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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cb371><colcolor=#fff> 출생 | <colcolor=#000,#ddd>1905년 10월 18일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야무수크로 | |
사망 | 1993년 12월 7일 (향년 88세) |
코트디부아르 야무수크로 | |
국적 | 코트디부아르 |
재임 기간 | 초대 대통령 |
1960년 11월 27일 ~ 1993년 12월 7일 (33년) | |
소속 정당 | 코트디부아르 민주당-아프리카 민주 연합 |
영부인 | 마리테레즈 우푸에부아니 (1952년 결혼) |
자녀 | 아들 오귀스탱, 기욤, 프랑수아, 펠릭스 쥐니오르, 올리비에앙투안 딸 마리, 엘렌, 플로랑스 |
수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5년 수여)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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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2. 생애
코트디부아르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이지만 무려 7선에 걸쳐 33년에 이르는 권력을 누리면서 결국 독재자가 된 영웅이 되어버렸다.1946년 아프리카독립민주연합의 수장으로 독립 운동을 주도했고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여 1960년 대통령이 된다.
그래도 초창기에는 친서방 온건 정책을 바탕으로 제법 정치를 잘 이끌어갔다. 1970년대까지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는 혼란에 있었던 이웃 국가들과는 다르게 순조롭게 성장해, 연평균 8%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였고, 이는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으로 불리며 높이 평가되었으며[2] 펠릭스 본인도 아프리카의 현인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을 떨치는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카카오 재배에 너무 매달린 여파는 결국 부작용이 되어 경제불안으로 돌아왔고, 이 와중에 무리하게 고향인 야무수크로에 각종 시설을 지으면서 엄청난 돈낭비를 해버렸다.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도 그런 경우. 또한 카카오 재배를 위해 주변 국가의 이민을 많이 받아들였는데, 이로 인해 민족 갈등이 발생해 코드디부아르 내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하지만 막대한 돈낭비를 한 대가 치고 수도인 아비장에 견주면 여전히 야무수크로는 별다른 발전이 못되었으며 85세 고령에도 선거라는 허울좋은 쇼로 7선에 올라 88세 생일까지 거창하게 치르고 두달도 안가 1993년 12월 7일,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독립영웅에 경제적 호황기를 이끌었다는 점이 겹쳤기에 코트디부아르 내에서 '파파 우푸에' 라고 불리며 국부로 여겨지는 등 코트디부아르 내부에선 평가가 좋은 편이다.[3]
3. 여담
- 놀랍게도 유네스코가 후원하는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평화상이 있다.
- 1993년 그가 사망한 후 2대 대통령은 앙리 코낭 베디에가 1999년까지 대통령을 맡았다.
4. 주요 경력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 |||||
코트디부아르 건국 | → | 초대 | → | 2대 | |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1960년 11월 27일 ~ 1993년 12월 7일) | → | 앙리 코낭 베디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