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붕당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관학파 | ||||||
사림파 | 훈구파 | ||||||
동인 | 서인 | ||||||
북인 | 남인 | 소론 | 노론 | ||||
세도정치 | |||||||
위정척사파 | 개화파 | ||||||
친청파 | 개화당 | ||||||
▼ 대한제국 이후 (공산정당) | |||||||
※ 붉은 계열은 원리주의적 강경파, 노란 계열은 탈이념적 정파, 푸른 계열은 개량주의적 온건파 | |||||||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친청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위정척사파 衛正斥邪派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고종 (1873 ~ 1897) | ||||||
한주학파 | 노사학파 | ||||||
곽종석 | 이승희 | 장석영 | 이진상 | 기정진 | 김녹휴 | ||
화서학파 | |||||||
이항로 | 최익현 | 양헌수 | 유인석 | 박문일 | 고능선 | ||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1. 개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는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당파'라는 뜻으로, 구한말에는 개항과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일제가 국권을 본격적으로 침탈하는 시기에는 항일의병 활동으로 바뀌었다.[1]2. 등장 배경
1860년대에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겪으면서 위정척사파가 등장한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했으나 만동묘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청전 유통등에 반발하여 고종의 친정에 찬성했고, 고종이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자 다시 지지를 중단했다.2.1. 위정척사론과 의병투쟁
읽다가 파악하겠지만, 한주학파를 제외한 학파들은 모두 주리론적 이기론을 근본적 바탕으로 한다.[2] 물론 구한말의 성리학에서 주기론적 이기론을 전개한 간재학파도 있지만, 위정척사파와는 다소 거리가 먼 편이기 때문에 제외했다.사실 주기론으로 끝나면 안 되고, 호락논쟁[3]에서 인물성이론을 펼친 호론의 분파로 보는게 이해하기 더 쉬울 것이다. 호론은 성을 인성과 물성으로 나누었고, 기(氣)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양자의 우열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히 신분제를 옹호하는 논리와 소중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노론 중에서도 송시열의 직계가 호론이었기 때문에, 이들 호론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에 속했다. 단, 학파 간의 이기론에 세부적인 차이는 존재하는 편이다.
3. 학파
3.1. 화서학파
화서 이항로의 학설을 토대로 한 학파로 경기 지방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다. 화서학파는 흔히 유리론(唯理論)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이야기되나, 사실은 이이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이 혼합된 이기론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학맥상 기호학파로 분류되나 다른 기호학파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화서 이항로와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등이 있다.[4]이항로는 주자의 학설을 확고히 하고, 우암 송시열을 공자, 맹자, 주자를 뒤이은 도통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송시열의 숭명배청론을 자신의 화이론과 연결하였다. 그의 이기론은 이이와 성혼의 학설을 절충했는데, 이(理)와 기(氣)가 상호적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理)가 기(氣)에 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이기론을 바탕으로 이를 지향하는 문화는 중화의 문화임을 강조하고, 중국과는 다른 이질적인 문화는 이(理)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사악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항로는 서양의 학문이 통화통색(通貨通色, 재화를 유통시키고 색정을 통한다)을 추구하는데, 이는 인욕(人慾, 전통적인 성리학적 관점에서 인심(人心)의 악한 부분이라 해석되는 개념)의 핵심으로 파악[5]하였으며, 이를 추구하는 것은 이적(夷狄)보다 못한 금수(禽獸)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위정척사파의 서양과의 통상 반대의 기반이 되었다.
이항로는 단순히 이런 통상반대론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방법론인 내수외양(內修外攘)을 제시했다. 그는 서양의 물건들은 인간의 사치심을 유발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욕구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수입을 금지하고, 더불어 서학에 동조하는 이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항로는 단순히 척화론이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다 말한다. 그가 바라본 근본적인 해결책은 성리학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있는 천리와 인욕을 분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항로는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의 마음가짐 여하에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음을 역설한다. 인(仁)을 바탕으로 군주가 덕치를 펼 것을 강조했는데,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에서 덕치를 확립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했다. 병인양요 이후에 올려진 이 상소에는 조정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무력 증강을 꾀하고, 인망 있는 자를 중용할 것을 요청했으며, 특히 여기에 쓰여진 의려책(義旅策)은 이후 유림들의 항일 투쟁의 실천적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문하의 유학자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3.2. 간재학파
간재 전우로부터 형성된 학파로, 화서학파와 한주학파가 정통 기호학파의 도론을 벗어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자 이에 반발하며 김창협으로부터 이어진 정통 노론의 낙론을 이어받은 학파이다. 전우는 김창협으로부터 이어진 기호학파 낙론의 뚜렷한 학맥 속에서 성장한 인물로 평생을 낙론 선배들이 구축한 이론을 확고하게 정립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으며, 전국적으로도 많은 문인을 형성하여 간재학파로 발전하게 된다.학설은 "도는 지극히 존귀한 실체이고 만물의 주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끌어내려 작용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도기(道器)와 상하(上下)의 구분이 문란해진다.[『간재사고(艮齋私稿)』]라고 하여 이(理)[만물의 이치, 원리, 질서]의 능동적 원인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의 절대성을 해친다는 입장이다. 간재는 이무위(理無爲)·심시기(心是氣)를 성리학적 논의의 전제로 삼아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을 주장하였다. 간재의 학설을 계승한 간재학파는 심본성(心本性)·성체심용(性體心用)·성존심비(性尊心卑) 등을 통하여 인간의 임의적 자의성을 규제하고, 도덕규범의 객관적 표준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규범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들은 간재학파가 당시의 여타 학파들보다 보수적이고 엄격성이 강한 특징을 지니게 만들었다. 이들은 기호학파의 전통적 입장에서 화서학파·한주학파·노사학파 등과 전방위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런 특징에서 간재학파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은둔자의 길을 택하는 한편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에 전념하여 조선은 사라졌지만 성리학적 의리(義理)를 보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간재학파 문인 수는 『관선록(觀善錄)』에 기록된 직전 문인들을 살펴보면 경기도 14명, 충청도 266명, 경상도 211명, 강원도 37명, 황해도 2명, 평안도 28명, 함경도 175명, 북간도 22명, 전라도 717명, 제주도 16명 등 전국적으로 1,488명에 달한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1842~1907],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1868~1944],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1874~1957],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1877~1960], 창수(蒼樹) 정형규(鄭衡圭)[1880~1957],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1882~1956],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1891~1874],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1893~1970],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1903~1974],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1877~1956] 등이 있다.
앞서 본것처럼 구한말에 전우는 당대에 유학자가 몸으로 도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지조를 지키거나, 나무를 끌어안고 굶어 죽거나, 숨어살면서 제자를 기르는 것은 훗날 양의 기운을 회복한 터전을 닦는 일이다."[『추담별집(秋潭別集)』]라고 말하면서, 망국의 상황 속에서 숨어살면서 제자를 기른 것은 성리학의 의리(義理)를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게 하고자 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유선영은 『담화연원록(潭華淵源錄)』에서 전우가 공자와 주자를 계승하고, 이이와 송시열을 잇는 적전으로서 조선성리학이 최종적으로 귀결하는 곳을 이루었다고 주장하였다. 정형규는 "아! 지금 나라가 망하고 도가 없어져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힘에 전성(前聖)의 전함을 우뚝 세우고 백 번을 꺾어도 꺾이지 않는 이는 오직 우리 스승 한 사람뿐이다. 우리들이 다행히 간옹(艮翁)의 뒤를 좇아 학문이 거의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창수집(蒼樹集)』]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특징으로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참가하지 않았기에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서는 ‘부패한 유학자(腐儒)’라고 혹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간재학파는 친일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패한 유학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항일무장투쟁을 하지 않으며, 은둔하여 교육에 힘썼다는 점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을 보이기에 조선의 독립이라는 측면에는 그 명확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학파이다.
3.3. 노사학파
노사 기정진의 학설인 이일원론(理一元論)[9]을 토대로 한 학파. 퇴계와 율곡과 다른 독자적 성리학의 경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녹휴, 기우만, 조성가,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이최선, 조의곤을 필두로, 기정진에게 친히 글을 배운 제자는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대학단으로써 호남 지방을 기반으로 삼았던 호남의 대표학파였다.노사학파는 전라도 뿐 아니라 영남과 호서지역까지 아우르는 대형학파였는데,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사색을 통하여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을 수립하는 것을 중시하여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이(理)는 존귀하여 상대가 없으며, 기(氣)는 이 속에 있는 것으로 이가 유행할 때 손발이 되는 것이라는 일원적 유리론을 확립하였다.
다른 학파들과는 다르게 노사학파는 사회경제에 대한 개혁을 중시하였다. 노사학파의 개혁안은 이일원론이 지향하는 사회·경제적 측면의 방향성에 궤를 맞추었다. 그들은 본인 스스로가 양반 기득권 계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으로 임술농민봉기가 발생했을 때 토지제도 개혁, 지주들의 토지 소유에 대한 특권 제한, 군제 개혁, 환곡을 상평창이나 사창으로 전환할 것 등을 조정에 상주하였다.
그들은 또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위정척사의 정신으로 싸우는 실천적 학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노사학파의 문인들은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으로는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전남 담양에서 의병을 모아 상경했는데, 이때 고경명의 후손 고중범이 의병으로 참여하였다.
3.4. 한주학파
한주 이진상의 학설[10]을 토대로 한 학파. 한주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진상과 그의 문인 중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불리는 곽종석, 이승희, 장석영, 이두훈, 윤주하, 김진호,[11] 허유, 이정모가 있으며, 곽종석 문하의 이인재, 이병헌, 김창승이 대표적이다.아이러니하게도 웬만한 다른 학파들보다 서구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곽종석은 균형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선 유학(儒學)뿐만 아니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실용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한 1890년대 중반부터는 국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 즉 국제법에 주목했다. 한주학파 내에서 가장 '위정척사파'라는 대중의 인식에 부합할 이승희[12]도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동시에 유교 개혁 운동을 전개했고,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곽종석의 문인에 이르면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인재(李寅梓)는 지방의 선비들이 폭넓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1912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정리한 논문인 「철학고변(哲學攷辨)」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논문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논문으로 평가된다. 김창숙(金昌淑)은 곽종석의 문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인물이었는데, 1908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회의 총무로 활동하였고, 선조 김우옹(金宇顒)을 배향한 청천서원을 수리해 신식학교인 성명학교[13]를 세웠다.
한주학파의 시대 대응방식도 여타 보수유림과 다른 점이 많았다. 보수유림의 순절투쟁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보다 만국공법을 활용한 구미열강과의 공조체제를 통해 국권을 수호·회복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접근방식은 자칫 이들이 몸담고 있는 유림사회로부터 ‘오랑캐(夷狄)’에 가까워진다는 비난을 받게 만들었다. 때문에 일제를 규탄하고 국제법에 따라 처벌해줄 것을 요청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외국공사관에 전달한 것 또한 다른 어떤 학파가 아닌, 역설적이게도 한주학파의 곽종석·윤주하·이승희·이두훈이었다.
이러한 학맥 탓에 흔히 위정척사파라 불리는 화서학파, 노사학파, 정재학파, 남당학파와 한 그룹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특히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해서는 전술했듯 국제법에 바탕하여 구미열강 협조를 이끌어 내려했고, 이는 1919년 파리장서운동으로 나타났다. 위의 김창숙처럼 서원을 현대식 학교로 바꿔세운 인물이나 이태환처럼 계몽 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한 경우도 있고, 이두훈의 경우 독립을 위해서는 유교적 순수성을 고수하지 말고 다른 학문을 배척하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서 벗어나야 하며 서구의 신교육과 신학문 등 신사조의 적극 수용해야 함을 주장했고, 여기에 바탕을 둔 동화세기 등 남긴 저술이 있으므로 한주학파 전체를 위정척사파라 뭉그러뜨리기도 불가능하다.
즉 한주학파에게 위정척사(衛正斥邪)란 '종래 유학을 따르고 서구 학문과 구미와의 통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의 내정 간섭을 배척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4. 역사적 평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했으며, 일부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하기도 하는 등 반외세적인 측면에서 우리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항일 의병으로 계승되는 등의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당시 세계 정세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낡은 사상과 봉건적 질서에 빠져나오지 못한 세력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4.1. 긍정적 평가
4.1.1. 개요
이 문단의 '긍정적 평가'는 위정척사파가 옳았다는 식으로 평가한다기보다는, 그들이 널리 퍼진 선입견대로 자기 기득권 지키려고 외부와 통하는 문은 죄다 걸어잠근 뒤 탱자탱자 놀았다는 부패 세력은 아니었다고 평가하는 문단이라 보는 것이 맞다. 이러나저러나 위정척사파가 실패한 노선을 주장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14]일단 위정척사파는 일반인에게 수구꼴통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서 그렇게 평가하듯 조선 후기 성리학적 질서의 유지와 존명사대의 실천에 집착하고 개화를 반대하여 국가발전을 저해한 세력이라는 평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이나 태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런 부분이 더욱 부각된다. 조선과 일본, 태국은 의외로 고종 시대 말기인 1900년까지도 1인당 GDP에서 큰 차이가 나는 나라가 아니었는데 이후 조선은 식민지화되고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이 됐으며 태국은 라마 5세에서부터 라마 9세에 이르는 현명한 영도 아래 독립국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식민지 시기 내내 경제적 수탈을 당했고 세계 2차대전이 끝날 무렵이 되면 1인당 GDP가 구한말 시절의 절반까지 줄어 있었다. 반면 같은 기간에 일본은 1인당 GDP가 4배 이상 증가했고, 식민지 수탈을 겪지 않은 태국도 2~3배 가까운 성장을 하며 산업혁명기를 성공적으로 지냈다.
하지만 처한 상황이 서로 너무나도 달랐으며, 각국이 어떤 행동을 취했기에 그 지위를 획득했기 보다는, 여러가지 외부상황이 맞물린 것이 컸다. 일본의 경우 개항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쿠로후네 사건으로 강제 개항당하고 불평등 교역 조항을 맺는 등, 훗날 조선과 청나라가 외부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대로 먼저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재수 좋게 때맞춰 남북 전쟁이 터지면서 개항 당사자인 미국이 제대로 공략을 못하고 방치하다시피 했고, 다른 열강들도 각자 일본 공략보다 시급한 과제가 하나씩은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모자란 돈은 옆나라 조선을 쳐서(정한론) 벌어들인다는 대전략을 시행한 것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완충지대라는 가치가 있었고, 태국 왕실이 양측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게 공들인 점도 있었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합의가 주효했다. 그렇게 때문에 조선이 개항을 빨리 했다고 해서 일본이나 태국처럼 발전했을것이란 추측은 맞지 않는다. 청나라만 해도 서양과 부분적인 교류가 있다가 명분도 없는 아편전쟁이 걸려 엊어터지고 별별 외세 간섭을 받는 신세가 되는데, 옆에서 그 꼴을 다 보고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개항하면 나라가 발전할거라는 생각이 들긴 어려웠을 것이다.
4.1.2. 개혁?
위정척사파라고 해서 국가 발전을 저해하면서까지 기득권을 지키려고만 든 세력은 아니다. 먼저 내정[15]에서는, 위정척사파도 삼정의 문란을 위시한 조선사회의 병폐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고치려고 생각하여 대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기정진은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난 원인이 삼정의 문란, 그 중에서도 환곡제도의 부패에 있음을 지적하고 개혁책인 임술의책을 내놓은 바 있다.외정[16]에서는, 조선책략에서 주장하는 친미, 친일, 반러에 대해 일본은 역사적으로 대립을 반복했으니 경계하는게 마땅하며, 미국은 가진바 정보가 없어 상대가 자신들을 속여 먹을 수 있으니 쉽사리 믿을 수 없으며, 러시아는 이웃 나라이며 마땅한 혐의도 없는데 무조건적으로 경계하는 것이 오히려 자국의 위험을 불러올 것이다.라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대어 반대했다.
사실 당시 국제사회는 지금보다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라, 진정한 책략이라면 어느 나라가 어떤 성향이니 친해야 한다, 류의 서술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성향이라는게 때와 힘의 균형에 의해 매번 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만 해도 조선의 개항기에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가장 쓸만한 패로 생각되었지만, 나중에 냉전시기에서 보듯이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나면 일본처럼 나올 가능성도 높았다.[17]
그리고 위정척사론자의 사상이 과거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특히 척사의 관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척양론과 왜양일체론을 기반으로 서양에 대해 거부하던 초반부의 관점이, 나중에 가면 서양에도 의리는 있다는 식으로 변화한다.[18]
실제로 매천야록에서 보면 보어 전쟁에 대해 언급하면서 보어인들이 힘껏 저항하자 영국이 이를 존중하여 몰살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4.1.3. 개항 = 발전?
위정척사파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주된 가정은, 조선이 빨리 개항했으면 신식문물을 배워서 부강해졌을 것이란 가정이다.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면 일단 문을 열고 교역을 해야 했는데, 당시 조선은 여러 전쟁을 거치며 상업적 가치가 있는 문화가 쇠퇴하여 별다른 특산물이라고 할 게 없는 농업 중심 사회였다. 한마디로 수출품이라 해봤자 곡물, 채소같은 식품류였으니 교역으로 이윤을 벌어들이기 어려웠는데, 무리하게 교역을 이어나가다간 외국에 의해 그대로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는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 추측은 그대로 실현되어, 조선은 쌀을 헐값으로 일본으로 넘기는 식량공장으로 전락하고, 조선사람들은 쌀이 없어서 굶주리게 되었다.
풍년이 들어도 일본 상인들이 쌀을 가을에 모조리 사들이는 바람에, 조선에서는 겨울이 끝나갈 즈음에는 쌀이 모자라서 일본으로부터 쌀을 수입할 수밖에 없다.
『한국지』, 170면,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에서 발췌
『한국지』, 170면,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에서 발췌
개항 훨씬 이전부터, 일본 상인들이 각종 공산품을 가지고 들어와 조선산 쌀과 원료를 헐값으로 빼앗다시피 가져가기 시작했기에, 조선 사람들도 전면 개방시 나라꼴이 어떻게 될 줄은 쉽게 예상이 가능했다.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되기 10년전, 대원군 집권 3년차의 일성록 기사를 보자.
우리나라 천은 아름다워서 원래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서쪽으로는 연경(燕京)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왜(倭)에 이르러 천을 수입을 하고 있다. 이 밖에 신기한 장난감 같은 수입 상품들이란 모두 나라의 돈을 소모하고, 백성들의 판단력만 흐리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서양 물건들이 거의 전국에 가득하여, 이미 지각있는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된지 오래다.
일성록(日省錄), 고종 3년 (1866년) 7월 30일,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에서 발췌
일성록(日省錄), 고종 3년 (1866년) 7월 30일,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에서 발췌
물론 제대로 가격을 지불했으면 그 돈으로 조선 경제가 어찌저찌 발전했겠지만, 때는 법도 피눈물도 없는 제국주의 시대, 다른 나라가 죽던 말던 돈벌면 장땡인 시대에 제대로 가격을 쳐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국제 무역에서 상품의 제 가격을 받고 문서상으로만의 공정 무역이 아닌 실제 공정 무역이 되려면,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한다.
[곡물 매매는 원래 조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으로서, 먹을 목적으로 필요한 양 이상으로 일시에 곡물을 모조리 사버리는 일은 좋지 않은 문제를 만들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 열리는 날에 일본 경찰을 수 명 파견하였으니, 만약 조선인이 쌀 팔기를 거부하거나 난동을 부리거든 직접 대응하지말고, 조용히 상대방을 붙잡아서 순찰 경관에 인도하라.]
일본 영사가 이런 훈령을 내린 시점이 1882년으로서, 개항 (1876년)으로부터 불과 6년만이었다. 일본이 조선 땅에서 거리낌없이 경찰력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들이 쌀을 제 값받고 팔고 있었다면, 거부하거나 난동을 부리다가 (조선 땅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갈 이유가 있었을까?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일본 영사가 이런 훈령을 내린 시점이 1882년으로서, 개항 (1876년)으로부터 불과 6년만이었다. 일본이 조선 땅에서 거리낌없이 경찰력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들이 쌀을 제 값받고 팔고 있었다면, 거부하거나 난동을 부리다가 (조선 땅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갈 이유가 있었을까?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개항 전에는 물정에 어두운 농민들에게 공산품을 비싸게 판다던지 하는 수법이 주를 이뤘다면, 개항 후에는 아예 일본 경찰까지 투입해서 반강제로 저가 매수를 하는 형편이었다. 조선 정부는 힘이 없으니 제대로 항의도 못했다.
그나마 조선이 무역에서 돈을 벌 가능성이 있는 길은 특화되는 상품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고 그 전까지는 무역적자를 봐가며 어떻게든 요령껏 버티는건데 이미 조선의 재정은 오랫동안의 세도 정치로 막장이 되었고 재정이 없으면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기도 힘들다. 거기다가 조선은 농공상 모두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도대체 언제까지 재정적자를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라 지금에야 널리 강조되는 자유무역, 공정무역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특화 상품이 있어도 군대 밀고 들어와서 식민지로 만들거나 불평등 조약으로 바꿔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 카리브해의 수많은 섬들은 설탕이라는 경쟁력 만땅인 특산품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부자 나라로 발전하기는 커녕 서구 열강이 군대로 점령하고 플랜테이션 기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란 역시 석유라는 대체 불가능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활용은 커녕 영국 배만 불려줬다. 이 부분은 BP라는 기업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중국 침략의 교두보 및 경제를 수탈할 목적으로 조선 강점에 혈안이 되어있었으니, 최대한 단기간에 이런 적성국가를 상대해야 한다는 목표가 당시 조선 사대부에게 뚝 떨어지고 만 상황이었다. 저 목표를 달성하려면, 최대한 외세의 개입을 받지 않은 상태로, 아무것도 없는 농경국가 위에서 산업기반을 세운 다음, 그걸 바탕으로 경제력을 키우고 거기서 나온 자본으로 군사력도 길러서, 당장이라도 쳐들어오려고 안달인 일본에 맞설 힘을, 십수년 안에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이 되는데 이는 세계의 어느 명군이 지도한다 해도 성공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사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만들어도 이런게 가능하면 현실성 너무 없다고 욕먹을 지경이다.
하다못해 정말 세계적으로도 특이 사례라 여겨질 만큼의 경제성장을 했던 지금의 한국도 PPP 기준 1인당 GDP에서 일본을 역전하기까지[19]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2020년까지, 무려 72년이나 걸렸다. 조선의 개항이 1875년이었으니, 그 시점에서부터 72년이라 한다면 이미 한참 전에 식민지가 되고 경제가 털릴대로 털려 1인당 GDP가 절반 가까이로 줄어버린 뒤 광복을 맞고 나서 2년이 흘러야 할 정도로 긴 시간이다. 이러니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불리한 국제정세에 놓였던 조선이 이를 자체의 힘만으로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조선과 일본보다 일찍 서구 열강들과 수교 및 개항을 한 중국 청나라는 부국강병은 커녕 오히려 서구 열강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며 그들에게 이권을 빼앗기는 반식민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청나라는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로 외세에 개항을 했으나 그로부터 20년 후인 1860년 영국은 또다시 제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침략하고 베이징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아편전쟁의 경과를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조선이 서구와의 개항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청나라가 서구 열강들이 요구하는 대로 개항을 하고 수교와 무역을 했으나 그들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살인과 약탈을 저지르는데, 과연 조선에서 우리도 어서 서구와 통교를 해야 한다고 나설 사람이 많을 수 있었겠는가? 특히 제 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선 사회에서는 곧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와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보따리를 싸들고 산과 계곡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불안한 민심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글인 권학가와 포덕문에서도 드러나는데, "요망한 서양의 적이 중국을 범하여 (중략) 서양은 싸워서 승리를 취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서양이 천하를 진멸하니 순망지탄이 아닐 수 없다."라며 두려워하였다.(출처: 조선의 예언 사상 하권/ 김탁 지음/ 북코리아/ 351~352쪽) 청나라 이외에도 서구 열강들이 원하는 대로 수교와 개항을 했지만 근대화나 부국강병은 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신세로 전락한 베트남이나 이집트의 경우도 있다.
개항했으면 우리도 일본처럼 발전했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들을 하지만, 세 나라중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도 순탄하게 일이 풀린 게 아니었다. 내부적인 갈등으로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 등 전국적으로 내란이 벌어진 끝에 반대파가 죄다 죽거나 정치적으로 몰락해서 개화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조급하게 발전과 징병을 밀어붙이다보니 당연히 돈이 부족해졌고 이를 때우려고 세수를 무지막지하게 올려 잇키가 수시로 벌어져 이후로도 내부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외세가 치고 들어왔으면 바로 손들고 식민지행이었겠지만, 일본에겐 다행스럽게도 개항 주최인 미국이 남북 전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고,[20] 다른 외세들도 각자 더 중요한 일들이 있어서 일본을 놔둔 행운이 찾아왔다.[21] 일본의 근대화는 이런 자국의 경제를 짜낸 것으로도 부족해 오키나와, 홋카이도, 조선 등 주변 나라들을 죄다 짜내면서 간신히 경제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이룬 것이며,[22] 이조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꽤 큰 타격을 입었다.[23]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자국을 전부 짜내고 그걸로도 모자라 주변의 건드릴 수 있는 나라라는 나라는 모조리 다 건드려서 간신히 성공시킨게 일본의 근대화였다. 정한론으로 일찍부터 일본은 옆나라에서 짜내지 않으면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천하의 정세는 각국이 분쟁하고 대소 강약이 서로 병탄하여, 갑(甲)이 일어나면 을(乙)이 쓰러져 성쇠(盛衰)가 엇갈리고 있다… (일본은) 국력이 쇠잔하고 군비가 공허하고 인심이 게으르고 약하여 황국(皇國) 독립의 기개가 없다. 이를 알면서 고식적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몇 년을 지나지 못해 죽어 넘어지고 뒤집혀 망해 다른 나라에 예속될 것은 분명하다… 이때에 우리 일본은 마땅히 그 틈을 타 중국⋅조선⋅만주로 건너가 이를 빼앗아 가져 이로써 구주 각국에 침입하는 기초를 세워야 한다.
기리노 도시아키, 정한론, 서남기전 제 1책
기리노 도시아키, 정한론, 서남기전 제 1책
즉, 일본이 특이 케이스로서, 식민지가 될 뻔하다가 각종 행운에 타이밍 좋게 옆 나라들을 짜내어 낮은 가능성을 뚫고 강국으로 바꿈한 것이지, 빠른개항 = 부국강병 이렇게 생각하면 곤란하다.[24]
그나마 빠르게 서구화한 일본마저도 저렇게 휘청였던 상황이었는데,[25] 경제적으로나 병력으로나 일본에는 턱없이 못 미칠 정도로 궁핍하던 당시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근대화 방식을 따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다른 열강의 내정 간섭을 막고 옆 나라를 침략해서 힘을 기르는 것이 사실상 유일하게 검증된 해법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행운에 힘입어 내정 간섭을 최소화할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은 그 일본이 저 살자고 집요하게 파고들어오는 상황이었고 문을 빨리 열어제끼면 발전은 커녕 나라가 더빨리 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위정척사운동을 단순한 수구꼴통들의 시대착오적인 반항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26]
그리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식민지배를 당하지 않은 국가 대부분의 특징은 정도는 달라도 근대화를 어느정도 하긴 했다. 그리고 이것이 독립을 지키는데 도움이 안 된 것도 아니다.[27] 그러나 진짜 중요한 점은 근대화의 여부가 아니라 강대국의 결정이라는 점으로 에티오피아나 태국이나 강대국들 사이에서 줄타기 잘해서 모두들 안 먹자고 합의했지만 이 합의를 깨려고 한 이탈리아, 일본이 쳐들어오자 이들은 강제로 주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근대화의 성공 여부도 중요하지만 '성공하기 전까지'는 강대국들이 얼마나 시간을 주느냐다.
4.2. 비판적 평가
위정척사파는 성리학을 절대적인 가치로 삼으며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배타적인 면모를 보였다.먼저, 위정척사론에서 이야기하는 중화(中華)는 한(漢)족의 유교적 정신을 의미하는데, 청나라가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기에 한족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당대의 관점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중화사상의 변방적 의미의 계승자이자 한족의 나라가 복원될 때까지의 임시 거점인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중화 숭배의 정신을 벗어난 일은 없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는 소중화로서 청나라에 예속된 번국으로서가 아닌 조선이 곧 중화라는 주체성의 선언이기도 하였다라고 변명하기도 하지만,[28] 청나라가 멸망하고 나면 결국 만주족의 나라가 아니라 한(漢)족의 나라를 숭배하는 사대주의가 될 뿐이었다.[29] 이에 대해서는 위에도 언급했지만 당장 화서학파의 사상적 기반에는 송시열의 숭명배청론이 있다. 요약하자면 송시열 계열의 유학자들은 도통과 현실적인 계승자를 구분하고 오랑캐인 만주족이 중국왕조의 실질적인 계승자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한당송명의 '도통(道統)'과 의리는 문명국인 조선만이 이어 받았다고 보았다. 그러니 소중화는 자주성의 발로가 아니며 오히려 인종차별적인 우월성의 표현일 뿐, 조선이 청제국의 속국으로 사대-조공질서를 지켜야한다고 본 것이다.
거기다 일관적인 것도 아니었는데 소중화를 주장하며 조선을 유일한 문명세계라며 북방민족을 오랑캐 취급했으나 정작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자 통상거부 명분으로 속국타령을 하던것도 위정척사파였다. 척사파의 대표적 인물인 최익현은 청의 속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대한제국 설립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다른 위정척사파 유생 유인석도 "이미 대명제국의 황제가 있으니 천하의 두 황제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칭제에 반대했다.[30] 그런데 의병대가 해산된 뒤 유인석은
“중국에 가서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해도 크게 잘못될 것은 없다.
또 우리 사람 1만 명이 사는 요동(遼東)에서 군사를 양성하면 크게는 온 무리를 바로잡을 것이요, 적게는 중화의 명맥을 보존할 것이다.”
( 원용정, ‘의암유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1))
또 우리 사람 1만 명이 사는 요동(遼東)에서 군사를 양성하면 크게는 온 무리를 바로잡을 것이요, 적게는 중화의 명맥을 보존할 것이다.”
( 원용정, ‘의암유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1))
과 같이 앞의 주장과 양립되지 않는 말을 했다. 쉽게 얘기하자면 대명제국의 정통성을 받드는 사람이 대명제국을 무너뜨린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중화(= 대명제국까지 이어져 내려온 중국의 문화)를 유지하자는 말을 한 것.
문제는 이미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크게 패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심지어 요동에 조선인 1만명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서 군대를 양성해서 소중화의 이상을 실천하고 그게 잘 안되면 그 가치관을 보존한채로 있을 수 있다는 건데 전자는 나라를 망치는 짓이고[31] 후자는 자연히 도태되어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32] 어느 쪽이고 미래가 없다. 유인석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 또한 유인석이 원병을 요청하기를 원했던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 이후 파견되어 12년간 조선을 기존의 명분적 속국에서 각종 이권을 침탈하여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사람이다.[33] 결과적으로 유인석은 실제로 요동으로 갔으나 청나라 측에 의해 의병을 해산하게 되었다.
어쨌든 양측 모두 기본 골자는 '중국이라는 제국이 이미 존재하는데 굳이 새로운 제국이 있을 필요는 없다.'라고 주장한 것. 결국 이들이 지키려던 것은 나라가 아니라 성리학 그것도 자기 학파의 세계관에서 존재하는 화이질서의 수호였지 조선왕조의 종묘사직도 아니요 대한제국의 자주권도 아니다.
또한 신분제에서도 경직된 면모를 보였는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척왜양창의를 내세우며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위정척사파는 이들을 의병을 사칭하여 향촌사회를 약탈하고 자신들의 향촌지배권에 반대하는 폭동이 다시 일어난 것으로 간주하며 제거의 대상으로 보았다.그래서 민보군을 조직하여 조선 관군과 심지어는 일본군과도 협력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했는데도 이들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는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은 물론 화적죄로 몰아서 생매장하기도 했으며 관리가 귀순한 동학농민군들은 죄를 묻지 않기로 했는데도 색출해서 죽이며 토지문서를 약탈해 가기도 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엄연한 외세이며, 제국주의 침략국인 일제와도 손을 잡은 것이다. 이미 일본은 침략 의지를 드러냈는데도 이를 등한시하거나 외면하다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겪고 나서야 부랴부랴 의병을 조직해 저항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변명이 안 된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이들은 동비[34]라 불렸는데 이 시기에 이들도 의병이 되려고 했다. 문제는 해당시기 의병장들은 대개 양반이었고 이들은 "어딜 동비 따위가!" 라며 안 받아주기 일쑤였다. 의병내부에 있던 동학도들도 색출해서 죽여버렸다. 이때 살아남은 동학세력들은 송병준, 이용구가 만든 일진회로 들어가서 의병들을 공격했다. 이들 위정척사파 민보군은 1894년 이후 정치적 입장차이로 분열하기도 했는데 반외세를 외치며 의병으로 활동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의병 활동을 하는 세력도 있었다.
단발령으로 인해 의병활동이 벌어지던 때, 이항로 학파에 속한 의병장 유인석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고 항의하던 김백선을 참살했는데, 문제는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대의 숫자는 3천~1만으로 앞섰고 김백선이 이끄는 의병대는 고작 4백명이지만, 전자는 훈련이 안된 소작농이나 근처 평민&천민들로 머릿 수만 많았던 민병집단이지만 김백선의 의병대는 포수들이 대부분인 정예병으로 일본군이나 관군도 위험시하던 부대였다. 이들의 수장이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같은 의병장에게 상민이 칼을 들고 항의했다는 이유로 죽었기에 결국 의병대가 해산된다는 결말이 나고 말았다. 나라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이미 신분에 얽메여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를 위와 같은 이유로 죽여버린 시점에서 위정척사파 전체가 그러지 않다하더라도 위정척사파가 마냥 흠 없는 애국자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임금의 명령보다도 성리학을 지키는게 훨씬 중요하다고 행동했는데, 대표적으로 을미의병을 들 수 있다. 을미의병의 궐기 명분은 대의적으로는 단발령, 정확히는 이로 인해 효를 어기게 되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신체발부 수지부모에 있는것이 아니다. 애초에 양반들도 사람이라 상투가 너무 덥기 때문에 속알머리를 밀고 트는게 보통이었고, 백성들도 더우면 그냥 머리를 적당히 깎고 다녔다. 상투를 틀지 못하는 것은 부모상을 치르는 상주나 백정같은 천민으로, 전자는 부모를 지키지 자책감 때문에, 후자는 그냥 사람 취급을 못받아서라는 이유였다.
적당히 머리를 깎는 정도까지는 암묵적으로 허락되던 건 암묵적이라 그런건 쳐도, 엄연히 임금이 명령한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 임금이 솔선수범해서 단발령을 직접 수행했는데도 단발령을 따른 지방관을 목을 베어 효수를 하는것은 이 당시 위정척사파가 국법과 임금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35]
이들이 유교적 도덕성 회복 사회개혁을 주장하였으나 기껏해야 '수신(修身)하면 된다.', '내부 단속을 해야한다.', '더 격렬하게 거부해야 된다'는 미래가 없는 대책을 내놓았을 뿐, 정말로 조선 사회에 필요했던 개혁이나 외부 문물은 무조건 배척하여 유인석은 신학교와 여학교, 무관학교 설립을 거부했고, 최익현은 의회 설립 운동을 주도한 독립협회의 활동을 반대했으며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이었던 신기선은 언문을 없애고 한자만 써야하고 내각대신이 국정을 논하는 것은 군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양복을 입지 말고 한복만 입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했다.#
그리고 내놓은 대책도 제대로 된 건 아니었는데, 최익현의 상소대로 고종이 친정하자마자 청전 유포를 금지하자 조선 재정은 파탄이나고 백성을 위해 청전 유통 금지[36] 했다가 재정난으로 백성들의 생명줄인 바로 환곡을 털어먹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37]
이들의 척화 대책이란 것도 의리만 있으면 몽둥이로도 진나라 초나라의 갑옷입은 대군을 물리친다는 의려제도(義旅制度)라는 민병대 양성안에 그쳤다. 그나마 냉병기로만 다투던 시기라도 정신론으로만 이기는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38][39] 제대로된 화기까지 도입되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정신론을 들먹인다는 것 부터가 사실상 유용한 방책은 없다고 스스로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었다.[40]간단하게 말하자면 일본군이 예찬하던 정신론의 판박이다. 물론 우리가 다 알다시피 정신력만 외치던 일본군은 러시아, 중국을 상대로는 매우 고전했고 진짜 강한 적인 미국에게는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정신론도 서로의 군사적인 체급이 맞는 상태에서, 그것도 고대로 갈수록 먹히는 이야기인데 이 시대는 화기가 매우 발달하고 있던 시대였다. 기관총 하나만 있으면 수백의 군대로 원시 부족 군대 수만을 쓸어버리는게 이 시대였다.
또한 '비싸고 다양한 물품을 만들 수 있는 열강과 달리 조선은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이 벼같은 비싸지도 않고 많지도 않아 섣부른 외교는 외국의 경제간섭의 빌미를 줄 수 있다.'라는 주장은 얼튿보면 맞는 말 같지만, 실제 경제사학 연구에서는 개항이 어떤 형태로든 간에 조선의 경제 성장을 자극했다는게 중론이다. 흔히 생각하는 개항 직후 교역은 '일본이 쌀을 싸게 사가고 공산품을 비싸게 파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제 값 주고 거래했다. 애초에 당시 일본은 그런 되도 않는 거래를 강요할 처지도 아니었고, 일본 상인들에게 물건 팔던 조선 상인들은 적자 보면서 일본에 물건을 팔아주는 자원봉사자가 아니었다.[반론1] 다만 도시화 중이던 일본은 쌀 값이 폭등했고 영국의 면포가 들어와 면포 값은 싸진 반면, 조선은 도시와 공업이 미발달하여 쌀 값은 싼데 면포 가격은 목화 재배지의 감소로 인해 폭증한 상태였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가 됐을 뿐이다. 이전까지 조선은 오직 농사만 짓다보니 쌀의 만성적인 공급과잉으로 쌀의 가격이 폭락해서 농민과 지주들이 자체적으로 생산을 줄이느라 생산성이 되려 낮아지고 있던 상태였는데, 개항 이후 쌀값이 높아지자 농민들이 다시 쌀농사 짓는데 투자를 늘여서 생산성이 늘어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위정척사파의 주장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위정척사파들과 같이 경제가 성장하지 않을 것이란 전제를 하고 논리를 전개하나, 개항장의 무역으로 자본을 축적한 조선 상인들은 후에 조선의 민족자본가들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반론2]
신석기문명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호주 원주민 아보리진도 중국 상인들과 해삼무역을 했고, 시베리아 원주민들도 중국과 러시아 상인을 상대로 모피 무역을 하며 총기 소금과 의류등을 보충했었으며, 일본도 개항 초기엔 불평등조약으로 서양열강들에게 관세자주권을 박탈당했고 청일전쟁 승전후 영일동맹을 앞둔 1899년이 되어서야 영국에게 최초로 자주관세권을 인정받으며 이후 이를 빌미로 협상을 거듭한 19세기에 와서야 열강에게 뜯겼던 관세자주권을 전부 회수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이홍장의 배려로 서양과의 수교 조약에서 처음부터 관세 자주권을 흭득했다.
또한 "서구열강이 조선에서 얻을 무역 이익을 탐했다"라는 위정척사파들의 주장도 비판할 수 있는데, 조선의 특산품은 쌀처럼 부피만 크고 부가가치는 미미하며 그렇다고 조선을 판매 시장으로 삼기엔 시장이 너무 작았다. 일본 제국과 청나라가 조선을 노렸던 것은 무슨 경제적 이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정학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큰 대가를 치르고 조선을 먹은 일본은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적자만 봤다. 대만총독부는 일본과 기후가 달라 설탕을 중심으로한 열대작물 플랜테이션으로 큰 재정흑자를 보고 일본중앙정계에서도 사랑받았지만 조선총독부는 뭘 할 수 있는게 없고,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었다.[반론3] 총독부가 그 적자 벗어나보겠다고 산미증식계획으로 쌀농사를 해서 적자를 좀 극복했는데 기후가 똑같다보니 재배종도 똑같아 일본쌀값이 폭락해서 일본농림성 장관이 내각회의에서 조선총독부 대표만 보이면 얼굴 붉히면서 고성을 질러대면서 이러다 농민폭동 일어난다고 반발해 결국 산미증식계획 자체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위정척사파는 서양열강은 일방적으로 배척하는 근시안적인 면모를 보였으며,오히려 금수 취급한 서양과 일본 대신 그나마 오랑캐이며 상국으로 종주국으로 인정한 청나라는[44] 유일한 대외관계 대상으로 인정했으나 청나라는 조선이 개항을 미적거리고 일본의 강제개항에도 개혁을 미적거리자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맺도록 주선하였다.[45]그리고 위정척사파는 상소를 올리며 만국공법을 인용하였지만, 국제 사회는 힘으로 결정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본질적인 부분을 모르는( 혹은 거부하는) 위정척사파들은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붕괴하고 있는 조선을 어떻게든 구해보려는 노력과 선의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기득권층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개혁을 거부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실 당초에 위정척사파의 행동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것이 위정척사파의 대부분이 주리론적 이기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주리론에 따르면 이와 기는 별개이며 이를 지켜야 하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주리론에 있어선 이들의 선배 격인 남인들도 위정척사파와 마찬가지로 사회변화와 이에 맞춘 개혁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바꾸지 않으면 못살아남는 시대니 이들이 뭘 주장하든 사상적 단계에서 이미 실패가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5. 여담
서양과의 통상을 반대한 행보로 인해 흥선대원군과 함께 영포자를 놀리는 데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다른 과목 성적은 우수한데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성적만 낮은 경우 교우들에게 위정척사파 소리를 듣늗다. 이때 놀림받는 영포자는 영어를 "양이의 언어"라면서 척화비문을 읊어주는 게 국룰.
영어뿐만 아니라 유독 서양 요리가 몸에 안 맞는 학생들도 위정척사파, 흥선대원군 소리를 듣곤 한다.
[1] 항일 의병 운동, 그 이후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2] 한주학파의 사상적 입장은 19세기의 학계 분위기 상 파격적인 학설로 받아들여진 ‘심즉리설(心卽理說)’에 집약되어 있다. 심(心)은 곧 리(理)라는 개념으로, 이런 표현은 이황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과 거리가 있었고, 조선의 유림이 오래도록 이단으로 배척했던 왕수인(王守仁)의 ‘심즉리설’과도 유사했다.[3] 사람과 사물/동물의 본성이 과연 동일한 종류의 것인지, 아니면 상이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한원진(인물성이론)과 이간(인물성동론) 사이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한원진을 따르는 이들은 호론으로, 이간을 따르는 이들은 낙론으로 파벌을 이뤘다.[4] 이외에도 병인양요 당시 정족산성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 양헌수, 관서 지방 성리학자 박문일이 있다.[5] 화서의 경우, 통색보다 통화의 위험이 크다고 경고하였다. 교역을 통해 상업이 발달하면 백성들이 사리사욕만을 추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북학파들의 주장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간재사고(艮齋私稿)』] 권28"[『추담별집(秋潭別集)』] 권1[『창수집(蒼樹集)』] 권3[9] 이(理)를 우주의 근원적 존재 또는 유일한 근원적 존재가 아니더라도, 분열된 존재가 아닌 통일된 존재로 설명하는 성리학 이론.[10] 이진상도 기정진처럼 주리설을 따랐지만, 동시에 연역법인 순추(順推)와 귀납법인 역추(逆推)라는 당시로서 독특한 논리로 논증했다. 인식론에 있어서도 감각적 인식인 도간(倒看)·경험적 인식인 횡간(橫看)·논리적 인식인 수간(竪看)이라는 3단계 인식법을 제시했다.[11] 여러 웹사이트에 김진우(金鎭祐)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김진호(金鎭祜)가 옳다. 자는 물천(勿川)이며, 아들 대순(大洵)이 간행한 『물천문집』도 전해진다.[12]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복구하고자 노력했고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리기도 했다.[13] ‘신교육을 통한 신진 인재 양성’이 목표였다.[14] 이 시기 사대부는 일단 일제강점기를 막지 못했다는 원죄가 가장 크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동안 1인당 GDP가 조선시대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할 만큼 세계적으로도 동시기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의 수탈을 당한 데다, 일제강점의 영향으로 한반도가 분할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치 불안요소를 남겼기 때문이다.[15] 국내의 정치[16] 외국과의 정치적인 교섭, 외교[17] 다만 그래도 러시아는 일본보다는 조금 덜한게 러시아의 경우 유럽의 정세에도 신경을 써야 해서 온전히 아시아의 정세에 집중할 순 없었다. 물론 유럽쪽 팽창시도가 죄다 막혀서 그 욕구가 동아시아 쪽으로 쏠릴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일본은 아시아나 오세아니아 말고 뻗어나갈 곳이 없어서 당연히 러시아보다 조선을 먹어치우려는 욕구가 진심이었다.[18] 개항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 등에서 번역된 만국공법 등 서양과 관련된 서적들이 들어왔으며,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기 위해선 상대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봤기에 해당 서적들을 읽어보는 과정에서 서양에 대해 지식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9] 1948년 기준으로 약 5배 차이가 났다.[20] 남북전쟁 이후로도 한동안 전후 재건에 전념해야 했다.[21] 일본의 개항~대정봉환 시기까지인 1850, 60년대까지는 크림전쟁과 남북전쟁이 터졌다.[22] 청일전쟁에 승리하기 전까지 막부 시대 다이묘들과 사무라이들에게 연금을 주는데만 재정의 30%를 소모하고 있었고, 긴축 정책을 20년이나 지속하며 헐값으로 국가재산을 팔아치울 정도로 말그대로 나라의 기둥까지 뽑아가며 발전을 시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23] 청일전쟁의 경우 배상금이라도 두둑하게 받았으나 러일전쟁은 아예 한 푼도 못 받아서 피로스의 승리가 됐다. 참고로 당시 일본은 연 세입이 2억엔도 안 되는데 20억 엔에 가까운 돈을 러일전쟁에 쏟아부었다. 그 중 12억엔은 영미의 지원이었지만 그래도 연세입의 몇배나 되는 돈을 쏟아부은건 달라지지 않는다. 이후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각종 군수물자를 팔아치우며 간신히 재정위기에서 탈출한다.[24] 이렇게까지 근대화를 했음에도 일본의 삶의 질은 동시기 제국주의 열강과 비교해도 비참했다. 자본주의와 야경국가주의가 만연하여 소수의 정치인, 자본가들만 잘살고 하층민들이 빈곤한건 다른 열강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여기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투쟁하며 권리가 올라가고 있었고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영아살해가 만연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일본은 영아살해 악습인 마비키가 이 때도 끊어지지 않았다.[25] 또한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일본이었지만 당연히 당대의 거두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 미치는 수준은 아니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일본은 겉보기로 보인 성과에만 눈이 돌아가 내부의 문제점들을 전혀 개선하지 않았다.[26] 다만 그렇다고 위정척사파의 주장이 정답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닌게 결국 외세에 맞서려면 힘을 길러야 하고 이미 기술격차가 극심한 상황에서 강해지는 법은 그들의 것을 배우는 것 뿐이고 이러면 개항이 어느정도 불가피하다. 즉 개항은 빨리죽는 것 폐쇄는 늦게죽는 것 정도의 차이...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개항을 아얘 안 하면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선택지는 아얘 없다. 아닌말로 서구의 무기를 받아들여도 써먹는 방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이고 써먹을 방법을 알려면 서구와 어떻게든 접촉해야 한다. 최대한 덜 접촉하려고 해도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영향력을 만들게 된다.[27] 에티오피아의 경우 당시 유럽에서 호구로 보는 아프리카 국가였지만 당시 황제인 메넬라크 2세가 길러놓은 신식 군대가 있었고 이들은 근대식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제대로 된 훈련도 받았다. 물론 이것도 있고 상대인 이탈리아군이 너무 못싸운데다 지 혼자 에티오피아를 꿀꺽하려는걸 못마땅하게 본 영국, 프랑스가 에티오피아를 지원해준 것도 있다.[28] 이 조선 중화라는 것도 명나라가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멸망하고 나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복속된 조선이 청나라를 국력으로 이길 수는 없으니 '중화가 조선에서 부활했고, 명나라도 멸망했지만 조선이 계승했으니 복수 안 해도 된다는 정신승리의 일환이었다.# 애초에 효종과 송시열이 내세우던 북벌 역시 청나라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해 왕권과 신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의미가 강했다, 그리고 조선통신사 조태억이 “천하가 모두 청나라를 따르지만, 우리 조선만은 대명의 제도를 고치지 않으니, 청나라 오랑캐들도 우리를 예의의 나라라 하여 감히 예의에 벗어난 것으로 우리에게 가하지 못하며, 이 하늘 밑에 조선만이 진정한 중화다."라고 허세를 부리다가 일본 유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에게 "그것도 오랑캐 청나라가 봐줘서 그 정도 아니겠는가?"라고 조선이 오랑캐라고 비웃던 일본에게도 비웃음을 당하는 수준이었다.동사일기곤 강관필담[29] 일례로 유인석이 중국으로 망명했을 때 쑨원에게 '우리나라는 대중화의 뒤를 잇는 소중화로 중국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으며 한족의 중국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다행히 당신이 그렇게 했으며 중국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내용의 흥중화국정부서#라는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유인석이 찬양하던 쑨원은 조선을 옛날부터 중화대륙의 속국이었지만 사악한 서양오랑캐들과 결탁한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탈환해야 할 중국의 잃어버린 옛 영토로 생각하던 인물이었고 중국이 다시 강력해지면 조선은 저절로 중국 밑에 다시 기어들어올 것이라고 하던 배타적, 팽창적 중화주의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30] 정작 유인석은 나라 망하고 난 뒤에 순종의 연호인 융희를 사용한다.[31] 다만 조선이 간도 일대를 은근슬쩍 자기 영토로 삼으려고 한 적은 있다.[32] 당연하지만 주권도 없고 인구도 밀리니 결국에는 소수인 조선인 쪽이 도태되고 설사 요동 내에서 조선인 인구가 앞서게 되면 이번에는 분리주의 문제가 나와서 결국 요동 일대가 조선인 국가가 되든 아니면 중국에게 진압당하든 둘 중 하나인데 후자도 문제지만 전자도 문제인게 일본이 있다.[33] 이와 관련되어 가장 좋은 예시가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인데 위안스카이는 여기서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국이다. 중국을 버린다면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이다.”라며 조선을 자국의 영향력 안에 넣으려 시도했다. 위안스카이 협박, 조선 근대화의 황금 기회 봉쇄하라[34] 동학을 사칭한 도적무리도 있기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동비로 몰았다는 게 잘했다는 건 아니다[35] 단 이 단발령의 '주체'에 따라서 달리 볼 여지가 있다. 우리가 아는 단발령에 대한 반응은 1차 단발령으로 그 후 5년 뒤 2차 단발령이 있었지만 1차와는 달리 2차때는 큰 반항이 없었다.(안 하는 사람은 안 했지만) 1차와 2차의 차이는 주체와 사전 분위기 그리고 진행상황의 차이로 1차때는 을미개혁 시기로 이 때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당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선 상태에 단발령의 집행도 길가던 사람 아무나 잡고 머리 미는 식으로 과격하게 진행되었으나 2차때는 고종이 정치를 주도하고 있었고 2차처럼 막무가내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즉 1차때는 사전에 있던 일도 방법도 이들을 자극하기 딱 좋았을 뿐더러 무엇보다 나라님의 의사인지 소위 '김홍집 내각' 이라고 불리는 (그들 입장에서) 친일 매국노들의 의사인지 확실히 구분지을 수 없을 뿐더러 실제로 고종은 김홍집 내각에 적대적이어서 아관파천 하자마자 김홍집 내각을 박살내고 단발령을 철회했기에 이들이 단발령의 주체를 김홍집 내각으로 보았다면 이러한 행동이 말이 된다. 김홍집 내각을 주체로 보았다면 일본의 국모 시해+그놈들과 한편인 놈들이 내각 차지+단발령+과격한 시행 이라는 이유로 충분히 수령을 죽이고 효수를 하는 과격성을 보일만 하다. 그 상태에서라면 수령도 수령이 아니라 김홍집 내각의 앞잡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종은 김홍집 내각과 1차 단발령에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아관파천 후 고종이 해산 명령을 내리자 대부분 자진 해산하는데 저때 수령을 죽인 행위가 임금을 무시하는 처사였다면 해산 후 보복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므로 이들이 과연 순순히 자진 해산했을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임금을 무시할 정도였다면 해산 명령을 내리든 말든 해산하지 않았을 것이다.[36] 지방관들은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어서 청전으로 한양에 송금 했기에 조정에는 청전만 가득했고, 청전 혁파하자 당시 조선 재정은 완전히 몰락했고 이후로도 회복되지 않았다.[37] 청전은 조선 숙종 시기 부터 중국에서 들여와 유통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조선 내 구리 생산량이 처참한데다가 유교 이론에 때라 광산 개발도 지지부진하고, 주 수입선이던 일본과의 교역도 끊겨서 민간에선 수요에 비해 동전이 공급량이 만성적으로 부족했다. 그덕에 탐관오리들도 이 교환비를 이용하여 막대한 차익을 누렸고, 민간에서도 쌀과 베의 물물교환 교역이 성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뿐이 아니라 조선상인들도 중국에서 구리 값이 싸니 구리 동전을 사와 자체적으로 유통 했고 청전은 나름대로 구리 함량과 크기가 상평통보보다 2분의 1내지 3분의 1에 불과 했기 때문에 민간에선 상평통보의 절반정도의 가치로 교환되는게 보통이었고, 당백전 당오전 따위처럼 일단 재정을 확보하자고 실제 가치보다 과장된 가치를 지닌 돈을 대량으로 풀어놓는 것보다는 양반이었다.[38]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싸울 마음이 안들면 제대로 못 싸우는게 당연하고 사람의 성질상 긍정적인 감정보단 부정적인 감정이 퍼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이때문에 수성전같이 유리한 환경이면 몰라도 야전같은 경우는 장비나 훈련의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기가 중요했다. 당장 팽성대전에선 수적으로 훨씬 우위였던 한나라 연합군 56만이 초나라군 단 3만에게 패배한 전적이 있다. 훈련이나 통솔권에 대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전열이 빠르게 무너진데서 사기가 극명하게 벌어졌고 이후 제대로 싸울 생각도 못하고 군대가 무너진게 패착이었다.[39] 다만 이러한 민명대 양성안이 당시 기준으로는 비현실적이라는 것 외엔 큰 문제가 없었는데 우리가 소위 '의병' 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바로 민병대의 일종이며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의병들이 큰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라면 임진왜란때와 달리 기술력 격차가 너무 심하게 벌어졌으며 민병대보다도 정규군 양성이 시급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군사쿠데타로 건국된지라 이런 민병대 양성을 과연 곱게 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의병은 국가가 망하냐 마냐 하는 수준의 극히 위험한 시기에 잠시 등장하는 조직으로 의병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중앙정부 입장에선 골치아파져서 시간이 지나면 의병은 관군에 흡수되는 식으로 없어지게 된다. 의병의 전투력을 보존하면서도 자칫하면 군벌화 될 수 있는 의병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이기 때문. 위정척사파 입장에서는 임진왜란 같은 역사적 사례를 참고하며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결과물이겠지만 이들은 그게 먹히지 않을 정도로 기술력 격차가 벌어진 것과 애초에 제대로 된 중앙정부가 의병, 민병대 같은걸 용납할 리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결국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평은 맞지만 실제로 의병으로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사례가 있으니 그거 하나만은 아얘 쌩뚱맞은 주장은 아니었다. 의외로 또 이 의병이 훗날 독립군이 되고 독립군이 일본을 자력으로 물리칠 '능력'은 되지 않았지만 그러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이 의지가 후일 2차대전 후 연합국이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리는데 기여했음을 감안하면 정신론 자체는 틀렸지만 정신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자체는 맞기도 했다.[40] 심지어 이 당시 조선의 기술은 16세기 홍이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수준인데 서양에선 이미 백색화약에 포도탄, 파열탄, 직사포 조준장치, 후장식 강철대포등이 나오던 시기로 홍이포는 그저 박물관 유물 취급해도 이상할게 없는 수준으로 격차가 벌어져있었다. 실제로 동학농민군 10만명이 조선 관군의 회선포(回旋砲)에 인간 표적이 되기 바빴다는 엄연한 사실도 존재했다.[반론1] 조선 상인들 몇은 적자를 안봤을지 몰라도, 생산자인 대다수 조선 농민은 제값 못받고 있었다. 위에 긍정론 쪽을 봐도 예시가 나오고, 시장 가격대로 팔리고 있었으면 조선에서 방곡령을 수백회 내릴 이유가 없다. 방곡령은 주민에게 먹을 것이 없어 쌀 수출을 금하는 명령인데, 쌀값을 넉넉히 쳐주고 있었으면 그 돈으로 다른 식량 사면 되는데 굳이 왜 방곡령을 내리겠는가? 그나마도 장사에 방해된다고 일본 상인들이 난리쳐서 일본 정부가 압력 넣으면 방곡령 내린 관리가 파직당하는 패턴이 주구장창 반복이었다. 관리해야될 나라가 힘이 없는데 제국주의 시대에 자유시장 경제가 제대로 돌아갔다고 가정하는게 문제다.[반론2] 이 부분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민족 자본가 몇명이 존재했으니 조선이라는 나라에 자본이 많이 축적되었다는 논리로 건너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항기에 장사좀 하던 조선 상인들은 대부분 화폐개혁이나 각종 일본인에게 유리한 경제정책들에 희생되어 얼마 살아남지 못했다. 실제로 1918년 조선 총독부 통계연보를 보면 조선땅에 일본인이 들어와 세운 회사들의 자본금이 총액이 1억5천7백만엔인데, 조선인이 세운 회사들은 10분의 1도 안되는 1천2백만엔이었다. 현재의 개발도상국에서도 아무리 가난에 찌든 나라도 부자는 존재한다.[반론3] 지정학적 가치는 뒤로 제쳐놓고 보더라도, 조선총독부 재정이 적자라고 일본의 조선 경영 전체가 적자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조선총독부가 존재함으로서 일본 상인과 기업들이 마음껏 조선에서 사업을 벌일 수 있는 것이며, 그 경제활동에서 나온 부는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공공부분 재정만 보고 그 땅이 적자라고 평가한다면, 오늘날의 미국 정부 역시 맨날 적자만 보니까 미국땅은 손해나는 곳이라는 소리와 똑같다.[44] 유인석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던 서상철은 동학농민봉기 시절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을 모집하면서 " 천하의 대세를 논해보더라도 위대한 청나라는 100년동안 중화를 지배한 종주국으로 우리 종묘사직이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청나라를 배신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니 의리에 이어 어찌 밝다고 하겠습니까?# 라는 내용의 글을 돌린 적이 있으며 "청나라는 우리 조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으니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자."# 라는 글까지 발견되기도 했다.[45] 청나라조차도 이 때는 양무운동이다 뭐다 해서 근대화에 어쨌든 착수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