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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363호 | ||
남양주 광해군묘 南楊州 光海君墓 Tomb of King Gwanghaegun, Namyangj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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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
면적 | 59,168㎡ | |
지정연도 | 1991년 10월 25일 | |
제작시기 | 인조 21년(1643) | |
위치 |
[clearfix]
1. 소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묘[1]로 조선 제 15대 임금인 광해군과 정실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이다. 사적 제363호.어머니인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와 동복형인 임해군의 묘도 근처에 있다.
2. 상세
본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해 유배지를 전전하다 마지막에 제주도에서 사망한 후 그곳에 안장했으나, 유언으로 어머니인 공빈 김씨의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말을 한 관계로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2]더불어 난간석, 무인석, 동물상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옆에 같이 안장된 사람은 그의 왕비였던 문성군부인 류씨다. 다른 폐군(廢君)인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내[3]에 있는지라 상당히 찾기 쉬운 위치에 있는데 반해, 광해군의 묘는 찾아 들어가기가 복잡하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찾아갈 경우에는 금곡역에서 봉인사 방향으로 가는 남양주시 마을버스 64번을 타고, '공원묘원' 정류장에 내리면 된다. 여기서 좌측으로 갈라지는 곳에는 영락교회 공원묘원[4] 입구가 있는데, 이 안으로 들어가 길을 따라 약 700m를 올라가야 한다.[5] 공원묘원까지 다 올라가기 전 중간 지점에 길 우측으로 녹색 철망 담장이 이어지는데, 중간에 광해군묘 안내판과 문이 있다. 하지만 공개제한 구역이라는 안내와 함께 자물쇠로 잠겨 있다.[6] 광해군묘 안으로 들어가려면 인근의 사릉관리소에서 문화재청에 사전 신청을 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꼭 들어가지 않더라도 조금 더 공원묘원 쪽으로 올라가면 담장 너머로 광해군묘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광해군의 서녀[7]가 혼인했던 가문[8]에서 관리했으며, 현재는 사릉에서 관리한다. 폐위된 왕의 묘이기 때문에 연산군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빠져 있다.
2002년 11월 15일에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광해군 부부에게 각각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 (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과 소온사헌혜장왕후(昭溫思獻惠章王后)이라는 묘호 및 시호를 올려 추숭 복위하는 일이 있었을 때, 이 묘 역시 열릉(烈陵)이라는 능호가 올려졌지만, 말 그대로 가상 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라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3. 연계교통
- 철도: 경춘선 금곡역 하차 후 아래 버스노선으로 환승 ↓↓
- 버스: 남양주 버스 23, 남양주 버스 55번, 남양주 마을버스 64번 이용. 단, 64번은 배차간격이 길어 시간표 숙지가 필요한 노선이다.
참고로 목적지에 최대한 가깝게 가는 노선은 64번이며 23번, 55번 이용시 금곡역을 지나 사릉에서 하차 후[9][10]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4. 외부 링크
5. 사적 제363호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부인 류씨(1576~1623)의 묘이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적극적으로 왜군에 대항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 복구사업을 계획하고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다시 편찬하였으며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 당시 명나라와 후금(청)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펴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폐위되었다. 유배생활 18년 만에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성군부인은 류자신의 딸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비에서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 문성군부인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고, 1641년(인조 19)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문성군부인묘 서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소는 쌍분의 형태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광해군, 오른쪽(동쪽)이 문성군부인의 묘이다. 묘에는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묘표석 등을 세웠다.
※ 남양주 광해군묘는 사적지 원형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하여 비공개로 관리중입니다. 학술조사 등 목적으로 관람을 희망하실 경우에는 사전에 관리소(031-573-8124)에서 허가를 받은 후 출입 가능합니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적극적으로 왜군에 대항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 복구사업을 계획하고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다시 편찬하였으며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 당시 명나라와 후금(청)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펴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폐위되었다. 유배생활 18년 만에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성군부인은 류자신의 딸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비에서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 문성군부인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고, 1641년(인조 19)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문성군부인묘 서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소는 쌍분의 형태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광해군, 오른쪽(동쪽)이 문성군부인의 묘이다. 묘에는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묘표석 등을 세웠다.
※ 남양주 광해군묘는 사적지 원형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하여 비공개로 관리중입니다. 학술조사 등 목적으로 관람을 희망하실 경우에는 사전에 관리소(031-573-8124)에서 허가를 받은 후 출입 가능합니다.
광해군묘는 현재 문화재청령에 따라 관람금지가 되어있으며 관람을 원할 경우 문화재청이나 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에 문의하여 방문신청을 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단, 광해주숭모회에서 주관하는 광해군 제례식 행사 때는 일일 개방이 되기에 이 때에는 출입이 가능하다. 광해주숭모회는 민간 단체이므로 문화재청과는 관련이 없으며 광해군 제례 행사 때만 진행을 하기에 참고한다.
[1] 연산군묘처럼 폐위당한 임금이기 때문에 능(陵)이 아니라 묘(墓)이다. 당연히 묘역 관리는 다른 임금들의 능에 비해 조악한 편이다. 그의 시신은 왕자(대군)의 예로 안장되었기 때문에 그의 묘 규모는 초라하다.[2] 그래서 이 묘소 근처에 공빈 김씨가 묻힌 성묘(成墓)가 있으며, 성묘는 덕흥대원군의 묘처럼 릉이라는 말이 현재는 붙지 않지만, 과거 광해군 시절에는 광해군이 어머니 공빈 김씨를 추숭하여 성릉(成陵)이라는 엄연히 능호를 가지고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다시 능에서 묘로 격이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민간에서는 성릉, 성능이라고 불렸다. 묘가 위치한 송능리의 어원이 바로 '송정 + 성능'인 것.[3] 방학동 신동아아파트 3단지 옆에 있어 연계 교통편이 많다.[4] 바로 서울 중심부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인 영락교회가 맞다. 따라서 이 묘원에는 한경직 목사의 묘도 있다.[5] 참고로 광해군의 동복형인 임해군의 묘는 다음 정류장인 송능2리회관에서 평화교회 수양관 가는 길 중간에 보면 올라가는 샛길이 있다. 임해군묘는 도로에서 벗어나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올라가야 해서 더 가기가 힘들다.[6] 제한기간이 2013년 1월 1일부터 2023년 12월 31일까지로 되어 있으나, 이후에도 계속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7] 후궁 소의 윤씨에게서 난 옹주[8] 음성 박씨 문중의 박징원에게 하가(下嫁)해 2남 3녀를 낳았다고 한다.[9] 정확한 정류장 이름은 '세계유산 조선왕릉 사릉, 송능2리, 적성골입구'[10] 금곡동 구종점과 양병원 사이에 있는 정류장이 아닌 금곡역에서 사릉한신아파트로 가는 방향에 있는 정류장과 사릉역으로 가는 도로 중간에도 비슷한 이름의 정류장이 있다. 해당 정류장 이름은 왕릉 사릉 또는 사능리로 들어가는 길목이란 의미의 사능입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