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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6창
六昌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

파일:50130315145453(1).jpg
金昌協
1651년 ~ 1708년

1. 개요2. 생애3. 학문
3.1. 사단칠정과 성악론3.2. 지각론3.3. 인물성동론
4. 평가5. 여담6. 가족관계

1. 개요

조선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 비평가. 본관은 신 안동 김씨.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상헌의 증손자이며,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다. 바로 아랫 동생인 김창흡과 함께 '농연'으로 불린다.

부친처럼 문과 장원 급제자이며, 장인인 이단상[1]의 제자이다.[2][3][4] 병조/예조참의, 대사성, 대사간, 청풍부사를 역임하였다. 1689년 부친숙종에게 기사환국으로 사사당하자 사직 후 은거하였다. 추후 부친이 복권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고사하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5] 출사는 하지 않았지만 재야에서 정계 영향력을 보인 사례도 있다.

2. 생애

1651년 김수항과 모친 안정 나씨[6]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7]김창집은 1648년생으로 3살 차이이고, 바로 아랫 동생인 김창흡은 1653년생이다. 출생 다음해 증조부 김상헌이 사망하였다. 1665년 연안 이씨 이단상의 딸과 혼인하였다. 1668년 조부 김광찬이 사망했다. 1669년 5월 진사시에 합격하였고[8], 9월 스승이자 장인인 이단상이 사망하였다.김창협의 제문

1670년 <성악논변>을 지어 순자의 학설에 대해 논하였다. 1671년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1675년 부친 김수항이 영암으로 유배되고 철원으로 옮겨가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는 것을 보고 과거 공부를 접고 은둔할 뜻을 품었다. 1677년 김창집, 김창즙과 전라도의 동복 적벽, 창평 물염정을 보고 왔다. 1678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김창흡, 김창즙과 독서하였다. 1679년 백부 김수증과 백운산 보문암을 유람했다.[9] 1680년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가을의 별시 초시 대책에서 수석을 하여 성균관에 입학한다. 1681년 우율[10]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고, 관학생 신분으로 운동을 주도하고 소를 작성하였다. 1682년 10월 아들 김숭겸이 태어났다. 11월 문과(文科) 증광시(增廣試)에서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683년 병조좌랑, 홍문간 부교리, 1684년 이조좌랑이 되었다.[11] 1686년 승정원 우부승지,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 예조 참의가 되었다. 1686년 외척들의 궁궐 출입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고, 그 문제를 제기한 이징명이 파직당한다.[12] 그에 영의정이던 김수항은 이징명을 옹호하였고, 당시 대사헌이던 김창협 또한 9월에 상소를 올려 궁인 장씨(훗날의 장희빈)에 대한 문제를 강경하게 지적한 바 있었다.실록 링크 숙종은 새겨듣겠다고 하였으나, 본심은 아니었던 듯 12월 장씨를 숙원에 봉한다. 이후 숙종의 김수항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 세간에서는 숙종의 김수항에 대한 악감정이 김창협 때문이라는 말도 세간에 떠돌았다한다.[13] 1687년 8월 사직하였다가, 11월 청풍 부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1688년 3월 김창흡과 단양을 유람하였고, 5월 둘째 아들 김청상(金淸祥)이 출생한다.[14] 권상하와 함께 송시열을 만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에 대해 논의하였다.

1688년 11월 장씨는 훗날의 경종을 출산하였고, 백일도 지나지 않아 1689년 숙종은 그를 원자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이 소를 올려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분노한 숙종은 송시열과 김수항을 유배 후 사사하였다. 김창협은 부친 유배 후 사직하고 진도로 내려가 모시고 있었으며 사사 과정을 지켜보고 장례를 맡았다. 김수항 사사 전 백운산에서 여생을 마치겠다고 고하고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송시열이 제주에서 붙잡혀 올라오는 중이었는데 부친의 묘비명을 그가 아니면 받을 곳이 없다고 여겨 행장을 급히 지어 사람을 보내 묘비명을 받아왔다.[15] 이후에는 부친의 유계를 받들어 학문에 집중하며[16] 조정의 부름[17]에도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18]

1692년부터는 자신의 '지각' 이론에 확신을 갖게되며 문인을 들이기 시작한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했을 때 숙종이 김창협을 호조참의로 임명하며 출사를 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19] 당시 소론으로 영의정이던 남구만에게 편지를 보내어 소론계의 장희재와 남인에 대한 온건한 태도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농암집 링크실록 링크

1695년 석실서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697년에는 윤증의 문인 민이승(閔以升, 1649 ~ 1698) 과 지각(知覺) 논쟁을 벌이고[20][21], 모친을 모시고 형의 강화 부임지에 다녀온다.

1698년(숙종 24년) 정권을 잡고 있는 소론에서 영수인 우의정이던 최석정을 필두로 남인 등용의 이야기가 나오자,[22]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며 최석정이 편찬해서 보내준 '예서(禮書)'를 교정하고 있던 것을 함께 돌려 보냈다.링크 동생 김창흡은 더욱 강한 어조의 편지를 최석정에게 보내고 절교를 선언한다. 김창협은 5살 아래의 최석정과 본디 친밀한 사이였다. 1678년(숙종 4년)에 최석정이 교리일 때 김수항을 옹호하다가 삭탈되었던 적 도 있고, 1685년(숙종 11년)에는 김수항이 최석정을 문학과 경술이 뛰어나다며 천거하기도 했다. 1686년 최석정이 진주 부사(陳奏副使)로 연경에 갈 때 송별시를 다섯 수 지어주었던 적도 있고,링크 1692년에는 최석정의 아들인 최창대에게 시와 공부에 대한 권면의 편지도 보낸 바 있다.링크

1699년 동생 김창즙과 송도, 천마산 유람을 하고, 형과는 보문암을 유람한다. 1700년 7월 셋째 딸 김운이 사망하였고, 10월 외아들 김숭겸이 사망하여 심리적 방황을 하며 이후 시를 쓰지 않았다.[23] 1701년 1월 몸도 좋지 않아 의원을 대고 약을 쓰기 좋은 한양 근처의 동생 김창업의 동장에서 머무른다. '사단칠정설'을 짓고[24]링크, 1703년 모친상이 있었고, 김창흡과 함께 박세당의 '사변록'을 비판한다.[25]링크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어 관작 삭탈 및 유배되며, 농연의 재야 영향력을 보인다.

1705년 이희조와 지각 논쟁을 벌인다. 1706년 석실 인근의 묘적산[26]을 둘러보며 정사(精舍)를 짓고 싶은 바람을 드러낸다.[27] 김창집과 서신을 교환하며 조정 사안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였다.서신 링크

1707년 이희조와 수락산, 옥류동을 유람했다. 1708년 형제들과 삼주(三洲)[28]에서 뱃놀이도 하고, 김창집과는 묘적산을 유람하였다. 삼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본인도 아내도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음을 이야기하였다.링크 그리고 그 해 4월 삼주에서 사망하였다.[29] 묘표와 묘지명 모두 삼연이 작성하였다.링크 부인 연안 이씨는 김창협과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사후에 문집인 농암집(農巖集)이 여러차례 간행되었다. 초판은 문인인 김시좌와 어유봉이 글을 수습하고 편정하였으며, 김창흡이 서문을 작성하였다.김창흡의 서문 농암집은 전체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며, 김창흡, 김창즙, 권상하, 어유봉 등 여러 문인들의 제문도 별집에 포함되어 있다.

극찬의 내용이 들어 있는 실록의 졸기는 다음 참조.[30][31] 농암집에 실린 그의 연보. 김원행이 훗날 작성하였다.링크

3. 학문

3.1. 사단칠정과 성악론

김창협은 학문적으로는 이이의 설을 따르되, 이황과 이이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은 선(善)뿐이고 칠정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다.”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다.”라고 하여 이이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였다.

김창협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 된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김창협은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악론에 대해 김창협은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3.2. 지각론

그의 지각론은 첫째, 성(性)은 성즉리(性卽理)의 입장에서 파악해야 하고 지(智) 또는 리(理)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 둘째, 지는 분별의 리로 해석하는 것이 옳고, ‘밝게 비춘다’라는 구절의 해석에서 기미와 색상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점, 셋째, 지(智)는 사물의 시비득실(是非得失)의 차별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 등이 강조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사물을 접하게 마련이고, 심(心)의 지각은 이를 감각 기관을 통하여 받으며, 지각을 통해 받아들인 것은 인의예지신의 성에 의해 정해지고,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며, 지는 인간의 내부에서 구체적인 정(情)의 작용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을 주체이고 능동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 부각시키는 사상적 근거가 된다.

송시열은 지각은 기가 발현된 것이지만 거기에는 리가 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지각은 지(智)의 용(用)이다고 하여 지각은 기이다와 지각은 지(智)의 용(用)이다를 동시에 주장했다. 김창협은 이 두 명제를 모순으로 보고, 1689년 송시열의 지각론을 비판하며, 지각은 지(智)의 용(用)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훗날 이희조는 이에 대해, 미발의 마음에는 항상 리가 타고 있고, 그 미발의 마음이 발현되어 이발의 지각 곧 정(情)이 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미발에서는 마음과 성이 분리될 수 없고 이발에서는 정이 곧 마음이기 때문에 성ㆍ정과 구별되는 마음의 영역을 따로 설정할 수가 없다. 김창협의 경우, 성ㆍ정과 구별되는 마음의 영역을 따로 설정함으로써 주희의 심통성정 구도를 확보하지만, 그 대신 지각은 지(智)의 용(用)일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주희 철학의 다른 측면을 과감히 폐기한다. 이러한 차이가 호락논쟁의 기저에 놓이게 된다.

김창협 철학은 지각은 본성의 용(用)이 아니다, 본성은 지각의 준칙이다, 이 두 마디로 압축된다. 이 두 명제는 기존 성리학의 모든 수양이론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발언이지만, 그가 직접 겨냥한 것은 송시열의 기질변화론이었다. 여기에는 김수항과 송시열 사후, 노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3.3. 인물성동론

한편 박세당의 도론을 비판하는 와중에 그의 인물성동론이 형성된다. 박세당이 말하는 마음의 밝음은 정신 능력을 가리킨다. 사람과 동물은 우선 사유능력에서부터 현저한 차이가 있으므로, 정신 능력을 사람의 본성으로 본다면 사람과 동물은 본성이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박세당의 인물성이론이다. 김창협은 도(道)를 착오 없이 결과에 이르게 해주는 준칙으로 해석하고 박세당의 견해를 반박한다. 김창협에 따르면 사유판단은 지각일 뿐이고 사유판단의 준칙이 본성이기 때문에 사유능력에 상관없이 그 준칙은 동일한 것이므로 인성과 물성은 같다고 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인물성동론이다. 한편 한원진과 권상하 등은 인간의 본질을 본능적인 욕구로 본다. 이 점에서 사람과 동물은 차이가 없지만 사람은 기질이 맑아서 예(禮)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은 기질지성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이 호론의 인물성이론이다. 이는 호락논쟁의 핵심을 이루었다.

4. 평가

안동 김씨의 일원으로 율곡의 제자 라인인 서인-노론의 계보를 정통으로 잇고 있으며, 학문적으로는 율곡의 이론을 기반으로 퇴계의 설도 절충하였다고 평가되어 왔으나 최근 들어서는 다른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퇴계와 율곡에 의한 조선 성리학의 정립 후 그 심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여러 논쟁들; 지각(知覺) 논쟁[32], 김창흡과 함께한 박세당의 사변록 비판, 호락 논쟁[33]과 인물성동이 논쟁[34] 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지식 논쟁과 이론 작업으로 소론에 맞서면서도 호론 계열과는 다른 방향 (주자학, 율곡학의 입장을 계승하되 퇴계학의 문제의식을 수용함)으로 진행함으로써 유연감과 포용성을 동시에 이룰 수 있었다.[35]. 김창협은 낙론의 보스라고 할 수 있으며, 낙론 학자들에게는 이이 다음의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호락논쟁은 노론 내에서 이루어졌고 호는 충청지방 곧 송시열의 문인들(권상하와 그의 제자인 한원진 등), 락은 경기지방인 김창협, 김창흡과 그 문인들이 해당한다.[36] 농연의 학문은 김상헌에서 출발한 가학에 기초해 송시열의 의리 정신, 이단상의 역학 정신, 조성기의 경세 정신, 이세구의 심학 정신을 발전적으로 수용하여 절충과 자득을 거쳐 형성되었고, 후기로는 북학파로 이어져 홍대용, 박지원에게 까지 이르게 된다.[37]

매우 정교한 사유와 치밀한 논리, 섬세한 언어 구사를 통해 주자학을 한단계 더 심화시켰다고 평가된다. '농암잡지(農巖雜識)'는 독서 단상의 형태이나 전문적인 학술 논변으로 이루어진 학술 담론이자 문학 비평을 담고 있다. 또한 본인이 송시열 사후 교정한 '주자대전차의'에 대한 질문과 자신의 견해를 담은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은 조선 주자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이는 명저이다. 조선을 넘어 18세기 초 동아시아의 지적 수준이 닿을 수 있는 정점이라는 극찬도 받는다.[38]

문장은 구양수, 시는 두보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다. 상대적으로 김창협은 문장에 집중하였고, 김창흡은 시에 더 집중한 경향이 있다. 후대의 문인 홍직필(洪直弼, 1776 ~ 1852)[39]은 우리나라 8대 문장가로 이색, 김종직, 최립, 장유, 이식, 김석주, 김창협, 김창흡을 뽑았고 2명을 더 넣는다면 이정구, 신흠을 더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탁월한 비평가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학사의 흐름을 형성하는데 일조하였다. 그의 고문비평의 결정판은 '잡지(雜識)'이다. 참고로 김창협 비평의 영향으로 조선 중기 한문학 4대가로 월상계택으로 병칭하여 후대에서 여기게 되었다.

김창흡과 석실서원에서 강학을 하였고, 동생 김창즙, 문인 어유봉, 박필주, 이희조, 이재형, 민우수, 신무일 등이 그의 철학을 계승하였다. 이현익(李顯益, 1678 ~ 1717)도 김창협의 문인인데 호론에 동조한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바 있다.[40] 또한 사위들의(5녀가 각각 서종유, 이태진, 오진주(吳晋周)[41], 박사한, 유수기에게 출가함) 후손들이 이들과 사제를 맺으며 학파가 이어졌다. 당대에도 동생 김창흡과 함께 재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이들이 직접적으로 의도한 바는 아닐 것이나 낙론계의 종장으로서 농연 형제는 추후 안동 김씨의 영향력 확대에 기여 아닌 기여를 하게 된다.[42][43] 김창협의 문학을 계승한 제자는 이의현(李宜顯, 1669 ~ 1745)으로 당송고문(唐宋古文) 운동을 계승하였다. 이의현은 영조 시기 탕평 정국에서 청론(淸論)을 주도한 인사이기도 하다.

5. 여담

1691년에 남긴 '凜巖尋瀑記' 라는 글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다. '보지 못한 폭포'로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글에 등장하는 자익(子益)과 대유(大有)는 동생 김창흡과 김창업이다.링크 배경이 되는 풍패동은 현재의 강원특별자치도 통천군 학일면 풍패리 일대이다.[44]

김창협의 호 농암(農巖)의 위치를 추정한 논문이 있다.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화동로2130번길 18 남쪽에 있는 바위이며 지역 사람들은 농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김창협은 연못을 가꾸어 정원을 만들고 정당을 관백실, 자신의 집은 농암수옥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현재 장암5리 마을회관의 위치라고 한다. [45]

6. 가족관계

증조부는 김상헌, 조부는 김광찬, 부친은 김수항이다. 형은 김창집이며, 동생으로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이 있다. 2남 5녀를 두었으나 아들이 모두 일찍 사망하여 형 김창집의 손자 김원행을 입적시켜 가계를 이었다. 조선흥선대원군 시기의 정승인 김병학, 김병국의 6대조이다.

오진주에게 출가했던 셋째 딸 김운(金雲, 1679 ~ 1700)을 특히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 사사 후 은거하던 김창협에게 유일한 즐거움을 주었던 딸이다. 당시 10대 초반의 김운은 영민하여 김창협에게 글을 배우고 말벗의 역할을 해주었다. 큰 할아버지인 김수증과 작은 아버지 김창흡도 김운을 아껴 여자 선비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출산 후 젖병으로 22세에 사망하였다. 김창협이 일가의 일찍 죽은 여성을 위해 묘문을 지었는데, 김운이 당시 그 글을 보고 '이 사람은 그래도 우리 아버지의 문장을 얻어 그 이름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죽음이 불행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김창협은 그 말을 기억하고 비통한 기록을 남겼다.[46]묘지명 링크 오진주와 김운의 아들은 월곡(月谷) 오원(吳瑗, 1700 ~ 1740)으로 백부 오태주(吳泰周, 1668 - 1716)[47]의 아들로 출계되었다. 29세에 문과 장원 급제 후 대사간, 대사성, 승지 및 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공조판서 재임 중 갑자기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오원의 아들 오재순(吳載純, 1727 ~ 1792)은 음보로 관직에 나갔다가 1755년 명안공주의 손자여서 특별히 6품으로 승진했다. 이후 1772년 문과 급제하였고 대사헌,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호는 순암(醇庵), 우불급재(愚不及齋)인데 뒤의 호는 영조가 직접 내려준 것이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 이단상의 둘째 형 이가상은 김창협의 모친의 고모와 혼인하였다. 엄마의 고모가 스승의 형수인 셈. 동생 김창흡이단상의 제자이다.[2] <농암속집>의 발문에서 김수근은 김창협의 학문 연원을 가학, 곧 부친 김수항에게 두고 있다. 그런데 김수항김상헌에게서 배웠고 김상헌은 월정 윤근수에게서 배웠으니, 결국 김창협의 학문의 연원은 율곡 이이가 아닌 월정학파에게서 이어지는 셈이다. 흔히 김창협은 송시열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며, 부친 김수항도 마찬가지로 송시열의 제자가 아니다. 협력하고 존중하는 사이임에는 분명하나, 의발을 전수받은 수제자 권상하 같이 송시열을 추종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송시열은 김창협을 대할 때 취할 견해가 많은 후배 학자로 인정하였고, 김창협은 송시열을 존중했으나 이견을 제시한 글도 적지 않다. 이들의 행동은 스승 제자가 아니라고 보고 해석해야한다. - 참고: 송혁기, 上疏를 통해 본 조선후기 지식인의 재편[3] 김창협의 이기심성론은 송시열이 충실히 계승한 율곡 이이의 그것과도 차이가 있다. 김창협이 스스로 문인임을 밝힌 것은 이단상이 유일하다.[48] 송시열이 김창협에게 '주자대전차의'의 교정을 부탁한 사실에서 사제지간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농암집의 내용은 암암리에 '당신들의 스승인 송시열이 허락한 것이니 당신들이 교정 내용에 대해 불만을 가질 일이 아니다'는 의미로 서술한 것이다. 송시열과 김창협의 관계는 김수항송시열의 정치적 협력관계에 따른 존중일 뿐이다. 또한 농암집의 다른 곳에서도 사제지간이 아님이 확인된다. ≪農巖集ㆍ與愼無逸≫(卷20, 1703), 24右面, “尤翁, 吾所尊也。雖未嘗受業爲師弟子, 而出入門下數十年, 情義篤矣.”; “尤翁(송시열)은 내가 존경하는 분이니 비록 수업을 받아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된 적은 없지만 그분의 문하에 출입한 지 수십 년이 되어 정의가 돈독하다" - 출처: 이종호, 17~18세기 기유문예의 두 양상-농연그룹의 문예활동을 중심으로-, 2010[4] 김창협, 김창흡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 대해서도 송시열의 학설과 사업만을 충실히 따르는 경향을 보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권상하 실록 졸기 링크[5]김창집은 함께 사직하였으나 추후 조정에 복귀하여 노론의 영수로 활동하게 된다. 1722년 김창집경종에게 사사당하는데, 그때는 이미 김창협이 사망한 후였다.[6] 훗날 발생하는 회니시비-서인노론-소론 분열에서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나양좌가 김창협의 외삼촌이다. 나양좌는 윤선거의 제자이다. 김창협의 외가는 소론의 중심이 된다. 김창협은 부친과 송시열 사이의 관계로 송시열의 편에 선다. 나양좌와 대립했던 인물은 송시열의 제자 이희조이며, 그는 이단상의 아들로 김창협의 숙부 김수흥의 사위이자 김창협의 손아래처남이다.[7] 경기도 과천의 외가에서 출생.[8] 형 김창집과 동생 김창흡은 1673년 같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김창흡 3위, 김창집 6위).[9] 1674년 2차 예송논쟁 이후인 남인 집권기부터 1680년 서인 재집권기까지 김창협은 과거 준비를 접고 공부에 전념하여 학문의 기초를 다진다.[10] '우'계 성혼, '율'곡 이이[11] 김창집은 이해에 문과 합격 후 예조좌랑이 되었다.[12] 이징명은 이단상의 제자로 김창협과 동문수학한 사이이다[13] 실록에 실린 김만중의 말이다. '요사이 전하께서 김수항(金壽恒)과 이단하(李端夏)에 대한 대우가 그전보다 크게 달라지셨는데, 김수항에 대해서는 외부(外部) 사람들 모두의 말이 ‘김창협의 상소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어찌 전하께서 그의 아들이 한 일 때문에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를 하시겠습니까? 이는 김수항의 죄명(罪名)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가지는 말이 외간(外間)에 마구 퍼지게 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실록 링크[14] 다음 해에 사망.[15] 조선의 문인들은 문집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김수항은 사사 받는 당일까지 김창협과 문집에 대한 논의를 했다. 김창협이 문집 교정, 정리를 하고 김창집이 추후 강화유수일 때 '문곡집'이 간행된다.[16] 농암을 가장 잘 아는 동생 김창흡은 <<농암집서문>>에서 1669년 문장 - 1674년 경전의 훈고 - 1680년 정계진출 - 1689년 성리학으로 관심이 옮겨갔다고 기술하였다.[17] 참판, 판서,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등에 제수되었다.[18] 형 김창집은 1694년 환국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19] 이후 대제학, 예조판서까지 제수받았고, 출사해 있던 형 김창집을 숙종이 직접 어전으로 불러 김창협을 설득해 나오라고 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처음의 뜻을 유지하고 처벌도 감수하자 숙종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김창집에게 보낸 편지[20] 지각 논쟁은 이후 1706년 김창협 - 이희조 사이에도 이어지며, 문인인 김시좌와도 계속하게 되는 김창협 학문의 중요한 기점 중 하나이다.[21] 민이승 사후 김창협은 제자를 보내 조문하고 제문도 작성하였다.김창협의 제문[22] 특히 김수항 가문과의 악연이 있는 오시복, 이서우, 권유, 이봉징의 등용도 겹쳐 있었다.[23] 농암집 연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숭겸은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재주와 행실이 탁월하여 아는 이들이 모두 원대한 사업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였으며 선생도 부자간의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인정했다. 그런데 불행히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모두들 서로 고하며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였다. 숭겸은 또 시에 뛰어나 선생이 선창하면 번번이 화답시를 지어 올려 즐겁게 했었는데, 이때부터 선생은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는 시를 읊지 않았다.'[24] 율곡의 성리학에서 충분히 규명되지 않은 문제를 포착하여 이론적 보완을 추동했다고 한다. 그 결과 호학, 낙학 모두에 자극을 주어 기호학의 사상적 발전에 기여한다. 호론계와의 다른 견해로 충돌을 우려한 김창즙의 반대로 농암집에는 바로 실리지 못했다. 훗날 농암속집 하권에 실린다.[25] 김창흡이 주도하여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있었고, 숙종에게 사변록을 비판하라는 명을 받은 권상유는 '사변록변(思辨錄辨)'을 작성하고 김창협에게 검토를 요청한다. 농암은 박세당이 섣불리 주자의 설들을 비판하였다고 지적하며 '주자를 우롱하고 모욕한 것이 심하다' 또는 ''斯文'에 죄를 얻을 것이다.', '性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 참조: 김형찬, 安東 金門의 지식논쟁과 지식권력의 형성 -農巖 金昌協의 학문적 입장을 중심으로[26] 현재 지도에는 남양주 백봉산으로 표기되어 있음.[27] 제자 이운(李澐)이 묘적산 근처 문곡(文谷)의 담화헌(湛華軒)에 살았기에 그간 왕래도 있었다. 1706년 정사 터를 물색한 것에 대해 김창업과 대화한 기록이 있다.[28] = 石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 미금, 농암 외에 김창협이 쓴 다른 호이기도 하다.[29] 김창협이 말년을 보낸 묘적산은 그를 추종하는 후대 유학자들이 유람하는 코스가 되기도 한다.[30] 노론의 시각에서 쓰인 것은 감안해야 한다.[31]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 김창협(金昌協)이 졸(卒)하였다. 김창협의 자(字)는 중화(仲和)로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온수(溫粹)하고 청결하여 한 점(點)의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고, 문장(文章)은 농욱(醲郁)을 모방하여 육일거사(六一居士)의 정수(精髓)를 깊이 얻었다. 국조(國朝) 이래로 작자(作者)는 1, 2분에 불과(不過)했는데, 김창협이 정립(鼎立)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시(詩)도 역시 한(漢)·위(魏)를 출입하면서 소릉(少陵)177) 으로 보익(補翼)하였다. 고고(高古)178) 하고 아건(雅健)하여, 천박한 문장을 일삼지 않았는데, 조금 후에 이것은 우리 선비가 끝까지 할 사업은 되지 못한다고 여겨 마침내 육경(六經)에만 오로지 정진하여 염락 관민(濂洛關閩)의 학(學)에 미쳐서 침함(浸涵)하고 연이(演迤)하여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니, 견해(見解)가 정확(精確)하고 공부(工夫)가 독실(篤實)하여 요즘의 변통성이 없는 선비에 비길 수 없었다. 주자서(朱子書)에 공력(功力)을 씀이 더욱 깊어, 송시열(宋時烈)이 《주문차의(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다. 만년(晩年)에 의리(義理)가 꽉 막히고 사문(斯文)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때를 당하매, 명의(名義)를 표정(表正)하고 사피(邪詖)함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세도(世道)가 힘입어서 유지(維持)되어 울연(蔚然)히 유림(儒林)의 으뜸이 되었다. 종학(從學)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훈회(訓誨)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후생(後生) 가운데 문사(文詞)를 바로잡을 자가 있으면 문득 이끌어서 학문(學問)에 나아가게 하였다. 젊어서 괴과(魁科)에 올라, 명망이 한 시대를 굽어보았다. 법연(法筵)에 진강(進講)하니, 순부(淳夫)처럼 삼매(三昧)의 경지에 있다는 성예(聲譽)가 있었다. 더욱 군덕(君德)의 궐유(闕遺)에 권권(眷眷)하고, 일을 만나면 규절(規切)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피(避)하지 않았다. 기사년의 화(禍)를 만나자, 다시는 당세(當世)에 뜻을 두지 않았고, 경화(更化)한 뒤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궁산(窮山)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지취(志趣)가 다른 자라도 또한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그의 자품(資稟)의 순수함과 문장(文章)의 높음과 학술(學術)의 심오함을 논(論)하면, 모두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홍유(鴻儒)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8세이었다. 태학생(太學生)들이 관(館)을 비우고 와서 전(奠)을 올렸고, 학자(學者)들이 그를 ‘농암 선생(農巖先生)’이라고 일컬었다. 문집(文集) 34권(卷)이 있어 세상에 행하여졌으며,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링크[32] 민이승과의 지각 논변에서 김창협의 입장은 농암집 14권 전체에 들어있는 민이승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김창즙도 일부 김창협을 도와 참여한 것이 보인다.농암집 링크[33] 본격적인 논쟁은 농암 사후에 일어난다.[34] 이 논쟁은 김창협 사후에 농연 문하의 문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김창흡은 김창협이 인물성동론을 주장했다고 하며 낙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35] 김형찬, 안동 김문의 지식논쟁과 지식권력의 형성 -농암 김창협의 학문적 입장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56권0호, 2012 참조[36] 낙학은 도암 이재, 그의 제자인 양손자 미호 김원행(김창집의 손자이나 농암의 아들 김숭겸의 양자로 입적.), 그의 문도인 황윤석, 박윤원, 오윤상을 거쳐 홍직필, 오희상, 그리고 김창흡의 현손 김매순으로 계승된다. 이재는 농연의 직계 제자는 아니며, 호락논쟁에서의 중요한 쟁점에서 농암과 조금의 차이가 있다. 김원행에 이르러 농암은 낙론의 종장으로 확실한 자리를 잡게 된다. - 배제성, 농암 김창협의 「사단칠정설」 연구­ 기호학내에서의 사상사적 의미와 호락논변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 2019 참조[37] 이종호, 17~18세기 기유문예의 두 양상-농연그룹의 문예활동을 중심으로-, 2010[38] 한국고전번역원, '농암집' 참고[39] 호는 매산(梅山)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인 문신, 유학자, 문인이다.[40] 김창흡, 박필주, 어유봉과 논쟁하였고, 낙론 학풍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조성기와 이단상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을 표했다. 한때 권상하 문하에서 수학한 바도 있다.[41]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 1624 ~ 1689)의 아들. 오두인은 인현왕후가 폐서인될 때 박태보와 함께 반대하다가 숙종에게 국문을 받고 사망하였다.[42] 당대에도 후대에도 영향력이 엄청나 후예들이 농연 형제의 독특한 걸음걸이를 흉내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43] 본 문서의 많은 부분은 이 논문을 근거로 한다.[44] 금봉강역 바로 강 건너 있으며, 현재의 북한 강원도 통천군 풍산리 일대이다.[45] 참조: 김세호, 조선 후기 장동김문의 백운산 별서 경영과 그 의미[46] ' 아, 그것이 정말 참언(讖言)이었단 말인가. 이제 너는 과연 소원을 이루었느냐?'[47] 명안공주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