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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7년 10월 3일[2] | ||
한성부 서부 반석방 미전하계 차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서소문 부근) | |||
충청도 영동현 동동면 계산리 (現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 |||
사망 | 1946년 9월 9일 (향년 69세) | ||
서울특별자유시 (現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3호 | ||
재임기간 | 제3·4대 임시의정원 의장 | ||
1921년 5월 6일 ~ 1922년 4월 3일 | |||
제6대 임시정부 국무령 | |||
1926년 7월 7일 ~ 1926년 12월 1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30066><colcolor=#ffffff> 본관 | 풍산 홍씨[3] | |
부모 | 아버지 홍재식, 어머니 한숙봉 | ||
형제자매 | 3형제 중 차남 | ||
자녀 | 아들 홍기택 | ||
학력 | 법관양성소 (졸업) |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안드레아) | ||
최종 당적 | |||
호 | 만오(晩悟) 또는 만호(晩湖)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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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중자유한인대회에서 연설하는 홍진(1943년 5월 10일) 대만 중앙통신사 수집자료 |
대한제국의 검사, 변호사,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6대 국무령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77년 8월 27일 태어났다. 이름은 면희(冕憙) 자는 성무(聖武)이고, 호는 만호(晩湖) ・ 만오(晩悟)이며, 필명으로 경환(警寰)이라 한 적도 있다. 이명은 홍진(洪鎭)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4]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했고,1903년 2월 법관양성소 입학 후 1904년 7월 21알 법관양성소를 졸업하였다. 이후 한성재판소 주사로 근무하다가 1906년 시험통과 후 12월 10일 발령을 받아 검사가 되었고,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발령받았다.
대한제국 관보, 충청북도 검사 발령 홍면희(洪冕憙)
홍면희 (홍진) (전) 충청북도 검사의 변호사 인가장 |
1908년 변호사 인가장을 받고,1909년부터 평양에서 사무소를 차리고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
2.2.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직후 서울에서 검사 출신 홍면희(홍진·1877~1946)와 목사 출신 이규갑은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3월 17일 이규갑 ・ 이교헌 ・ 윤이병 ・ 윤용주 ・ 한남수 ・ 김규 ・ 김사국 ・ 이민태・ 민강 등과 법관양성소 출신의 현직 검사인 한성오(韓聖五)의 집[5]에 모였다.# #이 회합에서 정부의 이름은 '한성정부'로, 정부수반의 명칭은 '집정관총재'로, 각원은 '총장'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에 이동휘를 비롯하여 각 부 총장과 평정관 ・ 파리강화회의 대표 등을 선출하고,정부의 헌법인 약법(約法)도 제정하였다. 이로써 한성정부 조직안이 만들어졌다.
1919년 이들이 상하이에 도착하였을 때, 상하이에는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4월 8일 국내에서 강대현이 가지고 온 '임시정부안'을 기초로 하여,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조직을 상하이의 인사들에게 알렸다.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문제를 가지고 논의하였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1922년 8월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되었고, 1926년 7월 8일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행정수반이 되었다. 그 뒤 한국 독립당을 만들고, 지청천과 항일 활동을 했다.
여자동귀 (與子同歸) 광복이 되면 모두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자.[6] |
임시정부의 입법기관, 즉, 현재의 대한민국 국회격인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을 역임하면서 광복을 맞이했다. 선생은 1921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가장 오랜 기간 세 차례에 걸쳐서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의회 정치의 기틀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문희상 전 국회의장, KBS 다큐)
1945년 광복 이후, 임시의정원 관련 문서를 보존해 귀국[7]했고, 초기 의회의 역사를 후대에 길이 남겼으나 광복 이듬해에 타계했다.
3. 연보
3.1. 대한제국
- 1877年 8月 27日 서울 서소문가 양반가에서 출생, 본명은 冕熹(면희),별명은 鳳根(봉근)이다.
- 1896年 의령 남씨(宜寧南氏) 남숙희(南肅熙)의 둘째딸 남향부(南相福)와 혼인하였다.
- 1903年 2月 법관양성소 (法官養成所)에 입학하였다.
- 1904年 7月 21日 판관양성소 (法官養成所)를 졸업하였다.
- 1904年 7月 26日 판관양성소 (法官養成所任) 박사로 임명되었다.
- 1906年 2月 한성평리원 주사로 임명되었다(任漢城平理院主事).
- 12月 5日,법관시험에 합격하였다.
- 12月 10日 검사로 발령되었다.
- 1907年 1月 28日 충청북도 재판소 (충주) 검사로 발령되었다
- 1908年 5月 14日 대한제국 검사로써 의병사건 논고를 거부하고 검사직을 의원면직하였다.
홍면희 (홍진) 검사의 의병사건 논고거부 [8] |
- 5月 29日 대한제국(大韓帝國) 법부로부터 변호사 인가장을 받았다.
- 1909年 7月 14日,평양지방재판소 검사국에 변호사로 등록하고, 평양에서 개업하였다. (在平壤地方裁判所檢查局任辯護士,在平壤开業)
3.2. 독립운동
- 1919年 3月 3·1 운동에 참여. 충북 청주군 연락책임자가 되었다.
- 3月 17日 현직 검사인 한성오의 집에 모여 한성정부를 조직하였다.
- 4月 15日 이규갑과 함께 한성정부의 각원 명단과 문건을 가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압록강을 건너며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꿈.
- 9月 11日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됨. 취임을 미루던 국무총리 이동휘를 찾아가 취임을 종용.
- 11月 임시정부 국내조사위원 및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거위원장에 임명.
3.3. 임시정부 법무총장,내무총장 등 역임
- 1920년 3월 19일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제4분과 위원.
- 3월 30일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회 위원.
- 1921년 4월 6일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에 당선.
- 4월 20일 상해대한교민단장에 선임.
- 5월 6일 임시의정원 제3대 의장에 선출.
- 5월 20일 교민단장 면직.
- 8월 13일 상해교민단 사무소에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발족하고 임시회장으로 선출.
- 8월 26일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공식출범에 따라 대표인 간사장을 맡음.
- 1922년 4월 3일 태평양회의에 대한 책임으로 국무원이 총사직, 임시의정원 의장직에서 면직.
- 1924년 5월 임시의정원 내에서 개헌 문제로 분란이 일자 사임후 장쑤성 전장에서 은거.
- 1926년 7월 7일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으로 선출. 이름을 홍진(洪震)으로 바꿈.
- 7월 8일 국무령에 취임.
- 8월 30일 정부를 구성하고, 홍진 정부가 공식 출범.
- 9월 27일 시정방침 및 신 부서(部署) 조직규정 발표.
- 9월 27일 국무령으로 외무부장 겸임.
- 9월 임시정부 시정방침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1.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 을 진작함. 2. 전민족 대당체(大黨體)를 건립함. 3. 각 피압박민족과 대연맹 을 체결하고 기타 우의. 4. 국교를 증진함)
- 12월 9일 유일당운동에 주력하기 위하여 국무령을 사직.
- 12월 29일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됨
- 1930년 7월 26일 한국독립당 창당, 중앙위원장으로 선출.
- 1934년 2월 25일 난징에서 신익희의 한국혁명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 창당, 중앙위원장으로 선출.
- 1935년 7월 5일 독립 계열 단일 정당 민족혁명당 창당, 중앙검사위원.
- 1937년 8월 17일 미주지역 6개 단체를 참여시킨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
- 1938년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이 결성되자, 광복전선 운영 간부에 선임.
- 1939년 10월 15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위원으로 선출.
- 10월 16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두 번째).
- 10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
- 10월 25일 임시정부 내무장으로 선임.
- 11월 5일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 불겸직안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장직 사임.
-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 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
- 10월 8일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
- 1942년 10월 26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세 번째).
- 1943년 10월 9일 제35차 임시의정원 회의 개최, 국무위원 숫자와 선출 방법을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
- 1944년 1월 3일 국무위원 선출방식을 위한 투표에서 여야 동수가 되자, 의장으로 야당 측이 주장한 무기명 투표안에 찬성. 이 일을 계기로 부의장 최동오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
- 1945년 2월 9일 신한민주당을 창당, 유동렬·김붕준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
3.4. 광복 이후
- 1945년 11월 5일 한국 해방에 따라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 29명과 함께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
- 12월 1일 임시정부 제2진으로 22명과 상하이를 출발, 폭설로 김포가 아닌 군산 비행장에 도착.
-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 1946년 2월 1일 명동성당에서 비상국민회의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비상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됨.
- 2월 미군 주둔군 사령관 존 하지와 면담.
- 7월 심장천식으로 입원, 입원 중 남상철의 권고로 영세를 받음(세례명 안드레아).
- 9월 9일 향년 70세로 사거.
- 9월 13일 명동성당에서 장례위원장 김구 집례로 장례미사, 인천시 관교동에 안장.
-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1984년 12월 15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
- 1994년 10월 6일 국립묘지 임시정부요인 묘역 내 임정수반 묘소로 천장(迁葬).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묘역 홍진 선생 묘역 |
4. 관련 사료
-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흉상 제막식이 국회도서관에서 개최됐다. #
5. 기타
5.1. 검사 출신 1호 대통령
- 이원석은 윤석열 대통령에 앞서 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홍진이 검사 출신 1호 대통령 임에 주목하고 나라에 헌신한 검사 출신 위인으로써 이준 열사에 이어 검찰 역사에 편입하는데 힘을 쓴다.
- 이원석 검찰총장. 검사 출신 독립운동가 홍진에 대해 이야기하다.
청주지검 독립운동가, 검사 홍진 |
- 홍진 선생의 독립요구서 (출처 : 대검찰청 페이스북)
홍진 선생의 독립요구서 |
윤석열 검찰총장 재직시절인 2019년 8월 14일 대검찰청 페이스북 |
5.2. 검찰의 참배 및 묘역정비
- 이원석 검찰총장은 임명 직후 현충원 방문시 참배하고 주기적으로 검찰사랑봉사단과 함께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참배 및 묘역 정비에 힘쓰고 있다. (2023년 8월 8일, 2024년 6월 4일) # #
2024년 6월 5일 홍진 전 국무령의 묘비를 닦는 이원석 |
홍진 국무령 (전 검사)은 "가장 큰 죄악은 분열이고 가장 큰 공능은 결합" 이라는 '통합' 을 강조한 말로 유명하다. 검사 출신 1호 '대통령'은 이 사람, 그의 특별한 과거
[1] 본명은 홍면희(洪冕憙), 아명(兒名)은 홍봉근(洪鳳根)· 홍우봉(洪又鳳).[2] 음력 8월 27일.[3] 23세 희(憙) 항렬.[4] 대한제국 관보 등에는 '홍면희'라고 찾아야 나온다.[5] https://www.yna.co.kr/view/AKR20170413035300371 한성오 집터 표지석 기사[6] 조국이 독립되면 우리 모두 함께 돌아가지는 뜻으로 홍진의장이 중경을 떠나 환국하기 전 조국 독립의 감회를 필적으로 남긴 유묵이다. (출처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7] 당시 그가 가지고 온 문서는 총 1,536건으로 타계 이후인 1974년 손자 홍석주 씨가 이를 국회에 기증해 현재는 국회도서관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해당 문건은 '대한민국'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1)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 (1927년), 2) 대한민국 건국강령 (1941년), 3) 광복군 작전보고(1945년) 등이다.[8] 출처 : KBS 다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