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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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채상덕(蔡尙悳) |
호 | 심호(深湖) |
본관 | 평강 채씨[1] |
출생 | 1862년 |
황해도 봉산군 사원방 (현 황해북도 사리원시) | |
사망 | 1925년 4월 |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 통화현 | |
묘소 |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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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채상덕의 출생지와 시기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1925년에 편찬된 일제의 보고문서에 따르면, 채상덕은 1862년생이며 충청도가 본적지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문일민의 <한국 독립운동사>와 김승학의 <한국독립사>에는 출생 시기는 나오지 않고 출생지만 황해도로 나온다. 그리고 남만주에서 채상덕을 스승으로 모셨던 이수흥은 그의 출신지를 황해도라고 진술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이수흥이 스승을 오랫동안 모시며 임종까지 함께 했으니 그의 진술이 옳은 것으로 추정된다. 즉, 채상덕은 1862년경 황해도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채상덕은 최익현의 문인이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최익현은 1906년 6월 4일 전라북도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채상덕은 스승의 명을 받들고 1906년 1월 충남 예산의 곽한일과 정두화(鄭斗和)에게 가 의병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동의한다는 의사가 담긴 답신을 받고 돌아왔다. 이어 3월 초에는 또다시 스승의 서한을 들고 이재윤(李載允)과 이남규를 찾아갔다. 서한의 내용은 이들 두 사람에게 베이징으로 가 청나라의 구원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이후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정읍, 순창, 곡성군을 접수하며 진군했지만 태인에서 한국 관군과 마주치자 동족상잔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의병대를 해산했다. 이때 채상덕의 기록은 없는데 아마도 스승이 체포되었을 때 잠적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채상덕은 1912년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비밀결사조직인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결성한 임병찬과 함께 총대표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13년 5월 23일 대원 김창식(金昌植)이 일경에 피체되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을 자백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채상덕은 임병찬 등 동지들이 대거 체포될 때 일제의 추적을 뿌리치고 남만주로 망명했다.
2.2. 대한통의부
남만주로 망명한 채상덕은 몇년 간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1920년 10월 일제가 간도 참변을 벌인 후,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파괴된 독립군기지와 한인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 1921년 후반부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운동을 일으켰다. 1922년 봄,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한단 등의 대표들이 환인현에 모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했다. 채상덕은 이 단체를 이끌어갈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선임되었다.채상덕은 비서장에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에 이웅해(李雄海), 군사부장에 이천민(李天民), 교육부장에 김동삼, 실업부장에 변창근(邊昌根), 사령관에 김창환(金昌煥), 경무감에 전덕원 등을 각각 임명했다. 이후 통군부는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와 그 후원대를 조직해 더 폭넓은 통합운동을 계속 추진했고, 마침내 통군부에 참여하지 않은 단체들의 대표까지 참가시켜 1922년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대회를 개최했다. 이 때 참가한 각 단체는 관전동로한교민단, 대한광복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안북도독판부 및 대한독립단과 서로군정서였다. 이들 대표들은 7일간의 회의 끝에 기존의 각 단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키기로 합의했다.
채상덕은 통의부의 부총장에 선임되었고, 총장은 통군부 시기 교육부장이었던 김동삼이 맡았다. 항일무장활동에 주력했던 기존의 독립군단과는 달리 항일활동과 함께 경신참변으로 파괴되고 흩어진 이주한인사회를 복원해야 할 임무를 겸임했다. 따라서 행정부서인 민사, 재무, 학무, 권업, 교섭, 참모, 교통, 법무, 군사 등을 설치하고, 관할지역 내 한인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사법기관인 사판소 및 한인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의회를 구성해 자치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중앙조직을 편성했다. 그리고 별도로 의용군을 편성해 무장활동에 두었다. 이 중앙조직은 관전현 하루하(下漏河)에 두고, 남만의 각 지역에 흩어져 형성된 한인사회에는 총관(總管)·구(區) 등의 지방조직을 설치해 중앙조직과 연계시켜 한인의 삶을 지원했다.
하지만 통의부에 가담한 단체들 간에는 신봉하는 이념, 노선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의병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대한독립단은 조국이 광복할 경우 정치체제는 왕정으로 해야 한다는 복벽주의를 신봉하고 있어 공화주의를 지향한 다른 단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이념의 차이는 얼마 후 갈등으로 이어졌다. 대한독립단 단장 전덕원과 공화주의자 양기탁 간에 불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불화는 복벽과 공화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커졌고, 전덕원의 부하들이 양기탁 등을 습격해 폭행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양측은 결국 화해하지 못했고, 1923년 초 대한독립단 인사들이 통의부를 이탈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결성했다. 이때 채상덕은 전덕원의 복벽주의에 동감해 부총장의 직책을 버리고 전덕원, 김평식(金平植)·오완하(吳完夏) 등과 함께 통의부를 나와 의군부에 가담했다.
2.3. 대한의군부
채상덕은 대한의군부 창설 후 총재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 밑으로 군무부장 전덕원, 정무부장 김유성(金有聲), 사한장(司翰長) 박홍제(朴弘濟), 재무부장 이병규(李炳奎), 종교부장 성보운(成寶運), 경리부장 조대능(趙大能), 참모부장 박일초 등의 간부들이 임명되었다. 본부의 근거지는 통의부와 같은 관전현에 설치되었다.1923년 여름, 남북만주 독립운동계 지도자 58명이 남만주 화전현(樺甸縣)[2]에 모여 만주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진로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8월 15일부터 채상덕은 11월 3일 까지 2개월 반 동안 진행된 이 회의에 참여해 중국 내 한민족의 교육과 경제부양, 각지에 설치된 청년단의 발전 방향,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와 외교 추진 방향 등을 논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게 논의된 것은 남북만주 각 단체와 군사기관을 통합시킨 하나의 통일체 구성이었다. 대표자들은 장기간 논의한 끝에‘만몽신당(滿蒙新黨)’이라는 통일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 단체는 활동지를 몽고 지역까지 확대해 조국 독립 달성을 위한 통일기관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총재는 이범윤이 맡았고, 채상덕은 만몽신당의 비서로 추대되었다.
이 시기, 채상덕은 19살의 청년 이수흥을 만났다. 채상덕은 그를 총애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 1923년 7월, 채상덕은 이수흥을 북만주 액목현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로 보냈다. 이 학교는 김좌진이 설립한 사관학교로, 이수흥은 이듬해 2월까지 신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채상덕으로 돌아왔다. 채상덕은 그가 돌아오자 집안현에 본부를 둔 참의부에 가입시켰다.
이보다 전, 채찬과 김원상(金元常) 등을 주축으로 한 의용군 일부가 무력 항쟁을 우선으로 삼지 않고 외교에만 몰두하는 통의부 지도부를 불신하고 1924년 전반기에 통의부를 이탈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인 참의부를 성립시켰다. 이때 의군부의 일부 독립군들도 가담했는데, 이들 모두 채상덕의 부하들이었다.
2.4. 최후
1925년 3월 16일, 집안현 고마령에서 참의부 5개 중대의 간부를 비롯한 대원들이 모여 군사회의를 개최했다. 그런데 밀정 이죽파(李竹坡)가 이 사실을 일제의 초산경찰대에 밀고했고, 초산 일본경찰대는 즉시 참의부 회의장소를 기습 공격했다. 참의부 간부들은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끝내 무너졌고 참의장 최석순(崔碩淳) 등 29명이 전사하고, 많은 인원이 부상을 입고 피신했다. 이수흥도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빠져나와 이 사실을 스승인 채상덕에게 알렸다.채상덕은 이 소식에 비탄에 빠졌다. 그는 우선 자식같은 제자인 이수흥을 병원으로 보냈다. 한달 후 이수흥이 퇴원하여 자신을 찾아오자, 그는 권총 2자루가 통화현 강산이도구 회당촌의 김운용(金運用)에게 맡겨 두었으니 그곳으로 가서 권총 두 자루를 찾아 쓰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으면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수흥이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향년 63세. 이수흥은 스승의 유해를 명당에 안장했고, 1년간 상을 치렀다. 그 후 그는 조선으로 들어가 스승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고 1926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간 의열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1929년 2월 27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채상덕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