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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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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정보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자연과학캠퍼스
대학 정보
성균관 역사 학부 대학원
학사제도 기숙사 입시 역대 총장 및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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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창원병원 삼성서울병원 강북삼성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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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文廟와 成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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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성균관
면적 40,089㎡
지정연도 1964년 11월 10일
제작시기 조선 태조 7년(1399)
위치
}}}}}}}}} ||
파일:attachment/SungkyunkwanLogomark.jpg
成均館
Seonggyungwan[1], Sungkyunkwan[2]
파일:성균관_명륜당.jpg
성균관 명륜당
파일:attachment/Sungkyunkwanmap.jpg
건물 배치도

1. 개요2. 역사3. 부속건물4. 위패 배치도
4.1. 현재의 배치4.2. 조선에서 모셔졌지만 해방 후 출향4.3. 조선시대에 출향
5. 직제
5.1. 고려, 조선 초 성균관의 직제5.2.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성균관 직제
6. 입학자격7. 석전대제8. 반촌(泮村)9. 유소(儒疏)10. 개성 성균관11. 기타12. 유사기구
12.1. 한국
12.1.1. 국립12.1.2. 사립
12.2. 외국
13. 사적 제143호14.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attachment/Sunggyungwanpicture.jpg
대성전에서 명륜당 구역을 바라본 전경

성균관 홈페이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명륜3가)에 위치한 조선의 고등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이다.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이 모셔진 유교의 사당인 문묘도 함께 있다. 면적은 81,673㎡. 태학(太學), 문묘(文廟), 반궁(泮宮)[3] , 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1964년 11월 10일 사적 제143호로 지정[4]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Seoul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Confucian Academy)'이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매년 봄과 가을마다 유교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가 거행됨에 따라 한국에서 유일하게 팔일무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에 비견되는 문묘제례악이 정기 연주되는 장소이며, 이것은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문화대혁명으로 실전되었던 공묘의 제공대전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은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는 그마저 폐교당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5]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6] 같은 해 11월 김창숙이 전국유림대회를 열어 전국에서 천여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으며, 김구가 위원장을 이승만이 고문을 역임했다.[7] 이 자리에서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모았으며 학봉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였다. 이후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고, 김창숙이 성균관대 초대 총장 및 성균관장으로 취임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63년 사학법 시행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8] 성균관대는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재단 이사장을 맡아 대학을 지원했고, 1979~1991년 봉명재단 시절을 거쳤다. 이후 1996년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에 참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9]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 문화 전문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성균관은 성균관대 학생들에게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장소이기도 한데, 고즈넉한 학내 분위기를 조성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캠퍼스 확장에 장애가 되는 곳이기도 하며, 호주제 폐지 운동에 앞장선 김주수 교수를 학내에서 몰아낸 데 성균관 유림들이 큰 역할을 해서 좋은 의미로만 볼 수는 없는 곳이기도 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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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22222> 고려 시대 <colbgcolor=#cdfbb5,#1c4a04> 986년 태학 설립(성종)
992년 국자감으로 확장(성종)
1275년 국학으로 격하(충렬왕)
1298년 성균감으로 개칭(충렬왕)
1308년 성균관으로 격상(충선왕)
1356년 국자감으로 격상(공민왕)
1362년 성균관으로 개칭(공민왕)
조선 시대 1398년 한양으로 이전(태조)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선조)
1606년 종전 이후 중건(선조)
1887년 성균관의 교육 기능이 경학원으로 분리(고종)
1894년 경학원 폐지(고종)
일제강점기 1911년 남아있던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개칭
1930년 경학원 부설 명륜학원 설립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확장
1944년 명륜연성소로 개편
미군정기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환원
1946년 성균관대학 발족(김창숙)
대한민국 1953년 성균관과 성균관대학 통합
1963년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교육 기관으로 독립

3. 부속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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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패 배치도

4.1. 현재의 배치

    大 대
成 성
至 지
聖 성
文 문
宣 선
王 왕

孔 공
夫 부
子 자
   
      
<colbgcolor=#cdfbb5,#1c4a04> 文昌侯 崔致遠
문창후 최치원
鄆公 冉耕
운공 염경
   費公 閔損
비공 민손
<colbgcolor=#cdfbb5,#1c4a04> 弘儒侯 薛聰
홍유후 설총
文忠公 鄭夢周
문충공 정몽주
齊公 宰予
제공 재여
<colbgcolor=#fbc4c4,#3b0404> 郕 성
國 국
宗 종
聖 성
公 공

曾 증
子 자
<colbgcolor=#fbc4c4,#3b0404> 兗 연
國 국
復 복
聖 성
公 공

顔 안
子 자
薛公 冉雍
설공 염옹
文成公 安裕
문성공 안유
文獻公 鄭汝昌
문헌공 정여창
徐公 冉求
서공 염구
黎公 端木賜
여공 단목사
文敬公 金宏弼
문경공 김굉필
文元公 李彦迪
문원공 이언적
吳公 言偃
오공 언언
衛公 仲由
위공 중유
文正公 趙光祖
문정공 조광조
文正公 金麟厚
문정공 김인후
潁川侯 顓孫師
영천후 전손사[10]
  魏公 卜商
위공 복상
文純公 李滉
문순공 이황
文簡公 成渾
문간공 성혼
  鄒 추
國 국
亞 아
聖 성
公 공

孟 맹
子 자
  沂 기
國 국
述 술
聖 성
公 공

子 자
思 사
子 자
  文成公 李珥
문성공 이이
文烈公 趙憲
문열공 조헌
<colbgcolor=#bfff9e> 豫國公 程顥
예국공 정호
 <colbgcolor=#bfff9e> 道國公 周惇頤
도국공 주돈이
文元公 金長生
문원공 김장생
文正公 宋時烈
문정공 송시열
新安伯 邵雍
신안백 소옹
  洛國公 程頤
낙국공 정이
文敬公 金集
문경공 김집
文純公 朴世采
문순공 박세채
徽國公 朱熹
휘국공 주희
  郿伯 張載
미백 장재
文正公 宋浚吉
문정공 송준길

현재의 위패는 조선시대의 배치를 따른 것은 아니다. 조선과 중국의 배치도 다른데 중국의 경우 조선의 인물을 빼고도 청나라 때 156명의 인물을 동서무에 모실 정도로 많은 인물을 모셨다. 조선에서는 사문난적으로 여겨지는 육구연이나 왕수인을 모시기도 하였고, 선조 때 명나라 사신의 보고에 따라 조선의 유학자들이 한탄을 하기도...
이와는 별도로 지방의 문묘에서는 고려의 최충과 최유선을 맘대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대 이후 도통이 확립되며 신라 설총, 최치원 고려 안향 정몽주로 전조(前朝)의 배향 대상자는 정리된다.
선조 때 한바탕 중국 역대 제현의 정리가 이루어져 대성전에는 5성과 공문십철, 송조육현이 모셔지고, 동서무에 중국 역대제현 94위와 동국 18현의 112위가 모셔진다.

4.2. 조선에서 모셔졌지만 해방 후 출향

해방 후 심산 김창숙선생이 성균관을 경학원에서 고쳐 다시 열면서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강조하여 동국 18현을 대성전으로 승향하고 동서무에 모셔진 94위의 중국 역대 제현의 위패는 매안하기로 한다. 그 외에 오성의 아버지를 모시는 별도의 사당인 계성사를 철거하는데, 계성사는 본래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이때 동서무에 있던 안자의 아버지 안무유, 증자의 아버지 증점, 공자의 아들이자 자사의 아버지인 공리의 위패를 옮겼다. 계성사가 철거되면서 결론적으로 총 95명의 위패가 출향되게 된다.
동서무에 모셔진 인물은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거론된 공자의 제자가 대부분이며 그 외에 송나라 성리학의 확립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준 인물들이 다수. 저평가된 한당 유학자들은 많이 없으며 구양수도 오르지 못했다.

4.3. 조선시대에 출향

선조 당시 명나라의 사신이 명나라의 문묘를 조사한 후 자체적인 판단에 의해 호안국 등을 새로 배향하는 대신 자격을 갖추지 않거나 중복되는 인물들을 가려내어 출향하였다. 특히 촉한정통론에 입각하여 위진의 유학자들을 거의 내쳤다. 또 순자인 순황을 오랫동안 모시다가 내친 것도 특징

실행된 것은 1682년(숙종 13년, 일본 연호는 덴나(天和) 2년)5월 21일에 시행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조 기사

치천후(淄川侯)[11] 신당(申黨, ? ~ ?): 문등후(文登侯)[12] 신정(申棖)과 동일인물

난릉백(蘭陵伯)[13] 순황(荀況): 법가에 오염
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 자로를 모함
사공(司空) 왕숙(王肅): 공자가어를 위조하고 정현을 모함
사도(司徒) 두예(杜預)
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
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
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
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
임천백(臨川伯) 오징(吳澄): 송의 신하로 원에 출사하여 절의를 꺾음

5. 직제

5.1. 고려, 조선 초 성균관의 직제

품계관직정원비고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정3품대사성(大司成)1명
종3품좨주(祭酒)[14]1명
정4품악정(樂正)[15]2명
종4품
정5품직강(直講)1명
종5품
정6품전부(典簿)[16]1명
종6품
정7품박사(博士)2명
종7품순유박사(諄諭博士)2인
정8품진덕박사(進德博士)2명
종8품
정9품학정(學正)2명
학록(學錄)2명
종9품직학(直學)2명
학유(學諭)4명
품계외서리(書吏)2명

5.2.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성균관 직제

품계관직정원비고
정1품
종1품
정2품지사(知事)1명겸관
종2품동지사(同知事)2명겸관
정3품대사성(大司成)1명
종3품사성((司成)2명
정4품사예(司藝)3명
종4품
정5품직강(直講)4명
종5품
정6품전적(典籍)13명
종6품
정7품박사(博士)3명
종7품
정8품학정(學正)3명
종8품
정9품학록(學錄)3명
종9품학유(學諭)3명
품계외서리(書吏)10명

6. 입학자격

국립대였던 만큼 성균관 유생은 특혜도 많았다. 우선 오늘날로 치면 등록금이니 하는 거 모두 없이[17] 성균관에서 수업받는 건 반촌에서 하숙생활 하지 않는 이상에야 모두 무료였고 성균관 유생만을 위한 과거 시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만큼 성균관 유생이 되는 조건은 아주 까다로워서 일단 성균관 유생이 되려면 적어도 소과 합격을 하거나 향교나 4부학당에서 최우수 학생으로 추천 받아야만 입학이 가능했다. 즉 진사나 생원은 달거나 소과 합격이 유력하다고 추천을 받아야 노려볼 수 있는 자리였다는 것. 여기에 저 특혜를 얻으려면 연간 300일의 출석을 달성해야 했다.[18] 여기에 툭하면 시험으로 매일 치는 시험 매달 치는 시험 등등 줄줄이 시험이었다.

7. 석전대제

매년 봄과 가을에 대성전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에 대한 제사가 거행되는데, 1953년부터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이를 거행하다가 다시 2007년부터는 공부자서거일(5월 11일)과 공부자탄강일(9월 28일)에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석전(釋尊), 석채(釋菜), 정제(丁祭),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1986년 11월 1일 중요 무형 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석전대제(Ritual for Confucius)'이다.

8. 반촌(泮村)

성균관 인근에는 성균관에서 일하는 사역인들이 모여 사는 반촌(泮村)이라는 동네가 있었다.[19] 이 사역인들 중에는 성균관에서 쓰는 고기들을 다루는 백정들도 많이 있었다. 최악의 천시를 받았던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이 반촌의 백정들은 성현들의 영혼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고기를 바친다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고, 성균관 출신의 고위층 인사들과도 학생시절부터 안면을 트고 지내며 생긴 연줄이 있어서 한성부 관리들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었다.[20] 이 때문에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로 바뀌었으며[21] 한성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상점과 물건들이 존재하며 성균관 유생들이 유흥을 즐기는 이색적인 번화가로 자리잡았다. 쉽게 말해서 조선 시대의 대학로신촌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반촌의 위치는 현대의 대학로와도 상당 부분 면적이 겹치는 편이다. 심지어 반촌민들의 말투도 서울 내 다른 지역 사람들과도 판이하게 달랐다.

반촌의 기원은 고려 말 안향이 개경 성균관에 기부한 노비들이라고 하며 조선 개창 후 태조가 성균관을 한양으로 이전[22]할 때 그들의 후예들도 한양으로 함께 이주하면서 반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23] 따라서 반촌 사람들은 자신을 안향의 노비들의 후예라고 믿었으며,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옛 주인의 후손이 오셨다'고 하면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9. 유소(儒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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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은 권위가 세서 세자가 나이가 차면 성균관 입학례를 하였다.[24] 이렇게 파워가 센 성균관 유생들은 학생운동처럼 정치적인 활동도 벌였는데 이때 '공관' 이라는 것은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끼쳤다. 대개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면 먼저 정책을 반대한다는 뜻의 집단 상소인 유소를 벌였고 그래도 안 되면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래도 안 먹혔을 때 쓰이던 최후의 스킬이 공관인데, 아예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 받기를 거부하는 일을 말한다. 단순히 수업 거부니 유생들 손해 아닌가 싶겠지만 실상은 공관쯤 되면 왕도 골치 아픈 상황에 이른다. 국가에서 직접 선발해 대우해주며 키우려는 인재들이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는 것도 거북할 일일 뿐더러 특히 수업일수 300일을 채워야 하는 사정 상 공관이 길어지면 그만큼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일수를 채우기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특별 시험을 못본다.

즉 나라에서 직접 선발하고 키운 인재들이 등용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이렇게 되면 여론도 슬슬 도대체 얼마나 잘못했길래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냐고 하고 대간에 대신들까지 유생들의 편을 들테니 난감한 건 당연, 여기에 지방에 있는 유생들까지 이에 자극받아 연명상소니 만인소니 올려댈 수준까지 가면 상소 폭탄까지 받아야 한다. 게다가 여러 안건들도 상당수는 성균관을 비롯한 많은 유생들이 올리고 이를 대간이 받아 주청하고 다시 대신이 받아 주청하는 방식이니 성균관 유생들은 언론의 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다.

10. 개성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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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두피디아.com/400_1199769201208611.jpg
북한 개성에도 성균관이 있다. 고려 시대의 국자감이 공민왕 때 성균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가 왕조가 바뀐 것이니 이쪽 성균관이 원조. 그러나 한양 천도 후 성균관도 한양으로 옮겨가면서 기존 성균관은 '성균관'이라는 이름만 유지했을 뿐 최고학부로서의 기능을 잃고 동네 향교로 격하되었다. 2013년에 성균관이 포함된 개성역사유적지구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1. 기타

12. 유사기구

12.1. 한국

12.1.1. 국립

12.1.2. 사립

12.2. 외국

13. 사적 제143호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문묘는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어졌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존경각과 향관청, 비천당, 계성사가 있으며, 남쪽 좌우에 유생들이 살면서 글을 읽던 동재와 서재가 남북 방향으로 길게 배치되 있다. 동재 동편에는 식당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창고, 육일각, 잡사가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제향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는 유교의 중심지로 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서울문묘일원(보물 및 현대건축물을 제외한 지상시설물 포함) → 서울 문묘와 성균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4. 관련 문서


[1]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의한 것으로 문화재로서의 로마자 명칭이다.[2] 유림 단체인 성균관유도회와 성균관대학교의 로마자 명칭이다.[3] 제후의 나라에 설치한 대학을 가리키는 말로 물이 그 주위를 반만 둘러싸고 있다 해서이다. 참고로 천자의 나라에 설치한 대학은 물이 그 주위를 벽옥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있어 영대(靈臺) 또는 벽옹(辟雍)이라 한다.[4] 다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과 삼문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 공간에 보물과 사적이 겹쳐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5] 군정법령 제6호 참조[6] 군정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에 효력을 생함[7] 출처: 자유신문 1945년 12월 10일자 "성균관대학 재단을 촉성, 1000여 대표 참가로 전국유림대회"(원본)[8] 1963년 12월 13일 기사 라이브러리[9] 한양원 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의 말에 따르면 60년대 당시 삼성은 전통을 가진 성균관대를 탐냈다고 한다. 하루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갑 사장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찾아와서는 봉투를 하나 건넸다. 심산은 비서인 윤종(윤봉길 의사의 아들)에게 ‘봉투에 뭐가 들었는지 보라’ 하더니 ‘5억원 수표가 들어 있다’고 하자 침을 뱉어 던지며, ‘이러면 내가 성균관대를 어서 가져가라고 내놓을 줄 알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기사 이 내용이 기사화되자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와 만났는데,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느냐’며 ‘제가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못한 일(성균관대 인수)을 해냈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2013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기사[10] 본래 공자가 언급한 사과십철四科十哲의 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홀로 후작이다.[11] 치천은 지금의 중국 산동성 수광시(山東省 壽光市)[12] 문등은 현재의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13] 난릉은 지금의 중국 산동성 린이시 창산현[14] 태종 1년(1401년) 사성(司成)으로 개정[15] 태종 1년(1401년) 사예(司藝)로 개정[16] 태종 1년(1401년) 주부(注簿)로 개정[17] 대신 속수례(束脩禮)라 해서 제자가 스승한테 배움을 받고자 하니 가르침을 달라는 의미에서 약소하게나마 물건을 줬다고 한다. 보통은 , 무명천, 술안주를 줬다고.[18] 현대 기준으로는 휴가 혹은 방학 없는 주 6일제에 가깝다. 상당히 빡빡한 수업일정인 셈. 출석은 매일 점심 급식(?)을 받은 기준으로 했는데 당연히 점심 급식만 받고 오후 수업을 째는 일이 빈번했고 나중에는 점심, 저녁 두 번으로 바뀌었다.자체 휴강은 옛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똑같다.[19] 유래는 고려 성균관에서부터인데, 18세기 서명응이 쓴 《안광수전》에 따르면 고려 말 안향(安珦)이 자기 집안의 노비 100여 명을 희사하여 성균관을 부흥하게 도운데서 비롯된다고 한다.[20] 렛츠고 시간탐험대 성균관 편에서는 반인(반촌 거주 노비)들이 끽소리도 못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딱히 틀린 고증은 아니다. 반인들이야 정부 고관대작들이나 성균관의 강사나 유생들의 빽으로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데, 그 빽 노릇해주는 사람들이 직접 갑질을 하고 있으니 뭐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이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라서, 잘못을 저지른 유생들을 선배 유생들이 벌할 때는 이들이 주로 나섰다. 렛츠고 시간탐헝대에서도 이 부분이 김동현니바와 함께(...) 아주 잘 고증이 되었다.[21] 이는 중세 유럽의 대학들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한 현상이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교황, 황제, 왕, 유력 제후 등이 아예 대학에 자치권을 주기도 했다.[22] 동시에 개경 성균관은 향교로 격하되었다.[23]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반촌 사람들이 개성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표현했다. 영묘조가 조선 건국 겨우 50여 년 즈음의 일이니 꽤나 적절한 고증.[24] 다르게 보면 그만큼 성균관이 국가적으로 띄워주는 기관이라는 말이 된다.[25] 이상설은 대사성을 지낸 후 탁지부(재무부) 사무관이 되는데, 즉 이 시기에 대사성은 사무관급의 위치로 내려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26] 문이 좁아 장비가 들어갈 수 없을 경우 흔히 쓰이는 방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