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 국민회라고도 불리는 제1공화국 시기 정당에 대한 내용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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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배우자 이혜련 · 장남 안필립 · 장녀 안수산 | ||
사상 | 민족개조론 | ||
성향 | 사회민주주의 | ||
사건사고 | 수양동우회 사건 | ||
관련 단체 | 신민회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흥사단 · 독립협회 · 한국독립당 · 국민대표회의 · 대한인국민회 | ||
기타 | 연통제 · 도산공원 · 대성학교 ·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
1938년 4월 17일 건물 개관식. 1937년 12월 22일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관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 1368 W. Jefferson Blvd.로 신축 이전한 뒤 개관식을 진행하였다. |
1910년경 대한인국민회 입회증서. 증서의 주인은 이승만이다. |
1. 개요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로,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하고 이끌었다.2. 역사
1908년 7월,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대회의 결의를 계기로 1908년 10월 30일,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 대표 7인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 대표 6인이 모여 단체의 통합을 결의하여, 1909년 2월, 국민회가 창립되었다.1910년 2월,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되었다.[1] [2]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해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멕시코에는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3]
1911년 3월,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설립하였으나, 분과와 임원을 완비한 완전한 조직구성을 완료하지는 못하였다.[4]
1912년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중앙총회를 정비하고 임원을 선임하기 위하여 그 해 11월 제 1회 대표원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재외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기관으로 활동하였다.[5]
1914년에는 안창호가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민단령'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해체하고, 1922년 3월 22일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을 조직하게 된다.[6] 이 외에도 같은 시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북미 대한인교민단으로, 1924년 9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LA 대한인교민단이 조직되는 등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지방총회가 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되었다.[7]
1924년 이승만을 중심으로한 외교독립론자들이 대한인국민회를 탈퇴하여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대한인동지회에 합류하였다.[8]
1930년 7월 16일 이승만은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와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대표였던 김원용과 이승만의 마찰로 실패하고, 법정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후 교민단 총단장 손덕인과 국민회 총회장 이정건의 노력으로, 1933년 1월 3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로 복설되었다.[9]
1945년 광복 후 이승만의 귀국 이후에는 임병직, 이원순 등을 통해 대한인국민회에 영향력을 미쳤지만, 1960년 이승만이 하야한 이후에는 순수 교민 단체로 변모하였다.
3. 활동
3.1. 중앙총회
1915년 이대위 목사가 발명한 인터탑입한글 식자기를 이용하여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로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조국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10]1918년, 이승만이 날인한 국민회 의무금 증서 |
1919년, 전미 총회에서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3인을 파리 강화회의의 한국 대표로 파견하였지만 당시 일제와 밀월 관계였던 미국은 비자 발급을 허락해주지 않아 프랑스에 갈 수가 없었다.
그대신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미국 상원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출하였다.
3.2. 지방총회
3.2.1. 하와이지방회
하와이에서 하울리들의 인종차별이 심하던 1920년대에 한인과 미국인 간의 인종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가난한 한인들을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한인들이 연루된 범죄를 조사, 재판관행 개선 요구 등 미국 법률체계와 한인사회 간의 완충기 역할을 하였다.[11]3.2.2. 멕시코지방회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북미 총회 산하로 조직되었다.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바뀌며 1912년 10월 6일 멕시코시티에 멕시코지방회가 인준되어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로 자리잡았다.[12] 멕시코에는 멕시코지방회 이외에도 프론테라 지방회, 오학기나(와하께냐) 지방회, 산따 페 지방회, 꼬앗사꼬알꼬스 지방회 등이 있었다.[13]3.2.3. 쿠바지방회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쿠바지역으로 한인들이 집단 이주를 시작하였다.[14]멕시코 한인들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하여 한인들의 쿠바 이주를 구상하였고, 신한민보 1920년 12월 22일자에 의하면 이해영[15]이 주선하여 한인 400명을 이주시키기로 하였다.[16] 쿠바로 이주해온 한인들은 얼마 뒤 아바나 주재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한인들도 일본 재외 국민으로 등록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한 한인들은 재발에 대비하여 한인 대표 기구를 만들기로 하여 1921년 6월 14일 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조직하였다.[17][18] 이후 마딴사스, 마나티, 까르데나스 세 곳에 지방회가 설립되었고, 1937년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도 지방회가 설립되었다.
쿠바의 아바나 지역의 한인들은 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거나 흥민학교(興民學校)라는 국어 학교를 설립하는 등 각지 지방회에서 국어학교를 설치하여 한인 2세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매년 3월 1일 국민회관에 모여 3·1절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애국가를 불렀다.[19][20][21] 뿐만 아니라, 1923년부터는 쿠바 현지인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친구회를 조직하였고, 국민회 의무금을 거두어 미주의 국민회 중앙 총회에 보내는 등 독립 운동 기금을 모금하였다. [22][23]
4. 사건/의혹
4.1. 이승만의 하와이 지방총회 장악 사건
이승만과 박용만은 깊은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의 관점부터 달랐다.박용만은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신앙운동 및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무력을 통한 주권회복을 강조하였다. 그는 하와이 오하우섬에 캠프를 설치하고 한인의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와이에서의 일본인과의 무력을 통한 군사적 대결은 실질적 소득이 없을 것이라 주장하며, 외교활동을 통해 서구 국가의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를 받아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은 한인여학원 설립에 관한 문제로 갈등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갈라지게 되었고, 교회까지 분열되며, 이승만이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4.2. 박용만 암살 의혹
1928년 10월 17일 북경에서 대본공사 사업을 추진하던 박용만은 이해명의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당시 박용만은 군자금 모금 차 중국 톈진시 에 체류하였는데, 독립운동 자금에 쓸 돈 1천원을 내놓으라는 의열단원 이구연, 박인식, 이규서 등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암살당하였다는 의혹이 있다.[24]5. 관련 인물
[1] 본래 대동보국회는 공립협회와 갈등관계에 있었고 이승만 주도로 다른 단체를 만들려 했었다. 오죽하면 혈서까지 써서 보냈으니 그러나 이승만은 한인들이 모두 하나로 통합하는게 대외적으로 좋겠다며 통합을 권유하였고 이로서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하였다.[2]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3]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6] 하와이대한인교민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7] 북미대한인국민회 (北美大韓人國民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8] 대한인동지회 (大韓人同志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9] 하와이대한인교민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0] 대한인국민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1] 하와이 한인과 미국인 간의 관계(1903~1945), Brandon Palmer[12] 대한인국민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3] 지방회 설립 및 폐쇄, 한국사데이터베이스[14] 한인들 사이에 쿠바에 가면 돈벌이가 훨씬 낫고, 생활 수준도 높아 자리 잡기가 용이하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이주가 시작되었다.[15]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서 영업을 하던 한인[16] 쿠바 이민과 대한인국민회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17] 쿠바 이빈과 대한인국민회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18] 『신한민보』 1921년 7월 14일자, 「쿠바에 지방회 설립」[19] 쿠바 이민과 대한인국민회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20] 『신한민보』 1923년 5월 24일자, 「큐바한인국어학교의 현상」[21] 『신한민보』 1930년 2월 27일자, 「까르데나스 국어학교 설립」[22] 쿠바 이민과 대한인국민회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23] 국민회 개설 이후 1945년까지 총 경상비, 교육비, 구제비, 외교비 등으로 총 2만여 달러를 모금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일주일에 2~3달러를 벌던 한인들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24] 박용만, 한족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