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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834년 1월 14일[1] |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 (現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 |
사망 | 1907년 1월 1일[2] (향년 72세) |
일본 제국 쓰시마섬 (現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 |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 |
본관 | 경주 최씨 |
아명 | 최기남(崔奇男) |
자 | 찬겸(贊謙) |
호 | 면암(勉菴) |
부모 | 아버지 최대(崔岱) |
자녀 | 장남 최영조(崔永朝) 최영학(崔永學) 최영복(崔永福) |
친인척 | 현손 최창규 |
학력 | 1855년 문과 급제 |
종교 | 유교(성리학) |
상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쓰시마섬으로 압송되는 최익현의 모습을 찍은 사진[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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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나라가 고려(高麗) 이후로 명칭은 비록 중국의 번속(藩屬)이었지만,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하고 자주(自主)하여 털끝만큼도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성기 때에는 승병(勝兵)이 백여 만이요, 재화(財貨)가 창고에 가득하였으며, 백성은 부유하고, 인구가 번성하였다. 비록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의 위세로도 패하여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원 세조(元世祖)가 여덟 번이나 쳐들어온 다음에야 복속(服屬)시키었다.
우리 태조(太祖) 때에 왜적이 여러 번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비록 명(明)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全勝)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倭船) 70여 척을 노량(露梁)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만약 임충민[5]의 ‘곧바로 근거지를 쳐부수자’는 청을 들었다면 청(淸)나라 사람들은 그 즉시 멸망하였을 것이니, 그 꾀를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지 진실로 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백성들의 성질이 강력함은 반드시 타국에 뒤지지 않는다.
ㅡ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팔도의 사민에게 널리 고함[布告八道士民]」, 『면암집(勉菴集)』 제16권 「잡저(雜著)」
우리 태조(太祖) 때에 왜적이 여러 번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비록 명(明)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全勝)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倭船) 70여 척을 노량(露梁)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만약 임충민[5]의 ‘곧바로 근거지를 쳐부수자’는 청을 들었다면 청(淸)나라 사람들은 그 즉시 멸망하였을 것이니, 그 꾀를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지 진실로 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백성들의 성질이 강력함은 반드시 타국에 뒤지지 않는다.
ㅡ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팔도의 사민에게 널리 고함[布告八道士民]」, 『면암집(勉菴集)』 제16권 「잡저(雜著)」
조선 말기의 유학자. 철종 시기 조선의 문신(文臣)이었으며, 고종 시기에는 조선 최후의 산림 중 한 사람으로 유학자들을 이끌었던 거두 중 한 명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했을 때 친고종 충성파 산림으로서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는데 한 몫을 했고, 개화기에는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리더로서 대신해서 개국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독립협회에 반대하고 기존 질서로 돌아가려는데 전력을 다했지만, 일제 침탈이 가속화되고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달리자, 노구를 이끌고 나아가 을사의병 항쟁을 했던 사람이었다.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의 수구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6] 개화를 반대하여 조선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면서도 조국의 안위와 독립를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결사투쟁했다. 봉건주의적 시각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던 인물이다.
2. 생애
2.1. 이항로의 문인
1833년 음력 12월 5일,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7] 경주 최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최대(崔岱)와 어머니 이씨[8]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초명(初名)은 '기남(奇男)'이다. 4세 때 포천을 떠나 충청도 단양군으로 이주하였으며 14세 때 부친의 권유하에 문신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했다.22세 때인 1855년(철종 6) 정시(庭試) 문과에서 병과 11위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을 거쳐 사간원, 이조정랑[9] 등의 관직을 임명받았다.
같은 이항로의 문인으로 양헌수, 박문일 등이 있다.
2.2. 흥선대원군 탄핵
그는 최초로 흥선대원군을 앞장서서 탄핵했다. 1868년 대원군이 고종의 대리 섭정이었던 시절,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경복궁 재건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반기를 들며 민생을 파탄하고 국가 재정을 바닥나게 하는 과소 행위라며 상소를 보내 혹독하게 비판했고 이에 대원군의 사람들에게 역사에 이름 석 자 남겨보려는 구차한 행위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고종은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돈녕부 도정에 제수했다. 다만 그의 근거가 위정척사파들의 사상적 근거인 유교 이념에 따라 경복궁 재건 같은 백성을 위한 정책도 있지만 청전폐지, 서원 복구, 만동묘 제사 복구같은 시대착오적인 수구적인 민생과 관련없는 내용도 있다. 다음은 1868년에 올라온 최익현의 상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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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73년에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의 과소 행위와 무리한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며[10] 그걸 떠나 이륜두상[11]이니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니 하면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이에 조정이 발칵 뒤집혀져 목숨이 위험할 뻔했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보호해주었고 결국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 된 대원군이 은퇴를 결정하여 항의 시위를 했지만 그 은퇴 기간을 절묘히 이용한 고종이 대원군 하야를 확정지어버리면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다. 다음은 최익현이 1873년에 올린 상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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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10월 25일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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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문호 개방 반대 운동
최익현은 흥선대원군과도 그랬지만 이후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과 문호를 개방하는 협상이 진행되자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서서 반(反) 개화와 외세 척결 등을 주장하였다. 아래는 그가 올린 상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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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저들이 대포를 겨누며 화친을 하자고 하니 이건 믿을 수 없는 화친이다.
- 저들이 파는 건 사치품이지만 우리가 파는건 생필품이니 민생에 해를 끼칠 것이다.
- 저들은 말이 왜인이지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이다.
- 저들이 우리 나라에 올라오면 재물과 부녀자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과 청 조정에서 러시아의 침입에 방어해줄 능력이 없다는 최종 통보를 듣고 서양열강과 수교로 입장을 바꾼 조선 조정과 고종은 "최익현은 지금 대계(臺啓)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중에 있으면서 나라와 관련되는 문제를 말한다고 하면서 어려움 없이 상소를 올렸으며, 도끼를 가지고 와서 임금이 행차하는 길 옆에 엎드렸으니 일이 참으로 놀랍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나수(拿囚)하라."란 명령을 내리며 최익현을 전라남도 신안 흑산도로 위리안치 시켰다. 다음은 최익현의 안치 이유다.
일본을 제어하는 일은 일본을 제어하는 일이고, 서양을 배척하는 일은 서양을 배척하는 일이다. 이번에 일본 사신이 온 것이 어떻게 서양과 합동한 것이라고 확실히 알겠는가? 가령 일본이 서양의 앞잡이라고 해도 또한 변란에 대처할 방도가 각기 있을 것이다. 최익현(崔益鉉)의 상소에서는 내가 사학(邪學)을 물리치는 일에 엄하지 않아 그렇다고 하면서, 한 세상을 현혹시킬 계책을 앞장서 만들고 이렇게 임금을 속이고 핍박하는 말을 만들어서 방자하게 지적하여 규탄하였다. 지적하여 규탄하는 것도 모자라서 공동(恐動)하기까지 하였고, 공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헐뜯어 욕하였으니, 그 가운데서 두세 마디의 말은 어찌 신하로서 감히 할 말이며 차마 할 말이겠는가? 가늠할 수 없는 행동과 음흉하고 간사한 속셈에 대해서는 마땅히 전형(典刑)으로 단죄해야 하겠지만 참작해 볼 것이 있으니 최익현은 특별히 한 가닥 남은 목숨을 용서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삼배도(三倍道)로 당일에 압송하라. |
귀양 이후에도 문호 개방이 확대되자 그는 개화에 반대하는 유생 및 백성들과 함께 위정 척사 운동을 전개하였고 개화파 역신 처단과 외세 철수 등을 주장하였다.
2.3.1. 문호개방 비판
이는 어느 정도 우려가 이해되는 말인데, 실제로 최익현이 올린 여러 상소들을 보면 당대 제국주의 국가 특히 서양 열강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국제 정세에 대단히 무지하고 교역 자체가 상호간에 이익을 주는 점에 대해 경제적인 지식이 부족하다. 다만 기본적으로 조선의 양반층들은 교역으로 인한 이득보다 그로 파급될 새로운 지식과 상업계층등 사회 변화에 대해 유교 이념상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는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최익현만의 한계라곤 볼수 없다.이미 청나라에서는 서구 국가들은 교역 이익을 추구하지 영토에는 관심이 적다는것을(러시아 제외) 파악하고 조선에게 서양 열강들과의 수교를 매번 강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화 하는건 영토적 야심 아니냐 하겠지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같은 부족-씨족 사회는 국가 체제를 세우지 못했고, 식민지도 18세기 이후로는 계몽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땅을 뺏고 귀금속을 약탈하는 형태에서 교역이익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그래서 미국은 납세자의 세금을 미개인들 먹여 살리는데 낭비 할수 없다는 이유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지 않았고, 독일 조차 비스마르크가 쓸데 없이 돈 안되는 식민지로 영국과 마찰이 불필요 하다고 보았다. 전세계에 식민지가 있었다 해도 영국의 인도와 말레이반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를 제외하면 식민지 운영은 적자 내지 본전 치기였다. 이미 차지한곳은 어쩔수 없다쳐도 이미 식민지에 투자할수록 치안, 세무, 교육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했고 그럴수록 민족감정이 성장하는 악순환으로 식민지 운영에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이는 식민지 지배주민에 대한 온정주의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제국주의로 통치하고 산업화를 시키려면 기초적인 하급 인력을 교육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교육이 개화와 민족주의의 성장이 퍼져 나가는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세기 후반까지 서양열강들이 조선을 그대로 둔 것은 조선이 먹을 가치가 없다고 손절했기 때문인데 뜬금없이 조선 조정의 대책없는 고립주의와 위정척사파들의 활약 때문에 조선이 독립을 지켜냈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면 곤란하다. 결정적으로 문호 개방을 안하면 잘해봐야 평생 그모양 그꼴로 조선을 운영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역사적으로 옳은 결정인지 아닌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민족주의 국사학계에서도 개항 자체의 강요성을 문제 삼지 개항 자체를 계속 거부했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은 전무하다. 그런데 최익현의 의견대로 서양물건은 죄다 불태우고 서학을 접하면 다 쳐죽이라는 주장이 옳다고 하면 곤란하다.
2.3.2. 문호 개방의 비판에 대한 반박
위 문단에 문호 개방에 대한 비판을 반박 하자면국제정세에 대해 무지했던 주체가 최익현인지, 당시 조선의 기득권층인지 기득권층중에서도 개화파인지 위정척사파인지 주어가 생략되어 불명확하다. 상업계층 등 사회 변화는 상업계층의 발생과 같은 사회변화를 얘기하는 것인지 어휘 사용이 모호하다. 문호개방으로 발생하는 전체적인 이득보다 그에 따라오는 사회의 변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한데, 조선의 양반층이 그랬다면, 개화를 주장하던 양반들을 설명할 수 없다.
서구 열강들이 영토에는 관심이 적다는 주장이 옳았다면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에 지배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며 태국이 주목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도 지정학적으로 중립지대로 두는 것이 열강들에게 이득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제외한 반례가 너무도 많다. 식민지 운영이 바뀐지 오래였는데 미국은 왜 필리핀을 점령하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으며, 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을 점령했고,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점령했고, 수많은 서구열강들이 수많은 국가를 왜 점령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서구'와 '열강'마저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일본도 식민지를 늘려나갔다. 18세기 이후에. 당시 미국과 독일이 점령할 식민지는 대부분 다른 나라가 점령한 상황이었고, 미국은 18세기와 19세기에는 아메리카대륙 정복하기도 바빴다. 식민지와 영토에 관심이 없어서 멕시코를 공격해서 지금의 텍사스를 점령했는가? 루이지애나 매입도 비슷한 맥락이다. 서비스 제공이 피지배국에 주는 대가가 아닌 열강들의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을거고, '제공'이라는 어휘사용이 적절한지 모호하다 시기가 다르다. 식민지운영에 회의적인 시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식민지들이 해방을 맞이한 때는 1918년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부터이다. 대한민국 역시 이 이듬해에 이 영향을 받아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러일전쟁만해도 20세기 초에 일어났다. 조선을 그대로 두었다기에는 광산채굴권부터 삼림채벌권, 철도부설권 등 다양한 권리를 끝도 없이 침탈했다
당시의 조선 정부 및 기득권들은 나라를 잘못 다스리고 있었다. 위정척사파는 구시대의 질서에 집착하였고, 기득권의 눈치를 보던 고종은 국가의 권리를 지킬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기득권층이 잘못했다'는 문장은 '최익현은 국제정세를 알지 못했다'는 주장을 끝맺는 문장으로 적절하지 않다. 기득권층과 최익현을 분리해서 얘기하는 것이 올바른 논지전개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최익현만의 한계가 아닌, 최익현이 가지고 있던 여러 한계 중 하나라는 의미로 말한것이다. 최익현을 포함한 조선시대 기득권층의 한계라고 표현하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또한 편집한 분은 '유교'와 '성리학'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은 엄밀히 말하면 유교에서도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며, 유교 이념중 새로운 배움을 혹은 새로운 사회변화는 옳지 않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당시 서구 열강들이 영토에는 관심이 적다고 하기엔 예시와 그 반례의 비율이 맞지 않는다. 모든 식민지를 전부 제시할 수 없겠지만, 영국의 식민지가 많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점령한 나라 중에도 충분히 문명사회는 많이 존재했다. 알제리왕국 혹은 미국이 점령한 하와이 왕국 등이 또 다른 예가 될 것이다. 교역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식민지배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말은 타당한 주장이 아니라고 새각한다. 그럼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원을 수탈할때도 헐값에 구매하는 방식으로 수탈한 것을 '교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미국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먼로독트린, 트루먼독트린을 통한 방관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 열강의 관심을 차단할 수 있는 명분, 그리고 유럽의 열강들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더이상 점령할 가치가 있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식민지에 투자하지 않았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는 아마 독일의 경우에도 비슷한 경우였을 것이다. 독일의 국력이 강해진 시점에는 이미 가치가 높은 식민지는 다른 국가가 점령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하와이와 괌, 사모아 등 필요한 곳은 식민지로, 혹은 괴뢰정부를 세워두는 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였다. 영국의 인도점령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점령을 제외하면 본전치기였다고 주장하는데 점령한 영토의 넓이나 인구 수를 보았을때 이를 제외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반례라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서구 열강이 영토 지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에 맞추어 주장에 맞는 근거만 제시하는 확증편향의 오류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위정척사파의 활약으로 조선이 독립을 지켜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고, 당시 기득권자들과 최익현이 당시의 국가를 위해 올바른 행동을 하였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최익현이 국제정세나 서양열강의 정체에 대해 몰랐다는 주장은 섣부르다는 것이다. '조선의 양반층은 유교적 질서에 따랐기 때문에 사회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서구 국가들은 영토보다는 교역 이익에 더 초점을 두었다'에서 언제부터, 어느정도 초점을 두었으며 그 예시와 반례의 비율을 대략적으로라도 제시해야 하며 서구열강들이 마치 모든 점령지를 문명을 이루지 못한 사회를 점령했다는 듯이 주장하고 있는데, 오히려 점령한 대부분의 국가는 나름대로의 역사와 문명을 가진 식민지가 대부분이었기에 그렇지 않은 예시를 들고 와야 할 것이고, 이 외에도 근거 혹은 출처가 다소 부족하다. 또한 '닦달'과 같은 맞춤법 교정과 '먹을 가치''손절' 등 다른 이들이 정보수집의 목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데이터에 사용하는 어휘로 부적절한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최익현은 화서학파로서 성리학적 질서에 충실한 선비로 외국문화에 배타적인 사람이었다. 때문에 신문물이나 변하는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진 인물은 맞다. 하지만 서양 열강과 국제 정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설명은 오히려 잘못된 설명이다. 그의 복궐지부상소 등이 가졌던 파급력은 엄연한 한 국가의 정치세력중 한 축이었던 위정척사파의 영수로서 행한 정치실력 행사였다. 생각해보라. 지금으로 따지면 한 정당대표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면 도끼로 내 목을 치라고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행한 것이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정치력 행사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도 당시는 엄연한 군주제국가이다.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국가가 아닌데도 이러한 실력행사를 한 것이다.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기에 대한 현대인의 일반적인 인식이 불러오는 오류 중 하나가 당시의 기득권층 혹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바보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대부분은 한 600년간 역사를 이어온 한 국가의 정치인 혹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 국가의 정치세력인 위정척사파의 수장은 아무나 가능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당시 서양 국가들의 국력과 국제정세를 모른다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것이다. 게다가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산업화되지 않은 국가들에게 문호 개방을 요구한 것은 상호간의 이익 증진보다는 교역국의 손익여부와 관계없이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구 국가들이 영토에 관심이 적었다면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경쟁이나 영국,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또는 종단 및 식민지 분할은 이해할 수 없다. 옆 나라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보고, 청나라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처참히 패배하는 사정을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최익현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한 국가 내의 기성세대이자 정치세력의 수장으로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호 개방 요구가 결코 교역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읽고 저 국가들이 우리의 안전을 해하려 한다는 주장으로서 문호 개방을 반대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 평가일 것이다.
2.3.3. 문호 개방 비판의 추가
문호 개방 반대가 옳았다는 전제하에 반박은 현재의 역사적 평가에서 참작은 가능하나 전적으로 그른 결정이었다는 사실은 부정 할수 없다. 주된 논지가 제국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쇄국이 불가피 했다는 주장인데 그 주장의 역사적 평가는 이미 내려져 있고,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자는 온정적 의견의 근거 조차 역사적 근거도 없다. 첫째로 최익현은 조선 기득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기득권 비판과 최익현의 위정척사 운동의 비판은 따로 떼낼 여지도 없다. 최익현이 주도한 척사 운동은 유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민족주의 사학의 부작용으로 세계사와 국내사의 배경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강화도 조약이나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운요호 따위가 대포 한방쏴서 개국을 한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강력한 압력으로 특히 조선정책을 총괄한 북양대신 이홍장이 지속적으로 설득한 결과가 조선 조정의 개화였지 서구 열강이나 일본의 무력이 아니었다. 예시에서 사하라 이남 부족 사회만 든것은 아프리카 분할이 열강의 대표적인 침탈이기에 예시를 든것이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신석기 문명상태라 깃발꽂아 정착했고,민족주의가 무슨 19세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에 나온줄 아는데 정작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시기 각국의 민족 감정이 퍼졌고, 그로 인해 남미는 1820년대부터 민족주의가 들끓어서 스페인으로 독립을 했다. 미국의 루이지애나 매입은 1804년이며 최익현과 동시대도 아니고 식민지도 아니라 본토 매입이다. 미국은 별다른 식민지 없이 1870년대 영국을 제끼고, 1900년대 영국을 두배이상 따돌리며 겨우 1914년 1차세계대전 직전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를 합친 최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역시 공화당과 고립주의자들이 카톨릭을 믿는 열등 인종들을 세금쓰면서 보호하지 말라는 압력에 독립 일정까지 제시해 주었고, 가쓰라 태프트 밀약은 민족주의 사학에서나 밀약이지 현재 국제학계나 한국 사학계에서도 밀약으로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일본 총리가 미국 육군장관에게 찾아가 한반도 이익선을 보장해달라고 요청에 불과하다는게 현재 국제적 통설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로 별다른 식민지도 없이 프랑스를 1.5배,1900년 초반에는 GDP로 영국을 따라잡는등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이 점점 약해지던게 팩트이며 이는 국뽕 역사학계가 아닌 국제적인 연구 자료가 넘쳐날정도로 많다. 그리고 영국의 보물인 인도는 경제사 연구자 니얼 퍼거슨의 증오의 세기에서도 나오지만, 앞서 제시한 민족감정과 통치의 어려움으로 인해 1900년대 초반 영국인들은 다음세기에도 영국령 인도를 계속 지배할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영국령 인도는 동인도회사가 벵골태수를 앞잡이로 삼아 간접지배하다가 반란이 일어나자 무굴제국을 해체하고 인도제국으로 수많은 번왕국을 존속시키며 간접통치였다.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도 괴뢰 황제를 내세웠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 형태는 지역마다 국가마다 동일하지 않다. 이처럼 수많은 식민지 통치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여러 연구가 많이 되어있다. 모든 식민지 통치를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동일시하려는 착각이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이다. 정작 최익현이나 위정척사파가 국제정세에 능통했다는 주장이 독자 주장으로 어떤 연구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적어도 반박을 하려면 국제적으로 널리 연구되어 통설로 되어있는 부분은 인정을 하고 제기해야 한다.지부복궐상소는 최익현이 만든게 아니다. 고려시대부터 있었고 조선중기 조헌도 있고 유교왕조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도끼뿐만 아니라 관짝까지 메고가 죽여달라고 상소하는 퍼포먼스가 행해졌다. 홍재학 처럼 아예 죽여달라고 노골적으로 고종을 비난한 유생들도 있었지만 최익현의 경우 유림의 원로인데다가 조정 고관을 지냈기에 도끼 상소에 그친것이다.
'조선의 양반층은 유교적 질서에 따랐기 때문에 사회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유교의 복고주의는 상식중의 상식으로 최익현 뿐만 아니라 위정척사파 뿐만 아니라 성리학 뿐만 아니라 원시 유교에서도 당연한 논제이다. 기본적으로 '새것을 좋아하고 옛것을 경시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유학자라도 이를 비난으로 받아들였다. 비판 후단에 더 자세한 설명을 찾아보면 될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양 열강등이 교역이익을 중시 했다고 한것은 이미 본문에서도 나왔듯이 이홍장이 조선조정과 개인적으로 서신을 주고 받던 영의정 이유원, 국왕 고종을 훈계하며 여러번에 걸쳐 설득한 내용이고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책략), 앞서서는 1840년대 아편전쟁 당시 임칙서 같은 중국의 관료들도 깨달았던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 청 조정은 개항후 해관세 수입이 크게 늘어 그 수입으로 양무운동을 하고 신강에서 러시아와 충돌할때 전비로 쓰면서 통상과 교역의 이득을 일부 인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강제로 개항을 한 청나라는 기독교와 서구 사상은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서양학문 중에서도 수학 과학 공학을 일부 받아들였고, 조정에서 영국 해군 사관학교와 미국의 아이비리그로 청소년들을 유학시킬 때 였다, 이는 청나라에도 외국인 학살과 서구문물을 방화하는 반달리즘이 조선보다 과격하면 더 과격했지 더 적은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배층인 보수 유학자들과 서태후와 만주귀족들의 묵인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판의 추가에 따른 반박
‘우선 국제정세에 밝았을 것이다’는 주장은 최익현 선생의 후손을 포함한 일부 연구자의 의견이다. 비판을 일부 수용하자면 ‘적어도 서구열강들이 우리에게 개항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고 그게 당시의 조선에게는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니 그 의도를 파악하고 개항을 반대했다.’고 주장했다고 하는 것이 더 명확할 것이다.
물론 그의 시선은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편협하고 문제가 있었다. 궁극적으로 반박하고자 하는 문장은 ‘서양 열강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는 문장이다. 문호개방의 역사적 평가와 관한 서술에 반박하자면, 만약 쇄국을 통해 조선 대원군의 기득권 숙청과 때아닌 혁명이 일어나 조선이 당시의 세도정치로 피폐해진 국력을 무릅쓰고 부강해졌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누군가가 할 수도 있다. 누구도 그 시대에 살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의 결정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함부로 내릴 수 없다. 물론 일반적으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 두 인물도 요즘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비판받을 요소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평가는 내려졌다는 것은 본인의 주관이다.‘최익현은 조선기득권의 핵심이다. 따라서 기득권 비판과 위정척사 운동의 비판은 따로 떼낼 여지가 없다’에 대해 반박하자면 기득권의 핵심이라는 말이 기득권층의 한 사회 조직을 얘기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반박한다. 기득권층과 기득권층이 지지한 운동 혹은 사상에 대한 비판은 동일할 수 없다. 당시의 유림에 대한 비판과 유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은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이 둘의 개념을 모호하게 구분하고 있다. 현대에서 기성세대가 보수주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것과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진 많은 요인 중 제일 주된 요인은 일본의 운요호사건을 통한 무력시위이다. 이홍장의 권고에도 일본이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추측이 포함되어 있는데 일본의 무력시위보다 청나라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주객전도라고 설명하면 적절할 듯 하다.
또한 모든 식민지통치의 형태가 우리와 같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서구열강들이 영토에 관심이 적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식민지는 경제적 이익만을 바라보고 차지하는 경우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 군사적인 이유나 국제 정세상읩 복잡한 이유 등이다. 주장하는 바가 서구 열강이 어떤 이유로 식민지를 지배하는 걸 원했지만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통해 식민지배를 받던 국가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민족주의를 일으켰다는 주장은 언급한 적이 없다.현재 ‘민족주의’라는 어휘의 사용은 번역의 문제로 여러 개념이 혼동된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일으킨 ‘민족감정’과 남미의 여러 독립운동의 배경이 된 ‘민족주의’는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밀약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뿐, 그리 보는 시각이 별로 없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주장대로 국제적 통설이 그렇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요청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사실이라면 왜 각서가 문서로 남아있는 것인지 역시 해명해야 할 것이다. 지부복궐상소를 최익현이 처음 올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없는데, 단지 위 문단의 주장은 ‘최익현의 복궐지부상소는 정치력 행사였다’는 주장일 뿐인데 왜 이런 반박을 주장하는지 이해가 어렵다. ‘새 것을 좋아하고 옛 것을 경시한다’는 말을 비난으로 어떤 유학자도 비난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은 자신을 한 명의 유학자로 인식한 세종대왕 역시 그런 것을 비난하였다는 사람인가? 당시의 개화파 인물 중 유림은 없었는가? ‘어떤 유학자도 비난으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에 반례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2.4.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보수적 성향
우선 위정척사란 주자 성리학 학통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배척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이어져온 조선의 통치 질서를 지키려 했다.결론적으로 그가 지키고자한 것은 성리학을 통해 철저히 지켜온 기득권이다. 따라서 서인 노론정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중심인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은 패도정치이며, 동학은 토비떼이고 천주교는 사학(邪學)이다. 따라서 1894년 청일전쟁 및 동학농민운동에도 농민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비적떼이고 갑오개혁도 일본이 시켜서가 아니라 주자성리학 이데올로기에 충돌하기 때문에 반대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을미개혁이 있었을 때도 계속해서 반대를 고수하였으며, 1896년 단발령이 일어났을 때는 상투 자르는 것을 맹렬히 반대하며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바로 왕명(王命) 거역 및 반역 미수죄로 체포되었다.
그가 했던 이 한 마디는 유생들과 보수 성향의 인사들에게도 교훈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후에는 왜놈들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들이 들끓는 조정에 있어봤자 심신(心身)이 더러워지게 될 뿐이라며 관직을 내놓고 사퇴하였으며,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내려주었지만 모두 고사하고 향리인 포천[12]에서 후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2.4.1. 독립협회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
고종 35년 12월 10일, 최익현은 고종에게 나라를 위해 시행해야 할 열 가지를 적은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 일곱 번째가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에 대한 다음의 매우 노골적인 배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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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 등을 제거하겠다는 고종의 방침에 대해 원칙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고종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민당 혁파의 책임을 떠맡으매 정치적 부담을 안기보다는, 왕권 유지하에도 원론적으로 옳은 태도를 견지해 대중의 존경을 받으면서 관료들로 하여금 악역을 담당하게 하라는 요지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엔 또한 군주가 유학에 힘쓰면 나라가 절로 평안해진다는 사상을 그 배경 논리로서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것뿐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군대는 도적잡을 정만 있으면 충분하다가 독립협회 내부 군사력에 대한 대표적인 의견이었음 고려하면 독립협회는 언제든 해체되도 이상할 게 없는 집단이었다.
2.4.2. 고종에게 을사조약의 책임을 묻는 상소를 올림
을사조약 직후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고종에게 조약 체결의 책임을 직접 물으며 명의 숭정제를 예로 들면서까지 날선 공격을 하였다. 일각에서는 숭정제처럼 자결하라는 상소였다고 하지만 그 정도까지 직접적이지는 않았고 "숭정제는 자결까지 했는데 폐하께서는 조약 하나 막지 못하셨습니까"라는 정도의 취지. 다만 최익현만 그런게 아니고 최익현은 지방에 있어 늦게 상소가 도달했지 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조정신료들이 줄사퇴하고 을사오적들의 목을 베라며 하루 몇건씩 상소했으나 인사권은 통감이 되는 이토 히로부미와 학부대신 이완용이 쥐고 있었고 이들에게 감시당하는 고종은 이미 실권을 잃은 허수아비 상태였다.2.5. 을사조약 체결에 의한 의병 활동
오백 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ㅡ의병을 일으키며
ㅡ의병을 일으키며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진회 등 친일 집단이 세워져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한성으로 상경하여 고종의 자문에 응하여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만행을 규탄하고 외세의 철수, 그리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 처단과 일진회 해산 등을 요구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향리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하고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비분함을 느끼며 을사 조약에 가담한 5적인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의 처단을 요구하고 아직 공관들이 떠난 것이 아니니 임금이 직접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각 공관이 철수하기 전에 조약이 무효라는 성명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국 각지에 의병 궐기 내용을 알리며 납세 거부, 기차 승차 및 철도 이용 거부, 일본 상품 불매, 을사 조약 가담자 5적 처단 운동과 의병 활동 및 항일 운동을 호소하며 1906년에 정읍 무성서원에서 74세의 노구를 이끌며 의병을 일으킨 후 전라북도 정읍에서 순창을 거쳐, 남원에서 고종의 해산 권고 칙지를 받고 고심하던 도중 남원에서 남아있던 유생들 21명과 함께 방안에서 사서삼경 중 하나인 맹자를 읽다가 대한제국군(진위대)이와서 체포했고 스스로 유생들을 해산하고 투항했다. 이때 그 의병대의 부대원들 중 하나가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였다. 결국 체포되어 금고 3년형을 선고받고 제자인 임병찬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다.
2.6. 단식 그리고 사망
쓰시마섬에 유배를 왔던 그에게 일본군 대대장이 관과 건을 벗고 서양식으로 예의를 표시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최익현이 노하여 거부하자, 대대장이 “너희들은 일본이 주는 밥을 먹었으니 일본의 명령을 좇아야 할 것이다. 관을 벗으라면 관을 벗고, 머리를 깎으라면 깎아 명령대로 시행할 것이지, 어찌 감히 거역한단 말이냐.”라고 병사들을 시켜 최익현의 관과 건을 강제로 벗기려 하자 최익현이 병사들을 꾸짖으며 저항했고 이에 병사들이 총검으로 최익현을 겨누며 위협하자 최익현은 가슴을 풀어헤치며 죽일테면 죽이라고 저항했다. 이후 대대장이 떠날때 최익현에게 일어서서 예를 표할 것을 요구했고 최익현이 일어서기를 거부하자 일본군들이 몰려와 좌우에서 잡아서 강제로 일으켜세우려 하면서 떠밀고 협박하였다. 일본군이 물러나자 최익현은“내가 일본 밥 두어 숟가락을 먹은 것이 이미 잘못된 일이로구나.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은 내가 조정 칙령(勅令)을 받고서도 오히려 소(疏)를 올려 간했는데 하물며 일본 사람의 말을 들을까보냐. 저들이 주는 밥을 먹고 저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의리가 아니니, 내 어찌 살기를 탐내어 입에 풀칠을 해서 선왕(先王)의 제도(制度)를 변해서 성인(聖人)에게 죄를 얻을까보냐. 이제부터는 단연코 일본 밥을 먹지 않으리라.”라고 탄식하며 단식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고종에게 단식에 관한 상소를 올렸는데, 이 때문에 최익현의 사망 원인이 최고령의 나이로 무리한 단식을 한 영향으로 인한 아사로 잘못 알려졌고, 위인전이나 심지어 메이저 일간지 사설들에서도 여전히 이 잘못된 설을 그대로 인용하는 바람에 아직도 최익현이 단식하다 사망한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최익현이 올린 소는 최제학의 반구일기에 수록되어 있다.죽음에 임박한 신 최모는 일본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서로 향하여 2번 절하고 우리 황제 폐하께 글월을 올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의 의병을 일으킨 대략은 이미 금년 윤 4월 일을 시작할 적에 상소로 갖추어 아뢰었사옵니다만, 그 소장이 전달되고 안 된 것은 신이 알 수 없사옵니다. 다만 신의 거의한 일이 형편없이 되어 마침내 포로로 잡혀 갇히는 욕을 당했사옵니다. 그래서 7월 초8일에 일본 대마도로 압송돼서 현재 그들의 소위 경비대라는 데서 갇혀 있사오니 반드시 당지에서 죽을 것이옵고 전혀 살아 돌아갈 가망은 없사옵니다. 지금 이 적이 처음에는 강제로 신의 머리털을 깎으려 했고, 나중에는 다시 교활한 언사로 풀이를 하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적의 속셈이 망칙하여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신이 이 땅에 들어온 이래로 한 수저 밥, 한 모금 물이 모두 적의 손으로부터 나오게 된 형세라, 설사 적이 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신은 차마 입과 배를 위해 더럽게 굴 수 없사옵기로 마침내 단식하기로 결심하여, 옛사람의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하여 선왕에게 바치는 의를 따르기로 했사옵니다. 신의 나이 지금 74세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읍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섬멸하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환수하지 못해서, 4천년 문명의 정맥이 분토(糞土)에 빠져도 붙잡을 수 없게 되고, 3천리 선왕의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어도 구출할 길이 없게 되었사오니, 신이 비록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왜적이 반드시 망할 형세가 있어, 멀어도 4, 5년을 지나지 못할 것이오나, 다만 우리나라의 계획하는 바가 그 도를 다 못할까 염려될 뿐이옵니다. 지금 청국 아라사 2나라가 이 왜에 대하여 밤낮으로 이를 갈고 있으며, 영(英)·미(美) 여러 국가에서도 역시 왜놈과 더불어 반드시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만 볼 수 없으니, 조만간 반드시 서로 공격하게 될 것이오며, 더구나 왜적이 전쟁에 광분한 나머지에 백성은 궁핍하고 재정은 고갈되어 모두 윗사람을 원망하고 있사온즉, 밖으로 틈을 노리는 적이 있고, 안으로 윗사람을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그 멸망은 발뒤축을 쳐들고 기다리는 것이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나라 일이 어떻게 할 수 없다고만 속단하지 마시고, 아무쪼록 분발하시와 지표를 정확히 세워 퇴폐한 것을 진흥시키시고, 고식적인 것을 제거하시고, 참지 못할 일은 참지 마시고, 믿지 못할 일은 믿지 마시고, 헛된 위세를 과히 겁내지 마시고, 아첨하는 말을 곧이듣지 마시고 더욱 자주의 정신을 굳건히 하시와 영원히 의뢰심을 끊어 버리시고, 더욱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을 돈독히 하시와 스스로 닦아 나갈 방법을 강구하시고, 영재(英才)를 초빙하시고, 군(軍)·민(民)을 잘 길러서 세계의 형세를 살피시와 그 가운데서 이익을 취하시도록 하시옵소서. 그렇게 하시면 이 백성이 본래부터 모두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다 더우기 모두 선왕의 5백년, 거룩하신 덕과 지극하신 은택에 젖어 왔으니 어찌 폐하를 위해 죽을 힘을 내어 큰 원수를 갚고 심한 치욕을 씻으려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 기틀은 다만 폐하의 마음 하나에 매었사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옵서 신의 죽음에 임박한 이 말을 조금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 주시옵소서. 신은 땅속에 가서도 역시 손을 모으고 기다리겠읍니다. 신은 죽음에 임박하여 정신이 황미하옵기로 말씀드리고자 한 것도 거의 다 빼고 우선 이 글월을 만들어, 함께 구금된 전 군수 신 임병찬에게 주고 죽으면서 때를 기다려 폐하께 올리게 한 것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옵서 가긍히 여기시고 살펴 주시옵소서. 신은 눈물로써 영결(永訣)을 고하오며 삼가 아뢰옵니다. |
진상은 2년형을 선고받고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로 끌려갔던 임병찬의 '대마도 일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 최익현과 더불어 최익현과 함께 유배를 간 제자들도 모조리 단식하였으나, 결국 일본군 소좌와 보병대대장이 직접 찾아와 오해가 있었음을 알리고 머리를 안 깎아도 된다고 해서 그날 밤부터 죽을 먹기 시작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이틀 만의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70노구에 가자마자 단식하면서 4개월을 버텼다는 이야기를 역사서를 쓴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상식적으로 4주도 의학적으로 생존률이 매우 낮은데, 4개월을 굶고 생존하기에는 불가능한 기간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최익현이 처음에 일본에서 제공한 죽이 일본음식이라고 거부하였다고 적고 있으나 궁극적인 사인은 나이가 많아 소화를 잘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노환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적은 것을 봐서는 당대에는 단식으로 인한 아사설이 대세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익현은 과거 위리안치때와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히진 않았으며 오히려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섬내 명소를 방문했다고 한다.[13] 흥미로운 것은 일본 통역이나 군의관과의 상당한 교류가 있었으며 임병찬은 통역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통역들의 인품이 훌륭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최익현도 통역들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조선에 있는 친지들과의 서신 교환이나 물건 반입 등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는데 한번은 조선의 식구들이 담배를 보내줬다가 세관에서 걸리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3개월 후 풍토병에 걸려서 약 1개월간 투병하였는데 처음엔 일본군의관들이 치료했으나 최익현이 곧 이를 거부하여 조선에서 한약을 공수하여 치료를 하였으나 병환이 심해지기만 하여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쓰시마 섬을 떠나 부산으로 운구되어 충청남도 예산에 안장되었다. 매천야록의 기록에 따르면 영구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백성들이 철시하고 상여를 따르며 통곡하였으며, 조문객이 인산인해를 이르렀다고 한다. 조문인파가 너무 몰리자 치안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한 일본 측이 조문객을 해산시킨 후에야 영구가 도착하였다고 한다. 매천야록에서는 "그러나 조정에서는 무슨 恩典을 내리지 않았다. 그것은 賊臣이 국정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라고 적고 있는데 당시는 을사조약 이후로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및 을사오적이 내각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에는 최익현의 사망소식조차 없다.
원래는 논산시 상월면에 있는 무동산에 안장되었으나, 1910년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는데 처음 묻힌곳이 명당이라 묻혔는데 문제는 남의 소유의 토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단 땅주인이 최익현 선생을 존경하여 일단 매장은 하되 7개월내에 옮겨달라고 요청해서 예산으로 이장했다. 대마도(쓰시마•対馬島)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이즈하라 슈젠지(修善寺)에는 최익현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1914년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에 모덕사가 완공되었고, 영정은 여기에 마련되어있다. 사당 옆엔 그가 최후에 머무르던 고택도 자리잡고 있다.
1962년 2월, 대한민국 정부가 208명의 독립유공자들에게 포상을 수훈하기로 결정하면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전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최익현의 증손자 최병교에게 표창장과 기념품이 수여되었다.
3. 평가
3.1. 긍정
현대인들이 당시의 수구파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옹호를 받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14] 왜냐하면 입으로만 성리학을 외치고 입으로만 국가에 충성을 외치던 다수의 산림이나 유학자들과 다르게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기지 않고 정말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 시기만 봐도, 당대 '대원위분부'라는 다섯 글자가 전 조선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목숨을 걸고 흥선대원군에게 반대했다.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킬 때, 최익현은 두 개의 상소를 올렸는데, 한 개는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였고, 다른 한 개는 고종을 고무시켜서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려는 상소였다. 만약 고종이 최익현의 상소에도 대원군의 꼭두각시로 살기로 했거나 아니면 비판하는 상소에 분노한 흥선대원군이 무리수를 좀 두기로 했다면 최익현은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최익현은 실제로 행동한 것이다.실제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대원군에게 정면으로 들이박은 성리학자는 최익현이 유일하다. 충성의 방향이 잘못되었지만 이후 개화세력이 수구세력을 압도했을 때도 개화세력을 정면에서 반대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고, 심지어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할 때 성리학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고종에게 책임을 묻기도 했다. 즉 자기 보신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용감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이 입이나 글로만 나라를 걱정하고 적을 비판하는 와중에 의병활동을 독려하고 그 스스로도 일흔이 넘는 나이에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행보는 행동력과 결단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예시일 뿐만이 아니라 애국심과 충성심이 투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독립 협회을 반대하고 비판한 것도 최익현이 수구파로서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독립협회가 계속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이다.[15] 얼마나 무리수를 두었으면 독립 협회의 권력적 기반인 한양 백성들도 처음에는 황국협회와 정면으로 적대하면서 까지 독립협회를 옹호했었다가 후에 독립협회로부터 등을 돌렸다. 애초에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온건 위정척사파가 개화당을 싫어했던 이유는 개혁 자체에 반대하는 것보다 외세에 너무 의존하고 외세에 이권을 너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정척사파의 초대 지도자였던 흥선대원군 조차도 개화에 반대했던 이유는 기득권 유지가 아니라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국가가 개화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컸다.[16]
실제로 대원군과 최익현의 수구적 행동이 조선의 멸망을 미루는데 한몫했다는 의견이 있다. 당시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던 급진 개화파던 외세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고, 특히 청[17]이나 일본[18]을 과신했는데, 특히 김옥균과 같은 개화파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함에도 일본을 뛰어난 스승취급하면서 그들의 동경하는 시각으로 보는 순진함으로 나라를 초기에 일본영향권 아래로 넣을 뻔했다.(갑신정변) 이렇게 개화당이 본의던 본의가 아니던 일본의 조선 도적질에 대한 도구가 되는 동안 방법은 틀렸을지언정 나라를 뺏기는 것에 항거한 것이다.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에서 최익현의 시대는 이미 개화가 주된 논점이었고 결코 당대의 반대하던 사람들이 주가 아니며 최익현은 사안을 굉장히 냉정하게 바라보던 시점이었다. 물론 그를 단순히 성리학 꼰대로 볼 수 있으나 무조건 이렇게 보는 것은 상당히 그를 편협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당시 강화도 조약 이후로 조선은 국부와 곡물이 미친 듯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민심이 붕괴하던 시점이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최익현은 을미사변 이후 고종조차 뮈텔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 요청할 정도로 암살 위협받는 상태의 극단적인 공포 분위기에서 조차도 대놓고 항거하던 사람이다.
최익현을 비롯한 위정척사파의 화이론(중화주의)이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 부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최익현이 상소한 '지부복궐척화의소'만 보더라도 단순히 '대외정세를 몰랐어서' 위정척사론을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최익현은 상소를 통해 청나라를 이적으로 분류하고 조선을 중화로 분류하는 인식이 있어서 위의 '친중 위정척사파'라는 표현도 적절치 못하다.[19]
최익현은 척화의소에서 개항을 반대하는 첫째 이유를 '조선에 주도권이 없다'는 것으로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외교적 주도권이 조선 측에 있지 않다는 비판이었다. 이는 군사력을 포함한 경제력 차이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열강들의 식민지에 대한 직접적 자본 투하는 식민지 경제에 치명적이었고 20년 넘는 세월 동안 관료를 지낸 최익현이 해당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특히나 1854년 인접국인 일본이 미국의 페리(M. C. Perry) 제독이 이끈 흑선(黑船)의 위력에 굴복해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1860년에는 영국 ‧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됐다는 사실은 장님이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진작에 국제관계를 좌우하는 실체로서의 '힘'을 인식했었는데 일본의 운요 호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강요받은 강화도 조약 체결을 시장 형성이 군소하여 경제기반이 전무한 조선이 강행하게 된다면 경제적으로 종속될 것이고 이는 곧 외교적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란 분석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서구물품의 수입을 반대하는 상소의 내용은 '성리학의 수호'라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상소에서도 누차 반복되어 나오는 부분이지만, 이미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막대한 자본 투하로 식민지 경제가 망가지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출된 결과이다. 실제로 얼마지 않아 20세기, 열강들은 블록화 경제를 구축하게 되고 식민지의 피지배민족은 지독한 경제적 격차를 겪고 소위 말하는 민족자본은 철저히 파괴되고 만다.
3.2. 비판
별개로 최익현이 비판받을 점 또한 적지 않다. 그의 사상적 배경이 충군애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위정척사 성리학 원리주의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익현이 속한 이항로 계열이 조선의 핵심 기득권층이었기에 개화를 가로막고, 기득권을 수호했다고 볼 수도 있다.동양권 병법에서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구절인데, 최소한 나라를 지키고 싶다면 적에 대하여도 나에 대하여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조선인 학자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손자병법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최익현은 조선의 고유한 것, 그들이 여태껏 향유하던 질서를 지키는 것에 초점을 두고 활동했다는 것이다. 최익현이 조정에 올렸던 상소나 행적을 보면 경제나 정치에 무지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그 지식이 수백 년간 쇄국 정책으로 제한된 지식이었다. 만국공법을 이야기했지만 다른 위정척사파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몰랐다. 교역이 쌀 유출만 우려했지 새로운 농사기법과 종자 비료등이 들어오는지는 몰랐다. 그런 식으로 조선의 고유한 것을 지키는 것과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몰두하는 바람에 그 지식을 써먹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위정척사파가 그러하긴 했지만 최익현은 송시열 이항로 계열이 아닌 모든 학문을 이단시했고 거부했다. 이들 논리에 의하면 '유교 성리학 이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에서 짐승으로 타락하는 것이라 이런 것을 억지로 배우느니 차라리 절개를 지켜 문명인으로 죽는 게 낫다!'였다. 1차 아편전쟁이 헌종 말인 1840년에, 그리고 2차 아편전쟁 또한 철종 중기인 1856년에 터졌다. 중국이 서양열강에 참패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했다. 1860년 원명원이 불타고 함풍제가 겨울에 피서산장으로 도망친 것을 알고 위로 사신을 보냈으나 돌아와서도 보고만 받고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동 시기의 에도막부가 아편전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 대응책을 고심하던 것과 대조된다. 헌종과 철종 시기에는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의 혁파와 개혁에 초점이 가 있었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만 고종시기에 최익현과 수구파들이 한 짓은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를 끝내고 모든 뒷수습을 하는 동안 흥선대원군의 행보에 대한 방해 밖에 없다. 심지어 흥선대원군은 당대 지도자 중 개혁과 개방 그리고 서양의 위협에 대한 대응책을 고심하던 유일한 지도자였음에 불구하고 유림을 포섭하기 위해서 척화를 주장해야만 했다.[20] 또한 흥선대원군은 면제배갑 개발이나 서양의 화륜선과 신식무기를 복제를 해보려는 시도라도 했지 최익현은 일본이 윤요호를 끌고 올 때까지도 서양에 대한 적개심만 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방어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 고종이 친정을 하고, 중국의 이홍장과 개인적인 서신을 교환하던 영의정 이유원과 개화파의 리더인 우의정 박규수까지 서양사정에 무지해서 고종 앞에서 중국 일개 성의 인구가 몇 명이냐에 답변을 못하거나 서양에는 세금이 없다는 허무맹랑한 답변을 할 정도인데 최익현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서양을 알리가 만무하다. 그저 '공맹정주를 외우면서 문명인답게 죽자! 송나라가 몽골에 멸망하여 천하의 문명이 사라졌어도 훗날에 명나라가 다시 일어났고, 명나라가 오랑캐에 망했어도 조선이 소중화가 된 것처럼 죽어도 도통은 누군가가 이어준다!'는 송시열식의 정신승리가 기반이었다. 그러니 조선이나 대한제국이 망하더라도 성리학의 도통만 이으면 장땡이라는 게 위정척사식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최익현의 배타성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지배층으로서 나온 것이다. 최익현은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개혁은 결사반대했는데, 특히 개혁을 막을 수 없게 된 시점인 대한제국 출범이전까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모든 체제 변동에 반대했다. 이러한 봉건적 질서에 대한 신봉이라는 한계가 강직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가 역사에 순기능으로 남지 못했던 이유가 되었다. 그의 봉건적 질서에 대한 신봉은 성리학이란 이념에 근거했고, 그가 성리학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한계는 명확했다. 그의 말대로 황제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전 백성이 성리학으로 무장해 단결하자고 주장했어도 봉건시대 이념인 주자성리학은 양반-상놈, 남자-여자, 주인-소작농, 노비 같은 상하관계를 엄격하게 지키는 전근대성 때문에 국론을 모을 수 없는 이념이었다. 당장의 위기를 피로써 넘겼을 수 있을지라도 그따위의 봉건정신으로는 조선의 국력이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명백한 한계점이 왔을 때, 큰 희생만 치르고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행보 때문에 최익현을 주자성리학의 수호자로 여길지언정 독립운동가나 대한민국의 건국훈장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되고 있다. 분명 구왕조도 아닌 구체제 양반-쌍놈 신분질서를 지키려고 모든 것을 건 사람에게 왜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 유공자로 우대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최익현에 대한 긍정의 이유인 투철한 선의 자체에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무지한 사람이 노력을 하면 더 문제가 커진다.라는 말이 있듯이 최익현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흥선대원군에 대놓고 반대했고, 지부상소를 올리고 개화에 반대했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실각으로 인한 개혁의 차질, 군사력 약화를 야기했고, 개화를 늦추고 서구화와 근대화가 늦어졌다. 차라리 그가 탐관오리고 부패한 인사였다면 개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를 배제하거나 숙청했겠지만 그는 당대 유림 중 손꼽히는 청렴한 인사였으며 조선의 지배층인 유림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당연하게도 그가 한 모든 행위는 적어도 충의와 애국에 기반한 것이었으므로 개혁파나 충성파가 그를 처낼 수도 없었다.[21]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22] 무지에 의한 그의 반대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끄는데 한몫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이끌던 위정척사파 자체도 문제가 있다. 위정척사파들이 행한 실수들이나 여러 삽질은 국수주의자들이나 민족주의자들 조차도 옹호하지 못할 정도로 질이 좋지 못하다. 애초에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데 근원적 원인인 세도정치도 수구파와 근원이 같은 유림가문들(안동 김 씨나 풍양 조 씨)이다. 수구파가 나라를 위한다는데, 서구와 일본이 쳐들어오기 전, 세도가문의 횡포는 진작에 막지 않았는가? 심지어 세도정치를 끝낸 흥선대원군을 끌어낸 것은 개화파도 친일파, 친청파 등의 사대주의자도 아닌 수구파였다.
무엇보다도 수구파는 조선을 폐쇄한 죄가 크다. 개방이야 힘들 수도 있는데, 정보자체를 수집하지 않아서 문제가 커진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위에도 이야기했듯이 아편전쟁 당시 조선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의 사신들을 통해서다. 심지어 그 정보도 조작되어서 조선이 청나라가 완벽하게 박살 났다는 사실을 안 것은 2차 아편전쟁 전후쯤이고 심지어 2차 아편전쟁은 청나라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수구파가 얼마나 무지했냐면, 조선의 수구파 관료들은 그들이 그토록 떠받들던 중국의 인구규모조차 몰랐다. 일례로 고종이 영의정에게 중국의 성(省) 하나가 조선 전토보다 큰데, 성들의 인구 규모는 대략 어떠하냐는 질문에 모른다는 답변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개화를 결정하고 난 뒤, 일본과의 수교과정에서 일어난 영남만인소에서 위정척사파들이 '일본이 짐이니 황제니 하는 소릴 하는데 수교하면 중국에서 책망하면 어쩌나'라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강화도 조약은 이미 청나라 조정이 알고 있던 사항이고 청일전쟁 이전에 청나라가 일본에 대한 삼궤고두례를 이미 폐지하여 사실상 청-일간의 관계가 대등하게 변해가고 있던 중이었으며, 조미수호통상조약 때도 청나라가 조선에 권해서 한 것이었는데도 조정은 위정척사파의 반발을 우려해서 청황제에게 칙령을 요청해야 했다.
그리고 웃기게도 수구파가 집권할 시기의 조선은 페리 제독의 흑선 사건을 전혀 몰랐다. 일본이 미국에 굴복하고 개항한 지도 모르고 양요 후에 자화자찬하는 식으로 일본에 "우리가 이렇게 양이들에 대처해서 잘 막았는데 너희도 잘해봐라"라는 식으로 훈계를 했다. 심지어 수구파는 조선이 양요를 막은 것이 자신들의 강함 덕분이고 서양의 침략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는데 [23], 병인양요로 외규장각서고가 몽땅 털리고, 신미양요 때 강화도 군민이 도륙을 당했음에도 그 강했던 적들이 왜 철군했는지 등의 사정은 알아볼 생각도 안 했다.
(영의정) 이유원이 아뢰기를,
“임진년 왜란에 우리나라 백성들은 군대를 구경하지 못한 지가 오래된 까닭에, 처음에는 공갈로 겁을 주면 그냥 달아나 흩어지는 일이 있었고, 섬오랑캐와 서로 낯이 익은 뒤에는 강하고 굳세기가 피차간에 차이가 없어 마침내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익히지 않는 일이 없어 이미 포를 쏘는 기술까지 알고 있으니, 의심하고 겁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연전에 또 양요(洋擾)를 겪어 서양놈들의 장점과 단점을 남김없이 잘 알고 있으니, 오늘날의 군병을 임진년 왜란 당시에 비교하면 도리어 나은 데도 있다고 봅니다.
(고종이) 이어 하교하기를,
“대신이 전에 연경에 다녀왔는데, 양이(洋夷)가 한 번 나올 계획이 있다는 것을 혹시 들은 적이 있으며, 그 나라에는 부역과 세금이 없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양이는 오로지 교역(交易)으로 나라를 세우는 까닭에 정말 부역과 세금이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1874년 (고종 11년) 6월25일
“임진년 왜란에 우리나라 백성들은 군대를 구경하지 못한 지가 오래된 까닭에, 처음에는 공갈로 겁을 주면 그냥 달아나 흩어지는 일이 있었고, 섬오랑캐와 서로 낯이 익은 뒤에는 강하고 굳세기가 피차간에 차이가 없어 마침내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익히지 않는 일이 없어 이미 포를 쏘는 기술까지 알고 있으니, 의심하고 겁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연전에 또 양요(洋擾)를 겪어 서양놈들의 장점과 단점을 남김없이 잘 알고 있으니, 오늘날의 군병을 임진년 왜란 당시에 비교하면 도리어 나은 데도 있다고 봅니다.
(고종이) 이어 하교하기를,
“대신이 전에 연경에 다녀왔는데, 양이(洋夷)가 한 번 나올 계획이 있다는 것을 혹시 들은 적이 있으며, 그 나라에는 부역과 세금이 없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양이는 오로지 교역(交易)으로 나라를 세우는 까닭에 정말 부역과 세금이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1874년 (고종 11년) 6월25일
위 글을 보면 알겠지만 수구파인 영의정 이유원의 정신승리는 그렇다 쳐도, 초기 개화파의 리더인 우의정 박규수조차 상식이 결여된 모습을 보였다. 국가라면 세금이 없을 수가 없고, 국가사업을 하려면 노동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데, 저 먼 거리에서 군대를 보낼 국력이 있는 나라에서 세금도 걷지 않고 노동력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조선 조정의 상태가 이러니 정보를 방을 길이 없는, 시골에서 지주로 살면서 공맹정주 유학만 맹목적으로 신봉하면서 송시열 계통이 아니면 사문난적이라고 같은 유학자도 이단이라는 이유로 때려죽이던 위정척사파들의 수준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수백 년 간 정보 통제와 국정난맥을 자초한 이들이 위정척사, 특히 서인 송시열의 문하 이항로[24], 유인석[25], 최익현 등의 문인인 게 사실이고 이들은 조선이 19세기 후반까지 개화의 걸림돌이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개항한 때가 1876년인데 일본과의 조약 체결 후 개항 5년 후인 1881년에 위정척사파의 거센 상소에 그들을 달래기 위해 척사윤음(천주교가 퍼지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지만 사상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조치)을 반포하였다
온건 개화파로 분류하는 김기수나 김홍집은 수신사로 가서 시찰이나 서양인의 접견을 격렬하게 거부하고 주자성리학에 물든 사고 구조로 동도서기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이 따르는 청나라와 이홍장이 추진한 양무운동에 발맞춰서 무기 제조만 흉내만 낸 조치였다. 서양무기만 받아먹으려는 동도서기가 개화면 임진왜란 때 조총을 받아들인 선조와 조선중기 신료들도 개화파가 되어 버린다.
군사력 및 경제력의 차이는 최익현 등 보수유생들이 죽어라고 개혁을 반대하고 주자성리학의 폐쇄적인 자급자족 농촌사회와 현재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기로는 기원전 십 수세기 성읍국가 시대 인신공양과 노예 정복 전쟁을 일삼던 시대를 가상의 태평성대로 포장하고 성군으로 찬양한 유교 고전 밖에 몰라서 한 것이지 경제와 군사를 잘 알아서 한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이들에게 경제나 군사 문제는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타락시키는 패도정치로 타도의 대상이며 대원군이 한 정도의 부국강병 정책도 그들의 이념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선으로 밥통 싸들고 반대한 것이다.
외교적 주도권은 최익현을 비롯한 위정척사파들의 정신세계에선 있을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이다. 전통적인 유교 성리학 사상에서 조선의 외교는 제후국으로 큰 나라인 중국에 사대하여 조공하고, 나머지 오랑캐들과는 교린의 관계이다. 사대조공은 국제 사회에서 힘의 논리로 정당화되기에 그렇다 쳐도, 조선의 유일한 교린국은 일본이었는데 일본이 개항하여 서양 오랑캐와 다름없어졌기 때문에(倭洋一體論) 오랑캐에서 예의를 버린 날짐승-들짐승으로 타락하였고 따라서 메이지 유신 이후에 국서 접수를 거부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주도권 타령을 하며 외교를 안 하면 저절로 서구열강과 일본이 물러나면 모를까 국내에서 농민 상놈들 때려잡는데나 여포질이지 군포나 세금 한품 안 내고 기득권만 누리면서 입으로만 척사 외쳐봐야 피해는 어차피 백성들이 크게 입는다. 그리고 조선 개항은 이홍장의 건의로 총리아문과 청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확정되어 이들이 명분으로 삼은 사대교린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애초에 "청나라 속방이라 오랑캐랑 외교 안 함"이라는 명분이 무력화되어 조선 조정에서도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지 주도권 타령 때문이 아니었다.
일본은 공식적인 개항을 페리 제독의 통상 요구 시기로 구분하나 서양 열강과 본격적으로 수교를 한 때가 그 이후이며 최소 1년에 한 번, 그리고 비정기적으로 네덜란드 사절단이 쇼군에게 세계정세를 보고하고 자문할 정도로 페리 제독이 오는 것도 보고 받고 도쿄만 방어 계획도 세우고 대책 논의 끝에 굴복한 것이지, 조선처럼 영국이 거문도를 떼먹는다고 청나라를 통해 한 달 후에 통보해도 자기네 영토가 침략을 받았는지 거문도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한심한 수준이 아니었다.
운요호 사건으로 대포 한방에 개항한 것이 아니라 위정척사파,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조선책략의 항목에 배경이 잘 설명되어 있지만 과거 대원군 시대에 메이지 유신 왕정복고로 새로운 국교를 원하던 일본의 국서를 접수 거부하고 "대마도주 데려와라"라고 10년 간 허송세월 했고, 결국 일본이 먼저 청에 접근하여 1871년 청나라와 일본이 삼궤구고두례를 폐지하여 대등하게 수교하고, 조선과 일본의 수교를 찬성했기 때문에 "대청국 속방이라 외교 안 함"이라는 이유와, 일본이 천황이니 짐이니 하는 용어를 쓴 서계 문제도 직접 이홍장이 자문을 보내 "일본의 짐이나 폐하니 하는 용어에 신경 쓰지 말고 수교나 빨리 해라"해서 조선이 일본의 국서를 거부할 명분이 없던 측면이 더 크다. 당시 일본은 제대로 된 수송선 하나도 없고 긴축정책과 국내 반란으로 조선을 침략해서 굴복할 군사력이 없었다.
최익현이 추구했던 것은 전술했듯이 유교에서 이상향으로 여긴 요순시대 탕왕, 문왕, 무왕의 성인의 도를 본받고 주나라의 예악을 보존하고 공자 맹자와 그 의 제자들이 펴낸 춘추전국시대 유교 고전을 미친 듯이 브레인워싱하듯 암송하며, 남송 시대 주희가 성리학 체제의 전제로 했던 지주 전호제 체제에서 평생 발전 없이 양반-상놈, 남성-여성 상하 관계를 보존하는 지배계층에게만 통치하기 이로우며 아름다운 의리가 남아 있는 사회였지, 최익현을 비롯한 척사파들에겐 민족이니 자본이니 하는 서양 짐승들의 야만적인 개념에는 관심도 없었다. 최익현의 스승인 이항로는 서양은 짐승만도 못한 수국(水國)의 인갑(鱗甲), 갑각류 급 생물이며 일본은 과거 교린 상대인 오랑캐에서 짐승 내지 서양의 갑각류 급으로 타락했다.
최익현의 전근대성은 1898년 상소에서도 잘 드러난다. 갑오개혁 때 없어진 연좌제 능지처참형이, 고종이 황제권을 강화한 광무개혁으로 다시 되살리려다가 서양 열강 들에게 나라망신이라는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최익현은 20세기가 2년이 남은 시점에도 멸문지화에서 살아남은 역적들의 가족을 찾아내 연좌제로 다 쳐 죽이라고 상소할 정도였다.고종실록 38권, 고종 35년 12월 10일 양력 2번째 기사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최익현의 철저하고 배타적인 정치관은 수백 년 전 인조반정 이래로 송시열계 노론에 숙청당한 소론, 남인, 북인 계열 문인들을 죽을 때까지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신원을 반대한 것으로도 잘 드러난다. 충신과 군신의리를 보존한 집단은 최익현이 속한 당파이고 나머지는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다 쳐 죽여야 된다는 확고한 원리주의 성향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했다.
4. 기타
- 최익현은 아래와 같은 시를 남긴 적이 있다.
이 몸을 일으켜 북두성 빛나는 조국을 바라보니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 수 없노라.
만 번 죽어도 적들의 부귀를 탐할쏘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 수 없노라.
만 번 죽어도 적들의 부귀를 탐할쏘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 중고등학교 교과서만 펴놓고 보면 아무 권세가 없는 사람이 갑자기 대원군을 탄핵하고 고종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가 나와 무명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지방 유림에서 학문적으로 명성이 알려지고 강직한 성품과 더불어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연고지인 충청도는 물론이거니와 넓게는 기호 지방까지 그가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수천 명의 유림이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올린 상소도 비단 최익현 개인이 아니라 당시 전통 질서와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던 보수적 선비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따라서 그 유명한 도끼 상소나 독립 협회에 대한 규탄이나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실력 행사였던 셈이다.[26] 유림의 대표라는 것 외에 실질적인 권세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최익현은 재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과거 급제로 관직에 몸담았었고 사헌부 지평, 장령과 사간원 정언 등 당대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았다. 요직 중의 요직인 이조정랑도 역임했으며 임금의 측근인 승지를 제수받기도 했던 고위 관료였다.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30대 중반에 정3품 당상관인 돈녕부 도정과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은 인물이므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그가 한 정파의 대표자라는 점을 떠나서 그의 애국심과 선비 정신이 구한말 당대에 개화파, 독립운동가, 일반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났고 그를 지켜 본 일본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 듯하다. 절명시로 유명한 시인 황현 같은 경우에는 오애시(五哀詩)[27]에 최익현을 실었다. 훗날 친일파가 되는 개화파 인사 윤치호도 본인의 일기에 최익현을 "위대한 원로"라고 지칭했으며 그를 본 다카야마 헌병 소령은 "한국에 이런 사람이 50명만 더 있으면 독립이 공연한 말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의미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부고 소식이 들리자 상인들은 철시를 했으며 장례 행렬에는 양반들만이 아닌 일반 백성, 심지어 어린 여자애들이나 기생들까지 수만 명이 모였다.[28] 해방 후에도 김구와 신익희가 최익현의 사당인 모덕사에서 환국 고유제를 열었다.
- 국가, 군주제, 민본주의, 사대주의, 서원, 신분제, 성리학적 질서, 존왕양이 등을 모두 지키고자 한 완벽한 의미의 '수구(守舊)'이며 시대가 당면한 개혁을 통한 근대화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과제 가운데 후자만을 만족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최익현은 개혁 정책과 각종 민생 정책에는 누구보다 앞장 서서 반대했는데 대부분의 개화파는 정반대로 전자는 만족하고 후자를 만족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물론 자신이 줄곧 믿었던 성리학의 선비로서의 신념에 있어서는 오차없는 삶을 살았다.
- 2022년 1월 3일에 그의 고택에서 고문헌 2만 여점이 발견됐다.
- 고종이 칭제를 할때 최익현이 비판을 한것은 사실이지만 비판의 내용은 명나라가 멸망한 지도 오래되었으니 스스로를 높이고 싶으면 칭제를 해도 상관 없지만 왜 조정대신들이 쓸데없이 칭제 명분을 찾을 때 서양 쪽 예를 드냐며 비판하는 의견이었다. 면암집에서 칭제에 대해 나오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심지어 지난해에 황제로 존칭할 때, 여러 신하들의 권진(勸進)한 글에도 역시 ‘갑오의 경장으로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찬란하게 일신되었다.’ 하고, 또한 ‘아아, 훌륭하도다. 이른바 「주 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오직 새롭다.」 한 것이로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서구(西歐)의 각국인 이탈리아(羅曼)독일(德國)오스트리아(墺地利)의 예(例)를 인용하여 일컬었습니다. 아아, 그들이 임금을 속이고 위를 욕되게 함이 너무나 심합니다. 저 갑오의 변란을 성대하고 훌륭하다 하고, 나라의 전장(典章)을 소멸시킨 것을 찬란하게 일신되었다고 한다면, 저 박영효ㆍ김홍집ㆍ유길준 같은 무리들은 그야말로 중흥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될 것이며, 왜적들이 분탕을 쳐서 우리를 전복시킨 것이 도리어 크게 도운 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소중화(小中華 우리나라를 말함)를 소일본(小日本)으로 바꾸어 놓고 ‘천명이 오히려 새롭다.’고 한다면, 오랑캐를 따르게 된 수치는 없고 소중화를 혁파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니, 이는 속인 것이 될 뿐입니다. 당당한 천승의 나라로서 만약 스스로 높이고 싶다면, 이렇게 황통(皇統)이 끊어진 지 오래인 때에 변통하여 황제라 칭하는 것이 그다지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는데, 구구하게 서구의 각 나라들의 전례를 모방하였으니, 이는 욕이 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속이고 모욕하는데도, 성명께서 바야흐로 또한 오연(傲然)하게 스스로 크게 여기면서, 오히려 서구의 각 나라들과 함께 동등하게 일컫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경장(更張)을 말하면 성명께서도 경장을 말하고, 사람들이 중흥을 말하면 성명께서도 중흥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선왕의 관직을 변경하고 선왕의 전장(典章)을 변경하였으나 명령이 금문(禁門)도 나가지 못하면서 오히려 실상이 없는 명칭만 가지고 있고, 위망이 조석간에 박두했는데 아첨하는 말만 믿고 계시니, 이것은 식견 있는 사람들의 조소를 불러들이고 후세에 조롱거리를 남기는 것입니다. 성명께서 장차 무엇을 영화롭고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신이 첫 상소에 이미 ‘명실이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대략 그 단서를 드러냈지만 감히 말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전례대로 호칭하고 스스로 다르게 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추요(芻蕘)의 말이지만 급히 위에 진달하여 만에 하나라도 성상의 마음이 혹 깨우치는 것이 있기를 바라고, 구구한 의리는 오히려 두 번째에 속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속 무리들이 구차하게 존칭한 것과 같지 않으나, 스스로 인군을 속이고 위를 욕되게 한 죄를 범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백세 후의 군자들에게 의리에 입각한 처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직 성명께서 스스로 하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만일 이로 인하여 앞으로 진보하여, 실제로 제왕의 업적을 일으키고 참으로 천자의 직책을 수행하시면, 중국의 자리에 임하여 사방 오랑캐를 어루만지며 천하의 옳은 임금이 될 수 있으니, 덕을 힘쓰는 데 달렸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시간을 보내기만 일삼고 구차하게 눈앞에 닥친 일만 도모하여, 경솔히 중화의 법을 고치고 이적의 법을 따르기를 즐기시면, 신은 황천이 돌보지 않고 조종들이 진노할까 염려되니, 비록 스스로 피하고 싶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명께서는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아, 신이 사면(辭免)하고 인책하려는 상소에 또한 이와 같이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긴 말을 하였으니, 의당 만번이라도 죄를 받아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시급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신의 전후로 범한 죄를 다스리도록 하시고, 이어 영구히 신의 이름을 사적(仕籍) 속에서 삭제하시어 어리석은 분수에 편안히 있도록 하여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황공하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는 마음이 지극하여 견디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출처
실록과 승정원 일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조정 대신들이 고종에게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로마의 예를 언급하면서 칭제를 권했는데 최익현 입장에선 칭제를 할거면 그냥 하면 될 것을 굳이 서양쪽 예를 든 것이 마음에 안든것이다. 출처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5.2. 소설
구한말을 소재로 하는 많은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작품마다 취급이 상이한 편인데 꿋꿋한 절개와 강직한 충성심이라는 강렬한 캐릭터성은 유지되는 편. 위정척사파의 거두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주인공의 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유림의 최종보스로 등장하기도 하며 개화의 필요성을 깨달아 주인공의 조력자 혹은 안타고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한다.- 웹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유학의 거두이자 최종 보스로서 대한일보의 편집장 자리로 들어가 모두까기의 대명사가 된다. 문서 참조.
- 웹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조선이 통상과 종교의 자유를 더 빨리 허용하며 프랑스를 시작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과 관계를 맺고 더 순조롭게 개화의 길에 들어서면서 젊은 시절부터 신문물을 접해 개화파로 노선을 전환하여 유교적 자유주의라는 묘한 이념을 추구하는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문서 참조.
- 웹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개화당 집권 후 초기 개화 정책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이때 완화군은 그를 초청해서 개화의 산물들을 보여주고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설득이 되었는지 이후 침묵하게 된다.[29] 조선-청나라전쟁에는 유인석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며 유림의 지지까지 정부에 모아주고, 중추원에도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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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833년 12월 5일.[2] 음력 1906년 11월 17일.[3]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을사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쓰시마섬으로 압송되었다.[4] 눈 부분이 잘 안 보이는데 이는 쓰고 있는 안경이 빛에 반사돼서 그렇다.[5] 林忠愍, 충민은 임경업(林慶業)의 시호[6] 그런데 사실 대원군은 이미지와 달리 처음부터 수구쇄국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으며, 개혁적인 성향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최익현과 정반대의 세력이었다.[7] 오늘날의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8] 이계진(李啓晉)의 딸.[9] 은 조선 시대에 이조 정랑(정5품)은 좌랑(정6품)과 함께 이조전랑(吏曹銓郞)을 구성하는 직위다. 이조전랑은 붕당정치에서 항상 이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인사권을 손에 쥔 요직이었다.[10] 이때 만동묘, 서원 복구 등도 주장하였다.[11] 彝倫斁喪: 떳떳한 의리와 윤리가 파괴되다.[12] 1900년 이후에는 충청남도 정산(定山, 현 청양군 목면 송암리)로 내려갔다.[13] 한일합방 전후로 일제는 유림 우대 정책을 펴는데 일본 국내에서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을 때려부수고 신토에서 불교의식을 없애고 유교 교육을 강화했는데 합방직후에 조선시대 효자 열녀들을 포상해서 민심을 얻으려고 했고 유림들을 우대했다.[14] 애초에 수구파라는 단어는 친일급진개화파들이 본인들 반대하던 온건개화파와 위정척사파를 묶어서 말하는 것으로 적절하지 못한 단어다. 학계에서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누는 이분법적 행위는 이미 사장되었고 최근에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일이 늘고 있다. 당장 문화재청과 고궁박물관, 궁능유적본부등에서 대한제국을 근대국가, 고종을 개명군주로 평가하고 있다.[15] 독립협회는 권력에 너무 눈이 멀어서 민주주의를 하자면서도 투표권을 한양에만 한정하자는 헛소리를 하거나 고종을 겨우 설득해서 대한제국의 국회인 중추원을 겨우 개원했더니 반역자들을 중앙대신으로 임명하자고 건의하고 심지어 대신임명권을 고종으로부터 뺏으려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독립협회는 군대를 감축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는 위정척사파, 온건개화파나 고종황제 양측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고종이 상업, 토지, 도시, 제도 등 온갖 방면에서 광무개혁을 비롯한 근대화 정책을 펼쳐 성공적인 성과를 거뒀음에도 강한 군대를 갖지 못하여 중국과 러시아를 이기고 미국과 싸워볼 만한 전투력을 지닌 일제가 무력으로 침략해 오자 제대로 반격할 수 없었다.[16]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면서 무조건적인 개화반대로 입장을 선회한 것은 오페르트 도굴 사건때문이다.[17] 민씨세력은 수구파가 아니라 온건개화파로 분류된다.[18] 특히 급진개화파가 일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19] 방용식 (2016). 면암 최익현의 국제관계 인식 연구.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 15(1)[20] 대원군이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어쨌든 승리했다는 자신감과 훗날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인한 분노 때문이다. 병인박해 등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 또한 원인 중 하나에 불과하긴 하지만 본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접선을 하려고 천주교에 접근했다가 천주교 세력이 거부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필요하다면 서구와 소통할 생각이 있었다는 뜻.[21] 흥선대원군부터 김홍집 내각에 독립협회까지, 자신들의 개혁에 방해가 되는 그를 제거하지 않은 것은 그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일말의 의심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다.[22] 고종황제 조차도 일본제국의 암살이 무서워서 도망쳐야 하는 판국에 일본제국이 그를 건드리지 못한 것은 최익현의 조선 지배층(지방세력)에 대한 영향력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이 다 망한 을사늑약 이후, 의병을 일으킨 그를 사형시키는 대신에 대마도로 유배를 보내야만 했다. 최익현의 권위가 올바르게 쓰였다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아쉬운 부분이다.[23] 병인양요가 끝났을 때 다음전쟁에 대비하려 했던 지배층은 흥선대원군 뿐이다. 신미양요가 흥선대원군은 전쟁에 대비해서 군비를 대규모로 비축했는데, 그것을 날려 먹은 것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약 10년 동안 비축한 재원을 명성황후와 민 씨 가문이 1년 만에 탕진했고 그들의 소비규모를 견디기 위해서 세금을 늘린 결과 고종시기의 수많은 농민봉기들이 일어났으며, 그 많은 세수를 걷었음에도 부패로 돈이 다 빠져나가 여기저기서 국비를 줄인 결과 나온 것이 1882년의 임오군란이다.[24] 이항로는 서양이 육지가 없고 바다만 있으며 삶을 멀리하고 죽음을 좋아하고 군신 부자 의리가 없는 짐승 미만의 갑각류로 여겼다.[25] 유인석의 화이론은 위정척사론 중에 가장 과격하여 청나라와 원세개에 군사를 빌려 개화파를 도륙하고 실제로 의병 중에 동학 출신 인원을 색출하여 처형하고 조정의 단발령에 순응한 관료들을 제멋대로 참수하고 효수까지 했다.[26] 단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상소문 하나로 끝내버린 대목만 봐도 그의 위세는 결코 무시 못할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권력 의지를 드러내던 성인 고종이 민생 정책으로 기득권을 잃어가던 보수적 유림들과 흥선대원군 축출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손을 잡았던 것.[27] 5명의 순국한 우국지사들을 기리는 시인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으로 최익현이 실렸다. 그 이유를 황현은 왕염오는 살아있는 문천상을 제사 지냈다며 최익현이 그러기를 바란다고 설명한다. 그 후 최익현은 진짜로 의병을 일으키고 대마도로 가 순국한다.[28] 이 때 백성들이 남긴 한글로 된 만시(추모시)도 많이 남아있다.[29] 원래 역사에서도 최익현이 몇 년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침묵한 사실에 작가가 상상력을 덧붙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