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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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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해주 오씨[1] |
출생 | 1889년 8월 14일 |
평안도 의주부 광평면 청수동 (현 평안북도 삭주군 청수노동자구) | |
사망 | 1944년 5월 20일 (향년 54세) |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 금정 공주형무소 | |
묘소 | 애국렬사릉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1호 | |
호 / 별호 | 송암(松菴) / 순천(順天) |
부모 | 어머니 한씨(생모), 백씨(계모) |
학력 | 대성학교 (단기 사범과 / 졸업)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복무 | 정의부 군사위원장 광복군총영 |
최종 계급 | 총령장, 군사위원장 |
조직 | 통군부[2], 정의부, 대한통의부, 광복군총영, 고려혁명당 |
근무 | 광복군, 정의부 |
의거 | 일제 관공서등 여러건물 폭파 |
서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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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세계평화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독립군 사령관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군인.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2. 생애
1889년 8월 14일 평안도 의주부 광평면 청수동(현 평안북도 삭주군 청수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안창호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 단기사범과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졸업하였으며, 고향에 돌아와 일신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 학도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하며 교육구국에 힘썼다.그 뒤 모교인 대성학교와 자신이 세운 일신학교가 일제 무리의 강압으로 폐쇄당하자 장군은 일제의 눈을 피할 겸 시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업에 종사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자, 장군은 장사꾼 행세를 하면서 의주에 머무르며 각지로 순회하면서 시위운동을 측면에서 지휘하다가 일제 무리의 탄압이 시작되자, 3월 18일 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봉천성 관전현(寬甸縣) 안자구(安子溝)[3]에 자리를 잡고 정착한다. 그리고 그 해 안자구에 온 전직 변호사 안병찬과 같이 내외 각지에 산재한 300여 개소에 조직되어 있는 대한청년단을 통합하기 시작했으며, 그 또한 교육부원이 되어 만주와 국내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또, 윤하진, 장덕진, 박태열 등을 규합하여 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했으며, 의용대를 편성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5월 중국 안동(현 단둥시)에 있는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기관을 설치하고 안동교통사무국을 두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관할했다. 1920년 2월에는 대한의용군사회, 대한독립단 독판부, 한족회, 청년단연합회 등이 통합하여 임시정부의 군무부 직할로 광복군사령부가 설치되어 장군은 제2영장(第二營長)으로 조직을 다스렸다. 그 뒤 그의 부대는 광복군총영으로 개편되고 오동진 장군은 총영장이 된다.
그 해에 광복군총영은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장총 2백 40여 정과 많은 탄약을 이륭양행을 통해 입수하였다. 이렇게 항쟁준비를 위한 무장을 강화하고 있을 때, 미국 의회 동양 시찰단인 모리스 의원 등 상원의원 일행과 가족 70여 명이 1920년 8월 14일 서울에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광복군총영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국내에 있는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하며 침략원흉과 일제관리 등을 처단하기로 했다. 그 결과 1920년 7월 결사대원을 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어 미 의원단 일행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일제관청을 파괴하고 일제요인들을 암살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궐석재판을 통해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명으로 통의부 5중대 소속 3인조 암살단으로 알려진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에게 첩자이며 여순조선인회 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1924년 6월 일진회의 회원으로 국권침탈에 앞장섰던 친일파 거두 최정규와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이자 매국노인 배정자의 암살지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고, 박희광에게 일본 영사관 파괴 명령을 내렸으나, 폭탄 불발로 실패하였다.
1926년에는 양기탁과 천도교 혁신파, 소련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규합, 조직한 고려혁명당의 군사위원장, 총사령으로서 독립군을 총지휘했다. 일제 경찰의 통계에 따르면, 1927년까지 오동진은 연인원 1만명이 넘는 부하를 이끌었고 일제 관공서를 백여차례 습격하여 살상한 사람이 900여명에 달한다. 이런 전과로 인해 그는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1927년, 옛 동료인 김종원(金宗源)의 밀고로 창춘에서 친일 경찰 김덕기에 체포되었고,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7년간의 형무소 생활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장군이 일제의 저항하는 단식에 들어가자 모두들 장군의 정신력에 경이로움을 표시했으며, 일본인 형무소장조차 선생과 면담을 할 때에는 경례하고 예를 갖추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인 의사가 장군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이는 바람에 장군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어, 그 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3. 기타
김일성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오동진이 김형직을 존경하여 아내와 집까지 찾아와 할머니 리보익에게 인사했으며, 동지이며 친구였다라고 주장했다.하지만 실제로는 김형직이 중강진으로 도피했을 때 김형직을 구해준 것이 오동진이며, 김형직이 약방을 차릴 때 책과 장사밑천, 가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서를 마련해준 것도 오동진으로, 오동진이 오히려 김씨가문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김일성이 자신과 집안의 활동을 과장한 전형적인 수법에 불과하며 자신의 책에서 이런 식으로 실제 그는 여러 독립인사들을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