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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0066><colcolor=#ffffff,#ffffff>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2대 부수반 김규식 金奎植 | Kim Kyu-sik | |
출생 | 1881년 2월 28일 |
경상도 동래도호부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 |
사망 | 1950년[1] 12월 10일 (향년 69세) |
자강도 만포군 만포면 별오동[2] (현 자강도 만포시 별오동) | |
직업 | 독립운동가, 정치인 |
묘소 | 애국렬사릉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201호 | |
본관 | 청풍 김씨 |
별칭 | 교명(敎名)은 요한 아호(號)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가명(假名)은 김성(金成), 김중문(金仲文), 김일민(金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 별칭(別稱)은 변갑 |
학력 | 구세학당[3] (졸업) 로어노크 칼리지 (영문학 / 학사)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 석사) 로어노크 칼리지 (법학 / 명예박사)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교회) |
가족 | 김정연(증조부), 김동선(조부), 김지성(부), 경주 이씨(모) 조은수(본처), 김진필(장남), 김진동(차남), 김진세(삼남) 김순애(후처), 김한애(장녀), 김민애(차녀), 김우애(삼녀) |
친인척 | 김은식(사촌), 이태준(매제)[4], 김필순(처남)[5] |
상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1918년, 파리 강화회담 당시의 김규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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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 운동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성명을 해야 했다.
그래서 자기 본명을 자기도 잊곤 했다.
- 1945년 귀국 직후 인사
그래서 자기 본명을 자기도 잊곤 했다.
- 1945년 귀국 직후 인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독립운동가 중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히 통찰했던 당대의 엘리트로 손꼽힌다. 무려 9개 국어를 유창하게 회화할 수 있었던 '어학의 천재'로도 알려져 있다.[6]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지만 광복 이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꼽힐 정도로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7]
2. 약력
- 구세학당(경신학교) 졸업
- 로어노크 칼리지 학사
- 프린스턴 대학교 석사
- 경신학교 교감
- 동제사(同濟社) 교수
- 파리강화회의 민족대표위원
- 구미위원부 위원장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장·외무부장
- 로어노크 칼리지 명예박사
-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회원
- 극동피압박민족대회 한국대표위원
- 국민대표회의 국민위원회 위원
- 북양대학 교수
-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 외교위원장
- 민족혁명당 중앙위원회 주석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선전부장
-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 경신중·고등학교 이사장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장
- 남북협상 대표부
- 조선적십자사 초대 총재
3. 생애
3.1. 유년기
1881년[8] 경상도 동래도호부(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동래부사 종사관 김지성(金智性)과 경주 이씨[9]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가문은 본래 노론 벽파로서 김상로, 김치인, 김종수 등을 배출한 명문가였으나[10], 순조대 이후 노론 벽파가 정치적으로 일망타진되면서 그의 가문 역시 몰락했다. 그러다 할아버지 김동선 대가 되어 다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참봉 같은 하위직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본래 김용원이었으나 1885년 김지성으로 개명했다. 김지성은 서구의 사진 기술을 배워오거나 유리 제조 기술 도입을 시도하는 등 서구식 학문을 배운 인물이었고[11], 수신사나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또 1884년에는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에 밀사로 다녀와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동래부의 무역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불평등 조약에 의해 시장이 일본 상인들에게 잠식당하는 실태를 지적하다 귀양을 갔고, 어머니 경주 이씨마저도 사망하여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됐다. 이 때 냉담한 어른들과 짓궂은 청소년들의 시달림 때문에 개인적으로 냉정한 성격이 됐다고 한다.
삼촌들은 형편이 안 되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에다가 그를 데려다 주었지만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은 8세 미만의 어린아이는 양육하기 어렵다 하여 다시 되돌려보낸다.[12]
어린 김규식은 삼촌들에게 양육되었지만 가난한 형편의 삼촌들은 그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며 그는 굶주림으로 영양 실조와 열병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고 이에 삼촌들은 그를 뒷방에 눕히고 병풍을 쳐놓았다 한다.
그 뒤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강원도까지 찾아간다.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딱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당시 언더우드 역시 몸이 성치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직접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언더우드 목사 발견 당시 너무 굶주렸던 어린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너무 딱하고 불쌍해 고아원에서 어린 아이를 돌보는 것이 어려움에도 결국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언더우드 목사의 주변 사람들은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며 말렸고 아이가 죽게 되면 언더우드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덤터기를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13]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를 데려가 치료하고 극진히 간호했는데 어린 김규식은 건강을 회복한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교)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 이후 경신학교에서 영어,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그러나 고아인데다가 친척도 아닌 목사의 집에 산다는 것이 학교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었고 참을 수 없었던 김규식은 가출을 단행하여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한성 시내를 떠돌다가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다시 강원도 홍천으로 되돌아갔으나 아버지도 곧 병으로 사망하였고 1894년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 형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김규식은 의지할 곳 없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3.2. 미국 유학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으며 이 시기 서재필의 독립신문 기자로 잠시 있기도 했다. 1896년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당시 그의 나이 17살이었다.1897년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회 계열 인문대학 로어노크 칼리지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웅변부 활동을 하면서 연설 경연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1900년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으로 진학하여 문학 동호회 데모스테니언(Demosthenean) 문학회의 회장이자 1903년 전체 3등으로 학사를 취득했으며 재학 중 고종의 서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 관계를 형성하였다.
훗날 3.1 운동 직후 김가진을 일제의 감시에서 빼돌려 망명시킨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19년 11월 대동단[14]을 통해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김규식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였다는 점과 이 시절 의친왕과 모종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 유학 당시 김규식은 고국에서 언더우드가 후원하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노동을 하여 스스로 마련하였다. 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어노크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당시 성적은 전체 3등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
1903년 대학 졸업 직후 미국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해 1905년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15]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김규식이 박사 학위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었고 본인 역시 박사 학위까지 공부할 생각이 있었으나 당시 정국에 대해 걱정했던 그는 "조국의 앞날이 염려된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귀국했다.[16]
귀국 직후 YMCA 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학관의 학감)를 지낸다.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외국어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직을 제의받으나 거절한다.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김규식은 모두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지난 세월 나는 미국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지만, 지금부터는 조선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겠다.
3.3. 항일 독립 운동
구미위원부 활동 중인 김규식, 이승만, 송헌주 |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사학교 설립과 독립군단 창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1916년 앤더슨&마이어 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장자커우 지사 등에서 근무했다.
1918년 상하이로 건너와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설하였고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회의 주최국인 프랑스 외무성 측으로부터 정부 자격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그는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알렸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은 만세 운동을 준비하여 실행에 옮겼고 3.1 운동을 기회로 각지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된다. 1919년 4월 그는 파리 현지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17]
본래 우리의 독립은 평화 회의나 모종의 유력한 단체로부터 승인을 받던지, 첩지(帖紙)를 내어 주듯 할 것이 아니오. 우리의 최고 기관으로부터 각 단체 또는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 여하에 달렸나니, 이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독립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오. 고로 금일 우리 민족은 그 멸취(滅取)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오.
- 1921년 1월 상해 환영회 석상에서의 연설
- 1921년 1월 상해 환영회 석상에서의 연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 김규식은 신채호와 함께 창조파의 입장에 섰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실망감을 느껴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1920년대 초 고려공산당 후보 당원으로 가입하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동방 노력자 대회(극동 피압박자 민족 대회)에 한국 대표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영국, 프랑스, 미국을 강도높게 비난했다.[18]
한민족은 홀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다. 이웃 어느 나라도 한민족의 독립 투쟁을 돕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결국 아시아 이웃 나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때는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한국이 힘을 합쳐 일제와 싸워야 한다.
- 1922년 7월 모스크바의 『공산평론』 中
- 1922년 7월 모스크바의 『공산평론』 中
이후 1924년~1926년 초까지는 독립운동 일선에서 잠시 떠났다가[19][20]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해 유자명은 중국국민당 중앙본부에게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고 1927년 톈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 생활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조차 일본 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 차녀 김민애, 1930년 장녀 김한애를 병으로 잃었다.
1930년 8월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학무장에 선임되고 1930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됐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 특별반의 군사 교관이 되었으며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 강사가 되었다. 1933년 4월 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 명이 모인 구류노류대학교에서 열린 한국 독립에 관한 연설에 강사로 참석했으며 7월 '중한 민중 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다시 출국해 미국을 방문했다. 귀국 후 김규식은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동맹의 비밀 요원인 이용직과 한길수를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동맹과 정보 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21]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송병조, 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 대동맹, 대일 전선 통일 연맹, 한국 광복 동지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 독립을 위해 민족 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1935년 10월 12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 등과 함께 민족 유일당 창당 회담을 가졌다. 이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민족혁명당 주석 직에 올랐다.
1940년 민족 유일당 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구 등을 만나 회담을 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 연합 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민족혁명당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각을 결정한다.
1944년 4월 24일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임정 내 제1당인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주석으로 선출된 데 대하여 제2당인 민혁당의 김규식이 부주석으로 안배되었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해나갔는데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오철성 등, 임시정부의 엄항섭과 안원생 등을 설득해 재중 동포 중 기독교인의 우호 단체인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 조소앙, 정환범, 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3.4. 광복 후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민중을 붙들자.
- 1945년 11월 28일 연설
- 1945년 11월 28일 연설
8.15 광복 후에는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의 한 사람으로 김포 비행장으로 입국했으며 이후 거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의 삼청장으로 정했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과 한반도 신탁 통치안이 보도되자 김규식은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다가 모스크바 3상 외상회의 전문을 입수하면서 부분적 찬탁을 동의했다.[22] 김규식은 국제적 합의를 무시할 수 없고 일단 통일된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임시 정부가 신탁 통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부터 그는 반탁 세력에 의한 테러 위협에 시달려 수시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김규식을 암살하려던 자객들이 김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의 담을 넘다가 걸려서 도주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미군정이 만든 최고 자문 기관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에서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김구와 김규식이 올랐다. 1946년 3월 이승만이 '광산 스캔들'[23]로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 의원 의장직에서 사임하자 의장 대리가 됐다. 미군정은 강경 우익 반탁 세력인 이승만 대신 온건한 중도파인 김규식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추앙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1946년, 이와 별개로 자신의 모교였던 경신고등학교에서 이사장을 역임하여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나) 보도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 도당은 장차 수립될 정부에서 권력의 완전한 장악을 기대하고 있다. 이승만은 자신은 대통령이 되고, 김규식은 부통령이, 김구는 국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적대 행위를 추구할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괴뢰 정부와 신탁 통치 실시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이후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들의 죽음에 격분한 인민들은 조선 전역에서 민족해방 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선두에는 친일분자들, 민족 반역자들, 토지 개혁에 화가 난 지주들 및 반공주의자들이 나설 것이다.
김규식은 입법의원 명의로 북조선 인민 위원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입법의원을 중심으로 민족 통일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동시에 김규식은 여러 개혁을 통해 입법의원을 민족의 자치 기구로 격상시키려 했다. 특히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혁에 관심을 쏟았는데 친일파 청산은 극우파의 경제적 기반, 토지 개혁은 극좌파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묘수였다. 김규식은 공식 석상에서 친일파 청산 문제에 적극적인 주장들을 여러차례 했었는데 1947년 새해 아침에 발표한 신년사#에서 김규식은 "특히 남북에 있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족 반역분자, 악질 모리배 등의 발호는 심하여 민생은 극도의 도탄에 빠지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는 비애국자의 진영으로서 계획적으로 남한에 있어서 공전의 소요 사건을 양출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1947년 5월 12일 열린 입법의원에서는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단이 '민족적 명제'라고 밝히고 토지 개혁 법안과 함께 '부일 협력자 - 민족 반역자 - 전범 - 간상배에 관한 특별 입법 조례' 등을 조속히 통과시켜 줄 것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김규식은 친일반민족행위자야말로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을 반대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극우파는 물론 미군정까지 이들 법안에 부정적이었지만 김규식은 미군정이 갈구하던 보통 선거법과 연계해 부일 협력자 - 민족 반역자 - 전범 - 간상배에 관한 특별 입법 조례를 통과시키지만 미군정은 이를 시행하지 않고 무시했다.
한편 입법의원을 장악한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세력은 입법의원을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들은 반탁 결의안을 통과시켜 중간파의 입지를 축소시켰으며, 행정 조직법, 남조선 과도 약헌 등 단독 정부 수립을 암시하는 법안이 잇따라 제출됐다.
우익 세력이 통제를 벗어나는 행동을 여럿 하자 미군정은 다시 김규식을 찾았는데, 1947년 2월 미군정은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며 김규식과 중간파에 힘을 실어준다. 또한 (본인의 거부로 무산되기는 하지만) 김규식을 미군정 하의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할 계획이 세워지기도 한다. 다만 미군정은 김규식을 미군정의 바지사장으로 이용했을 뿐 그의 개혁 구상을 추진하는데는 소극적이었으며, 김규식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미군정에 의존만 하기보다는 좌우합작운동에 힘을 쏟았다.
3.5. 좌우합작운동
좌우 합작은 독립을 위한 제1단계요. 이 단계를 밟지 않으면 둘째 단계인 독립을 얻을 수 없다면 내가 희생하겠소.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도 알고 있소. 또 떨어뜨린 후에는 나를 짓밟을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남북분단 위기가 고조되자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에 김규식은 여운형에 비해 좌우 합작에 소극적이었으며 김규식은 좌우 합작으로 인한 우익의 분열을 걱정했다. 미군정의 지지는 김규식이 태도를 바꾼 전환점이었는데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한국민주당에게 좌우 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도 지지를 선언했다.
김규식의 경우 미군정의 정책에 호의적이면서도 그 자신의 정치적인 이해를 위한 당파를 구성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미군정은 그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그가 민주의원 내에서 유일하게 반탁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지도자였다는 사실 역시 소련과의 협의를 유리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를 역임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은 “한국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헌신적인 지도자는 단지 극소수일 뿐”이며 “그 명단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것이 김규식이라고 극찬하였다.[24]
덕분에 좌우합작운동은 급진전되어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김규식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북한의 소련군정 및 좌익 세력과의 통일 협상을 담당하는 대표 기구로 성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의 비타협적 태도로 좌우합작운동은 어려움을 맞고 좌익 3당 통합 문제로 여운형이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미군정이 나선다. 미군정은 박헌영 등 강경 좌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재천명한다. 미군정은 미군정을 대신 해서 좌우 합작 위원회가 과도 입법 기구 수립을 제안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김규식은 과도 입법 기구 내 좌우 합작 위원회의 주도권 보장, 개혁 여건 마련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과도 입법 기구 설립에 소극적이었던 여운형을 설득하는 일도 김규식의 몫이었는데 좌익 대부분이 과도 입법 기구 설립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일은 여운형의 정치적 기반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25]
김규식의 설득과 여운형의 결단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과도 입법 기구 설치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한다. 한국민주당은 토지 개혁 조항을 문제삼으며 좌우 합작 위원회를 공격했으며[26] 이 과정에서 원세훈, 김약수 등 한국민주당에서 좌우 합작에 참여했던 당내 비주류 인사들이 탈당했다. 이들은 '민중 동맹'을 결성하고 이후 김규식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으며 이후 민중 동맹은 중간파의 거점이 됐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지원에 힘입어 미군정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입법 의원) 설치를 공포하고 10월부터 선거 절차에 돌입한다.[27] 그러나 미군정의 기대와 달리 민선의원 선거 결과는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세력의 압승으로 끝났다.[28] 김규식은 일부 선거구에서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재선거와 과거 미군정이 약속한 합의 이행 등을 요구했다. 선거 결과가 자신들이 바랐던 것과 다르자 미군정은 재선거 요구를 받아들이고 관선의원 대부분을 좌우합작위원회 인물들로 채워넣었다.[29]
왼쪽으로부터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 의원)이 구성되자 관선의원에 선임되고 12월 의장에 취임했다. 남조선 과도입법위원은 최종적으로 민선 45명, 미군정이 추천하는 관선 45명으로 구성되었고 1946년 12월 12일 개원하였다. 48년 제헌의회에 바톤을 넘기기 해체될 때 까지 총 33건의 법률안을 심의했고 그 중 16개 법률이 통과되었다.
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김규식. 김규식의 육성을 담은 유일한 음성이다.
그러나 좌우합작위원회의 지분과 개혁 지원 요구는 거부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운형 등 중도 좌익 세력은 입법 의원 참여를 거부했으며 입법 의원이 개원되자마자 미군정은 좌우 합작 위원회 해체를 요구했다. 김규식은 미군정의 요구를 거부하고 좌우 합작 위원회의 조직을 강화하여 독자적인 정치 조직으로 삼으려 했는데 1947년 5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김규식은 중간파를 결집하는데 애쓴다. 이 무렵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소식에 정계에 복귀한 여운형도 좌우 합작을 다시 함께 하는데 김규식과 여운형의 정치적 위상은 날로 높아졌으며 이들을 향한 극우파의 공격도 거세졌다.[30] 동아일보는 김규식을 사기 사건의 공범으로 매도했고 김규식의 자택에 괴한이 난입하려다 제지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반탁 입장을 표명한 우익을 협상에서 배제하려는 소련의 주장으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1947년 7월 결렬되었고 얼마 후 여운형마저 암살[31]되며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했다.[32]
남북 회담이 성공하리라고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북한 쪽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을 내놓기가 쉽다. 그러므로 북행하는 사람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 1948년 4월 3일 북행을 발표하면서
- 1948년 4월 3일 북행을 발표하면서
이후 김규식은 중도파를 결속해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만들어 총재가 되었으며 1948년 4월 남한 지역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여 남북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남북 협상 이후 김규식은 좌파로 몰렸는데 그는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빨갱이로 몰리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본인은 건강 문제로 불출마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출마를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3.6. 납북과 사망
1950년 6.25 전쟁 중 9.28 서울 수복 직전인 9월 26일 밤 조선인민군에 납북되어 평양을 거쳐 북쪽으로 계속 끌려가던 중 그 해 12월 10일 자강도 만포군 만포면 별오동(현 자강도 만포시 별오동)에 있던 군 병원에서 지병인 천식을 비롯해 뇌출혈, 동상 등 이런저런 병명으로 병사했다.[33] 수백만 명이 슬퍼하며 장례가 치러진 김구의 죽음이나 여운형의 죽음에 비교하면 그의 죽음은 한참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정부와 이후의 군사 정권에서는 외면받아 오다가 1989년에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로동신문, 민주조선, 조국전선 등의 관영언론에 부고가 발표되고 국장이 거행되는 등 나름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는데, 6.25 전쟁 중의 로동신문은 매우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 검증하기가 어렵다.[34]김규식의 묘소.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소재의 애국렬사릉. 뒤에 조소앙의 묘도 보인다.
사후 그의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를 세웠다.
4. 기타
- 임시정부 소속이었는데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둘 다 참여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35] 독특한 입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러일전쟁을 예견하거나 모스크바 3상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등 외교적 식견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지만 정치를 할 만큼 통이 크지 못했다고 한다.
- 몸이 약해서 항상 아팠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수시로 일어났고 뇌종양 수술도 받고 신경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미군정 쪽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sickly(약골)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Kim Kiusic이라고 썼는데 미묘하게 비슷하다. 광복 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규식은 "차라리 안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빠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장죽 담배 피우기를 즐겼다. 남북 연석 회의 차 북한에 가서 장죽 담배를 물고 문서에 서명한 일도 있었다.
- 처음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 분단과 좌 - 우 정치적 지형이 극단화되어갈수록 이대로 있어서 안된다는 생각에 총대를 메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로 1946년 어느날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찾아와 좌우 합작을 권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0만원인가를 내놓자, 애연가인 김규식은 2자나 되는 긴 담뱃대를 집으면서 "형님은 대통령이나 하시오. 나는 대통(장죽 담배)이나 즐기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승만에게 "형님은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댈 것임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라고 발언했다고 한다.[36]#
- 어학의 천재로 다국어에 능했고 영어를 매우 잘해서 미군이 놀랄 정도였으며,[37][38] 임시 정부 활동 시절에 임정 요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신채호도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김규식이 발음이 틀렸다고 자꾸 지적하자 신채호는 단어 뜻만 알면 되지 발음은 뭣 하러 공부해야 하느냐고 서로 싸웠고, 신채호는 이광수한테 영어를 배웠다.[39]
- 의외지만 1946년 4월 25일에 칼로 자살을 기도했다. 실패 이유는 이웃 사람이 방으로 뛰어들어 칼을 빼앗았기 때문. 사실 4월에는 김구나 이승만도 민족적 각성을 위해 자결을 고려한 바가 있었다.
- 성격이 매우 차갑고 냉소적인 편이라 인간적으로는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전형적인 학자풍의 성격으로 정치인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당대 인물들의 주된 평.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를 지낸 우양 허정은 그를 두고 '매우 냉정한 분' 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또 매우 현실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일평생 정치 생명을 담보로 모험하지 않았다. 여운형과 좌우 합작을 주도한 탓에 원조 통일 정부론을 주장한 대표격 인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론 제의를 받고도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 실제로 남북 협상 당시에도 맹동적이었던 김구와 달리 일찌감치 북한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성격이었던 셈이다.[40]
- 남북협상 참여 후 정계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원세훈 등 김규식 계열의 정치인들이 정계에 진출해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할것을 권유하였다. 6.25 전쟁으로 김규식 계열의 정치인들이 대거 납북되어 명맥을 잇지는 못했지만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거 당선되는 등 많은 지지를 얻었다.
- 기본적으로는 깐깐한 원칙주의자였으나 의외의 면도 존재한다. 그 일화로 허정의 증언을 들 수 있다. 다른 임정 요인들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한 허정은 김규식이 아들 김진동과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었다.[41] 이에 대해선 아마 그의 투철한 자유주의 사상 관에 입각한 평등 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추측만 이어질 뿐이다.
- 민족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매우 냉소적이었다. 민족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민족 그 자체에 예찬적인 태도를 견지할 의무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 김규식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한 민족주의자였음에도 "우리 민족은 잔인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주장했다. 또한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공주의자라고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속으로 드러난 입장이지, 적어도 공식적인 담화나 발표 글에서는 좀처럼 반공주의적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42] 이는 광복 이후, 당시 좌익으로부터 각종 비난과 비판이 쏟아질 때도 김규식이 정면으로 좌익을 비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가장 중요시했던 원칙은 '민족 통일 전선과 좌우 합작'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 허례허식을 매우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을 지지하던 청년 하나가 찾아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자 "왜놈들이나 하던 짓 쓸데없이 무엇 하러 하시는가?"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 프랑스 파리에서 임시 정부 외무 총장이자 파리 위원부 대표로 활동을 할 당시에 호찌민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호찌민이 김규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의 문건들이 프랑스 정부 자료에 자세히 담겨있을 정도다. 구체적으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당시 프랑스 파리의 정보 경찰은 1920년 2월 메모에서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기고한 모든 글이 번역돼 중국에서 간행됐는데, 모두 호찌민이 김규식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김규식은 중국 신문의 미국 특파원을 호찌민에게 연결해줘 인터뷰를 주선하기까지 했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호찌민과 김규식이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밀했다는 정황이 묘사되어있기도 하다. 호찌민 감시 佛 경찰 문건 대거 발굴… 한국 임시 정부 활약상 생생
5. 대중매체에서
- 1973년 개봉한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서는 배우 추봉이 연기했다.
- 1979년 KBS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서는 배우 윤덕용이 연기했다.
- 1982년 MBC 8.15 특집극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에서도 배우 이묵원이 연기했다.
- 1985년 KBS 드라마 <새벽>에서는 성우 김규식이 연기했다.
- 1990년 KBS 8.15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배우 백준기가 연기했다.
- 1994년 KBS <다큐멘터리극장>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2탄에서는 성우 최흘, 3탄에서는 배우 맹호림이 연기했다.
-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문회원이 연기했다. 좌우 합작을 방해한 김두한의 이런 과격한 행보에 매우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럼에도 과거 김좌진과의 인연 탓인지 미군의 조사에서는 김두한을 애써 감싸는 모습도 보여준다.
- 대체역사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당시에는 대전쟁으로 불린 1차 대전 종전 뒤, 파리파트에서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가명을 쓴 호치민과 같이 찾아간다. 거기서 주인공은 얼마없는 사비로 조그마한 성의를 표한다.
- 대체역사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군인으로 등장하며 만주 조정과 논공행상을 위한 협상 대표로 나서는데 실제 인물이 그랬듯 언어 능력이 뛰어나서 통역없이 회담해서 고압적인 태도로 영토를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킨다.
- 대체역사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김구의 광복 선언 당시 여운형과 함께 옆에 있었다고 한다.
- 대체역사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살아남은 대한제국의 유능한 외교관으로 등장하여 활약한다. 역사대로 식민지 상태인 아시아 국가에 동정적이여서 역사의 변화로 수혜를 입은 자신과 달리 여전히 식민지 지식인인 호치민을 동정하여 아시아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국이 이를 지원해야 하며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소련에 대해서도 유화적이다. 이 때문에 이승만과는 노선 차이가 있지만 워낙 권력 의지가 없어서 이승만과 직접적으로 부딪히지는 않는다.
- 대체역사소설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는 파시스트 지도자 아르민 로젠바움을 찬양하는 이범석을 비꼬는 모습으로 등장. 정작 이범석은 비꼬는걸 못알아먹는다.
- 대체역사 게임 Hearts of Korea에서 대한민국 3대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부통령 여운형과 함께 광란의 20년대 번영을 잘 이끈 능력있는 지도자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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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952년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2] #[3] 현 경신중·고등학교[4] 김은식의 남편[5] 후처 김순애의 오빠[6]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에 산스크리트어 구사까지 했었다고 한다.[7] 이유는 김규식의 성품 때문인데 김규식은 호방하기보다는 내성적이어서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사색을 즐기는 문인 기질의 학자형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광복 직후 대표적인 정치인치고는 인지도가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설은 잘하는 편이라, 자체의 퀄리티는 김구나 이승만보다 한수위였다.[8] 김규식의 출생년도는 불분명한데 이정식 교수는 족보 등을 근거로 '김규식의 생애'(신구문화사, 1974)에서 1881년 설을 취했다. 1877년 설, 1880년 설도 있다. 김규식 본인은 남북 협상 당시 자신이 70 고개라고 언급한 바 있다. 생일 역시 불확실한데 2월 28일(음력 1월 27일)생 설과 1월 29일생 설, 12월 10일생 설이 있다. 북한 애국렬사릉 비문에는 1880년 12월 10일생으로 되어 있다.[9] 이정식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경주 이씨의 아들이 아니라 첩에게서 얻은 서자라고 한다.[10] 정확히는 김상로의 동생 김무가 그의 7대조이다.[11] 다만 정치적으로 개화파는 아니었다.[12] 언더우드는 1886년 5월 고종의 승인을 얻어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중이었다. 이 고아원은 정동에 위치하였으며 나중에 예수교학당(Jesus Doctrine School)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이후 경신학교의 전신이 된다.[13] 조선에 도착한 서양인 선교사들은 조선인에 대해 "미개하고 불결하며 심보가 잔인하다"는 평가들을 내렸다. 또한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 시각은 21세기의 한국인들이 21세기의 아프리카 빈국에 가서 살 때 그곳에 관해 가지게 될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인습 항목 참고.[14] 부평군수를 지낸 바 있는 전협을 필두로 조직된 소규모 독립운동 조직.[15] 김규식 박사라 불린 것은 이후에 모교인 로어노크 칼리지에서 받은 명예 법학 박사 학위 때문이다.[16] 한국에서 근대식 교육 과정의 박사 학위를 최초로 받은 것은 이승만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것이 1910년이었으므로 만약 김규식이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까지 계속 밟았더라면 한국 최초의 박사 영예는 김규식이 가져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17] 1919년 9월에 가서야 각지의 임시 정부가 통합된다.[18] 연설에서 김규식은 프랑스, 미국, 영국, 일본을 흡혈귀 국가라고 성토했다. 이러한 행보는 그가 공산당원으로서의 깊은 자각으로 인한 행보라기보다는 '민족 자결주의' 등 국제 조류가 한국의 상황과는 맞지 않자 또다른 축이 될 소련에 외교적 행보를 한 것이라 추측된다. 실제로 이 시기는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사회주의에 기대를 가졌던 인물들도 많았다.[19] 1924년 3월 1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내란죄 혐의에 대해 공소 기각 판결을 받은 기록이 있다.[20] 1924년 9월 재중국 소련 무역 대표부 석유 과장의 이름으로 된 한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김규식은 과거에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고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의 2차 회의에도 참가했었음. 현재에 그는 신념을 바꾼 변절자이며 사업 쪽으로 방향을 돌리려는 그의 시도도 실패하고 있는 인물임. 미국 석유의 판매를 비롯한 몇 차례의 회사 설립을 위한 그의 시도는 알려져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소련을 떠난 뒤 이미 김규식은 공산당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며 이런 그에 대해 소련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1] 그가 선임한 두 대표자 중 한길수는 미국 내의 이승만 세력과 수시로 마찰을 일으켰고 심지어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공작을 벌였는데("방선주 저작집" 1권)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1가지 원인을 제공했다. 당연히 이승만은 김규식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과격파나 공산주의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길수는 김원봉이 이끌던 공산주의 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에서 발간하던 신문인 '독립'지에 기사를 쓰기도 했다.[22] 모스크바 3상 외상회의의 전문에 따르면, 신탁 통치 자체가 주된 목적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임시 정부를 수립하느냐? 어찌저찌해서 한국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해서 지원을 해주느냐?' 등에 주안점을 두었던 회의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김규식은 다중언어 구사자였기 때문에 그는 모스크바 3상 외상회의가 이러한 내용으로 진행됨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처음 모스크바 3상 외상회의 보도를 한 <동아일보>가 이를 왜곡시켜 신탁 통치안을 부풀려 버렸어서, 신탁 통치안에 주안점을 둔 회의로 알고 있던 한국인들이 많았던 것. 게다가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제안하고 소련이 거부 및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 것에 대해 주체를 정반대로 바꾸었고, 신탁통치를 식민통치로 보이도록 보도하는 바람에 광복 직후 한국은 이에 대해 좌익 및 우익 대립에 시달리게 되었다.[23] 미국인 사무엘 돌베어에게 100만 달러를 받고 광산 채굴권을 약속했다는 주장으로 이승만의 반대파이던 한길수가 '독립'지에 쓴 기사에서 주장한 얘기인데 별도의 근거는 없었다.[24] 아놀드 소장과의 대담 비망록(1946년 10월 9일) 김국태 역[25] 과도 입법 기구 설치를 막기 위해 조선공산당의 당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여운형이 납치되는 일까지 있었다.[26] 당시 한민당은 좌우 합작 7원칙 3조에서 발표한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이상 유상매수), 무상분배 방침에 반대해 지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주장했다. 반대로 좌익측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며 좌우합작위원회를 공격했다.[27] 입법 의원 선거는 4단계로 구성된 간접 선거 방식이었다.[28] 납세 실적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부여한 입법 의원의 선거 방식은 지주와 자본가가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에게 유리했다.[29] 과도 입법의원의 절반은 간접 선거로 뽑히는 민선의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미군정이 임명하는 관선의원이었다.[30] 남조선로동당 등 좌파 세력은 이 시기 일제강점기에 인권 변호사로 명망이 높았던 허헌을 얼굴 간판으로 내세워 합법적 공간에서 정치 활동을 한창 하였으나 1946년 정판사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된 미군정의 공격으로 이미 정치 세력으로서의 지지 기반은 힘을 잃었던 시기였다.[31] 이 시기 여운형은 미군정으로부터 민정장관 제안을 받았으며 여운형은 미군정의 민정장관 제안을 수락받기로 예정되었다.[32] 여운형 암살 시점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한창이던 당시 좌우 세력이 '선 임정 후 반탁'이라는 내용 아래에 합의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이 상황에서 좌우 합작 위원회가 결속되었던 것이고 그 중재자이자 구심점 역할인 여운형이 암살당했다.[33]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 참조.# 1950년에 사망한 게 아니라 1952년까지 생존해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1980년대까지 백과 사전들은 1952년 사망설을 실었으며 1980년대 말부터 북한 측의 자료나 애국열사릉의 묘비명을 보고 1950년 사망설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 직후 작성된 납북, 피랍자 신상 관련 자료에는 1952년으로 된 것으로 보아 1952년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34] 특히나 김규식이 사망한 1950년 12월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35] 여운형은 남북연석회의 이전에 암살당했다. 단, 좌우합작 추진 과정에서 남북합작까지 해야겠다고 홀로 5번 북행길에 오른 적이 있었다.[36] -출처: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1972년-[37] 미국 동부 억양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프린스턴 유학생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38] 장준하의 회고록 <돌베개>에 따르면 충칭시 임시정부 시절 김구의 주선으로 장준하는 충칭시에 체류하고 있는 미국의 선교사들과 잡지 타임의 기자들을 만나 한국의 기독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장준하의 영어통역을 전담해준 사람이 김규식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장준하를 비롯한 일본 유학파 학도병들의 경우 이 당시 기준으로 고학력 엘리트였던 것은 맞지만 일본식 영어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발음은 재플리시식 발음인 경우가 많아 회화에는 굉장히 서툴렀다.[39] 이 때만 해도 이광수는 친일파로 변절한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40] 장준하, 김준엽의 절친이자 해방정국 때 이승만의 공보비서로 활동했던 최기일 교수 또한 본인의 상사였던 이승만보다 오히려 김규식의 식견과 정치적 노선이 훨씬 합리적이었지만 김규식 특유의 소극적인 성격때문에 제대로 현실화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고 평가했다.[41] 지금이야 시대가 변하였기에 그나마 높은 사람 앞에서 담배를 (그래도 최대한 눈치보면서)피울 수라도 있지만 당시에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따귀를 맞는 일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42] 좌익에 대한 김규식의 직접적인 언급이 별로 없는 가운데서도 몇몇 연구는 김규식을 반공주의자로 규정한 바 있다. 이때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좌우 합작 위원회에서 활동한 바 있던 강원용에게 공산 혁명을 통한 여러 나라의 유혈 혁명 사례를 들어 말했다는 "우리 민족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인한 성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피바다가 된다."는 발언이다.[43] 배우 강부자의 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