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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우익 민족주의 정당.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것이 기원이기에, 명칭은 '당'이지만 사실상 독립운동 조직으로 기능했다.
다른 당들에 비해 역사가 복잡한데, 같은 해에 상하이와 만주라는 다른 두 지역에서 같은 이름의 정당이 탄생했고, 합당과 탈당 등 일련의 사건을 거쳐 상하이 쪽 한국독립당이 재건되었으며, 그로부터 몇 해 뒤에는 상하이와 만주의 한국독립당이 하나의 이름으로 다시 합쳐졌다. 해방 후에도 같은 이름의 당이 두 번 등장하는데, 이 문서에서는 당들이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서술한다.
2. 1930년에 상하이에서 창당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운동 정당 | ||||
한국독립당 (임시정부) | → | 한국국민당 | → | 한국독립당 (재건임시정부) |
한국독립당은 설립 당시에는 조직, 선전, 훈련 등의 반일운동을 광범위하게 벌이기로 결정했으나, 실제로는 당세 확장을 위한 조직 활동과 기관지 발행을 통한 선전 활동에 치중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로 인해 일제의 검색이 강화됨에 따라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근거지를 옮겼고, 그 이후에는 당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재무부, 내무부, 총무부 등의 부서를 설치했다. 또한 김철, 조소앙 등의 주도 하에 기관지 <진광>을 창간하고 각종 선언서와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선전 활동을 계속했다.
한국독립당의 외곽 단체로는 상해한인청년당,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상해한인소년동맹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상해한인청년당이 기관지 발행 등의 선전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수행했다.
◇ 당의
1. 우리는 5천년 독립자주하여 오던 국가를 이족異族 일본에게 빼앗기고
2. 지금 정치의 유린과 경제의 파멸과 문화의 말살 아래서 사멸에 직면하여
3. 민족적으로 자존을 득하기 불능하고 세계적으로 공영을 도하기末有(말유)한지라,
4. 이에 본당은 혁명으로써
5. 원수 일본의 모든 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6.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고,
7.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하여서,
8. 내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며 외로는 족여족 국여국의 평등을 실현하고
9.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로 향함.
※ 1929년 당시의 당의와 당강은 1940년 한국독립당이 출범하면서 조소앙에 의해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한국독립당 창립경과 속에 한문으로 번역되어 전해진다. 원래는 위에서 처럼 우리말로 되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이를 조소앙이 한국독립당의 당의 해석 등에서 원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에 따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앞의 문단 숫자는 원래 없는 것이지만 역시 후일 조소앙이 분류한 바에 따라 설명의 편의상 붙인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3, p.396.
위의 당의 전문은 이후의 재건한국당(1935) 및 통합한독당(1940)에도 그대로 변동 없이 계승된다. 결국 삼균주의의 중심 내용은 1920년대 말에 이미 한국독립당의 당의로 채택되어 민족진영 전체의 합의된 이념으로 정립된 것이다.
동시에 이때 7개조의 당강을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민의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함.
2. 엄밀한 조직 아래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진행함.
3. 우리의 광복운동에 대해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는 절실히 연락함.
4. 보선제를 실시하여 국민의 참정권을 균등하게 하고, 국민의 기본권리를 보장함.
5.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함.
6. 생활상의 기본지식과 필수기능을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공비에 의한 의무교육제를 실시하여 국민의 구학권을 평등하게 함.
7. 국제평등과 세계공영을 도모함.
출처: 〈도산 안창호의 민족혁명론〉, 2022, 박만규.
3. 1930년에 창당된 만주 혁신의회의 여당
1920년대 초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 세력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나뉘어 있었다. 1920년대 중후반 민족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지역에서도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통합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하나의 단체로 완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북만주 지역의 혁신의회(1928)와 남만주 지역의 국민부(1929) 둘로 나뉘게 되었다. 그 둘 중 김좌진이 주도하고 있었던 혁신의회는 1년 뒤인 1929년에 한족총연합회로 개편되었다.1930년에 김좌진이 암살당한 뒤, 지청천이 남은 이들을 수습하여 한족총연합회를 한국독립당으로 개편했다. 1933년 한국독립당은 활동 근거지를 만주에서 중국 본토로 옮기고 한중연합군을 구성하여 쏠쏠한 전과를 올렸으나 중국공산당의 압력으로 얼마 안 가 해산되고 말았다.
한국독립당은 1934년 한국혁명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했고, 신한독립당은 1935년 5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했으나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해 얼마 안 가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이 출범하면서 신한독립당 계열도 같이 탈당했다. 이후 지청천이 1937년에 탈당하여 조선혁명당을 창당했고, 조선혁명당은 이후 1940년에 한국국민당 및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4. 1935년에 만들어진 조소앙의 독립운동 단체
1931년에 일본이 벌인 만주사변은 한인 독립운동 세력에게 기회가 되었다. 중국인들의 항일 구호가 높아지면서 한중 연합이 급속하게 진전된 것이다. 이러한 정세에 따라 독립운동단체들의 역량을 집중하여 대일통일전선을 형성시키자는 의견이 나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출범했고, 한국독립당은 의열단, 신한독립당과 합당하여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이하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5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족혁명당이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열 세력에 의해 주도되자 조소앙이 1935년 7월에 탈당하여 1935년 9월 25일 조소앙·박창세 등은 민족혁명당을 이탈하여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했고 창당했다. 합당을 반대했던 김구 또한 합당 중에 빠져나와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1]이후에는 민족혁명당은 협동전선으로 출발했지만 결집한 이들의 성향과 노선 등의 차이로 인해 점차 분열되었다. 조소앙 역시 당의 노선 변화에 불만을 품고 당을 나와 재건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재건 한국독립당은 이후 독자적으로 활동했으나 재정적 문제로 인해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했다.
김구의 한국국민당(1935년), 지청천의 조선혁명당(1937년)과 함께 한국독립당(1940년)으로 합당했다.
4.1.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1937)와 전국연합진선협회(1939)
1937년 4월 이후, 중국 관내의 반(反) 민족혁명당 세력은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분리된 상태에서는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당 연합을 시도하게 된다. 조소앙은 재건선언 당시 정치상 견해가 부합되는 세력과의 결합을 천명했고,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뒤 조선혁명당을 결성한 지청천 역시 일본과 대립하는 모든 세력을 연결한다는 정강을 채택하여 당이 연합할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리하여 1937년 8월, 각 당의 대표들이 난징에 모여 회담한 끝에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광복진선)가 결성되었다.그 후의 중국 관내의 민족해방운동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양립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두 단체는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목적이 같았으나, 투쟁 방략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결국 민족통일전선운동은 김구와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양대 진영의 대립만 키우면서 항일독립운동전선의 대동단결은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절정에 이르자 중국 국민당 총재 장제스는 둘의 합작을 권유했는데, 마침 항일독립전선운동을 통일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기에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동포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양 진영의 연합전선 형성을 구체화하게 되었고, 이후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 총 7개 단체가 모여 7단체회의를 거쳐 전국연합진선협회가 발족했지만 몇몇 단체들 의 이탈로 인해 세력이 급속히 위축되면서 얼마 안 가 소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