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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7 23:15:05

윤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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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윤근수(尹根壽)
자고(子固)
월정(月汀), 외암(畏菴)
시호 문정(文貞)
본관 해평 윤씨
출생 1537년
사망 1616년
1. 개요2.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윤근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화가이며, 서인의 일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자고, 호는 월정•외암, 시호는 문정이다. 김식의 아들이자 김육의 조상인 김덕수에게서 학문을 사사했으며 이후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영의정 윤두수의 동생이다.

조선 중기의 정치인이자 문인 김상헌과 대동법 추진으로 유명한 김육, 월상계택의 일원으로 유명한 월사 이정구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의 학맥은 김종직으로부터 유래되어 김종직-김식-김덕수를 거쳐 경세론의 측면에서 경학 대신 시문을 중시했던 시장파로 이어지며, 이후 한당과 넓게 보아 노론 시파로 이어진다. 그의 제자인 김상헌, 김상용 형제나 정홍명, 장유, 조익, 김육 등 역시 경학이나 성리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조익은 양명학을 연구하기까지 했다. 다만 윤근수 본인은 퇴계 이황에게서 사사한 것의 영향으로 양명학 등에는 부정적이었다. 또 당송시대가 아닌 진한시대의 고문을 중시하여 진한고문론을 내세웠으며, 현실적 차원에서 경세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학문은 월정학파라고 불리며 17세기 서인 관료집단의 학문적 중추를 형성한다. 즉 여러모로 당대 경기지방의 학문적 풍토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의 학파는 후일 대동법 실시 등 조선 중기의 경세론적 개혁을 이끌었고, 한편으로는 명에 대한 의리를 중요시했다는 특징이 있다. 김상헌의 경우 대동법의 즉각 실시에는 부정적이었지만 대동법의 필요성을 아예 부정한 것은 아니다. 조익의 제자인 장유의 경우 최명길에 동조해 강화를 주장했으나 한펀으로는 중국에 끌려갔다 온 며느리의 이혼을 청하는 등의 면모를 보였다. 산당과는 달리 철저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건설에는 무관심했지만 의리와 예의 강조라는 측면에서는 비슷했으며 산당보다는 경세론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학문적으로는 중국에 갔을 때 양명학자 육광조와 양지와 지각에 대해 벌인 주육논쟁이 유명하다. 시문에 있어서는 이몽양과 왕세정 등 당대 명나라의 전후칠자라고 불린 복고주의 시풍을 조선에 소개해 유행을 이끌었다. 18세기 이후 복고주의 기풍에 비판이 가해졌지만 윤근수는 그래도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는 것이 특이점이라면 특이점.

2. 대중 매체에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원발이 윤근수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