어머니 밀양 박씨(1854 ~ 1891)[7]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정2정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46번지[8]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신악의 집안은 직계 5대 내에 고조부 신현록(申顯祿, 1743. 7. 27 ~ 1789. 4. 24) 외에 4대가 벼슬길에 나아간 당대의 명문가였다. 그의 아버지 신병휴는 1887년(고종 24)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한 뒤 사간원 대사간(정3품)과 병조 참의(정3품) 등에 올랐고, 조부 신만구(申萬求, 1806. 12. 26 ~ 1884)는 1840년(헌종 6) 식년 진사시에 3등 68위로 입격한 뒤 음서로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정3품)에까지 올랐다. 생조부 신헌구(申獻求, 1823. 5. 7 ~ 1902)는 1862년(철종 13) 정시 문과에 병과 5위로 은사(恩賜) 급제한 뒤 예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증조부 신응모(申應模, 1784. 9. 21 ~ 1864)는 1822년(순조 22) 식년 진사시에 2등 7위로 입격한 뒤 음서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올랐다. 5대조 신택권(申宅權, 1722 ~ 1802)은 1763년(영조 39) 증광 생원시에 2등 25위로 입격한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에 올랐다.

한편, 신악은 일찍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19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후 황포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국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의열단 활동을 위하여 국민혁명군에서 전역하고, 1935년 4월 강소성 강녕현(江寧縣) 상방진(上坊鎭)[9] 황룡산(黃龍山) 기슭 천녕사(天寧寺) 경내에 설치된 의열단의 한국혁명군 간부양성훈련반의 교육주임, 중국군관학교 간부훈련단 군사부장 및 제1기 교관 등을 맡아 군사훈련에 전념하였다. 또한 조선혁명당에 입당하여 중앙검사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6년에 3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서기부 재무과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전쟁 중이던 우한시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그는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이에 가입하여 중국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1940년 그는 조선의용대 본부 기요조장(機要組長)에 임명되었다가 1941년에는 김원봉 휘하의 부대장(副隊長)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유로 한국광복군에 통합되자 그는 한국광복군 중교(中校)로서 제1지대에 편입되어 대부(隊附)의 직을 맡았고, 이후에는 제1지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후 광복군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채 보지 못하고 중화민국에서 별세하였다. 다만, 고령신씨대동보 권15 303쪽에 따르면, 1942년 봄에 중화민국 충칭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고령신씨대동보 권15 303쪽에는 1890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독립유공자 공훈록[3] 용의조선인명부에는 평안도 숙천도호부 우상방 도덕리(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가 출신지 겸 본적으로 기재되어 있다.[4] 고령신씨대동보 권15 303쪽에는 1942년 봄에 충칭에서 전사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귀래정공파 24세 우(雨) 항렬. 족보명은 신창우(申彰雨).[6]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7] 박기회(朴氣會, 1817 ~ ?)의 딸이다. 박기회는 1858년(철종 9) 식년 진사시에 3등 16위로 입격한 뒤 안산군수(安山郡守, 종4품)와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종4품) 등을 역임했다.[8] 현재 이 지번에는 돈의문박물관마을작가갤러리가 위치해 있다.[9] 현 중국 장쑤성 난징시 장닝구(江寧區) 샹팡진(上坊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