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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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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홍범도
洪範圖[1] | Хон Помдо | Hong Beom-do
파일:홍범도.pn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68년(고종 5년) 8월 27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융흥방 무열사동
(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 만수대예술극장 인근)[2]
사망 1943년 10월 25일[3] (향년 75세)
소련 카자흐 SSR 크즐오르다 주 크즐오르다
(現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주 크즐오르다)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1868~1897)

[[대한제국|]][[틀:국기|]][[틀:국기|]] (1897~1910)

[[소련|]][[틀:국기|]][[틀:국기|]] (1927~194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사후 부여)[4]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917호[5]
본관 남양 홍씨 당홍계[6]
여천 (汝千)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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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홍윤식 (洪允植)
배우자 단양 이씨[7], 이인복[8]
자녀 아들 홍양순, 홍용환, 슬하 3녀
후손 외손녀 김알라[9]
종교 대종교
신장 190cm[10]
정당
[[소련 공산당|]][11]
소속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단
직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서훈 건국공로훈장 복장[12] 추서 (1962년)[13]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021년)[14]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항일 활동2.3. 독립 운동2.4. 소련 합류2.5. 말년
3. 사후
3.1. 봉환 과정3.2. 유해 봉환3.3. 독립군 학살 누명
3.3.1. 자유시 참변 왜곡3.3.2. 홍범도에 대한 암살미수 사건 관련 왜곡
3.4. 유해 봉환에 대한 박노자의 문제 제기3.5.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관련 영상
홍범도 장군 발굴영상 / / KBS 2020.10.24 방송
“홍범도 장군을 모셔온 그 역사적 현장을 담았습니다“
자랑스러운 전승의 역사, 봉오동 전투와 여천 홍범도
목적과 희망: 고려 독립
소련 입국조사서에 적은 소망
저명한 조선 빨찌산[주의] 대장 홍범도 묘 1868년 8월 27일 출생 1943년 10월 25일 사망(앞면)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홈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1951년 10월 25일 레닌기치 신문사 동인, 고인의 전우 및 시내 유지한 조선인 일동 건립(뒷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의 홍범도장군묘에 세워진 철비에 새겨진 문구[16]
한국독립운동가이자 군인.

2. 생애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독립기념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1. 초기

1868년, 평안남도 평양부 보통문(서문) 내의 무열사[17] 앞마을의 양반집에서 머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18] 홍범도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머슴 아버지마저 그가 9살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

1877년, 9살이 되던 해 머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 뿌리조차 모른 채 다른 양반집 머슴으로 보내졌다.

1883년, 15살이 되던 해 머슴살이를 청산하고자 17살로 나이를 속이고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1886년, 부대 내 차별과 폭행이 심한 분위기에 처한 상황이었고, 자신을 괴롭히던 장교를 살해하고 4년만에 군을 탈영했다. 이후 도주한 뒤, 군대 동료의 말을 떠올려 황해도 수안의 제지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공장주는 임금을 7달이나 주지 않았고, 받으려면 동학을 믿으라고 명령하고 강요하자 말다툼 끝에 결국 공장주를 살해하고 제지공장을 떠났다.

1890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 지담(止潭)을 상좌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범도는 이때야 글과 한국사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19]

절 내에서 비구니였던 이씨[20]를 만나 정분을 나누었고 임신을 하자 함께 신계사를 나왔다(환속). 오갈데가 없어 이씨의 처가가 있는 북청으로 향했으나 가던 길에 건달패들을 만나 둘은 생이별하게 된다.

홍범도는 이씨가 죽은 줄 알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강원도 회양군 먹패장골에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밑천을 다 털어 총을 구매해 강원도 북부에서 사냥꾼(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포수 권익 단체('포계(砲契)')의 대장이 되었다.[21]

2.2. 항일 활동

1895년, 을미의병 직후 일본 제국이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을 발령하자, 강원도 회양군에서 김수협 등 14명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철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했다. 함경도 안변의 학포로 이동해,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했다. 일본군과 3차례의 전투를 했다. 김수협 및 여러 의병이 죽고 도주하는 등 기세가 사그라들자 의병을 해체했다.

황해도 연풍에서 금광노동자가 되었지만 일본군의 감시가 끊이지 않자 함경도로 향했다. 박말령에서 일본군 3명을 때려눕히고 총 3정을 빼앗고, 함경도 덕원읍의 좌수 전성준을 공격해 금품을 빼앗고 1897년 함경도 북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죽은줄 알았던 아내 이씨와 자식을 5년만에 재회했다.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 및 화전농으로 생계를 이었다. 또 다시 포수 권익 단체('포연대(捕捐隊)')의 대장이 되었다.

1907년, 정미의병 직후 일본 제국이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으로 총기를 수거하려 하자, 11월 차도선 등과 포수 70명과 '산포대'라는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당대(當隊)가 폭도[23]의 풍모를 가장하고 행동했더니 촌민은 이를 매우 환영하고 자진하여 주식(酒食)을 향응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일반(주민)의 의향을 측정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1908년 10월 13일 제3순사대 경부(警部) 와타나베 마사카츠(波邊正勝)의 보고서

1909년 6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이를 들은 (을미의병 시기 친해진) 유인석이 '역량을 키우라'는 격려/권고 편지를 보냈다.

2.3. 독립 운동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길림성의 백두산 인근 장백현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적위군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 홍범도와 소련 공산당의 첫 만남이었다.

1919년, (앞서 1914년에 만들어진) '간도국민회'가 3.1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10월엔 함경남도 혜산진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1920년
10월 하순 이도구·어랑촌 및 봉밀구 방면에서 일본 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 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과 같은 재질이 있는 인물이 아닌 듯하고 앞서 홍범도가 간도 방면을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일반 조선인, 특히 그 배하(配下)에 있는 자로부터 신(神)과 같은 숭배를 받고
이도구·어랑촌·봉밀구 부근의 전투에 당면하여 일본군의 포위 중에 빠진 것 같이 그의 전술이 졸렬한 것을 빈정대는 것보다도 몸을 던져 부하를 독려하고 일본군에게 일시(一矢)[26]를 보복하려는 것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지당할 것이며, 그는 지금 한쪽 다리에 관통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다 하는데 그에 대한 일면을 판단할 수 있다.…
1921년 조선총독부 간행「간도 출병 후의 불령선인 단체 상황」

2.4. 소련 합류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비에트 러시아 영내로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의 방침은 매력적인 선택지였으며, 곧 홍범도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독대해 마우저 권총을 선물받을 정도로 소련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파일:홍범도장군 입국신고서.png
홍범도의 소비에트 러시아 입국신고서.
'직업' 항목에 의병, '목적과 희망' 항목에 고려독립이라고 쓴 것이 인상적이다.
내용 해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uby(調査表, ruby=조사표)] [ruby(高麗部, ruby=고려부)]

Ⅰ [ruby(姓名, ruby=성명)]과 [ruby(生年, ruby=생년)].[ruby(月, ruby=월)].[ruby(日, ruby=일)].: 1868 [ruby(八, ruby=팔)]월 [ruby(二十七日, ruby=이십칠일)] 홍범도
Ⅱ [ruby(敎育, ruby=교육)]: 국문
Ⅲ [ruby(職業, ruby=직업)]: 의병 [ruby(二十八年, ruby=이십팔년)]
Ⅳ [ruby(社會上, ruby=사회상)] [ruby(地位, ruby=지위)]([ruby(士族, ruby=사족)], [ruby(平民, ruby=평민)], [ruby(紳士, ruby=신사)] [ruby(等 別, ruby=등 별)] ): 농사
Ⅴ [ruby(如何, ruby=여하)]한 [ruby(委任狀, ruby=위임장)]을 가지고 오셧소?: 의병듸
Ⅵ 언으 [ruby(政党, ruby=정당)] [ruby(或, ruby=혹)]은 [ruby(團体, ruby=단체)]에 [ruby(屬, ruby=속)]하엿소: 업소
Ⅶ 언으 [ruby(勞働組合, ruby=노동조합)]에 [ruby(屬, ruby=속)]하엿소: 업소
Ⅷ [ruby(何月何日, ruby=하월하일)]에 어대셔 로시아 [ruby(國境, ruby=국경)]을 넘어오셧소: 18/Ⅰ 1921 이만
Ⅸ [ruby(目的, ruby=목적)]과 [ruby(希望, ruby=희망)]: 고려독립
Ⅹ 언으 [ruby(外國, ruby=외국)]말을 알으시요: 업소
Ⅺ [ruby(以前, ruby=이전)]에 로시아에셔 오래동안 머무러섯난지요: 1905에 와셔 1921년ᄭᆞ지 잇섯소
Ⅻ [ruby(備考, ruby=비고)]:
[ruby(署名, ruby=서명)]: 홍범도
}}}

현대어 해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조사표 고려부

1. 성명과 생년월일: 1868년 8월 27일 홍범도
2. 교육: 국문
3. 직업: 의병 28년(차)
4. 사회적 지위(사족, 평민, 신사 등 별: 농사
5. 어떤 위임장을 가지고 오셨소?: 의병대
6. 어느 정당 혹은 단체에 속하였소?: 없소
7. 어느 노동조합에 속하였소?: 없소
8. 몇 월 며칠에 어디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어오셨소?: 1921년 1월 18일 이만
9. 목적과 희망: 고려 독립
10. 어느 외국어를 아시오?: 없소
11. 이전에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머무르셨는지요?: 1905년에 와서 1921년까지 있었소
12. 비고:
서명: 홍범도
}}}
1921년 3월,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는 당시 주도권을 쥔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어주었다. 홍범도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

1922년 2월,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극동피압박인민대회 혹은 원동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여기서 블라디미르 레닌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을 선물해 주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권총집
파일:khonbomdo_avtobiografiya.jpg
이후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해제되었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소련에 잔류해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으며 이때 2번째 부인 이인복과 재혼했다.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러시아 극동과 일본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사할린 부대에 소속됐던 김창수와 김오남이 홍범도의 암살을 시도하며 불시에 공격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범도는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 한다. 해당 사건의 현실에 대한 설명은 아래 독립군 학살 누명 문단이 자세하다.

2.5. 말년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27]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 SSR로 이주되었다.

이후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36년 기준,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50 ~ 200 루블, 연금은 25 ~ 50 루블이었다. 1달 수입이 130 루블이면 당시의 평균 임금보다 꽤 낮은 편이지만 부양가족이 없었고 수위 자리도 홍범도에게 생활비 챙겨 주려고 일부러 마련한 자리라 편했기에 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 기준 소련 1루블은 약 0.8달러에 해당하였고, 이는 당시 미국의 비숙련 중졸 노동자가 200시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한다. [28] 당시의 크슬오르다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정착을 한 지역으로 고려인 신문사, 원동조선사범대학, 조선극장, 라디오방송국, 하바롭쓰크출판사 조선부 등의 고려인들이 세운 문화기관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홍범도와 자주 교류했던 소설가 김기철에 의하면 이러한 크슬오르다의 생활환경이 홍범도의 말년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에게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상을 구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가 만들어졌으며 홍범도 일지를 토대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상영되는데, 이를 관람한 홍범도는 자신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 홍범도가 맡은 직책인 수위장도 고려극장의 배려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일은 널널하였다. 홍범도는 고려극장의 제일 뒷편에 앉아 당시 인기리에 상영 중이던 연극인 <춘향전>, <심청전> 등을 관람하고 주연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 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한인극단>에 의하면 홍범도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소련 정규군에 지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한인예술가 전창화에 의하면 자원입대를 거절당한 홍범도는 자신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사격장에 사람을 불러모은 뒤 2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작은 동전을 총을 쏴 명중시키는 사격실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 SSR 동부 우슈토베(Үштөбе / Üştöbe)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독립군들은 교전 중 사살당하거나 투옥 중 고문 후유증으로 젊었을 때 사망한 경우가 많다. 홍범도와 똑같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의 한 명인 김경천은 홍범도가 죽기 1년 전인 1942년 1월 2일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알려졌다고 쓴 이유는 김경천 항목 참조.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일본군에 의해 사살당하거나 여운형, 김립, 김구[29]백색테러에 희생당하거나 좌우 갈등에 희생당하거나 가난에 시달리고 망명 국가에서 암살당하는 등의 고생을 겪으면서 천수를 누리지 못 해 죽고 말았는데 홍범도는 보기 드물게 노환으로 죽은 케이스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 만리타국에서 쓴 입국신고서에서 소원을 묻는 질문에 "고려 독립"이라고 쓸 정도로 죽는 순간까지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그가 결국 전쟁의 종식과 광복을 보지 못했으니 어떤 심경으로 눈을 감았을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3. 사후

3.1. 봉환 과정

1962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는데 현재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다. 당시의 대한민국 대통령(권한대행)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91년 카자흐스탄이 구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유해 송환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남북한 대사관 간에 외교전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홍범도의 유해 송환을 추진한 것은 남한보다도 북한이 앞서서, 이미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대해 홍범도의 유해를 북한으로 송환하겠다고 했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에서 나서서 이를 거부했다.

전 주영북한 공사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 북한은 카자흐스탄에 학교도 세우고 교사들도 파견하며 고려인 예술단도 평양에 초청하였으나 전반적인 고려인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가운데는 광복 이후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 지역으로 귀환했고 6.25 전쟁에도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이후 김일성의 독재 권력 구축 과정에서 숙청되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소련파 항목 참조). 공산주의 국가라고 해서 마냥 북한에 우호적인 게 아니라는 것.[30]

거기에 소련이나 친소 성향 위성국들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당시 중립을 지향한 것 때문에 북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북한이 핵실험을 진행하면서 고려인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바닥을 쳤는데 북한이 2015년 말 카자흐스탄 수도에 대사관을 개설하겠다고 했으나 2016년 4차 핵실험으로 불허당하고 2017년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이 규탄하면서 카자흐스탄은 북한과의 거의 모든 관계를 동결시켰다. #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남한도 카자흐스탄에 정부 조사단을 보내 묘소 조사와 함께 유해 송환을 협의했는데 북한은 1995년 8월 28일 평양방송을 통해 "홍 장군 유해 봉환은 (남측의) 사기 협작극이며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봉환 계획은 쑥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1997년 5월 한국 국가보훈처와 기업은 홍 장군 묘역 정비 사업 지원에 1만 달러를 투입해 홍 장군 흉상 주변에 3개 기념비를 건립하고 공원 묘역을 단장했다. 충청남도 홍성군 태생에 아들 김두한, 손녀 김을동가족이 남한에 있었던 김좌진과는 달리 홍범도는 태생이 평양 출생이었던지라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데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들이 크즐오르다 묘역을 존치시키자고 해서 유지되었다. #

홍범도의 묘지는 크즐오르다 공동묘지에 있었고 스탈린 사후 소수민족 탄압이 중지되면서 업적을 인정받고 복권되어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도 생겼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어서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묘소를 매우 정성껏 관리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묘지 관리 상태가 매우 우수했다. 이것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도 고려인의 입장을 들어 유해를 대한민국에 봉환하지 말고 카자흐스탄에 그대로 존치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유해를 봉환하면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을 위해서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홍범도 장군 묘역에 정부가 추모 공원을 만들기로 했다. #

3.2. 유해 봉환

<colbgcolor=#cd313a><colcolor=#fff> 현장 영상 <colbgcolor=#0047a0><colcolor=#fff> 해설 영상

광복 전까지 소련에서 여생을 보냈고 출생지도 평양인지라 북한이 유해를 평양으로 옮기자면 얼마든지 가능했고 이것만 본다면 명분은 북한측이 더 컸다.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31] 자신의 항일 업적만 내세우고 자신을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으로 내세우기 위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같은 항일무장투쟁은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일성이 "홍범도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라고까지 하면서 배척했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당연히 이는 김정일 집권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던게 대한민국 정부가 유해 봉환을 추진하자 갑자기 고향인 평양에 안치해야 한다고 나서게 되었다는 것. #

2021년 8월 12일 청와대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토카예프의 방한과 연계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되어 있는 홍범도의 유해를 봉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8월 14일 국가보훈처장 황기철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하였다. #


이 특사단에는 배우 조진웅도 동행했다. 조진웅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보 대사로도 활동 중인데 그동안 영화 <암살>과 영화 <대장 김창수> 등에 출연하면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숭고한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는 특사단에 끼게 된 것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회장이자 특사단의 일원인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우원식 의원이 그를 추천한 뒤 소감을 묻는 질문에 "두말할 나위가 있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제가 세상 모든 일은 뒤로 미뤄놓더라도 이 일은 해야죠. 그리고 너무나 기뻤고 감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공군 제11전투비행단 방주원 소령
홍범도의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서해방공식별구역에 진입했을 때 봉환용 기체로 KC-330 시그너스 1호기가 투입되었다. 기사. 호위기로는 F-15K, F-4E, F-35A, F-5F, KF-16D, FA-50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는 모든 종류의 전투기가 출격하여 최고의 예우를 했다. 기체 좌측 KF-16D, F-35A, F-15K. 기체 우측 F-4E, F-5F, FA-50 순서로 위치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대열 바깥쪽에 F-15K 1기가 더 동원되었다. 사진 촬영을 위한 F-15K 외에도 봉환 영상이 공군 유튜브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영상 촬영을 위한 KF-16 또는 FA-50 1기가 추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까지 유해 봉환과는 다르게 호위 기체와 봉환 기체가 영공에 진입해 플레어로 예포까지 쏘면서 극진히 예우했다. # # # # #

봉환 후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 유해를 임시 안치했다. 홍범도 장군의 현충원 안장은 대한민국의 흙과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 장군 묘역에 있던 카자흐스탄의 흙과 함게 허토됐다.또한 국민 분향소를 열어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 기간을 보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애용하던 신영복의 글씨체(신영복체)를 활용하여 홍범도 장군의 묘비에 글을 새겼다. 홍범도 장군 안장식에는 국빈방문한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도 함께했다. 2021년 8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는데 여운형에 이어 2번째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중복 수훈자가 되었으며 훈장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이 대신 받았다. 추서식에는 방한 중인 카자흐스탄 대통령도 참석했으며 홍범도 장군의 사망 진단서와 말년에 수위로 일했던 '고려극장'의 사임서 등 2건의 사료를 전달했다. 2021년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청와대 트위터

청와대는 이번 유해 봉환이 남북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또 하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저지하려는 북한과의 오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 [32]

홍범도의 봉환 이후 한 네티즌이 홍범도 유해 봉환을 기념하여 "1911 - 2021"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올렸다. 1911년에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망명한 이후 2021년에야 고국에 묻혀 영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음을 표현한 듯. 답글을 살펴보면 '고국에는 돌아오셨는데 고향에 모시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라며 안타까워하는 반응도 있다. 그림에서 홍범도 장군은 비행기 창문을 통해 조국의 찬란한 야경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다른 네티즌은 서울공항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국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그림을 남겼다.

3.3. 독립군 학살 누명

3.3.1. 자유시 참변 왜곡

복잡하게 얽힌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왜곡된 주장(이념 대립)으로 국민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
반병률 교수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참변 당시 홍 장군이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만 있다.
윤상원 교수
[팩트체크]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몰살된 '자유시 참변'에 가담?

보수 언론인 <펜앤드마이크>와 <크리스천투데이> 등지에서는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에서 김좌진 장군을 배신하고 김 장군이 이끌던 부대를 학살한 친소괴뢰"라 주장하며 비난한다.[33] 정작 김일성은 "홍범도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까지 하면서 배척했었다고 한다.[34]
자유시 참변 논란은 소련 측의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하자는 홍범도 장군의 방침을 반대한 사람들의 비난한 결과. 당시 러시아 홍군 측은 우리 독립군에게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무기를 반납하고 허락을 받으면 돌려주겠다고 했다”면서 “홍범도 장군도 처음엔 거부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따르자는 쪽으로 의견이 바뀌었다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홍범도에게 덮어씌우던 자유시 참변의 누명명백한 역사적 오류다.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의 지적처럼 홍범도는 단지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극동 공화국의 지극히 당연한 요구에 수용했을 뿐이다.
특히 최근 일부 언론이나 인사들이 제기한 홍범도의 ‘자유시사변(1921년 6월 28일)’ 가담설이나 ‘자유시 학살’ 개입설, ‘한국독립군 대학살’, ‘독립군 학살 공모’ 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장세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 역사와 현실 121, 2021, 15쪽. #
1921년 연해주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다. 하지만 곧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대한의용군 측 독립군 일부가 목숨을 잃었다. 다만 홍범도 측 부대는 안무, 최진동, 이청천(지청천) 등 다른 대부분의 간도독립군과 함께 이미 자유시 참변의 현장인 수라젭카에 없었다.[35] 윤상원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의 소식을 전해듣고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36]

자유시 참변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37]이다. 권희영 교수도 발표 논문에서 최소 사망자의 수를 36명으로 기재했다.
사망 36명 포로 964명 병자로 불참한자가 19명 박 일리야가 데리고 도망한자 34명 기외 59명 행방불명이었다. 무장해제를 집행한 군대는 사자1명 29연대 사자 1명이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쪽
독립군이 몰살당했다고 표현하기에도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당시 사건이 일어난 수라세프카에 없었으며 홍범도의 부대는 이미 자유시에서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함께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해당 사건으로 희생당한 부대는 김좌진이 아닌 허재욱이 이끌던 의군부 부대였다. 사건 이후 김좌진에게 합류하려던 부대가 무장 해제를 당한 일도 있었으나 이는 훨씬 후의 일이며, 그것도 중화민국 군대에 의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한편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서 홍범도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극우 일각에서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인데, 고려혁명군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위원으로 선임해 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재판은 정작 흐지부지되었으며 실형이 선고된 사람도 손에 꼽는다.

추가로, 자유시 참변에서 '공산주의자가 독립운동가를 무장해제시켰다'는 프레임도 사실이 아니다.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인 이르쿠츠크파야말로 급진적인 한국해방작전은 추진했던 세력이었다.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중략)

그러나 극동 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호소함으로써 슈먀츠키의 모험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극동 공화국 크라스노쇼코프 대통령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 라핀 총사령관의 의견을 듣고 (61: 라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조차도 동족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일은 한국으로 향하는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당 사절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란다리시빌리 세력이 한국 국경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89) ) 일본의 도발을 두려워 하며, 1921년 6월 치체린과 레닌에게 계획된 모험에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다: “…. 한인들에 대한 슈마츠키의 계획, 일본의 도발을 유도하게 될 계획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특히 그는 한국으로 진군하면서 한인들을 지휘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습과 잡음을 일으키며 극동 공화국 전역을 훑고 지나갔던, 나이가 들어 의식이 흐릿한 동방 전역에서 유명한 유격대원인 칼란다리시빌리를 수장에 세웠다. 끔찍한 사실은, 1) 4,000 명이 한인들이 블라고베쉔스크의 일본인들 앞에 집결해 약탈, 강간 등 끔찍한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며, 자기 측에서 선출된 지휘부에만 복종하고 있다….. 노인네(칼란다리시빌리)가 2 천노리의 한국 진군을 위해 한인들과 중국 영토로 이동한 것은 좀 부드럽게 말하자면, 시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나, 삼국협약의 눈앞에서 완전히 정당화된 일본의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 외교인민위원회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 '모험을 가능한 한 조속히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62 :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 p.73-91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번역 재인용
홍범도가 누명을 쓴 이유는 당시에 사살당한 집단이 어떤 단체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원인인데 당시 진압당한 군사 단체는 러시아 민간인에 대해 능동적으로 학살, 폭행, 약탈을 일삼은 범죄 단체였다. 니콜라옙스크 사건 문서 참고. 홍범도가 그들과 손절한 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선택이 아니었다. 지금도 전쟁 중 약탈 행위는 군형법에 의한 처벌 대상이다. 군 내부뿐만 아니라 전시 지역 전체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처벌이 엄하며 약탈, 강간 행위는 전시국제법 위반이기도 하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에서도 상세히 설명되지만 상해파 군대를 지휘한 사할린 부대야말로 소비에트볼셰비키의 편에서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약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극좌 부대였다. 하지만 뉴라이트 세력들과 국방부는 이상하게도 이런 극좌 소비에트 세력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며, 이런 전쟁범죄 군대와 반대편에서 섰을 뿐인 홍범도만을 가지고 물고 늘어진다. 우경화가 두드러지는 네이버 댓글에도 이런 인간들이 많다.

참고로 이미 수십 년 전인 1962년 3.1절, 홍범도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38]이 수여되기도 했다. 한편 이때가 5.16 군사정변 이후이기에 박정희가 대통령인 시절에 수여한 걸로 알려져 왔지만, 정확하게는 아직 윤보선이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행정안전부 상훈기록 데이터베이스 당시 기사. 그러나 이때는 이미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이고, 행정•입법•사법 3권이라는 초월적 권한을 가진 최고통치기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각을 인선하던 군정 내각 시기였으며, 이 최고회의의 의장이 박정희였다는 걸 감안하면 훈장 수여 시기가 박정희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에도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유해 송환을 추진하여 문민정부 시기에 유해 송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며, 박근혜 정부 당시에도 손원일잠수함 7번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하는 등의 사례가 있었다.

또한 보수 진영 일부를 중심으로 홍범도의 친 소련 활동을 지적하며 '유해를 북한으로 보내라'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도 나오기도 한다.[39]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소련은 소수민족의 독립을 지원했다. 기반으로 삼을 나라도 잃은 채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벗어나야 했던 당대의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적의 적'에 해당하는 소련을 일시적인 견제자로 끌어들인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 수도 없다. 우파 진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이승만의 활동 기반도 타국인 중화민국미국에 있었다.[40]

비슷하지만 다른 예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찬드라 보스일본 제국과 손잡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주적이었던 발트 3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치 독일과 손잡았다. 심지어 대영제국의 수상인 윈스턴 처칠도 "만약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한다면 나는 하원에서 악마에 대한 지지 연설이라도 할 수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철의 장막' 연설을 하는 등 스탈린과 소련에 적대적인 입장으로 바뀌었지만 적어도 히틀러가 더 큰 위협이었을때는 소련과 일시적으로나마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무기대여법을 통하여 2차 대전 전선에서 나치와 싸우는 소련에 무기와 보급품을 공급하는 등 소련을 동맹으로 여겼다.

3.3.2. 홍범도에 대한 암살미수 사건 관련 왜곡

1923년 8월엔 러시아 극동과 일본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사할린 부대원들의 홍범도 암살 시도 사건이 있었다. 사할린 부대 소속의 김창수와 김오남은 "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와 싸우지 않았냐"는 이유로 홍범도를 습격해 죽이려하자 레닌에게 받은 권총을 두명을 정당방위를 사살했다. 홍범도는 이 사살로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 한다.

이 사건의 유일한 출처는 '홍범도일지' 또는 '홍범도일기'라 명명되는 구술자료로서 원출처에는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22년 정월 초 6일 떠나 21일 만에 이르쿠츠크 나와 유하다가 1923년 4월 3일에 치타 나와서 사·오 삭 유하다가 8월 초 일일 블라고베셴스크 나와 수일 유하다가 배에 앉아 하바로프스크 나와 내린 즉 14일에 삭클니[41] 아른닷때에 있던 김창수·김오남 이놈들이 합동 군대 까란다시 군대와 쌈할 때에 나를 쌈하지 않았다고 나를 죽이자고 불시로 피짱으로 나를 치니까 두대 부러지므로 레닌이 체급 준 싸창으로 그 두 놈을 죽이고 칠일 주르만[тюрьма][42]에 갓기웠다가 레닌께서 회의 나온 일이 있소.
“홍범도의 일지”, ≪독립운동가자료이인섭수기류 1-007057-000≫ (독립기념관 소장) #
해당 사건을 근거로 일각에선 아래와 같은 허위 사실을 유포한다.
자유시 참변에서 우리 독립군 무장 독립군의 명맥이 끊길 정도로 많은 분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그때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독립군 중에 두 분인 김오남과 제가 한 분 정확하게 성함이 기억이 안 납니다. 김창수님이셨던 것 같은데요. 어쨌든 그 두 분이 홍범도 장군을 나중에 적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대해서 우리 무장독립군 해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책임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는 않을 겁니다.
장예찬 #
일단 김오남과 김창수가 '참변의 생존자'란 증거가 없다. 또한 자유시 참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주장했지만 이미 선술됐듯 자유시 참변의 사망자는 36명 밖에 되지 않으며 일부는 도망가다 익사했고, 대부분의 군인들은 체포된 것으로 종결된 사건이었다. 홍범도를 암살 시도한 두 명은 참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는지, 도망간건지 체포된 인물인지도 불분명하다.

또한 김오남, 김창수가 속한 사할린 부대는 학살과 약탈로 러시아 극동 및 일본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집단이었고, 폭력을 습관처럼 저지른 부대였다. 소비에트 정부의 범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인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43]는 논문에서 이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테플랴코프 교수가 게재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의 범죄 행위에 대한 논문[44]에서 상해파 부대를 행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곧이어 칼란다리시빌리는 특히 심했던 국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20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 천여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러시아로 건너온 폭동의 한인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 나머지는 상해 혁명파로 방향을 잡았다. 반면,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1920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아무르강 하류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를 이용해 공급 문제와 사적인 갈등을 해결했다. 1920 년 7 월 말, 인민혁명군 에이헤 총사령관과 그의 정치조력자 비샤린은 병사와 군간부들 중에 '직무상 범죄자나 정치사범이 많은' 한중연대를 정리할 것을 명했다. (44: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185. Op.6. D.24. L.601 )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 군대와 정당이 교류한 서신에 따르면, 한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에이헤 총사령관은 1921년 1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부대원이자 조선공산당 아무르지역위원회 위원장 이반 다닐로비치 박찬은에게 조선 유격대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고자 2 월 치타 또는 하바롭스크에서 유격대 회의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하고', 부대 사령관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45: 상동. F.221. Op.1. D.376. L.4 ) 당시 극동국 한인부의 모든 부대원들과 사할린 부대 사령관인 김 인노켄티와 박 일리아는 '당내 활동에서 규율을 준수하지 않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사무국 결정에 따라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김과 박은 국가안보국 아무르지역지부의 조사를 받았다.(박은 '모험가인 트랴피씬'의 열성적 옹호자이자 콜차크의 방첩활동 첩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러시아 군대 준위였던 김은 인민혁명군 복무를 회피한 혐의로 1920 년 이르쿠츠크에서 제 5 군대 특별부에 체포된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46: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41 )

최관윤을 의장으로 하고, 김관 강동유격대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21년 3월 11일 치타에서 개최된 조선군사비상회의는 특별사할린유격부대 김 사령관과 박 군사인민위원을 파면하고, '연대 해산'을 위해 그들을 전지임시군사법원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분리주의를 니콜라옙스크 중대에 도입하고, 일반병사들과 연대 지휘권 논쟁을 야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예프파 유격대원들이 행한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 박 바실리 전 사령관의 사형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스보보드니시)에서 시골로 이동하면서 김과 박은 ‘사격수들이 평화로운 러시아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허용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한인 유격대의 무장해제와 한인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농민들을 무장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김과 박은 ‘니콜라예프파로 구성된 무책임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만들어 병사들과 조선독립보병연대 지휘부에 패닉을 야기했다’. (47: 상동. L.51)

무정부 상태는 결국 트랴피씬의 독재 하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파르티잔의 규율을 무너뜨렸다. 1921 년 4 월 23 일 에이헤가 슈먀츠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은 사할린 부대가 식량 부족과 ‘부대장의 부재’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사 “농민들과 한인들 간에 공개적인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부대는 인접 지역 중 한 곳으로 옮겨질 계획이었다. 에이헤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칼란다리시빌리에게 출발을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48: 상동. L.62 )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한편, 1921 년 5 월 8 일 사할린 부대 군간부는 한인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하묵이 한때 대대사령관으로 ‘인민군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에게 전했다. 요청서에 서명한 그리고리예프 부대장(전 장교, 무소속), 김 부대장 보조, 박 군사위원(전 니콜라옙스크 부대장), 최 참모총장(제 2 비행대 전 참모총장), 림 제 1 대대장, 아무 제 2 대대장, 헤자욱 제 3 대대장 및 많은 사령관들은 오하묵에 불복할 것을 선언했다. (49: 상동. L.69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45]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예전부터 사적 갈등을 무기로 해결하던 집단이었는데, 이런 범죄집단이 홍범도를 공격한 것을 근거로 삼아 홍범도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건 궤변이다.

3.4. 유해 봉환에 대한 박노자의 문제 제기

2021년 8월 16일, 박노자페이스북으로 "홍범도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로 한 것은 카자흐스탄 국가 권력자와의 합의인가, 아니면 현지 고려인 사회 전체와의 합의인가?", "현지 고려인들에게 홍범도는 절대적인 존재이고 고려인 전체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데 유해 봉환 과정에서 고려인 사회 전체의 여론은 반영하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민주주의냐?", "소수자는 무시하고 행정 편의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 정부 들어서도 변한게 없다. 그렇게 홍범도를 존경하고 기리고 싶다면 홍범도 장군 부대원의 후손이 포함된 재한 고려인에게 간이 귀화의 가능성이라도 열어 주든지 그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나 좀 걱정하는 게 어떠냐" 등을 말했다. #

2021년 8월 17일, 이에 대해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 겸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페이스북에 "박노자 교수님께서 문재인 정부가 홍범도 장군님을 모셔오면서 고려인 사회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고 한 말씀 하셨는데 그 고언을 잊지 않고 고려인 영주권 문제 등 고려인과 동질감을 회복하는 제도적 개선책도 끊임없이 모색할 것이며 홍범도기념사업회부터 더욱 앞장서겠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대한민국 정부의 의무다.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꼭 고국에 데려가라'고 유언을 남기셨다. 해방된 조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이념적 대립 속에 그 유언을 한 세기가 다 지나서야 지킬 수 있게 됐다", "고려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는 것도 오해",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이미 2년전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때 그곳 고려인들에게 정성껏 설명을 드린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홍범도 장군이 계셨던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대한민국 정상으로 최초로 방문하셨다", "순방을 통해 계봉우, 황운정 지사 내외분 봉환과 함께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결정에 대해서도 계봉우, 황운정 지사 후손들을 포함한 많은 동포 여러분들께서도 기꺼이 축하해주셨다" 등을 말했다. #

3.5.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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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김좌진 · 지청천 · 이범석 · 나운규
가족 아버지 홍윤식 · 아내 이옥구 · 아들 홍양순 · 아들 홍용환 · 외손녀 김알라
대중매체 봉오동 전투 · 까레이스키 · 우둥불 · 홍여천 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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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명은 洪範道(홍범도).[2] 이북5도위원회 헌법상 평안남도 평양시 장별리 (행정동 : 수옥동)[3] 오후 8시에 사망하였으며, 장례식은 10월 27일 오후 4시에 진행되었다.[4] 2022년 7월, 국가보훈처에서 무호적 독립유공자들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홍범도도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이 부여되었다. #[5] 사후 유해가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다가 2021년 8월 15일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고 8월 18일에 정식 안장되었다. 봉환되기 이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무후선열 위패 11호가 봉안되어 있었다.[6] 남양군파 봉교공 문중 17대손, 시조 31세손이다.[7] 금강산 신계사의 비구니 출신으로, 본명이 이옥구, 이옥녀라는등 여러 설이 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된것은 단양 이씨 사람이라는것 뿐이다.[8] 소련으로 이민 후 재혼하였다.[9] 관련 기사[10] 당시 남자 평균 키가 약 163-165cm 것을 감안하면 거의 골리앗 수준이였으며 오늘날의 키로 환산하면 200cm 이상이다. 동시대의 인물 중에서 키가 크기로 유명한 김구(180cm), 김좌진(185cm)보다 각각 10cm, 5cm나 더 크다.[11] 1927년에 입당.[12] 지금의 건국훈장 대통령장.[13]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육군대장 박정희.[14] 문재인 정부. 대통령 문재인.[주의] 1945년부터 1955년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한 그 빨치산아니다. 비정규 게릴라 부대 partisan(빨치산)을 의미한다.[16] 홍범도 장군 사망 8주기인 1951년 10월 25일 분묘 봉분이 내려앉아, 크즐오르다시의 고려인 인사들과 옛날 홍범도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전우들이 '홍범도장군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해 2천 루블의 성금을 모아 철벽과 함께 세운 것이다. 다만 그의 묘는 202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 이장되었다.[17] 홍범도의 자서전인 <홍범도일지>에는 문열사로 적혀 있지만 오기로, 무열사는 석성을 기리기 위해 1593년에 세워진 사당이다. 석성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권을 쥔 병부상서였으며 "위기에 빠진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파병 반대파와 만력제를 설득시켜 파병을 이뤄냈다. 8.15 광복 당시까지 있었다가 6.25 전쟁 와중에 미 공군의 대공습으로 인한 폭격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만수대예술극장이 들어섰다.[18] 출생지가 현재 기준 평안남도 양덕군, 자강도 자성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19] 승려 지담은 수원 사람으로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였다. 1880년 승려 의성과 함께 신계사 유리전(瑠璃殿)을 중수한 기록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2018년 9월 임경석 박사가 한겨레21에 "독립투사로 남은 '나는 홍장군'의 아내" 기사로 주장했다. #[20] 이름이 이옥구, 이옥녀 등으로 추정되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단양 이씨라는 것 뿐이다.[21] 먼 거리에서 총을 쏴 유리병의 입구를 통과해 병의 바닥을 맞히는 사격 실력을 보유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실력 때문에 주변 포수들을 모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22] 2021년 3.1절 기념식 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해군잠수함사령부 홍범도함에서 근무하던 여명훈 중위가 대신 받았다. 영상[23] 당시 일본군은 의병 세력들을 폭도라고 불렀다.[24]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 알려진 김좌진우파 인사이고 말년에 현지 한인들에게 인심을 잃었던 탓에 중국한인 사회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으로 김좌진보다 홍범도를 더욱 높게 친다.[25] 반면 거꾸로 대한민국에서는 홍범도가 결국 소련군과 손을 잡았었다는 점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도 홍범도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만 되고 홍범도의 말년도 '독립운동을 하다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었다'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즉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의 공로가 반반이라고 보는 편이 좋으며 특히 일본군끼리 서로 싸우게 한 작전은 홍범도가 주도했다.[26] 일본어로 잇시(一矢)는 직역하면 '화살 한 발'이라는 뜻이지만, 관용구로서는 '모든 힘이 소진된 상태에서 상대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던지는 최후의 일격'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27] 연금을 받기 위한 수단이라고 평가된다. #[28] 물론 이는 소련의 공식 환율에 따른 것이고, 실제 적용 환율은 2~30% 수준이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29] 본인이 앞선 김립의 백색테러를 주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도 극우파인 안두희에게 정치적 사유로 암살당했다. 이 안두희 역시 훗날 김구의 지지자 곽태영에게 살해 당할 뻔 했으며 이후 버스기사 박기서에게 피살당했다.[30] 베트남 또한 친미 - 부분적 친서방 성향의 공산주의 국가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관계가 껄그럽긴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우방국이다. 반면 베트남과 중국과의 관계는 매우 껄끄럽기 때문에 반중으로 돌아섰다.[31] 이승만은 정부가 수립되자 한때는 형님 아우로 서로를 대하며 협력도 하던 김구와 갈등도 있기는 했지만, 김일성처럼 아예 적극적으로 유관순같은 인물이나 공적이 뛰어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마저 조그맣게 소개하며 저버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적을 왜곡하며 유관순 같은 사람들이나 광주학생운동에 편승하는 영화도 만들어지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 이승만이 본인을 부각시키며 그를 중심으로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1955년부터 1960년 4.19 혁명 직전까지 계속된 이승만에 대한 일련의 '우상화 작업'으로 정점을 찍었다. #[32] 태영호 의원은 관련된 입장을 내놓았다. # #[33] 실상은 김좌진 부대는 자유시에 간 적도 없다.[34] 김일성이 홍범도를 정치적으로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북한에선 매번 숙청당한 사람은 자본가니 제국주의니 하며 자신들의 사상과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몰아버리곤 한다. 실제로 홍범도 본인이 정통 공산주의와 거리도 멀었기도 하고. 이승만 역시 반민특위를 억지 해산시켜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훼방을 놓고도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용공분자 낙인 혹은 친일몰이를 서슴치 않았다.[35]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00~202[36]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2017, 259쪽. #[37]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18p.[38] 당시 수여된 훈장 명칭은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으로 현재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에 해당한다.[39] 이런 극단적인 논리라면 만약 정권 교체됐을 시 반대편이 백선엽이나 박정희에 대해서 현충원에서 파묘해서 일본으로 이장시키라는 주장에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적어도 홍범도가 북한 정권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든지 6.25를 일으킨 원흉도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공산주의자 이력으로 이런 식으로 배격을 하는 건 아니다.[40] 심지어 이승만 본인도 소련과의 협력을 추진한 일이 있었다.#[41] 사할린[42] 쮸리마. 감옥.[43]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의 정치적 억압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 편집위원회(소련에서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회) 위원이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푸틴의 독재정부, 소련에 대한 미화, 러시아의 폐쇄적인 민족주의, 공산주의, 러시아의 반서방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44] 연구의 주제가 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은 자유시 참변을 지휘한 당사자이므로 자유시 참변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45]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번역 재인용[46] 여담으로 이순신 문서도 2003년 만들어졌으며, 이순신 문서 작성은 안중근 문서 작성보다 20일 늦었다.[47] 그것도 한국에서 김원봉 재평가 열풍이 일기도 전이었다.[48] 여담으로 이회영 문서도 2012년에야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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