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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광릉 南楊州 光陵 Gwangneung Royal Tomb, Namyangju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 (진접읍)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지정연도 | 1970년 5월 26일 |
관리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
|
남양주 광릉 안내도 |
1. 개요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세조와 정혜왕후의 왕릉 광릉 光陵 | |
| |
매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 |
조성형태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
매장자 | 언덕 좌: 세조 (1468년 10월 2일 사망) 언덕 우: 정희왕후 (1483년 5월 15일 사망) |
조성시기 | 1468년 10월 10일 |
홈페이지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광릉(敬陵) 전경 |
2. 역사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1915년 촬영된 광릉(敬陵)[1] |
이렇게 광릉은 평소 왕릉 조성 비용의 절반 남짓으로 묘역이 조성되었고 덕분에 왕릉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광릉은 조선 왕조는 물론 조선 장례 문화 변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후의 왕릉 조성에도 큰 모범이 되었다. 조선의 관혼상제 예법을 적시한 주자가례에도 장례 방식이 회곽묘로 되어있으나, 정작 회곽 묘의 원산인 중국에선 회곽묘가 흔하지 않다. 반면 조선은 사대부의 상당수가 회곽묘다. 1483년 그의 정실 정희왕후 윤씨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다. 원래는 정창손의 조부인 정흠지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시켰다.
원래 정해진 능호(陵號)는 지금의 이름인 광릉이 아닌, 태릉(泰陵)이었다.[3] 그러다 예종이 태릉을 제시했는데 신숙주가 재논의 과정에서 태릉은 암군이자 후대의 평가가 좋지 않은 당 현종의 능호와 똑같다는 이유로 반대해서, 결국 광릉(光陵)으로 정해진다.[4] 이 태릉(泰陵)이란 능호는 나중에 문정왕후의 능호가 된다.
3. 형식
하늘에서 바라본 광릉의 모습. 왼쪽이 세조릉, 오른쪽이 정희왕후릉. 하나의 정자각을 사이에 두고 완벽한 V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왕릉의 형식 중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효시이다.[5] 즉, 하나의 정자각을 가운데에 두고, 정자각 뒤편의 2개의 언덕에 각각 능을 구성하는 형식으로서 보통 정자각에서 바라보기에 좌측이 왕의 능이고, 오른쪽이 왕비의 무덤이다. 이 법도를 벗어난 무덤으로는 조선 왕조의 추존 왕인 덕종과 소혜왕후가 묻혀 있는 경릉(敬陵)이 있다.
4. 외부 링크
5. 같이보기
[1] 비각 앞(정자각 우측)에 수복방(왕릉을 지키는 수복이 지내던 곳)이 보이는데 이후 소실되어서 없는 채로 있다가 2017년에 복원하였다. 정자각 좌측에도 수라간이 있었는데 역시 소실되었다가 2017년에 복원하였다.[2] 三物. 석회와 황토, 가는 모래를 2 : 1 : 1로 섞은 것[3] 사실 경릉(景陵)·창릉(昌陵)·정릉(靖陵)이 능호 후보였어서 태릉 또한 후보에 없었다.[4] 정작 이 광릉이라는 능호를 공유하는 당 목종도 암군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5] 조선 제 5대 임금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혀 있는 현릉(顯陵) 역시 동원이강릉인데, 광릉은 정희왕후가 승하한 후인 1483년에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었고, 현릉은 처음에는 문종만 묻혀 있는 단릉이었다가 중종 대인 1512년에 현덕왕후를 같이 모심으로써 동원이강릉으로 조성이 되었다. 즉, 광릉이 현릉보다 조성된 시점이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