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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자 책봉 이전
광해군은 1575년(선조 8년)에 선조와 훗날 잠시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었던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태어났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는 슬하에 자녀를 낳지 못했고 생모 공빈 김씨가 일찍 죽어 의인왕후가 그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선조의 장남이자 광해군의 동복형으로는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많은데도 너무나 제멋대로에 포악하고 사람을 멋대로 죽이고 다니는 성격파탄자였기에 대중의 외면을 받았으며, 선조가 임진왜란 이전에 눈여겨 본 인빈 김씨 소생의 이복동생 의안군과 신성군은 모두 전란 이전이나 도중에 일찍 죽어서 경쟁상대가 사라졌다.여기에 건저(建儲)[1]에 관한 조정의 여론은 서인과 동인 할 거 없이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광해군이 우위적으로 대세였고, 임진왜란 시기 분조(分朝)활동을 거치며 권위가 아버지 선조를 위협할 정도로 강해져서 30살 넘게 차이나는 영창대군을 데리고 의도가 명백한 질투섞인 견제를 매번 받아야 했다.[2] 단, 선조의 정치적 견제는 광해군의 평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애초에 광해군은 종법상으로 따져봐도 영창대군보다 우월한 위치였다.[3] 선조의 이런 행보 때문에 광해군 본인이 심리상으로 불안한 마음을 받았을 수는 있을지언정, 정치권력적으로 광해군은 매우 견고한 위치였다. 영창대군은 광해군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수단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아버지 선조가 떨어진 권위로 어떻게든 왕노릇 계속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투쟁 수단이라고 봐야한다. 현실주의자였던 선조는 깊숙한 실제 속내로는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수 있을지언정 실제 세자를 바꾸려고 하진 않았고, 애초에 바꿀 힘도 없었다. 오히려 세자가 석고대죄 할 때마다 "세자의 지위를 흔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몇 번씩 했다.
그가 왕자였던 시절에 부왕의 물음에 영특하게 답한 야사가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루는 선조가 여러 왕자들을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으뜸인 반찬이 무엇이냐?"며 묻기를,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4]을 댔으나 유독 광해군만은 조미료인 "소금이라 답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광해군이 이르기를,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선조가 왕자들에게 "가장 아쉽게 여기는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다른 왕자들의 답변과 달리 광해군은 "생모가 일찍 죽은 것을 가장 아쉽게 여깁니다."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선조가 갖가지 선물을 준비해 왕자들에게 "가지고 싶은 물건을 가져가라."고 하자 다른 왕자들은 앞다투어 보물들을 가져갔는데, 광해군만 선비가 들고 다니는 붓과 먹을 가져가서 아버지 선조가 크게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2. 세자 시절
임진왜란 당시에는 위대한 전쟁 영웅으로서의 행보를 보여주었는데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도성이 위협받자 선조는 파천을 앞둔 1592년(선조 25년) 6월 8일에 광해군을 긴급히 왕세자로 임시 책봉하였으며 이로써 광해군은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세자가 되었다.[5] 이후 광해군은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 지휘를 맡기도 한다. 그러나 평양부가 왜군에 의해 점령되자 안주목으로 후퇴한 후, 영변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영변에서 다시 만나게 된 아버지 선조는 광해군에게 분조하여 맡긴게 아니라 조선 조정의 모든 실권을 책임 떠넘기듯 모두 넘겼다. 평안북도 영변대도호부에서 선조가 세자에게 조정을 맡긴다고 했는데 그 조정을 맡긴다는 것이 분조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너에게 다 주고 난 뒤에 요동으로 튀어가겠어!" 수준이었다.[6] 심지어 선조는 아예 아들 광해군에게 양위까지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대소 신료들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튈 생각만 하던 그 순간 18살의 광해군은 조정을 이끌고 곧바로 왜군이 포진해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원래 평안북도 강계군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남쪽으로 향하는데 그것도 강원도 이천군이라는 그 당시 전국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걸리면 무조건 죽거나 인질로 잡힐 수 있는 위험한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청년 시절의 광해군의 활약은 훗날 왕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의 호오와는 별개로 조선 왕조 역사상 외적과의 전면전에 세자가 직접 뛰어들어 전쟁터를 누빈 유일한 사례[7]로서 뭇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왕의 재목으로도 모두 인정하던 시기였다.선조는 국외로 망명할 생각으로 도주하려 하고[8] 순왜들이 왕자들을 왜군에게 넘기던 시절[9] 광해군은 유일하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책임있게 매우 성공적으로 임한 인물[10]로서 그의 활약에 따른 민심 수습과 사기 회복, 왕실 이미지 회복의 효과들은 매우 컸었다.[11] 그 때 광해군의 나이[12]나 상황[13]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로 책임 의식을 가지고 해낸 것이 놀라울 정도이며 괜히 신하들과 명나라가 선조를 끌어내리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던게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계속되면서 그 와중에 광해군이 엄청난 활약을 하고 명나라가 광해군을 새로운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선조는 아들 광해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큰 질투심에 사로잡혀 점점 더 아들 광해군에 대한 의심이 짙어졌다.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반란 사건으로 가뜩이나 의심이 더 많아진 선조는 큰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광해군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위를 되찾고 광해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였다. 다만, 견제하는 이상의 일은 벌이지 않았다. 애초에 대안으로 내세울 패가 아예 없었다. 나머지 아들들은 개념이 너무 없었고[14]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도 한참 나중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1600년(선조 33년) 광해군의 가장 큰 지원군이었던 의인왕후가 죽고, 선조는 김제남의 차녀를 새로이 계비로 맞아들이니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이다. 당시 선조는 51세, 인목왕후는 19세, 김제남은 41세, 명목상 인목왕후의 아들이 되는 광해군은 9살 많은 28세였다. 어린 인목왕후는 선조의 총애를 받아 곧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는데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그를 우대하였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던데(당시 만 1세)다가 광해군(당시 만 30세 이상)이 공이 크고 흠이 없었기 때문에 전례를 고려하면 별 문제가 아닌 명나라의 책봉 문제[15]를 끌어내 견제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류영경의 탁소북은 그런 선조에게 부화뇌동하여 광해군의 지위를 흔들려 했으나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고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세자라서 기반이 정말로 불안하지는 않았다.[16] 다만 궁궐 내에서는 왕이 10년만 더 살면 영창대군이 세자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았는지 중궁전 나인들이 동궁전 나인들을 핍박했다고도 하는 등, 여러모로 광해군이 하루하루 가시방석에 앉는 것처럼 더욱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으며[17] 실제로 광해군은 이후 왕이 되자 그간의 일을 들어 소성대비를 핍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선조가 더 오래 살았더라도 세자 교체는 당시 성리학적 질서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분조의 활약뿐만 아니라 광해군이 정비 의인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세자로 책봉된 이상 16세기부터 확립된 판례상 적자가 태어나더라도 먼저 입적된 양자의 파양은 불허하는 것이 당시의 통설이었으며 세자가 됨으로서 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와의 군신 관계가 성립되는데 영창대군은 태어나면서부터 신하의 지위로 자동적으로 확정되는 것이었고 한 번 세워진 군신 명분은 바꿀 수 없다는게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대의명분론에 근거한 성리학적 질서였기 때문이다.
3. 국왕 시절
3.1. 즉위 시절의 불안정
선조는 병상에 누워서까지 후계에 대한 확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승하가 임박해서야 "세자를 왕위에 앉히고 왕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탁소북의 영수이자 권신이었던 류영경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위해 이 교지를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왕위 계승을 교란시켰다. 이에 계비였던 인목왕후가 언문 교지를 통해 광해군의 후계를 인정하고서야 광해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18] 선조의 광해군 견제에 이용된 영창대군 문제는 광해군의 의심병과 얽혀 옥사와 정파간 균형파괴로 이어져버렸다. 기자헌과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 세력은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광해군의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증폭시키기 시작한다.기폭제가 된 것은 임해군을 시작으로 한 임해군 옥사와 봉산옥사, 계축옥사 등 거듭 발각되는 역모 모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은 대부분 과장, 허위성 고변에 불과했다.[19] 대표적인 게 봉산옥사. 광해군 역시 이를 알면서도 왕권 강화 및 확립을 위해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광해군은 조정과 재야, 당파를 막론하고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음에도 부왕 선조가 이몽학의 난 이후부터 보여준 극심한 노이로제 증상을 똑같이 겪었다. 그 결과 왕권을 위협할만한 징후가 보이면 주저없이 친국을 통해 이를 가차없이 제압해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기자헌과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에게 권력이 쏠리게 된다.[20]
선조의 사망에 허준과 광해군이 관여했다는 독살설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열거해보면, 우선 선조가 의외로 제법 건강한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사했으며, 당시에 어의였던 허준이 광해군의 비호로 인하여 그에게 내려졌던 형벌이 귀양에서 그쳤다는 점, 심지어는 북인의 신하들도 허준에게 더한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내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는 점, 이후 광해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는 점들이다.[21]
그러나 독살설과 관계없이 광해군이 허준에게 호의를 보일 만했던 점은 광해군이 왕자였을 때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와중에 자원하여 치료를 해주고 마침내 완쾌시킨 사람이 바로 허준이었다는 것이다. 허준은 그 공로로 당상관에 오른 적도 있었는데, 실록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 치료에 대한 포상이 너무 과하다고 신하들이 따지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왕이 죽었다고 무조건 어의들을 때려잡듯이 벌을 주고 귀양을 보낸 것은 절대 아니었다.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의 경우 거의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병사한 경우에도 형식적인 귀양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유배에도 급이 있어서(가령 자기 땅 많은 곳에 보낸다든지, 자원 부처라든지..), 누가 봐도 형식적인 귀양이라면 그냥 휴가보내듯 갔다가 돌아올수도 있다.[22]
따라서 음모론은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며, 오늘날 허준은 당대 조선의 민중을 구원한 위대한 의술가로 높이 평가된다. 게다가 이 음모론 자체도 인조반정 당시 소성대비의 주도로 광해군의 죄상에 포함시키려다가 바로 그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들이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여 빠진 부분이다. 말 그대로 "찹쌀 떡밥".[23] 애초에 이러한 독살설들은 대부분 심증에 지나지 않는다.
3.2. 붕당 간 균형의 무력화
위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광해군은 초기부터 선조와 인조의 실책에 버금가는 극심한 왕권 노이로제를 보여준다. 수많은 옥사들은 붕당간의 균형을 뒤흔들었고, 특히 기자헌과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이 역대 붕당 중에서 역대급으로 패악을 부리게 된다. 특히, 대신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대북파의 힘이 너무 커져 광해군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윤선도의 상소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여러 옥사들을 주도하며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대북은 이후 각종 국가 기관들과 심지어 과거 시험까지 조작해가면서 권력을 다지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서인과 남인 정계에서는 완전히 밀린 상황이고 그나마 같은 북인이면서 소북파인 박승종과 박홍구마저 손쓸 수 없는 정도로 막장화되어 버렸다.광해군이 총애하던 허균은 대북의 막장화를 가속화해서 폐모론을 선동하는 한편, 다 나아가서는 아예 인목왕후까지 살해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것만은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까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여서 결국에는 인목왕후에 대한 살해를 시도한 허균을 능지처참으로 처형해서 폐모론으로 요동친 민심을 무마했다. 그럴 정도로 대북에게 왕권이 잠식되어 있는 막장 상황이 되었다. 흔히 선조와 광해군을 비교하며 선조를 무능하다고 깎아내리는데 사실 실록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이게 무능한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선조의 대부분 판단이나 조치는 나무랄 게 없다. 게다가 선조는 기가 막히게 인물을 돌려쓰면서 붕당을 제어하는 정무적 능력을 보여준다.[24]
반면 광해군은 그런 정무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결국 정국을 이끌 능력이 부족한 기자헌과 이이첨에게 휘둘려 결국에는 기자헌과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 독재의 길을 열었는데 이는 조선의 내정의 피폐화와 북인 멸망으로 마무리된다. 흔히 말하는 무능한 선조와 유능한 광해군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옥사와 폐모론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이귀와 김류 등 서인 세력들은 광해군의 잦은 옥사 때문에 피해를 입는 바람에 광해군에게 원한을 품어 잠재적 불만론자들이 되어버렸고 그들에 대한 경계를 거뒀다. 한편 권신인 이이첨이 폐모론에 반대한 기자헌과 유몽인까지 유배보내며 대북파로부터 이이첨 1인 독재가 이어지자 광해군은 권력을 거둬들이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경계를 푼 결과는 거사 당일 날의 밀고마저 일축함으로써 인조반정이 크게 성공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3.3. 임해군 옥사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여 반역을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조정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서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일제히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다만 살려주자는 의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남인 내에서는 이원익, 이덕형, 정구, 홍가신, 심희수, 서인 내에서는 이항복, 북인 내에서는 정온 등이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하였다.[25]고변을 들은 직후에는 "내 형이 그럴 리 없다."라고 광해군이 일단 쉴드를 쳐줬지만,[26] 삼사가 절도 안치를 청하자[27] 혐의를 기정사실화하여 유배한 뒤 옥사를 벌였다. 그리고 죄가 없을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한 채 종들의 입에서 자백이 나올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고, 그나마도 종 1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군기를 땅에 묻었다고 진술했는데, 왕은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파냈을 거다."라며 자신의 머릿속 각본에 따라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대사헌 정구, 이덕형 등이 전은론을 펴자 이걸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정인홍이 임해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기뻐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역적이라는 결론부터 먼저 내린 후 원인을 밝혀내는 황당한 과정을 거친 것. 결국 광해군은 임해군을 붙잡아 교동도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임진왜란의 전쟁영웅들로 제흥군 연창군 등으로 봉해진 고언백[28]과 박명현이 임해군의 일파로 몰려 고문을 받다 억울하게 사망한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터지고 말았는데 명나라에서는 형 임해군이 있는데 아우인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은 석연치 않다며 문제삼았고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임해군이 건강이 좋지 않아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보해 광해군이 왕위를 이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사신을 파견하였다. 광해군은 형조 정랑 정호관(丁好寬), 선전관 신경원(申景瑗)을 보내 임해군을 데려오게 하였고 외숙부 김예직(金禮直)을 보내 임해군에게 명나라 사신을 만났을 때 답할 말을 잘 타일러주게 하였다. 임해군은 외숙부 김예직을 보고는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이후 임해군이 서강으로 나와 명나라 사신 엄일괴와 만애민을 만나고 병에 걸린 척 연기를 하였다. 엄일괴는 의문을 품었지만 광해군에게 뇌물을 받고 돌아갔다. 이후 임해군은 교동도로 다시 유배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의문사했다.[29] 광해군이 암암리에 암살했거나 사사했을 것이라는 심증만 제기될 뿐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불명이다.
사실 임해군도 본인의 살 길을 단단히 망각한 채 맨날 무사들과 어울리고[30] 자신이 잡힐 것 같자 여장을 하고 도망쳤는데, 정치적으로 공격받는 마당에 도망까지 쳐서 아예 역적 인증을 했으니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임해군의 옥사는 너무 억지에 한심했다. 광해군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임해군이 외숙부 김예직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통곡했다는 사실을 들은 사람들이 그 임해군을 불쌍하게 여겨 동정하였으며 익사공신에 2등에 녹훈된 심희수는 부끄러워하여 사양하였으나 결국 공신에 봉해지자 계사나 차자가 아니면 공신 호칭을 쓰지 않았다고 하며 이항복은 제자들에게 임해군이 신원될 것이라고 말할기도 하는 등 임해군의 옥사는 막장이었다. 물론 서인들이 광해군을 깍아 내리기 위해 그런 서술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감안하고 봐야 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임해군 옥사는 큰 부작용을 가져왔는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명나라에게 종계변무와 임진왜란때 원군을 요청할 때도 뇌물을 쓴 적이 없는데도 임해군 옥사를 덮는답시고 광해군이 명나라 사신에게 최초로 뇌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호구 잡혀 뇌물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심지어 환관이 사신으로 오면 은을 10여만냥이나 사용해야 했다고 한다.
그때 광해가 많은 은과 인삼으로 중국 차관에게 뇌물을 먹여서 무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종계(宗系) 변무(辨誣)할 때와 임진ㆍ정유년 왜란에 두 번 청병(請兵)할 때에도 모두 중국에 뇌물을 쓰지는 않았는데, 이때에 처음으로 뇌물을 먹이는 길을 틔웠다.이후로 사소한 일이라도 우리나라 역관이 그 사이에서 농간을 부려 뇌물이 아니면 일이 되지 않았고 중국 사신은 우리나라를 뇌물 먹는 곳으로 알아서 뇌물을 요구하기를 욕심껏 하였고, 환관이 사신으로 오면 은으로 10여만 냥까지 사용하였으니, 선조조(宣祖朝)에 홍순언(洪純彦)의 말 순언에 대한 말은 종계 변무조에 적혔다. 이 이제 와서 맞았다. 연려실기술 제19권 /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하담록》
연려실기술 제19권 /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광해군 일기의 기록에도 저 사건이후 명나라에 조선이 뇌물로 은을 준다는 소문이 퍼져 요동(遼東)·광녕(廣寧)의 각 아문에서 조선을 노다지 소굴로 알고 뇌물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제19권 /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정원이 아뢰기를, "일단 고천준(顧天峻)과 최정건(崔廷健),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 등 태감(太監)의 양사(兩使)가 다녀간 뒤로 은(銀)을 쓴다는 소문이 중국에 퍼진 결과 요동(遼東)·광녕(廣寧)의 각 아문에서 본국을 하나의 노다지 소굴로 알고 차관들을 뻔질나게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급하는 구식(口食)은 은으로 떼어 받고, 마필(馬匹)은 주단(紬段)을 징수하며, 또 사화(私貨)를 지니고 와서는 이익을 많이 남기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조금만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번번이 성을 내는 바람에 위세 있는 호령에 겁먹은 수령들이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구차하게 죄책을 면하려는 해당 관원들이 시리(市里)를 침학한 나머지 서울이고 지방이고 감당할 수가 없어 원망하는 소리가 일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세과(李世科) 등이 미적거리며 떠나지 않은 채 갖가지 협박과 공갈을 늘어놓으며 성화같이 몰아세우고 있으므로 상고(商賈)는 문을 닫고 전복(典僕)들은 도망가 흩어지고 있는 실정이니, 눈앞에 닥친 참혹함이 이미 극에 달했을 뿐더러 앞으로의 폐단이 무궁하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양 어사(楊御史)가 진(鎭)에 와 국경 근처에 있다 하는데, 이런 사유를 가지고 곡진히 이자하여 강역(疆域)을 막아 보호하고 왕래에 정한(程限)이 있게 하면 고질적인 폐단이 그런 대로 제거되고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얻게 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처리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32권, 광해 2년 8월 30일 임인 3번째기사
광해군일기(중초본) 32권, 광해 2년 8월 30일 임인 3번째기사
3.4. 봉산옥사
광해군 4년(1612년) 2월 13일에 역모 보고가 들어온다. 장소는 황해도 봉산으로 그 장본인은 김제세로 공문서를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 하였다가 엉터리로 만들었기에 '위조한 흔적이 현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서' 그를 붙잡아 추궁하였는데 그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나온다. "평산의 대장(김백함)이 군내에서 반역을 일으키고자 우리 형제로 하여금 허실을 염탐하게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김제세가 대장이라고 고한 김백함은 바로 붙잡혀왔고 이름이 나오는대로 굴비 엮이듯 줄줄이 들어왔다. 광해군은 이를 직접 심문(친국)하였으나 시간이 가면서 사건이 이상해져갔다. 일단 맨 처음 황해 병사 유공량의 장계에서도 그런 부분이 나오는데 이런 내용이다. "그의 꾸며대는 말이 괴이하여 다시 국문을 가한즉 말이 혼란하여 믿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17일, 황해 감사 윤훤과 병사 유공량은 각기 장계를 올리면서 공초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고 보고하였다."그자는 이미 어보(御寶)와 인장(印章)을 위조하고 체포된 뒤 틀림없이 사형이 될 것임을 스스로 알고는 평소에 일면식이라도 있고 조금이라도 원한이 있는 사람은 다수 끌어대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 말들이 마치 미리 외워놓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니 또 무어라 끌어댈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중략) 앞뒤로 말을 바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풍병이 들었거나 정신나간 사람은 아닌 듯한데, 형제가 같은 말로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시인하여 진술)를 하였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 윤훤
"역적이 끌어대는 숫자가 점점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며 민간에서는 소요하여 뜻밖의 변란이 이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도 있겠기에, 신의 어리석은 염려도 아울러 장계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중략) 심문하여 전일의 공초를 가지고 힐문하니 대개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역모를 꾀한 사실을 마치 심상한 보통 이야기 하듯 하고 두서 없고 혼란한 말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 유공량
현장에서 이들을 심문한 병사와 감사가 거짓을 말했다고 본 것이었고 이 일을 듣고 이덕형이 급히 들어왔는데 그 역시 죄인들이 다 잡혔으니 더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말하지만 광해군은 그럴 생각이 없어 매일마다 친국했다, 붙잡혀 온 이들이 부정하면 곧바로 압슬형을 행하였고 그렇게 죄인들은 압슬형을 당하면 이런저런 이름을 댔다가 다시 부정했고, 또 압슬형이 시작되면 다른 이름들을 끌어내는 식이다. 여기서 나온 이름이 그냥 아무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가 원한이 있는 이였을 수도 있었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또 끌려오게 되었다. 대장이라는 김백함은 2월 22일에 다른 이들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지는데 이 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라가 나에게 속았다!"이런 것을 근거로 박승종과 박홍구 등은 계축옥사 때 적당히 하라는 쪽으로 광해군에게 말하지만, 광해군은 이렇게 답한다. "역적을 국문할 때에는 엄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국맥을 실제로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옥사가 확대되는 가운데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봉산 군수 신율의 지인 유팽석도 끌어온다. 그는 황혁, 정경세 등의 대신부터 정인홍까지 끌어들였고 여기에 류영경의 자식들까지 끌어들였다. 원수 사이인 정인홍과 류영경의 자식들이 같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한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거짓 증언이었지만 광해군은 정인홍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모두 붙잡아 심문했고, 그 과정에서 황혁은 죽고 정경세는 파직되었다.
실록의 사관 평에서는 이것을 신율이 꾸민 것으로 적고 있다. 지인인 유팽석을 희생시켜 자기의 원수였던 황혁과 정경세를 숙청하려 했다는 거였다. 애초에 신율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다. 남이 지은 글로 표절해 과거에 급제했으며 바늘 도둑도 소 도둑으로 둔갑시키곤 하는 비겁한 인간이었다. 위에 나온 김제세가 엄청난 고변을 한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제법 큰걸 (거짓이든 진실이든) 실토해야 고생은 덜하기 때문이다. 신율은 봉산옥사 전만 해도 군수였다가 봉산옥사 이후 봉군되고 판서급까지 올랐지만 광해군 5년(1613, 계축) 급사한다.
하도 인망이 없고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질러서 그런지 사관은 양서(황해,평안)의 사람들 중에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 없었고 흉악한 짓을 한 업보라고 여겼다고 썼다. 고문으로 자백하게 하여 더 큰 범죄를 만든다는 식이라는 것이다. 옥사에는 죽은 이들의 처첩과 어린아이들까지 연루되었다. 보통 이들은 관비로 가지 고문을 하진 않지만, 광해군은 이러한 과정에 개입하였다. 9월이 되어서야 이 모든 게 끝이 난다. 이른바 봉산옥사로 이로 인해 100여 가문이 멸문되었다고 한다.
3.5. 안위의 허위고변과 두둔
그 후에도 지인과 허위 역모를 꾸민 다음 그 지인을 고발해버린 일이 벌어지는데 안위[31]라는 자로 임해군이 잡힐 때 수문장이었던 김위를 본받은 것이었다.[32] 김위는 임해군의 궁노가 철퇴와 대검을 들고 갔다는 걸 고발했고, 원래라면 수문장이 막지 않은 것이므로 임해군이 역적이라면 오히려 김위가 한패가 아니냐는 식으로 의심을 받아서 국문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광해군이 화를 내면서 국문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를 2등공신에 삼고 송산군(松山君)에 봉해주었다. 안위는 그 일을 본받은 것이다. 안위는 거짓 고변을 하더라도 상을 받으려고 음모를 꾸며놓고는 같이 꾸민 이 또한 고발하였다.그렇게 같이 의논해놓고 역모의 대상이 된 조극신, 그의 아비는 조극신에게 이 모든 것을 안위와 꾸민 일이라 자백하라고 하였고 조극신은 조언대로 이를 모두 자백했지만 광해군은 조극신은 유배보내놓고 안위는 집으로 보내주었다. 거짓이라 해도 알리기만 하면 아무 죄를 묻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나중에 폐모론이 일때 장령이던 배대유는 "김덕룡이란 자는 간음하다 붙들리자 고변했고 김언춘은 도둑질하다 붙들리자 모역을 했다고 칭했습니다." 라며 깠다. 여기에 선왕(선조)께서도 역적을 많이 다스렸지만 법은 준엄하게 써서 친국이 여러날 지속되지도 않았고 무고죄는 반드시 엄하게 다스렸다고 하여 선조와 비교하기까지 했다.
사실 상식적으로도 광해군이 잘못한 것인데 역모죄라는 게 걸려서 사실로 드러나면 집안 망치는 것이라서 역모를 무고로 고변하면 거의 다 죽이게 되어있다. 하지만 안위의 사례를 보면 자기가 먼저 저질러놓고 남을 끌어들여 그 남을 망쳐놓았다. 누가봐도 안위가 잘못한 것이고 설령 광해군이 안위를 커버해서 보호하고 싶다 해도 처벌하는 척쯤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것도 안했으니 앞서 지적대로 고변이 면책 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
3.6. 신경희의 옥사
야사인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이이첨이 속으로는 신경희를 꺼려서 제거하려 했다는 서술 그리고 대북파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봉산옥사 계축옥사 해주옥사 같은 여러 역모 사건을 조작했기에 신경희의 옥사 역시 대북파가 역모 사건을 조작해 능창군을 제거하고 반대파를 탄압했다는 오해가 존재한다. 심지어 위키백과의 능창군추대사건 항목의 설명에 신경희가 서인계 인물이라고 설명하는데 신경희는 서인이 아니라 엄연히 대북파 소속의 인물이고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경희의 옥사는 오히려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 세력이 역모에 몰린 사건이다.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익산의 진사 소명국이라는 자가 있었다. 수안군수 신경희[33]와 친했지만 어떠한 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신경희는 소명국을 죽이려고 윤길과 (신경희의 숙부 신할(申硈)의 사위였다) 모의해 소명국을 음행(淫行)을 고발했다.
옥에 갇힌 소명국은 돌파구를 찾으려했다 뜬금없이 신경희가 장령 윤길, 정언 양시진 등이 신경희의 사촌 누이의 양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을 했다 그 근거로 신경희 일당이 임금의 관상과 명운, 국운 길흉을 멋대로 점을 치고는 능창군이 40년간 치평할 임금이라는 점괘를 내보인 것을 꼽았다. 신경희는 자신은 정인홍의 고제[34]이자 이이첨과 마음을 통하는 벗이며[35] 대북(大北) 사람들은 비록 노예라 하더라도 역적질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어찌 신이 하였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36] 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명국은 교활하고 구변이 있어서 소명국과의 대질에서 소명국의 말에 신경희가 쩔쩔매자 이에 광해군은 분노해 신경희를 엄하게 신문할 것을 명령하였다.
신경희는 대북파의 일원으로 정인홍의 제자이자[37] 이이첨의 심복이었다.[38] 평소 대북파는 역적 토죄를 일삼았기 때문에 유희분과 박승종을 비롯한 소북 세력이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박승종은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과연 역적이 가까이에 있었다"고 외쳤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이첨까지 옭아매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경희와 윤길, 양시진은 극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봉산군수 윤공과 백령첨사 윤숙이 인성군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했다. 윤공, 윤숙, 인성군은 유배를 가고 신경희는 형신하는 동안에 다섯 번이나 역변(逆變)을 고해 죽음을 늦추고자 하였으나 모두 이루어지지 않아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고 윤길(尹趌)·양시진(楊時晉) 역시 신문을 받다가 죽었으나 끝내 자복한 자가 없었고 거짓 고변을 한 소명국은 풀려났다.
신경희 일당의 추대대상으로 몰린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군으로 귀양 보내졌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허물고 경덕궁을 지었다.
능창군의 유배지 생활은 혹독했다. 달아나지 못하게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인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한마디로 집 울타리 곳곳에 가시가 박혀 있던 것. 뿐만 아니라 의금부도사 구시백(具峕伯)은 능창군의 목에 칼(계구)을 채워 작은 움직임조차 힘들게 하였고, 거기에다 두 끼만 먹는 밥도 석회수로 지어 도저히 제대로 먹을 수 없게 했다. 다행히 능창군과 같이 지내게 된 지역 주민 고봉생과 강화군청의 사동인 수생이란 아이가 자신의 밥을 덜어서 주었으나 이 역시 발각되어 수생은 능창군과 밥을 따로 먹게 되었다.
결국 참담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능창군은 1615년 11월 17일 유배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는 겨우 17세. 자결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미수기언》에서는 음독자살했다고 하고 《연려실기술》에는 영창대군처럼 아궁이에 불을 때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능창군묘지명》에는 목을 매 자결했다고 나온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정원군은 술병과 홧병으로 얼마 못 가 사망하였다.
이 일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가져오는데 능창군의 형이자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은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에 분노하여 아버지와 동생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인조반정에 직접 가담하게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담으로 이 사건은 다른 당파들에게 대북천 하인 광해군 정권에서 이이첨 일파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건수가 되었는지 속잡록의 기록에서는 신지익이 혼정편록의 기록에서는 이귀가 신경희를 언급하면서 대북파를 공격하는데 써먹었다.
3.7. 계축옥사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해 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소위 폐모살제라 불리는 친족에 대한 무자비한 견제였다. 형인 임해군을 독살했고, 조카인 능창군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보낸 뒤 사실상 목숨을 빼앗았으며, 소성대비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서궐인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을 죽이도록 광해군이 직접 교사했다는 사료는 전무하다. 사실 실록에 등장하는 영창대군 살해 진상은 그 때 그 때 다 다르다. 또한 영창대군 사사에 연루된 인사들 중 영창대군 살해에 가담했던 정항 등 상당 수는 훗날 인조반정 공신들에 의해 복권되었다.
어느 쪽이든 당시 정황상 심증으로 광해군이 그랬을 거라 취급하는 것이며, 또한 반정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처럼 몰아간 면도 꽤 있는 편이다. 기록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유배지의 현지 관리가 왕명과 무관하게 임의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대북의 수장이던 기자헌의 소행이라는 견해가 있다.[39] 다만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 부사 정항 등 의심자들에 대해 딱히 이렇다할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것이 광해군이 내심 이들의 행위를 두둔했다는 것이 근거로 꼽히기도 한다.
임해군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따른다'면서도 가족과 노비까지 혹독히 수사하면서 몰아붙였고[40] 처음 임해군이 병사했다고 보고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재조사 도중 노비가 "독약을 올렸다가 임해군이 먹지 않으니 목을 매어 죽였다"고 증언한[41] 대상인 이정표라는 인물은 임해군 사후 전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영창대군을 감시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와중에 선조 생전에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말을 들은 여러 노신들이 김제남의 가족들과 함께 잡혀왔었는데 그 중 박동량이 서궁에서 왕에 대한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고변하였다. 그 내용은 대군 궁방의 사람들은 선왕께서 병환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에게 돌렸고 그리하여 수십여 명이 요망한 무당들과 함께 잇따라 유릉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것이다.[42] 다만 사관은 그들이 저주한 게 의인왕후가 아닌 광해군의 어미인 공빈 김씨의 능에서 했다고 적고 있고 그마저도 임해군이 노비들을 동원해 막아서 실제로 하진 못 했다고 적고 있다. 이 말로 인해 대비전의 궁녀들이 줄줄이 불려와 고문을 가해 새로운 증언이 나왔고 그 증언에 따라 선조의 능까지 파보았다. 하지만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역모에 휘말린 김제남은 6월 1일에 사사되었다.
이러한 미온적인 대응과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혹한 조치가 표면적으로 극형을 꺼린 광해군의 입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다며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진짜 의중과 이면에 감춰진 진실은 본인과 연루자들 밖에 모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인조 자신조차 영창대군 살해 관련자(이정표, 정항)들에 대한 처벌 요청에는 시큰둥하다 못해 아예 화를 내면서 막았다. 그리고 거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이 증살설, 굶어죽은 것, 양잿물을 먹여 죽게 했다는 등 일관되지 못하고 광해군 시대에는 병사설이 정설이었다가 인조 후 다양한 죽음설들이 돌며 광해군 정권이 살해한 것으로 묘사되고 인조 측도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재조사는 없었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은 병사가 맞고 살해했다는 것은 누명이라는 의견도 간혹 보인다.
또한 광해군 대에 영창대군이 죽었을 때의 상소의 내용은 역적을 국법으로 죽여야 하는데 정항 놈이 제대로 관리를 안해서 국법으로 처벌을 내리기도 전에 죽어 종묘 사직을 욕되게 하였으니 정항에게 벌 주세요 정도로 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나 정항이 살해했다는 말은 인조나 서인 측에서도 단순히 소문일 뿐이라며 정항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았었고, 본래 인조 대에 편찬된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에 "정항이 영창대군에게 밥을 주지 않아 영창대군이 기력이 다해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43] 정항이 영창대군을 증살하였다" 등 일관되지 못한 내용에 인조 대의 영창대군의 비문에는 불을 피우지 않아 영창대군이 얼어죽게 만들려고 했다가 안 죽으니 양잿물을 먹여 죽였다고 되어있으며, 이 양잿물설은 인조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양잿물을 먹인 것은 정항이 아닌 이정표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서인계, 남인계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신료들이 역적이라고 하는 영창대군을 어린 아이를 섬에 보내 중병에 걸려 죽게 한 자신의 책임이라며 영창대군을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영창대군이 죽기 며칠 전에도 중병에 걸렸다고도 하는 등의 내용이 있고 정항이 급한 서신이라며 보낸 서신도 있긴 하지만 정설은 없이 수많은 추측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으로 영창대군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반론이 있다. 이정포가 별장 홍유의에게 영창을 죽이자고 했지만 홍유의는 반대했고 교체되었다. 그리고 강화 부사 기협도 파직됐는데 그 이유는 "강화 수령으로 있을 때 역적 의를 비호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며, 음식 공급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는 게 이유였다.
다른 케이스인 단종의 경우 금부 도사 왕방연으로 하여금 사약을 전달하게 했는데 왕방연이 사약을 갖고 오는 것을 안 단종이 그 전에 스스로 목을 맸다는 게 정설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전에도 수차례 사약이 갔는데 수행역을 맡은 이들이 차마 따를 수 없어 줄줄이 자결했다고도 한다. 이후에도 세조는 노골적으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으며, 이 때문에 영월 동강에 그대로 내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엄홍도가 몰래 수습해 장례했고 이후 숙종 대 들어서야 능이 제대로 정비되었다.
3.8. 폐모론을 둘러싼 당쟁
폐모론 수용과 관련해서, 광해군 5년(1613) 당시 이위경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정조, 윤인 등을 비롯한 태학생 19명을 대동해 폐모소를 올리자 처음에 광해군은 그 주된 근거인 신덕왕후 및 이방석과 방번의 전례를 상고해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대사헌 이지완과 최유원이 이에 반하여 상소하자 "국모를 동요하니 그 죄가 윤리와 기강에 관계된다"며 이위경 등 20명 모두에게 정거(停擧)[44] 조치를 내렸다. 여기서 일단락될 뻔했던 폐모론은 4년이 지난 광해군 9년(1619) 11월에 다시 유생들(박몽준, 한보길, 윤유겸 등등)의 빗발치는 상소로 불거져 의정부에서 논해졌는데, 당시 광해군일기 11월 ~ 12월자를 보면 온통 유생들의 폐모 상소 관련 내용이다.결국 유생들의 상소 러시로 촉발된 폐모 정국 과정에서 조정은 허균과 이이첨 등 대북을 위시한 소수의 찬성파와 기자헌과 유몽인 등의 다수의 반대파 두 패로 갈라졌고, 심지어 양사까지 나서서 폐모를 주청하는 등 몇 년을 끌다 광해군 11년(1619년) 무렵에서야 겨우 서궁(경운궁)에 안치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이즈음 궁중에서는 과거 작서의 변 때와 같은 유사한 일들이 많았다. 실록의 사관은 인목왕후의 어미 정씨의 소행이라 주장하였다. 결국 광해군일기 11년(1619년) 1월 13일자에선 이를 조보(朝譜)에 내지 말라고 굳이 덮어두는 조치가 눈에 띈다. 광해군은 폐모론 주창자 중 정조, 윤인 등을 삭직했다가 복귀시켰고, 폐모론 반대 주창자 중 이원익은 한동안 유배 후 고향인 여주로 돌려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유배 당시 이원익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지금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머리를 맞대고 흉흉하게 하는 말이 ‘이로 인해 장차 대비에게까지 미칠 것이다.’고 합니다. 신(臣)은 그만 놀라서 간담이 철렁 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어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孝道)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이 지극히 크고 그 윤기가 지극히 중합니다. 성인은 인륜(人倫)의 극치인데, 성명(聖明)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과연 이 논의가 없었다면 신(臣)이 경솔히 항간의 말을 믿고 사전에 시끄럽게 한 것이니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그러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겠습니다." - 이원익
광해군은 이 말을 듣고 어디서 들었냐고 따졌고, 이원익은 그냥 걱정돼서 한 거라면서 남에게 들은 게 아니라고 답한다. 결국 이 일은 이원익의 유배로 마무리되었다. 이창록이라는 이는 광해군 7년(1615년) 8월에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가 죽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 좀 과격하긴 했다.실록에서는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야사에서는 그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고 적고 있다. 다만 앞부분 형과 아우를 죽였다는 건 실록에서도 나온다. 다만 야사에서는 정인홍이 이를 고발했다. 하는데 정작 정인홍은 광해군과 만났을 때 이걸로 그 고을까지 벌준 걸 좀 까는 뉘앙스의 말을 하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광해군은 폐모론에 대해 여론 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다. 세종의 공법 여론 조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여론 조사는 광해군일기에도 나오지만 <추안급국안>이라는 사료에 좀 더 자세히 나오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 조사에 참가한 인원은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고 그 결과는 소수의 관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찬성 의견을 냈다.[45]그러나 폐모론에 대한 인목왕후 폐비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찬성으로 나왔다지만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이 자파 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신료들 대부분이 찬성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과 남인 원로 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 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 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광해군 재위기에 터진 이런 저런 일들은 반정 세력의 좋은 명분이 되었음도 사실이며, 임해군 사사건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까지 얽혀 대중국 외교에 상당한 무리를 주게 되기도 했다.
소성대비의 예도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리긴 하지만, 여하간 유교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북을 제외한 붕당들의 반발이 있었다. 대북 내에서도 곽재우, 기자헌, 유몽인, 정창연, 정온 같은 이이첨 일파가 아닌 대북이나 류희분, 박승종, 박홍구 같은 소북과 공빈 김씨의 남동생으로 광해군의 외숙인 김예직마저 폐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광해군이 폐비하라고 정식으로 교서를 내린 일은 없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 소성대비는 폐비 취급을 당하긴 했으나 공식적으로 폐모가 된 것은 아니었다.
보통 유폐라는 설명만으로는 저 서궁이라는 궁궐이 도성 변두리에 있는 초라한 전각 비슷한 이미지로 느껴지기 쉬운데, 사실 이 서궁 건물은 본디 경운궁이라 하여 저래봬도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궁궐들을 신축하기 전(선조 후기)까지 조선의 정궁에 해당했으며, 지금은 덕수궁이라고 불리는 상당히 대규모의 궁이다. 즉 광해군이 궁궐을 신축하지 않았으면 서궁이 아니라 그대로 계속 정궁으로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폐모살제는 결국 광해군 본인의 몰락을 불러왔다. 서인, 남인, 대북파, 소북파, 친척까지 광해군에게 반대하고 나서는데 결국 광해군은 이를 기어코 단행했다.
비록 폐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설사 좋은 궁궐에 가두었다고 해도 결국 아들이 어머니를 강제로 묶어두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유교가 아니라 윤리적으로 큰 문제다. 특히 위에 서술되었던 영창대군 죽음 이후에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비 이이첨 일당[46] 사람들이 폐비를 결사 반대하는데 이를 유배와 숙청 등으로 이룬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 일부가 권력을 차지해 자신과 격렬하게 대립함에도 광해군은 이들을 숙청하지 못한다. 서인과 남인을 다시 끌어들이려면 대비의 유폐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폐모론에 동참한 정양윤, 김호 등이 북청으로 귀양 온 이항복을 찾아와 죽기 싫어서 폐모론을 주장했을 뿐이라며 이항복에게 용서를 구했는데 폐모론을 주장한 이들조차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무리한 일이었다.
조정립(曺挺立)은 곧 정인홍(鄭仁弘)의 제자인데, 지난번 계축년에 간관이 되어 이항복을 심히 공격하였다. 또 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갈 때의 간관은 정양윤(鄭良胤)과 김호(金昈)인데, 모두 정사년의 대간으로서 정청을 정지시켰고 또 이항복을 극변(極邊)으로 귀양 보낸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그때에 그 지역을 피하게 하려고 자못 형적을 남겼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이 지방에 임명하였다. 이때에 정양윤과 김호 등이 함께 북청에 이르러서 이항복에게 절하면서, “지난 해에는 우리들이 대감을 이 땅에 보내었는데, 금년에는 대감께서 우리들을 이 길목에서 보게 되니 일이 잘 뒤집어집니다.그러나 지난 해의 일이 어찌 우리들의 본심이었겠습니까. 다만 한 때의 죽음을 참지 못한 것 뿐입니다. 나쁜 짓도 끝까지 못하여 오늘날에 이런 걸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대감댁의 문을 어찌 우리가 밟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얼굴을 가리고 자취를 숨기고서 바로 지나치려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당초에 본 마음과 형적은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니 혹시 용서를 구할 만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감히 당돌하게 왔습니다.” 하면서, 움츠리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말투에 넘쳐 흘렀다.이항복은, “지난 시절의 일이니 다시 따질 필요가 없소. 다만 오늘날 공들의 걸음은 다시 무슨 연고인지 각기 그 뜻을 말하오.” 하니, 조정립이 또한 와서 절하였는데, 그의 부끄러움이 극도에 달하였다. 《북천록(北遷錄)》
연려실기술 제20권 /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결국 광해군은 즉위한지 14년(1622년)이 되고 나서야 겨우 서인과 남인을 다시 포용하기 시작했다.[47] 광해군이 유폐를 단행한 것은 선조의 지나친 견제에 따른 불안감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대비 유폐는 광해군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후술될 박시백의 말처럼 아버지 선조에게 받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회복해 포용력 있게 나갔다면 대북의 일당 독재로 벌어진 빈 틈 없이 정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폐위 과정에서 알 수 있듯 폐모살제는 단순한 명분론 차원의 문제를 넘어 광해군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되었다.연려실기술 제20권 /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3.9. 대동법 시행과 확대 반대
자세한 내용은 대동법/광해군 시기 문서 참고하십시오.광해군 즉위년(1608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로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으로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하지만, 광해군 본인은 이 법의 시행 건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적으론 부정적이었고 일찍이 시도나 성공 전례가 없었으므로 "이 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겠냐"며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범 실시 지역인 경기도 밖으로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을 확대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분명히 했다.
결국 인조대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시행과 이 과정에서 생기는 시행착오 분석, 실무인력 육성 등이 이뤄질 수 있었고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의 실패에도 강원도에선 강원대동법(江原大同法)이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다가 효종 초 선왕 시기 축적된 인력과 노하우를 가지고 재시행. 현종때까지 지속적인 확대, 보완을 거쳐 숙종 시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시행 되었다. 다만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같은 업적[48]은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49][50][51][52]가 되었다.
3.10. 전후 복구
호적과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53][54][55][56][57][58] 세수를 확보하고[59][60][61][62] 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복원했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발간했다.[63] 또 창덕궁 등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64] 또 임진왜란 과정에서 한양이 생각보다 방어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일찍부터 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지관 이의신의 견해에 따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요지인 파주의 교하로 천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묘청의 난 등의 전례를 들어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반정으로 실각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그 외에 광해군 시기 적상산성과 남한산성 석성 개축, 북방 성벽 강화, 강화도에 진지 구축, 수군 훈련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다만 광해군 대부터 인조 대까지 반란과 호란으로 소실된 기록이 많아 구체적으로 얼마의 병사들이 전방에 배치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실한 편이다. 반정 세력은 집권 후 민생 파탄의 주범이었던 궁궐 공사를 중지하는 제스쳐를 내보여 급작스런 정권 교체로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물론 인조 정권 역시 이괄의 난과 호란으로 궁궐 등을 공사를 하긴 했지만 인조 대의 그것은 규모와 필요 성면에서 광해군 대의 그것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3.11. 기록물 편찬과 보존 사업
일반적으로 광해군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과 완성을 후원했던 것으로 특히 유명하나[65] 그 외에도 《국조보감(國朝寶鑑)》,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을 재간 및 보급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관련해서는 재위 2년차에 무주군의 적상산성을 수리하면서 적상산 사고를 새로 설치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줄곧 새로운 외침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특히 후금의 침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훗날 호란 때의 실제 침공 루트까지도 거의 간파하고 있었다.이런 이유로 기존 사고의 불안성을 보완할 새로운 실록 사고 건축을 명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마니산, 춘추관 사고에 보존되어 있던 사료들 태반이 소실됨으로써 이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참고로 적상산 사고본은 정묘호란 당시 그곳을 지키던 승려 상훈이 재빨리 인근 굴 속으로 숨김으로써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고, 현종 때 소실된 실록들을 보완했던 작업에서는 적상산 사고본이 주된 참고 사료가 되었다.
3.12. 중립 외교
계승범: 그니까 우리가 광해군이 뭐 엄청난 탁월한 외교가가 돼 가지고 뭐 중립외교하고 그런 게 아니라 자기방어에요. 여러분이 왕이면 지킬 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내 왕위를 지켜야 하고 두 번째는 왕조 즉 종묘사직을 지켜야 해요. 누가 위협합니까? 내 에너지가 100이 있으면 편의상 50은 내부의 적을 막는 데 쓰고 50은 외부의 적을 막는 데 쓰는데 다 내부의 적 외부의 적 다 뭡니까? 내 왕좌 또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것이죠. 근데 지금 지킬 힘이 없어요. 그니까 내부의 적을 눌(누)르기 위해서 영창대군 제거하고 다 포텐셜 에너미니까 임해군 제거하고 그러는 거에요. 근데 문제는 외부의 적이 강력한 적이 나온 겁니다. 근데 이건 내가 붙을만한 적수가 아니에요. 도움도 올 때(데)가 없어요. 그럼 어떡합니까? 누르하치하고 창구를 열어서 핫 라인을 열어서 명나라 몰래 은밀하게 대화해야 한다는 (거죠). 그니까 이건 제 개인 학설이지만 중립외교라고 하는 거는 말이 안 되고 뭐 이중외교라는게 더 맞다는 거죠. 여러분 중립이라고 하는 건 A, B, C 삼국이 있을 때 똑같이 100% 독립국이에요. A와 B가 싸우는데 C가 중립을 지킨다? "난 싸움에 안 들어가." 그게 중립이에요.
(박물관역사문화교실)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1:03:06~1:04:33)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흥기하여 1588년(선조 21년)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칙서 500여 통을 확보함으로써, 이듬해 명으로부터 도독첨사를 제수했으며, 1595년에는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첩을 받았다. 조선은 건주여진 부족정들과의 호시와 개시 관할 구역을 명과 분점했었으나,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모두 정복하고 1601년 해서여진의 하다(hada)마저 병합하면서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직첩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이중수직을 받는 여진인이 16세기 중반 이래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임진왜란으로 종주국 명과의 관계가 밀접해진 국제정세에 따라 인신무외교의 원칙을 준수한다는 명분으로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누르하치는 대신 양곡을 빌리겠다는 타협책을 제시하였으며, 조선 측도 건주여진과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1613년까지 해마다 만포에서 수백~수천여 명의 여진인들을 구휼했다. 또한 누르하치에게 복속한 안추라쿠(anculakū) 내하(內河, dorgi birai golo; 동량북)의 로툰(lotun)에 대해서도 무산을 진으로 승격하고 개시하는 방법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도모했다.[66](박물관역사문화교실)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1:03:06~1:04:33)
누르하치는 1605년(선조 38년) 만포첨사에게, 1607년(선조 40년)에는 선조에게 보낸 서신에서 건주등처지방(建州等處地方)의 왕을 자칭하고 건주좌위의 인신도 대체하면서 명의 위소제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군주로 군림하고 있다는 늬앙스를 풍기면서도, 이성량이 경질된 것이나 조선의 대명보고를 의식하여 명에 대한 조공을 재개하는 한편, 조선과는 허례에 불과하긴 했지만 번호규례(藩胡規例)를 준수해주며 오갈암 전투를 통해 우라(ula) 세력을 축출한 회령 방면으로 초피무역을 추진하였으며 녹봉을 지급받았다. 광해군과 장만 등은 비록 흉폭하긴 하나 우라를 통해서 건주여진을 견제하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했으나, 1613년(광해군 9년), 누르하치가 우라를 친정하여 국성을 함락하고 버이러(beile)인 부잔타이는 예허(yehe)로 망명함으로써, 대여진 정책은 완전히 일원화 됐다.[67]
비변사가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나오면 그 문답할 말을 투서 및 박규영(朴葵英)이 가지고 갈 글의 뜻으로 참작하여 가감하고, 별증(別贈)을 후하게 주어 반드시 환심을 얻도록 하되, 아주 상세하고 신중하게 하여 중국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을 원수(元帥)·찬신(贊臣)·〈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치유(馳諭)하여 〈어설프게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적이 바야흐로 [68] 수병(水兵)이 나온 것과 우리 나라가 중국 장수를 대접해 주고 있는 데 대하여 크게 노여워하고 있으니, 이번 문답 때 대답할 말을 상세하게 지시하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76권, 광해 14년 4월 16일 신사 4번째기사
1614년(광해군 6년), 명 만력제가 누르하치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요좌(遼左)의 번리인 예허(yehe)를 누르하치로부터 구원할 것을 명하며 예허의 두 성에 명의 화기수(火器手) 천여 명을 주둔시켰다. 이러한 만력제의 적극적인 태도에 요동아문의 분수도 백양수(白養粹)는 조선에 응원군(징병)을 요청했다.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에 대한 추숭을 순조롭게 성사시키고자 한 광해군은 징병 가능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줘 조선 국경인 의주에 1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69]"호차(胡差)가 나오면 그 문답할 말을 투서 및 박규영(朴葵英)이 가지고 갈 글의 뜻으로 참작하여 가감하고, 별증(別贈)을 후하게 주어 반드시 환심을 얻도록 하되, 아주 상세하고 신중하게 하여 중국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을 원수(元帥)·찬신(贊臣)·〈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치유(馳諭)하여 〈어설프게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적이 바야흐로 [68] 수병(水兵)이 나온 것과 우리 나라가 중국 장수를 대접해 주고 있는 데 대하여 크게 노여워하고 있으니, 이번 문답 때 대답할 말을 상세하게 지시하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76권, 광해 14년 4월 16일 신사 4번째기사
1930년 중화민국 랴오닝통지관이 중간한 《만주실록》 〈강공립솔병귀항도(姜功立率兵歸降圖)〉, 후금의 4 버이러가 주석단에 앉아 강홍립(姜功立, giyang gung liyei)이 인솔한 조선군의 항복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신 강홍립 등이 명을 받고 싸움터로 나갔다면 오직 적만을 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먼저 통역을 보내어 미리 출병하는 까닭을 통지하는 등 마치 당초에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어,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하였다가 그들의 장계를 보니, 힘이 모자라 함락을 당하였다는 정상은 조금도 없고 또한 구차하게 살아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뜻도 없이 가는 길의 행군한 절차를 차례로 서술하고 감히 미리 통지하여 낭패하였다는 등의 말을 버젓이 아뢰면서 스스로 그들이 한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며, 끝에 가서는 다시 회답할 말을 지시해 주어 살아서 돌아오기를 꾀하고 있습니다.
...
대체로 변명할 때는 빈 말만으로 〈의심을 풀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명백한 실제의 일이 있어야만 근거를 삼아 변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그들의 처자를 감금하고 정응정 등을 나포하여 문초하는 일에 대해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누누이 청한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뜻은 좋다. 그러나 내 비록 혼미하고 병들어 맑은 정신은 아니지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 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 지난해 격문이 왔을 때부터 내가 우려하던 것은 징발한 병사를 보내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 견고하지 못하고 군병은 평소에 교련되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몰고 들어가면 전쟁에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진달하되, 서둘러 경략이 나오기 전에 주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비록 오늘날에 패배를 당하더라도 지난해에 주달한 것과 서로 부합되었을 것이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경들은 나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막으려고만 하고 있는데 단지 사정을 주달하는 것이 무슨 사리에 어긋난 점이 있다고 끝내 내 말을 이행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이것이 통탄스럽다.
...
대국 섬기는 성의를 더욱 다하여 붙들어 잡는 계책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말고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버려두고 생각지 않은 채 번번이 강홍립 등의 처자를 구금하는 일만 가지고 줄곧 계문하여 번거롭히고 있으니, 나는 마음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본사에서 누차 청하는 뜻을 나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천천히 선처하여도 진실로 늦지 않다. 오직 국가의 다급한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추의 서신이 들어온 지 이미 7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처결하지 못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하늘의 운수이니 더욱 통탄스럽기만 하다."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9권, 광해 11년 4월 8일 신유 1번째기사
출병이 불가피해지자, 광해군은 패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조선군이 명 장수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여 도원수 강홍립의 지휘권을 지키는 한편, 조선군을 명의 동로군(棟盧軍)[71]에 예속시켜 자의에 따른 출병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했다. 또한 동로군이 출병하기도 직전 후금과의 초피 교역을 시행하고 녹봉을 지급했으며, 이 과정에서 회령부사 한명련으로 하여금 누르하치의 차관 쇼롱오(šolonggo)에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명군의 진[唐陣]의 뒤에 있을 것"이라 유시하였다. 한명련과 같이 광해군의 밀령을 받은 강홍립은 배동관령에 이르러 호역 하세국을 허투아라로 보내어 조선 측이 후금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이번 출병은 상국(명)의 재촉을 받아 부득이하게 한 것으로, 얼마안되는 군졸들은 명군 진 뒤에 있었다고 전했다. 마찬가지로 사르후 전투 현장에서는 조선군 좌우영이 전멸하자, 다이샨은 조선군 중영에 통사를 요구했고, 이에 강홍립은 통사 황연해로 하여금 "지금은 부득이 해서 온 것"이라 전했으며, 후금 측도 번호 출신들을 보내어 조선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삼사에서는 강홍립 등을 '적신(賊臣)'이라 칭하면서 처벌을 주장했으나 이들에게 밀지를 내린 광해군은 그들의 처벌 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72]"적신 강홍립 등이 명을 받고 싸움터로 나갔다면 오직 적만을 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먼저 통역을 보내어 미리 출병하는 까닭을 통지하는 등 마치 당초에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어,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하였다가 그들의 장계를 보니, 힘이 모자라 함락을 당하였다는 정상은 조금도 없고 또한 구차하게 살아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뜻도 없이 가는 길의 행군한 절차를 차례로 서술하고 감히 미리 통지하여 낭패하였다는 등의 말을 버젓이 아뢰면서 스스로 그들이 한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며, 끝에 가서는 다시 회답할 말을 지시해 주어 살아서 돌아오기를 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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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변명할 때는 빈 말만으로 〈의심을 풀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명백한 실제의 일이 있어야만 근거를 삼아 변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그들의 처자를 감금하고 정응정 등을 나포하여 문초하는 일에 대해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누누이 청한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뜻은 좋다. 그러나 내 비록 혼미하고 병들어 맑은 정신은 아니지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 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 지난해 격문이 왔을 때부터 내가 우려하던 것은 징발한 병사를 보내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 견고하지 못하고 군병은 평소에 교련되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몰고 들어가면 전쟁에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진달하되, 서둘러 경략이 나오기 전에 주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비록 오늘날에 패배를 당하더라도 지난해에 주달한 것과 서로 부합되었을 것이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경들은 나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막으려고만 하고 있는데 단지 사정을 주달하는 것이 무슨 사리에 어긋난 점이 있다고 끝내 내 말을 이행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이것이 통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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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 섬기는 성의를 더욱 다하여 붙들어 잡는 계책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말고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버려두고 생각지 않은 채 번번이 강홍립 등의 처자를 구금하는 일만 가지고 줄곧 계문하여 번거롭히고 있으니, 나는 마음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본사에서 누차 청하는 뜻을 나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천천히 선처하여도 진실로 늦지 않다. 오직 국가의 다급한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추의 서신이 들어온 지 이미 7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처결하지 못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하늘의 운수이니 더욱 통탄스럽기만 하다."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9권, 광해 11년 4월 8일 신유 1번째기사
한편 1616년(광해군 8년) 정월, 누르하치는 겅옌 한(genggiyen han)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사르후 전투 직후인 3월 21일에 천명(天命, abkai fulingga) 2년(1618년)이라는 독자적 연호와 함께 후금국의 한(amaga aisin gurun-i han)과 천명금국한(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73]을 자칭하며, 자신을 조선국왕(solho han)과 대등하게 설정한 국서를 보내어 통교를 요구했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교섭을 통해 난극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며, 신료들과 달리 비록 속국관계와 그에 따른 사대관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누르하치와의 직접적인 대화에 중점을 두었다. 누르하치는 이외에도 4월 4일 칭한(稱汗)은 물론 명을 남조(南朝)라 지칭하는 서신들을 보내왔으며, 1621년(광해군 13년) 3월과 6월에는 각각 만주국 한을 자칭하며 광해군을 너(是, si)라고 지칭하거나, 만포진이 아닌 의주로 발송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조정은 회신은 절대 불가하다고 반발했지만, 광해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은 것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대화를 강조했다. 그는 즉시 차관을 파견하여 회신을 우호적으로 할 것을 명하는 한편, 회신에 반대하는 비변사 당상들을 세상 물정도 모르는 선비라고 질책했다. 광해군의 독촉에 비변사는 마지못해 그에게 동의했으며, 마침내 누르하치를 '후금국 한 전하(殿下)' 지칭하고 후금과의 신의를 강조하는 답신을 보냈다.[74]
1622년(광해군 14년) 4월, 명이 감군어사 양지원(梁之垣)을 파견하여 청병칙서를 전달했다. 칙서를 근거로 징병을 거부하덤 광해군은 관외가 모두 누르하치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선박 지원 외에 군사의 파병은 불가하다는 새로운 명분으로 이를 거절했다. 비변사는 노골적으로 반발하여 명 측과 합의 사항을 도출했으나 광해군은 이에 인준을 거부하였으며, 양지원은 시간을 끄는 조정의 행태를 힐난하며 담당 관리를 군율에 따라 처단하겠다는 언동을 일삼았다. 이렇든 칙서와 존호마저 거절한 광해군은 그해 10월 신료들의 반발 심리를 무릅쓰고 후금에게 국서를 회신하고, 11월에 이르면 마침내 모문룡 휘하 명군을 가도로 이주시킴으로써 1622년(광해군 14년) 10월경부터 조선과 후금 간 긴장관계는 개선되었으며, 누르하치는 이후 요서 공략이 집중했다. 이런 형세는 정묘호란 발발 직전인 1626년(인조 4년) 12월까지 지속되었다.[75]
대왕 대비가 왕을 폐하여 광해군(光海君)으로 삼고 이지를 서인(庶人)으로 삼고, 금상을 책명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그 교지는 다음과 같다.
"소성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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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이겠는가.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001)(註 001)(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 3월 14일 갑진 1번째기사
일련의 사건은 광해군의 외교 노선이 명을 은밀히 기만하던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명을 기피하는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며, 조선의 적극적 공조로 자리잡혀가던 명의 사대질서의 균열 조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양반귀족 지지와 명 황제의 승인을 조선 국왕의 정통성을 삼은 조선의 양반귀족층에게 군부(君父, 명)와 이적(夷狄, 후금)의 대치 속에서 신자(臣子, 조선)의 이러한 행태는 종주국 황제에 대한 속국 군주의 항명을 넘어 패륜으로 받아들여졌다. '보국안민(保國安民)'을 내세우며 실행한 대후금 교섭으로 인해 오명을 쓴 고달픈 처지를 토로하던 광해군은 징병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누르하치를 '후금국전하'로 지칭하는 우호 국서를 보낸 것을 계기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능양군과 서인에 의해 배명(背明) 행위 등을 했다는 이유로 반정으로 폐위됐다. 정변으로 성립된 인조 정권은 명 황제의 책봉을 받기 위해 매달리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 모문룡 휘하 명군에게 물자를 국고로 들이쏟아 붇거나 그와의 협조를 전제로 국왕 친정을 내세우며 어영사를 두는 등 강한 친명 노선(친명배금)으로 회귀하였다.[76]"소성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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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이겠는가.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001)(註 001)(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 3월 14일 갑진 1번째기사
3.13. 궁궐병과 재정파탄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조차 과오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어물쩍 넘어가는 광해군의 가장 심각한 실책이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폐모살제니 중립외교니 하는 것들은 조정 업무에 깊숙히 관여하는 고관대작이 아니고서야 널리 알려질 일들이 아니었다. 조선은 전근대국가고 지금처럼 정부 정책을 언론에서 알려주는 시절도 아니었음을 기억하자. 허나 무리한 궁궐 증축은 조선 재정에 심각한 피해를 끼쳤으며, 당대 백성들 모두가 피부로 느끼던 요소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폐위 직후나 광해군이 유배 시절 주변 사람들이 광해군을 비난할 때 썼던 요소는 궁궐병과 재정파탄이 전부고, 폐모살제 같은 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인조(능양군)의 반정이 성공할 수 있었고 반정 사후에도 딱히 광해군을 옹호하는 지지세력이 나타나지 않은, 광해군 폐위의 핵심 원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인조 측의 영향인지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이 군역으로 징발을 했다는 기록 등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작 인조 2년(1624년)에 바로 광해군 시대 때 5년, 6년간이나 군사 징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이 가능하며 동시에 광해군일기에서도 궁궐을 수도 없이 지으면서도 죄다 변경에 군사를 밀어넣어서 도성 내에 군사가 3,000명 이하로 떨어질 지경이 되어 업무를 수행할 수도 없어 호위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도성 내의 군사들까지 죄다 변경에 투입하는 짓을 제발 좀 그만하라고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 수탈과 과도한 군역에 이중으로 시달려야 했던 백성들의 고생은 말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다.
또 악소배(惡少輩)를 시켜 백성들의 소와 말을 빼앗아 자재를 운반하게 하고, 개성 근처의 각 군(郡)에서 장정을 징발해 벌목한 후 목재를 강물로 떠내려 보냈다. 이로 인해 인마(人馬)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주(州)·군(郡)이 소란하니 농민들은 아예 농사를 작파해버렸다. 당시 개경 백성들에 사이에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 궁전의 주춧돌 밑에 묻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집집마다 놀란 나머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는 사람이 많았다. 악소배들은 이 틈을 타서 겁탈과 도둑질을 자행했다.
왕(上)은 완공이 지연되자 노하여 김선장과 박양연 등에게,
“만약 10월까지 완공하지 못하면 반드시 중형을 받게 될 것이고 또 하사했던 물품과 공사 비용도 추징할 것이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김선장 등이 밤낮으로 쉼없이 공사를 독촉하면서,
“재상으로부터 권무(權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재를 실어 나르되, 기한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베 5백 필을 징수하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낸다.” 는 방을 붙이니 자재를 실은 수레가 길을 메웠다. 신궁(新宮)의 처마와 문을 모두 놋쇠와 구리로 장식하면서, 백관으로부터 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분부해 두 사람당 오종포(五綜布) 1필 씩을 주고 놋쇠와 구리(鍮銅) 2근씩을 징수하니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했다.
“만약 10월까지 완공하지 못하면 반드시 중형을 받게 될 것이고 또 하사했던 물품과 공사 비용도 추징할 것이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김선장 등이 밤낮으로 쉼없이 공사를 독촉하면서,
“재상으로부터 권무(權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재를 실어 나르되, 기한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베 5백 필을 징수하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낸다.” 는 방을 붙이니 자재를 실은 수레가 길을 메웠다. 신궁(新宮)의 처마와 문을 모두 놋쇠와 구리로 장식하면서, 백관으로부터 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분부해 두 사람당 오종포(五綜布) 1필 씩을 주고 놋쇠와 구리(鍮銅) 2근씩을 징수하니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했다.
또 각 도(道)로부터 구리와 철을 거두어 세 발 달린 솥과 발이 없는 큰솥 및 가마솥을 만들어 신궁에 들여 놓았으므로 민간의 농기구는 아예 남아나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왕은 공사가 지연되는 것에 노해서 몸소 김선장·박양연·민환에게 장형을 내리니 민가와 사원의 재목·기와·주춧돌·섬돌이 모두 뜯겨져 나갔다. 그 궁실의 구조는 왕의 거소와 사뭇 달랐다.
전교하였다.
"가을이 이미 다가왔는데, 공명첩(空名帖)을 아직도 만들어 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55권, 광해 12년 8월 7일 임자 3번째기사
공명첩[77]을 발행 안 했다고 조사한다니 고금에 토목 공사를 자주 벌였던 임금 치고 말로가 좋은 경우는 드문데 광해군은 역대에서 유례가 없을만큼 새로 짓고, 꾸미는데 열심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 사업을 재개하여 1611년(광해군 3년) 완성하고 창덕궁으로 옮겼다. 중건 뒤엔 다시 창경궁을 중수했고 정원군[78]의 사저가 있던 자리에 왕기가 있다는 풍문을 이유로 돈의문 안에 경덕궁을 지었다. 이후에 영조 때 경희궁이라 했는데, 공교롭게도 정원군이 후에 추숭될 때 "경덕"이란 시호가 있어서 이를 피해 이름을 새로 지은 것이었다. 광해군이 능창군[79]을 죽이지 않고, 경덕궁 등의 궁궐 공사를 하지 않았다면 인조반정도 없었을지 모르고, 또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정원군이 팔자에도 없는 추숭 왕이 되지도 못했을 테고, 그럼 "경덕"이란 이름을 받을 일도, 후에 영조가 그 이름을 피할 일도 없었을 테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가을이 이미 다가왔는데, 공명첩(空名帖)을 아직도 만들어 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55권, 광해 12년 8월 7일 임자 3번째기사
풍수에 따라 또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며 인경궁을 짓고 북학 자리에는 자수궁을 짓는 등, 궁궐을 짓고 또 지었다. 임진왜란 때 궁궐들이 다 불탔으니 원래 있던 궁궐을 짓는다면 신하들도 반대하기 힘들었겠지만 광해군은 그런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선조때 이미 창덕궁 공사가 시작되어 거처할 궁궐을 확보했는데도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했다. 인경궁은 아예 옛 정궁 경복궁 10배 크기였다. 또한 인경궁과 자수궁은 청기와를 사용했는데 이 청기와 재조의 주 재료가 화약의 원료인 염초다. 앞의 선조나 후대의 인조 시기는 말할 것도 없이 광해군 대에도 화약이 크게 부족했다는걸 고려하면 궁궐 공사 따위에 민생은 물론 국방의 핵심 전략물자까지 소모한 셈이다.
심지어 궁궐 공사로 재정이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추가적인 군역 징발을 실시하는데 당장 광해군일기에서 광해군 14년(1622년)대를 보면 훈련 도감에서 도성 내의 군사가 3,000명도 채 안되고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들이 너무 힘들어하는데 이 상태에서 또 변경으로 보내면 궁성을 호위할 병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광해군을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80] 문제는 내치와 행정, 경제가 파탄났던 탓으로 광해군 시기 국가 전체 차원에서의 병력 수효 및 군사적 건전성은 오히려 여타 국왕 재위기보다 부실하였고 이러한 과도한 군역 부과가 국가 재정과 여민 휴식에 부담이 됐을 뿐 유의미한 국방력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이 때에서 7개월 전 훗날의 청태종이 되는 홍타이지가 병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보고를 받았던 광해군은 홍타이지에게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누르하치의 장남인 따이샨[81]의 행방을 찾으라고 정충신에게 다급히 명하기도 했고 홍타이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성 내의 호위를 거의 포기하면서까지 저렇게 닥치는대로 병력을 모아다가 보내던 것은 홍타이지가 병권을 잡은 것을 경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궁궐을 짓고 나서의 행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즉위 초에 이미 창덕궁 중건을 마쳤는데도 그곳에 계속 거처하지 않고 수시로 '좁고 불편한' 정릉 행궁(경운궁)으로 옮겨가서 거처했다. 반대를 뿌리치고 경덕궁을 중건한 다음에도 그랬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광해군의 이런 행동은 세자 시절 겪은 전쟁 후유증[82]이 주된 원인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을 통해 '죽고,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굶어죽고, 병에 걸리고, 사람이 사람을 먹고, 강간을 목도'하면서 사람들은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미신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적극으로 나서 싸웠던 세자였으니 당연히 이런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운수에 집착이 심했고 술사들을 가까이 했다.
광해군은 일찍이 이의신에게 '창덕궁은 두 번이나 큰 일을 치러서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의신은 "고금(古今)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란들은 궁궐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속히 옮길 곳은 점쳐야 합니다"고 했다. 광해군은 이후에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다. 이의신의 주장에 신료들은 격렬히 반대했으나 광해군은 이의신의 주장에 동조했다. 광해군 7년(1615년) 5월 23일에 머물고 있던 창덕궁 대조전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경운궁)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대조전은 유암불편(有暗不便)하여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창경궁으로 옮기고 싶다'고 한 것이다. 두 궁궐을 수리, 개수하라고 지시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리고 이건 수리에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는 욕구도 역시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부왕 선조의 권위가 무너지는 걸 직접 보았다. 평양에서는 군민들이 북상하려던 선조 일행을 막고 시위를 벌였다. 숙천에서는 선조의 행방을 알려주려고 벽에다가 낙서를 해놓은 백성도 있었다. 그렇게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국왕으로서 권위를 구겼다. 명군 지휘관들한테도 수모를 당했다. 선조는 명군의 최고 지휘관인 병부 시랑 송응창이나 이여송은 물론, 연대장 급 정도인 장교들과도 맞절을 했다. 선조 실록에는 선조를 면담했던 명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처소보다 국왕의 거처가 누추해서 송구스럽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83]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당시 궁궐 공사에 따른 부가세까지 얹은 것. 그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파병 요구를 해왔다. "전쟁과 토목 공사를 병행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 없다"는 상식적인 지적이 당시 신료들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궁궐 공사에 계속 집착했다. 일부 지방관들은 잘 협조하지 않아 자재 수급과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특별 어사들을 지방에 파견했다. 조도와 독운별장이다.
광해군은 궁궐 공사 재원 마련을 위해 전국에 영건 도감 소속 조도사를 내려보내 면포를 걷었다. 영건 도감 자체가 왕의 지대한 비호 아래 부패, 권력 기구화하여 정해진 수량[84]에다 방납가를 적용, 최대 100배까지 징수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던 것이다. 지방에 내려간 조도사들은 어명을 내세워 마구잡이로 징색과 횡포를 벌였다.
한가지 예로, 서자 출신인 김충보는 광해군 15년(1623) 1월, "경주 부윤 김존경이 궁궐 영건을 못마땅해하고 자신한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울로 소환하여 옥에 가두라 상소했다. 조도사가 종2품의 "고간을 잡아넣어야한다"고 직보한 것이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조도사가 취한 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 취한게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지방 수령들의 탄원을 무시하고 조도사들의 수탈을 지원했다. 한명기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 인조반정의 빌미의 싹을 텼을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내정면에서, 광해군의 나라는 그야말로 망국 직전의 아노미였다. 1619년(광해군 11년) 결국 원정군을 파병했는데도 궁궐 공사는 이어졌다. 원정군에게 필요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조도사가 삼남에 파견됐다. 영건 비용 + 원정을 위한 증세 조처가 더 해진 것! 또다시 궁궐 영건을 중단하라는 요구들이 나왔다. 하지만 광해군은 꿈쩍도 안 했다. 원정군이 후금군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경덕궁의 공사는 광해군 12년(1620) 11월경에 거의 끝났다. 하지만 인경궁 공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무렵 호남 등지에는 심각한 기근이 생겨 농민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이였다. 파견된 조도사들 사이에서도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예로 호남에 파견됐던 조도사 이창정은 농민들의 참상을 목도했다. 그래서 죄책감을 크게 느꼈다한다. 심지어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도둑질하는 신하이고 하루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루의 죄악을 더할 뿐." 조도사조차 이런 죄책감을 느꼈다. 이창정은 엘리트 관료 출신으로 지방관 재직시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폐비론에 참여해 욕을 좀 먹었다. 그래도 죄질이 그리 크지는 않다고 여겨 반정 후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당시 서인과 남인들은 쫓겨났다.
대북파도 광해군한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85] 이런 상황에서 이창정 같은 실무 관료들은 광해군의 권력에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조차 자신들을 '도둑질하는 신하'라고 했다. 한명기 교수는 여기서 '광해군 정권을 몰락을 예고'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인경궁의 건설을 끝내지도 못하고 인조반정을 맞았다.[86] 한명기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광해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집착했던 궁궐 영건 사업이 농민들을 병들게 하고 광해군 자신을 몰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87]
사실 형편을 도외시한 궁궐 공사 자체는 조선 왕조 기간 동안 가끔 있었다. 예로 태종은 재위 초기에 흉년 중에도 궁궐 공사를 감행할 정도였고 반대하는 대간들을 투옥시킬 정도로 강압적이었고, 성종도 흉년 중 세자궁 공사를 감행하였고, 문정왕후는 사찰 건립 공사로 재정과 민생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선조는 재위 말기 왜란으로 피폐한 상황에도 고려치 않고 창덕궁 중건 공사를 강행하여 대간들의 지탄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 말기인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도 경복궁 중건을 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쟁으로 나라가 완전히 피폐해진 상황에서 광해군 정도로 토목 공사를 집중시키진 않았다.
광해군이 처음에 말한 대로 경운궁, 창덕궁, 창경궁까지만 짓고 끝냈으면 임진년 이전처럼 3궁 체제를 복구한 것이니 여기까지는 할만하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더 크게 궁궐 공사를 벌리고 심지어 교하 천도까지 생각했었으니 가히 "궁궐병"이라고 할만 했다. (그나마도 죄다 풍수가,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결정한 것이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재정이 회복되지 않았고 심지어 한 궁궐이 다 지어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황기와와 청기와로 지붕을 덮도록 지시하는 등의 조치는 위에서 언급한 PTSD가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국가 재정이 멀쩡한 다른 사기였더라도 분명 과하다는 소리가 나올 수준이었다. 하물며 7년의 전란으로 재정 자체가 박살난 임란 직후의 조선이라면 그 부담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광해군의 궁궐 공사로 인한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해군 12년(1620년) 여름을 기점으로 농민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아예 백성들은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경우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그의 연임 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
광해군 14년(1622년) 10월. 전라도 나주 백성들이 목사 유석증의 유임을 위해 쌀 1,000석을 바치거나 함평 백성들이 현감 이홍망의 재부임을 위해 쌀 300석을 바친 것이 그 사례로 유석증은 임지에서 근신하면서 잘 다스렸고, 이홍망도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기록한 사관은 "백성들의 마음이 무척 감동적이다"면서 감탄하고 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돈을 바치고 청렴한 수령을 스스로 구입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여담으로 광해군의 이 궁궐 많이 짓는 일은 후금까지 소문이 나 유명했다. 누르하치는 조선 통사 박경룡(朴景龍)에게 "듣건대 너희 나라에 궁궐을 많이 짓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묻기도 했다. 이 당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날 떠나지 못하였는데, 이튿날〉 노추가 통사 박경룡(朴景龍)을 불러 묻기를 ‘듣건대 너희 나라에 궁궐을 많이 짓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기에, 답하기를 ‘왜란이 난 뒤로 궁궐을 짓지 못하다가 지난해부터 짓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쯤은 모두 끝났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큰 섬 가운데에도 성을 쌓고 궁궐을 짓는다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기에, 답하기를 ‘서울에서 3일 걸리는 거리에 강화부가 있는데, 사면이 바다로 싸여 있고, 지역도 매우 넓다. 임진년 변란 때에 서울의 선비들이 피난하기 위해 많이 들어갔었다. 성지(城池)를 수축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였습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9권, 광해 13년 9월 10일 무신 3번째기사
광해군 3년에 경제를 담당하는 호조판서 황신(黃愼)이 국가 재정이 파탄났음을 알리고,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함을 광해군에게 누차 강조한다. 호조판서 황신(黃愼)은 양전사업을 조금 더 철저하게 해서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광해군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허사로 돌아갔다.광해군일기(중초본) 169권, 광해 13년 9월 10일 무신 3번째기사
호조 판서 황신(黃愼)이 아뢰기를,
"신이 얼마 전의 계사에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보니 ‘구임(久任)시켜 성취를 책임지운다.’는 뜻으로 유시하셨기에, 신은 진실로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나름대로 생각건대, 임명을 받은 이래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재주와 국량이 부족하고 일을 처리함이 생소한 까닭에 제대로 조획(措劃)하여 구원(久遠)한 규모를 마련해내지 못하고, 전후로 힘을 들인 바라고는 소소하게 보철(補綴)하여 목전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는 국가의 재정이 점차 탕갈되어 관아에 저축해 둔 것이 없고 해관(該官)은 실직(失職)한 채 단지 허명(虛名)만 남았습니다. 이미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지 못한 데다, 또 지출을 헤아려 거둬들이지도 못하므로, 비유하자면 원천이 없는 물이 당장 말라 버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이미 말라 버린 것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당장 변통을 하여 국가의 큰 규모를 세우지 아니하면, 몇 년 가지 않아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바닥이 나서 제아무리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또한 능히 그 뒤를 선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우려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감히 구구한 견해를 하나하나 별지에 적어 아룁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만일 가능하다고 하거든, 근거없는 논의에 흔들리지 마시고 착실하게 시행하소서. 그렇게 해주시면 신이 비록 재직하다가 말라 죽더라도 조금도 한스러워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고서 신으로 하여금 그저 남의 뒤만 따라 오락가락하면서 의례적으로 책임만 때우도록 하신다면, 이는 실로 신이 평소 원하던 바가 아니고, 후일에 누적된 폐단이 더욱 고질화되어 대세가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경우, 하는 일 없이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그르친 죄가 반드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이니 신은 삼가 안타깝습니다."
하니 왕이 따랐다. 【황신은 대체로 양전제(量田制)의 운용을 변통하고자 한 것인데, 후에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44권, 광해 3년 8월 8일 을해 1번째기사
"신이 얼마 전의 계사에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보니 ‘구임(久任)시켜 성취를 책임지운다.’는 뜻으로 유시하셨기에, 신은 진실로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나름대로 생각건대, 임명을 받은 이래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재주와 국량이 부족하고 일을 처리함이 생소한 까닭에 제대로 조획(措劃)하여 구원(久遠)한 규모를 마련해내지 못하고, 전후로 힘을 들인 바라고는 소소하게 보철(補綴)하여 목전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는 국가의 재정이 점차 탕갈되어 관아에 저축해 둔 것이 없고 해관(該官)은 실직(失職)한 채 단지 허명(虛名)만 남았습니다. 이미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지 못한 데다, 또 지출을 헤아려 거둬들이지도 못하므로, 비유하자면 원천이 없는 물이 당장 말라 버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이미 말라 버린 것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당장 변통을 하여 국가의 큰 규모를 세우지 아니하면, 몇 년 가지 않아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바닥이 나서 제아무리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또한 능히 그 뒤를 선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우려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감히 구구한 견해를 하나하나 별지에 적어 아룁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만일 가능하다고 하거든, 근거없는 논의에 흔들리지 마시고 착실하게 시행하소서. 그렇게 해주시면 신이 비록 재직하다가 말라 죽더라도 조금도 한스러워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고서 신으로 하여금 그저 남의 뒤만 따라 오락가락하면서 의례적으로 책임만 때우도록 하신다면, 이는 실로 신이 평소 원하던 바가 아니고, 후일에 누적된 폐단이 더욱 고질화되어 대세가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경우, 하는 일 없이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그르친 죄가 반드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이니 신은 삼가 안타깝습니다."
하니 왕이 따랐다. 【황신은 대체로 양전제(量田制)의 운용을 변통하고자 한 것인데, 후에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44권, 광해 3년 8월 8일 을해 1번째기사
호조가 아뢰기를, 【호조 참의 장세철(張世哲)의 상소를 지난 병진년 4월 4일에 특별 전교를 인하여 입계하였었는데, 정사년 1월 3일에 비로소 내리면서 점련(粘連)하여 비변사에 계하해서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판하(判下)하였다. 】
"영의정은 의논드리기를 ‘나라의 재정이 이때보다 더 심하게 탕진된 적이 없는데, 선혜청이 이미 성과가 있었으니, 이 상소의 내용 역시 선혜청과 마찬가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만약 혹시라도 자질구레하게 방해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 가서 처리해도 됩니다. 다만 지금은 대신이 혹 외방에 있기도 하고 혹 정고(呈告) 중에 있기도 한데, 이와 같이 크게 경장(更張)하는 일은 수의(收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널리 조정의 의견을 거두어서 결정하소서. 삼가 상께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정창연은 병으로 인해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은 대신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려서 널리 의논을 모아 처리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1권, 광해 9년 1월 3일 기사 6번째기사
"영의정은 의논드리기를 ‘나라의 재정이 이때보다 더 심하게 탕진된 적이 없는데, 선혜청이 이미 성과가 있었으니, 이 상소의 내용 역시 선혜청과 마찬가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만약 혹시라도 자질구레하게 방해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 가서 처리해도 됩니다. 다만 지금은 대신이 혹 외방에 있기도 하고 혹 정고(呈告) 중에 있기도 한데, 이와 같이 크게 경장(更張)하는 일은 수의(收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널리 조정의 의견을 거두어서 결정하소서. 삼가 상께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정창연은 병으로 인해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은 대신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려서 널리 의논을 모아 처리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1권, 광해 9년 1월 3일 기사 6번째기사
호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그러니 만약 달리 조치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전결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것을 정지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세입(稅入)이 1년의 쓰임새를 다 대지 못하여서 10월등(十月等)의 반록(頒菉)과 다음해 정월등(正月等)의 반록은 매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부득이 계청해서 경기와 공홍도의 전세(田稅)를 미리 끌어다가 썼습니다.
금년에는 신들이 이에 대해 미리 염려하여, 애써 수합한 여러 가지의 작미(作米)와 작목(作木)을 이미 받아들인 것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통계내어 보니, 금년부터 내년까지 쓸 잡차하(雜上下)와 녹봉으로 반급(頒給)할 것을 제외하고도 상수(常數) 외에서 나온 나머지가 마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서 포목 5백 동과 쌀 1만 석을 선수 도감으로 이송(移送)해서 조금이나마 보태어 써서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주고, 그 이외에 부족한 숫자에 대해서는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4권, 광해 9년 4월 18일 임자 4번째기사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그러니 만약 달리 조치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전결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것을 정지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세입(稅入)이 1년의 쓰임새를 다 대지 못하여서 10월등(十月等)의 반록(頒菉)과 다음해 정월등(正月等)의 반록은 매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부득이 계청해서 경기와 공홍도의 전세(田稅)를 미리 끌어다가 썼습니다.
금년에는 신들이 이에 대해 미리 염려하여, 애써 수합한 여러 가지의 작미(作米)와 작목(作木)을 이미 받아들인 것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통계내어 보니, 금년부터 내년까지 쓸 잡차하(雜上下)와 녹봉으로 반급(頒給)할 것을 제외하고도 상수(常數) 외에서 나온 나머지가 마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서 포목 5백 동과 쌀 1만 석을 선수 도감으로 이송(移送)해서 조금이나마 보태어 써서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주고, 그 이외에 부족한 숫자에 대해서는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4권, 광해 9년 4월 18일 임자 4번째기사
호조가 아뢰기를,
"근일 병조가 부장(部將) 10인을 원록체아(原祿遞兒)로 더 차출하고는 비교해 보아서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移文)하였으며, 또 무신 겸선전관 30인을 체아직으로 더 차출했는데 부사과(副司果) 2인, 부사정(副司正) 5인, 부사맹(副司猛) 8인, 부사용(副司勇) 15인으로 계하(啓下) 받아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하였습니다. 또 병조의 관문(關文)을 보건대, 그 안에 ‘별장(別將)과 위장(衛將)은 모두 정원 외에 남아도는 관원을 신설한 것이므로 현재 남아 있는 녹체아로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사과와 부사정으로 각각 10인, 부사맹 20인을 균등하게 부록(付祿)하는 체아직으로 더 차출하고 가위장(假衛將) 이하 다관(多官)은 돌아가며 부록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런에 요즘 으레 녹봉을 지급하는 규정을 보건대, 통산 1년 사등(四等)의 녹봉이 미두(米豆)로 도합 1천 7백여 석입니다. 현재 국가 재정이 고갈될 대로 고갈되었다는 것을 상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녹봉을 나눠줄 시기가 이미 박두했는데, 정박한 세선(稅船)은 한 척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양호(兩湖)의 세선이 4월이 되었는 데도 강에 도착하지 않은 때가 언제 있기나 했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양호에서 세금으로 미두를 전혀 거두지 못했다고도 하고 유민(流民)이 길에 깔려 봄 초에 납부해야 할 미곡도 지금까지 반이나 넘게 납부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다고도 합니다. 여기에 다시 겨울과 봄의 빗물 때문에 봄 보리도 갈지 못한 채 보리와 밀이 시들어 버리고 말았으니 앞으로 참혹한 광경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경비를 철저히 절감해서 줄이는 것은 있어도 늘리는 것은 없도록 해야만 그런대로 지탱해 갈 수가 있는데, 지금 졸지에 1백 명에 가까운 관원들을 더 두고는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라 하고 있습니다. 정례적으로 나누어주어야 할 녹봉도 넉넉하지 못한데 더구나 이렇게 천만 뜻밖에 더 설치한 인원에 대한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들이 감히 구구하게 비용을 아까워하는 유사(有司)의 행태를 융통성 없이 지키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바짝 마른 나무에서 물을 찾듯이 어찌해 볼 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금방 실시했다 금방 그만둘 성격의 것이 아니고 형세상 오래도록 시행될 것이 분명한데 혹 그만한 액수만큼 더 백성에게 부과하든가 아니면 양전(量田)하는 정사를 급히 행하여 세입(歲入)을 증가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을 지은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6권, 광해 10년 4월 3일 임진 6번째기사
"근일 병조가 부장(部將) 10인을 원록체아(原祿遞兒)로 더 차출하고는 비교해 보아서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移文)하였으며, 또 무신 겸선전관 30인을 체아직으로 더 차출했는데 부사과(副司果) 2인, 부사정(副司正) 5인, 부사맹(副司猛) 8인, 부사용(副司勇) 15인으로 계하(啓下) 받아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하였습니다. 또 병조의 관문(關文)을 보건대, 그 안에 ‘별장(別將)과 위장(衛將)은 모두 정원 외에 남아도는 관원을 신설한 것이므로 현재 남아 있는 녹체아로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사과와 부사정으로 각각 10인, 부사맹 20인을 균등하게 부록(付祿)하는 체아직으로 더 차출하고 가위장(假衛將) 이하 다관(多官)은 돌아가며 부록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런에 요즘 으레 녹봉을 지급하는 규정을 보건대, 통산 1년 사등(四等)의 녹봉이 미두(米豆)로 도합 1천 7백여 석입니다. 현재 국가 재정이 고갈될 대로 고갈되었다는 것을 상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녹봉을 나눠줄 시기가 이미 박두했는데, 정박한 세선(稅船)은 한 척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양호(兩湖)의 세선이 4월이 되었는 데도 강에 도착하지 않은 때가 언제 있기나 했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양호에서 세금으로 미두를 전혀 거두지 못했다고도 하고 유민(流民)이 길에 깔려 봄 초에 납부해야 할 미곡도 지금까지 반이나 넘게 납부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다고도 합니다. 여기에 다시 겨울과 봄의 빗물 때문에 봄 보리도 갈지 못한 채 보리와 밀이 시들어 버리고 말았으니 앞으로 참혹한 광경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경비를 철저히 절감해서 줄이는 것은 있어도 늘리는 것은 없도록 해야만 그런대로 지탱해 갈 수가 있는데, 지금 졸지에 1백 명에 가까운 관원들을 더 두고는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라 하고 있습니다. 정례적으로 나누어주어야 할 녹봉도 넉넉하지 못한데 더구나 이렇게 천만 뜻밖에 더 설치한 인원에 대한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들이 감히 구구하게 비용을 아까워하는 유사(有司)의 행태를 융통성 없이 지키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바짝 마른 나무에서 물을 찾듯이 어찌해 볼 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금방 실시했다 금방 그만둘 성격의 것이 아니고 형세상 오래도록 시행될 것이 분명한데 혹 그만한 액수만큼 더 백성에게 부과하든가 아니면 양전(量田)하는 정사를 급히 행하여 세입(歲入)을 증가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을 지은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6권, 광해 10년 4월 3일 임진 6번째기사
호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비국의 계사를 인하여, 징병된 군사들이 머지않아 올라올 테니 군량을 조치해두라고 분호조 당상 및 각도 감사에게 이미 하유하였습니다.
각도의 군사를 점검하여 보낼 때에는 으레 초면(初面) 고을의 점고를 받게 되는데, 가령 공홍도(公洪道)는 직산(稷山)에서, 전라도는 여산(礪山)과 익산(益山)에서 점고를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전라도의 군대는 은진(恩津)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공홍도의 군대는 수원(水原)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경상도의 군대는 영동(嶺東)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해(平海)에서 급료를 주거나 공홍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황연도(黃延道)의 군대는 양덕(陽德)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안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강원도의 군대는 고산(高山)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는 것으로, 을사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이미 이렇게 예가 굳어졌으니, 이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평안도 군대의 경우 역시 그때 가서 변경에 도착하면 급료를 주어야 할 듯합니다. 다만 원수가 군대를 모아 조련시키는 곳의 경우는 꼭 일정한 규정에 구애받을 필요없이 분호조로 하여금 원수의 분부를 받아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이 많이 들어간 뒤에는 조금이라도 허비되는 폐단이 없도록 방량관(放糧官)이 지급하는 규정을 두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분조(分曹)가 알아서 처치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방량관은 윤수겸(尹守謙)으로 하여금 도내의 강명(剛明)한 문관이나 경관(京官)인 문음(文蔭) 중에서 엄선하여 자벽(自辟)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체로 각도가 똑같이 재정이 고갈되었는데 그야말로 옛 곡식이 다 떨어지고 새 곡식은 아직 익지 않은 날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마련해 낼 대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을 수령들도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니 그 누가 기꺼이 없는 가운데에서 그래도 마련해내어 국가의 급한 수요를 충당하려 하겠습니까. 지나는 길에서 급료로 줄 양식마저도 부족하다고 하소연할 걱정이 없지 않은데, 본조에서 미리 분조를 내어 제때에 내려보내기로 한 것은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평안도의 군량을 계속 조달할 계책을 생각하노라면 더욱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도내의 원곡(元穀) 가운데 미곡(米穀)의 숫자가 본래 적다고는 하나 그래도 추수 때 적곡(糴穀)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만분의 일이나마 지탱해 나가겠지만 지금 묘가 자라기만 할 뿐 아직 익지도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사신들이 바삐 오가고 장사(將士)의 왕래가 끊임없게 되면 계속 접대하기 어렵게 되어 하졸(下卒)이 놀라 흩어질텐데 이렇게 관가(官家)가 먼저 엉망이 된 뒤에는 설령 원곡이 있다 하더라도 수습하기가 지극히 어렵게 될 것입니다. 전일 안응형(安應亨)의 장계 가운데 ‘정확하게 어느 곳에 얼마나 양식이 비축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윤수겸은 어떻게 조치했는지의 형세를 점검하여 현재 어느 정도나 되는지 치계해야 마땅한 데도 지금까지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조의 생각에, 군대가 요양(遼陽)으로 들어갈 경우 신속히 수송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중국 조정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면 혹 은(銀)으로 미곡 값을 환산해 무역해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미곡 값이 얼마인지 그리고 중국 조정에서 양식을 지급해 줄지의 여부를 재자관 일행으로 하여금 세밀히 알아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경략의 자문 내용을 듣건대 ‘한 달 가량의 양식을 아울러 마련하고 진병할 날짜를 기다리라.’ 하였고, 또 ‘불과 2, 3백 리 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몇 길로 나누어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따라서 도로를 이미 예측하기 어려울 뿐더러 우리로 하여금 양식을 싸들고 오도록 하는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것이니, 군대가 갈 때 군량도 따라가는 문제를 아울러 미리 헤아려 생각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변경에 머물러 주둔할 때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고, 진병한 뒤에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며, 도내 원곡 숫자 안에서 가식미(可食米)133)(註 133)(가식미(可食米) : 금방 먹을 수 있는 정미(精米).) 를 덜어내고 지급할 예정인 것은 얼마이고, 장사에게 주어야 할 급료는 얼마이며, 군병에게 지급할 양은 얼마이고, 말먹이 콩으로 들어갈 양은 얼마인지 모두 계산하여 미리 아룀으로써 처치할 근거를 마련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병화(兵禍)를 입게 되면 1, 2년 사이에 끝날 수는 없을 듯한데 그럴 경우 군량을 계속 조달할 걱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쪽 백성들이 만약 하루 아침에 모조리 결딴이 나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라서 오늘날의 계책 가운데에서도 서쪽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폐해를 덜 받도록 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급무라 할 것이니, 대관(大官) 이하로부터 모두에 대한 접대 비용을 가능한 한 줄여 간소하게 하고 그릇 수를 정할 것이며, 군관 이하에 대해서는 전에 군사를 일으켰던 때의 예에 의거하여 산료(散料)134)(註 134)(산료(散料) : 감작 산료(減作散料)의 준말.) 를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 한 조목에 대해서는 비국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상기 각 조항의 일들을 모두 분조 당상 및 각도 관찰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9권, 광해 10년 6월 21일 무인 7번째기사
광해군 대 조선은 연이은 두 차례 왜란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기 전결 상태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 재정은 이러한 상황을 뚜렷이 보여준다. 호조판서 황신(黃愼)에 따르면 국가의 세입은 전쟁 전에 비해 2/10, 3/10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지출은 어느덧 전쟁 전의 규모를 회복하고 있었다. 한 해에 받아들이는 공물로는 당년의 용도를 지탱하기에 크게 부족했다. 또 임진왜란 이전 삼남 지역의 총 전결수 113만 결은 계묘양전(癸卯量田)(선조 36년, 1603년)에서 29만 결로 줄었다가, 갑술양전(甲戌量田)(인조 12년, 1634년)에서야 89만 5,000여 결로 회복되었다.[88][89][90] 광해 대에 중앙 전부가 운용한 전결의 규모는 전쟁 전의 26%, 갑술양전(甲戌量田)의 32% 수준에 불과했다.[91][92][93]"지난번 비국의 계사를 인하여, 징병된 군사들이 머지않아 올라올 테니 군량을 조치해두라고 분호조 당상 및 각도 감사에게 이미 하유하였습니다.
각도의 군사를 점검하여 보낼 때에는 으레 초면(初面) 고을의 점고를 받게 되는데, 가령 공홍도(公洪道)는 직산(稷山)에서, 전라도는 여산(礪山)과 익산(益山)에서 점고를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전라도의 군대는 은진(恩津)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공홍도의 군대는 수원(水原)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경상도의 군대는 영동(嶺東)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해(平海)에서 급료를 주거나 공홍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황연도(黃延道)의 군대는 양덕(陽德)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안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강원도의 군대는 고산(高山)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는 것으로, 을사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이미 이렇게 예가 굳어졌으니, 이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평안도 군대의 경우 역시 그때 가서 변경에 도착하면 급료를 주어야 할 듯합니다. 다만 원수가 군대를 모아 조련시키는 곳의 경우는 꼭 일정한 규정에 구애받을 필요없이 분호조로 하여금 원수의 분부를 받아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이 많이 들어간 뒤에는 조금이라도 허비되는 폐단이 없도록 방량관(放糧官)이 지급하는 규정을 두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분조(分曹)가 알아서 처치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방량관은 윤수겸(尹守謙)으로 하여금 도내의 강명(剛明)한 문관이나 경관(京官)인 문음(文蔭) 중에서 엄선하여 자벽(自辟)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체로 각도가 똑같이 재정이 고갈되었는데 그야말로 옛 곡식이 다 떨어지고 새 곡식은 아직 익지 않은 날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마련해 낼 대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을 수령들도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니 그 누가 기꺼이 없는 가운데에서 그래도 마련해내어 국가의 급한 수요를 충당하려 하겠습니까. 지나는 길에서 급료로 줄 양식마저도 부족하다고 하소연할 걱정이 없지 않은데, 본조에서 미리 분조를 내어 제때에 내려보내기로 한 것은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평안도의 군량을 계속 조달할 계책을 생각하노라면 더욱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도내의 원곡(元穀) 가운데 미곡(米穀)의 숫자가 본래 적다고는 하나 그래도 추수 때 적곡(糴穀)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만분의 일이나마 지탱해 나가겠지만 지금 묘가 자라기만 할 뿐 아직 익지도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사신들이 바삐 오가고 장사(將士)의 왕래가 끊임없게 되면 계속 접대하기 어렵게 되어 하졸(下卒)이 놀라 흩어질텐데 이렇게 관가(官家)가 먼저 엉망이 된 뒤에는 설령 원곡이 있다 하더라도 수습하기가 지극히 어렵게 될 것입니다. 전일 안응형(安應亨)의 장계 가운데 ‘정확하게 어느 곳에 얼마나 양식이 비축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윤수겸은 어떻게 조치했는지의 형세를 점검하여 현재 어느 정도나 되는지 치계해야 마땅한 데도 지금까지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조의 생각에, 군대가 요양(遼陽)으로 들어갈 경우 신속히 수송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중국 조정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면 혹 은(銀)으로 미곡 값을 환산해 무역해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미곡 값이 얼마인지 그리고 중국 조정에서 양식을 지급해 줄지의 여부를 재자관 일행으로 하여금 세밀히 알아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경략의 자문 내용을 듣건대 ‘한 달 가량의 양식을 아울러 마련하고 진병할 날짜를 기다리라.’ 하였고, 또 ‘불과 2, 3백 리 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몇 길로 나누어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따라서 도로를 이미 예측하기 어려울 뿐더러 우리로 하여금 양식을 싸들고 오도록 하는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것이니, 군대가 갈 때 군량도 따라가는 문제를 아울러 미리 헤아려 생각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변경에 머물러 주둔할 때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고, 진병한 뒤에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며, 도내 원곡 숫자 안에서 가식미(可食米)133)(註 133)(가식미(可食米) : 금방 먹을 수 있는 정미(精米).) 를 덜어내고 지급할 예정인 것은 얼마이고, 장사에게 주어야 할 급료는 얼마이며, 군병에게 지급할 양은 얼마이고, 말먹이 콩으로 들어갈 양은 얼마인지 모두 계산하여 미리 아룀으로써 처치할 근거를 마련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병화(兵禍)를 입게 되면 1, 2년 사이에 끝날 수는 없을 듯한데 그럴 경우 군량을 계속 조달할 걱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쪽 백성들이 만약 하루 아침에 모조리 결딴이 나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라서 오늘날의 계책 가운데에서도 서쪽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폐해를 덜 받도록 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급무라 할 것이니, 대관(大官) 이하로부터 모두에 대한 접대 비용을 가능한 한 줄여 간소하게 하고 그릇 수를 정할 것이며, 군관 이하에 대해서는 전에 군사를 일으켰던 때의 예에 의거하여 산료(散料)134)(註 134)(산료(散料) : 감작 산료(減作散料)의 준말.) 를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 한 조목에 대해서는 비국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상기 각 조항의 일들을 모두 분조 당상 및 각도 관찰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9권, 광해 10년 6월 21일 무인 7번째기사
광해군 시기는 피폐된 국가 운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차분히 제도적 재정비에 힘써야 할 때였다. 하지만 수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이것들 대부분은 중앙 정부의 대규모 재정 수요를 직접적으로 발생시켰다. 5개, 6개에 이르는 궁궐 공사가 한 예다. 선조 40년(1607)에 시작해서 광해군 대에 완료된 창덕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덕궁, 경운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역대 조선 왕조 전체를 살펴도, 이렇듯 짦은 기간에 궁궐 공사가 집중된 때가 없었다. 공사비는 대부분 전결에 부과하는 결미, 결포로 충당되었다.[94]
4. 인조반정과 폐위
광해군은 재위 초부터 서자라는 불안정한 위치와 수시로 후계자 선정을 번복하는 부왕 선조의 견제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자연히 자신을 지지해주는 남명 학파(조식의 문하) 인사들과 친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훗날 북인(대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만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실세가 의외로 대북(大北)이 아니라 광해군의 처남 류희분이 영수로 있는 소북이었고, 서인과 남인 대북이 공존하는 체제였으나 광해군의 잦은 옥사로 인해 광해군이 이이첨 같은 소수 대북 인물들에게 힘을 몰아주게 되었다. 그리고 폐모론이 대두되어 대북 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나 중북이 생성되었고 기자헌과 유몽인정온을 유배보내고 정창연이 은둔 할 정도로 이이첨 일파의 일당 독주를 불러오게 되었고 자연히 권력 핵심에서 멀어진 서인, 남인, 소북의 반감을 크게 사게 되었다.광해군의 끝없는 옥사는 광해군의 불안감이 너무 컸다는 걸로 설명이 된다. 물론 옥사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긴 했다. 류영경과 임해군은 모든 당파가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충성 경쟁을 했다. 하지만 강해진 왕권으로 광해군은 대북만을 키워주면서 붕당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부왕 선조만 해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을 이용해 동인들을 대거 숙청했지만, 곧바로 서인의 정철도 세자책봉 촉구 건의(건저 문제)를 빌미로 숙청하면서 동서 양당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자신의 위신을 보전했다. 반면, 광해군은 이걸 하지 못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분노는=가 대북은 물론 그 자신에게로 향하고 말았다. 실제로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그 동안의 옥사에 연루돼서 겨우 벗어나거나 유배된 상태였고, 계속되는 옥사에 그들 자신의 목숨부터 걱정해야 했다. 그들의 생각은 당하느니 먼저 치자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는 반정(反正)의 가장 근본적인 단초가 된다.
물론 부왕인 선조 때에도 중기 이후 서인과 동인이 번갈아가면서 권력을 독식하긴 했으나 기축옥사와 같은 대규모 옥사 및 견제를 통해 대대적인 물갈이가 종종 이뤄져 정권 재창출을 꾀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광해군 집권 15년간은 꾸준히 대북이 권력의 핵심을 거의 장악했다. 물론 대북 영수급의 거물인 정인홍조차 성균관 유생들의 반발을 제압하지 못할 만큼 당시 붕당도 나름대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기는 했다. 그런데 광해군 중기부터 이이첨이 대북파 실세로 부상하여 권력을 휘두르면서 변두리로 밀려난 서인이 잦은 옥사와 친국으로 생존 위기 의식까지 느낄 정도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은 광해군조차도 더 좌시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광해군 집권 후반기에는 이이첨을 견제하며 국정을 주도하고자 했다. 소용 임씨의 숙부 임취정을 중용하였고 이원익 이귀 기자헌 남이공을 귀양에서 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서인 일부 세력[96]은 권력 회복을 위해 반정을 획책했으며 끝내 이를 막을 수는 없게되어 박승종과 류희분을 비롯한 소북이 반정을 막을 계책을 논의했지만, 남인과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을 당하게 된다. 이이첨에 대한 광해군의 불안은 다음 대목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반정 당시 변장하여 안국신에 집에 머무를 때 안국신의 처에게 건넸던 말.광해군 15년(1623), 이귀, 김류, 최명길을 위시한 서인들의 반정 계획은 이미 상당히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발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귀는 대질 심문까지 주장하며 교묘하게 반정과 무관한 척 연기를 벌였고 광해군의 의심을 (잠시나마) 거둘 수 있었다. 여기에는 김자점에게 매수된 상궁 김개시의 조언도 한 몫 했다. 훈련대장 이흥립이 내통해 있었던 것도 반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정은 발각되었기에 더욱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결행되었다.[97]
어쨌든 급작스런 변고에 궁을 탈출한 광해군은 의관인 안국신의 집에 상주로 변장한 차림으로 피신해 있다가 의원 정남수의 밀고로 발견되어 반정군에 의해 질질 끌려나왔다(실록의 기록). 혹은 한강 나루터에서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다. 폐위 직후 도성의 남녀들이 왕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담장과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은 욕하기를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 들인 금은은 어느 곳에 두고 이 길을 가는가"라며 조롱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파란만장한 즉위 과정 때문에 점쟁이와 지관, 운명을 신봉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그 수많은 시도 가운데 일부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조반정의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반정 세력이 주장한 명분들 이면에 인조가 반정을 주도하게 된 계기가 그러한데, 왕기가 있다는 이유로 정원군의 가택을 몰수하였으며 이는 정원군의 아들이자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유배당해 죽은 사건까지 겹쳐져 인조로 하여금 정권 찬탈의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98]
아무튼 붙잡힌 광해군은 곧장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해 부인과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반정이 성공리에 끝나면서 북인에게 피해를 당한 서인과 남인은 북인에 대해 엄청난 처벌을 내렸는데 특히 미움을 받고 있었던 북인 권신들과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세력에게 집중되었다. 이이첨, 정인홍, 류희분을 비롯한 당대 권신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했다.[99] 이 때 왕족으로서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이 비어있는 왕좌를 접수하니 그가 바로 삼전도의 치욕으로 유명한 인조다.
5. 강화도 유배 시절
광해군은 처음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 호란 즈음에 청에서 광해군 폐위를 명분으로 내정을 흔들어보려는 공작 시도가 있자[100] 유배지를 제주도로 옮겼다. 광해군은 결국 제주도 생활 4년 4개월만에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수명으로만 따지면 조선 역대 국왕 중 네 번째로 장수한 임금이다.[101]소성대비는 광해군 부자를 죽여야 한다고 "그 부자를 씹어 먹을 정도로 시원찮다"며 흥분에 가득차 주장했지만 정작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당시 집권층인 북인들을 잔인하게 대거 숙청했음에도 유교 명분상 폭군을 내치는 예는 있어도 주륙(主戮)하는 예는 없다[102]며 대비를 뜯어 말렸다. 이는 인조와 반정공신들이 사전에 합의한 것이다.
기자헌과 유몽인 등이 반정 정권에 출사하기를 거부하고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켰다가 무고를 받아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등 북인에 대해 서인과 남인들의 가혹한 보복이 있자, 북인은 이에 대해 반발하며 역모를 준비했다. 박홍구, 임취정, 유효립 등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심복들이 인조 2년(1624)과 인조 6년(1628)에 역모를 꾸몄다가 발각이 되어 처형당했다. 주로 흥안군과 인성군을 왕위에 올리자는 거사였으나, 이것이 모두 광해군의 복위와 연루된 것이었다. 이이첨, 류희분, 박승종과 기자헌 등 광해군이 총애했던 신하들의 죽음과 박홍구, 임취정, 유효립 등의 역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광해군은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도 풀고 한참 동안이나 울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조도 할아버지 선조와 삼촌 광해군처럼 왕위에 대해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이게 되었으며, 결국 인조 자신도 흥안군과 인성군을 감시하게 된다.
흥안군은 인조의 감시를 피해 이괄의 난 때 이괄과 한명련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심기원에 의해 신하들 상의도 없이 냅다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인성군은 이후에 역모 혐의로 엮어 죽이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다만 인성군은 사후에 무고함이 인정되어 신원이 복권되었다. 사실 인성군의 경우에도 당시 법으로 보면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당시로는 왕족이면 개입하지 않아도 역모에 이름이 올라가면 죽어야 했는데 인성군은 이미 여러번 올라 있었다. 심지어 이전에 일어난 역모 사건에서는 자금까지 전달해준 정황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럼에도 광해군 자신이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이미 이이첨, 기자헌, 정인홍, 유희분, 박승종을 비롯한 북인 영수들이 대부분 숙청으로 죽어서 그의 세력에 대해 거의 씨를 말렸기 때문이고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유교 예법상 세자 때부터 30년을 군주로 섬긴 광해군을 죽이는건 시해(弑害)이기 때문이다. 왕이 패륜을 저질러서 신하들이 왕을 내쫓을 수는 있으나 죽일수는 없다는 것은 유교 고전에서 걸주 임금 뿐만 아니라 조선조 중종반정 때 연산군의 예가 있다. 실제로 폐위를 주도한 서인들도 광해군 폐위의 근거로 선조독살설을 넣거나, 또는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 절대로 반대했다.
다른 의견으로는 이미 광해군은 10년에 걸쳐 민심을 잃었기에 복위의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유교의 예법으로도 '폭군을 내치는 법은 있어도 주륙하는 예는 없다' 는 것이었고 인륜을 기치로 든 인조 정권이 광해군을 죽일 경우 반정의 명분이 꺾일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폐주'라고 해도 죽여버린다면 인조의 반정 명분에 크게 흠을 입게 되는 것이라 폐위시키는 선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무능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던 당시 인조가 광해군을 죽인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소성대비가 "광해군의 목을 베고 살을 씹겠다."란 말을 했을 때도 이들은 계속 말리며 반대했다.
인목왕후(혹은 그녀의 나인)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를 보면 소성대비가 얼마나 편집증적으로 광해군을 저주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인목왕후 입장에서는 무난하게 광해군에게 정권을 주었고, 뚜렷한 반목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기 아버지인 김제남과 아들을 죽이고, 서궁(경운궁)에 유폐시킨데다 정명공주까지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으니 원한이 안 맺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103] 그리고 광해군 몰락의 단초가 궁궐병과 소성대비의 서궁 유폐라는 점에서 인목왕후의 저주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복수를 성공하게 만든 사람은 능양군, 인조다.
사실 명에게 큰 지지조차 받지 못한 반정이었다는 점도 그의 사사를 꺼리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명나라 조정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 국왕은 충순(忠順)한데 왜 폐위시켰냐?" 라는 반응을 보냈다.[104] 반정 이후 책봉을 받으러 간 고명 사신들은 배를 타고[105]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 자사에게 "임금을 시해한 짐승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북경(北京)으로 가는 것도 방해받았다.
또한 당시 명 황제 천계제는 "왜군 3,000명을 동원해 조선 왕을 쫓아내고 능양군이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있어서 조선 사신단은 이를 해명하는데 고생이 참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22개월동안 책봉을 받지 못했다. 유교 윤리에 충실한 명나라의 동림당 계열은 책봉에 반대했지만 환관 세력과 결탁한 조정의 현실파들이 은혜를 베풀면 보답할 것이라는 현실론으로 결국엔 책봉한다. 물론 정작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광해군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한데다 군사력도 재건하지 못하여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결국 인조 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국고에서 대량으로 썼으며 이 과정에서 가도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문룡에게 은을 빌려온 것이다. 당시 모문룡은 조선 - 명 - 만주 간의 교역 중심지에 걸터앉아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것. 일설로는 이 때 약 은 10만냥에 달하는 사신 접대 비용 및 뇌물 중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왔고, 이는 나중에 인삼 등으로 갚았다는 설도 있다. 인조가 명에 바친 뇌물의 양은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바친 은의 총량을 능가했다.[106] 사실 조선이 청에게 쉽게 굴복한 것도 실상은 이 과정에서 명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상한데다 명나라 스스로가 막장 상황을 거듭하면서 재조지은을 외쳤던 이들조차도 하나 둘 등을 돌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광해군 때와 달리 인조 때에 이르면 오히려 최명길과 같은 주화파가 더 늘어났으니까. 의외로 이이첨을 비롯해서 대북 정권은 매우 강경한 주전론자들이었다. 주화론자야 해봐야 소북의 박승종과 서인 출신들 정도가 고작이었다. 단, 인조 때도 대신들은 주화론자로 대체되었지만 대간은 여전히 김상헌과 같은 주전론자였다. 물론 이후의 전개를 보면 차라리 대북의 주전론자가 싸그리 갈려간게 나았다. 그리고 모문룡은 책봉을 도운 것을 인조 정권의 아킬레스건 삼아서 갖은 패악과 행패를 부려댔다. 인조 15년(1637) 인조는 왕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으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감지하고 왕권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심기원은 이번에도 광해군을 죽이기 위해 유배지를 제주도로 바꾸는 한편 신경진과 구굉에게 살해의뢰를 맡겼다. 그러나 신경진과 구굉은 왕명도 아닌 심기원만의 일방적이고 독자적인 명령인데다가 광해군을 살해해봤자 현 정권에 이득이 될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광해군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며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서 끝냈다.[107] 현재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왔을 때 배에서 내린 곳인 구좌읍 행원리에 '광해군 기착비(光海君基着碑)'가 세워져있다.
6. 제주도 유배 시절
6.1. 광해군 기착비
광해군의 제주도 유배 생활은 실록에 기록될리가 없으므로 대부분 야사인 연려실기술에서 나온 기록들이다. 유배지에서 광해군은 가시 울타리 안에 위리안치되었고, 감시하는 군인과 계집종들에게 영감[爺爺][110]이라 불리는 수모를 받았지만,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감시하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광해군을 하방에 두는 등의 모욕적 처사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 시점에서 이미 인생 무상을 느끼고 달관했던 것일지도. 그러한 성품은 그가 유배지에서도 천수를 누리는데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이 당시 유배지 주변 인물들이 광해군을 언급할 때, 보통 후대에 광해군을 평가할 때 부정적 요소로 꼽히는 잦은 옥사나 중립외교, 폐모살제 등의 폭정은 민중들에게 그다지 와닿는 요소가 아니다 보니 언급이 아예 안 된다. 대신 '매관매직으로 민심을 어지럽혔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반정 직후 광해군이 압송당할 때 민중들이 불렀다는 노래 내용도 그렇고, 아무래도 당대 민심이 광해군을 버린 가장 큰 이유는 부정부패였는듯.
광해군의 당시 여론과 관련해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유배지에 따라간 종들 가운데 유난히 광해군에게 싸가지없이 구는 계집종이 있어서 참다 못한 광해군이 "너 왜 나한테 태도가 그따위야?"라고 질책을 했다. 그러자 그 계집종은 광해군에게 되레 “당신은 정치 왜 그따위로 했는데요? 영감이 이전에 임금 자리에 있을 때 무엇이 부족해 아랫사람들에게 음식까지 부탁해 김치판서, 잡채참판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게 했소? 영감이 임금 자리를 잃은 건 자업자득이지만,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이오?”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는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광해군이 아무리 폐주라고는 하지만 계집종이 광해군에게 저런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을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계집종이 광해군에게 막해대는 짓을 본 사람들이 광해군에게 꼴좋다고 비웃는 게 아니라 계집종의 패악하고 교만한 말에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어, '반드시 저년 저거 천벌받을 거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광해군에게 무례하게 막말을 퍼부은 그 계집종은 이후 다른 일로 인하여 좋지 못하게 죽었다고 한다. # 일개 계집종이 저런 식으로 나올 정도면 광해군의 신세가 그만큼 비참해졌거나 혹은 광해군의 평판이 최악이었음을 보여 주는데, 동시에 "그 패악하고 교만한 말에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반드시 저년 저거 천벌 받을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 그 계집종은 과연 안 좋은 일로 죽었다고 한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그럼에도 그런 광해군에 대한 동정 여론도 만만치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연려실기술에는 광해군을 '정치를 못해서 쫓겨난 거지 인간 말종은 아닌 왕'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종종 언급된다.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를 왔을 당시, 크게 슬퍼한 광해군 앞에 문안을 드리기 위해 온 제주 목사 이확[111]이 나타나 무릎을 꿇으며 "공자께서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겠습니까. '덕(德)을 닦지 않으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112]이라는 옛말을 모르십니까?"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광해군은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더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 동정 여론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도 이 계집종의 행동은 당시 기준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강상죄이기에 저런 나쁜 평가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설령 죄를 지어 폐위된 군주인 폐주라 할지라도 폐서인까지 되지 않은 이상 광해군은 사대부나 양반보다 높은 엄연한 왕족이다. 아무리 죄가 많다지만 일개 종따위가 저런 식으로 홀대하고 모욕할 수가 없는 신분이라는 뜻이다. 그나마 이 종이 당장 강상죄로 처벌받지 않은 것만 해도 제주 유배 당시의 광해군이 왕족 대우도 제대로 못받는 처지였다는 증명이다. 하긴 감시하는 아전인 별장부터가 광해군을 막 대하는 판이니. 따라서 문제의 저 종에 대한 악평은 당대에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윗전에 대한 모욕을 곱게 보지 않는 의견이 많았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마찬가지로 광해군의 실정을 신랄하게 지적했지만 윗전에 대한 예우는 철저하게 지킨 제주목사 이확이나 어느 늙은 궁인에 대해선 아무런 악평이 없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애초에 그런 문제 다 제쳐두고 저런 식으로 앞뒤 생각 않고 대놓고 막말이나 내뱉고 다니는 인간 중에 사회 생활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느냐만.
6.2. 시(詩)
제주도로 가기 직전 광해군이 남긴 시가 전해지고 있다. 인조실록 42권의 인조 19년 7월 10일 1번째 광해군 사망 기사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광해가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도로 옮겨 갈 때에 시(詩)를 짓기를,
風吹飛雨過城頭 / 풍취비우과성두
(바람 불고 비 날림에 성머리를 지나네)
瘴氣薰陰百尺樓 / 장기훈음백척루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滄海怒濤來薄暮 / 창해노도래박모
(푸른 바다에 파도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碧山愁色 帶淸秋 / 벽동수색 대청추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띠었네)
歸心厭見王孫草 / 귀심염견왕손초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客夢頻驚 帝子洲 / 객몽빈경 제자주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깨이누나)
故國存亡消息斷 / 고국존망소식단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烟波江上臥孤舟 / 인파강상와고주
(안개 낀 강 위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비감에 젖었다.
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7월 10일 갑신 1번째기사
風吹飛雨過城頭 / 풍취비우과성두
(바람 불고 비 날림에 성머리를 지나네)
瘴氣薰陰百尺樓 / 장기훈음백척루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滄海怒濤來薄暮 / 창해노도래박모
(푸른 바다에 파도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碧山愁色 帶淸秋 / 벽동수색 대청추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띠었네)
歸心厭見王孫草 / 귀심염견왕손초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客夢頻驚 帝子洲 / 객몽빈경 제자주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깨이누나)
故國存亡消息斷 / 고국존망소식단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烟波江上臥孤舟 / 인파강상와고주
(안개 낀 강 위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비감에 젖었다.
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7월 10일 갑신 1번째기사
6.3. 유언과 사후
이후 제주목사(150대)[113]였던 이시방(李時昉, 1594~1660)[114]이 광해군의 신변을 책임지고 맡았는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이시방은 반정공신의 아들이면서도 광해군을 잘 돌보았다고 한다. 이시방이 고을 사람을 잘 단속하여 밥상을 깨끗이 하여 올리자 광해군은 "대접이 전과 다르니 제주목사가 지난날 나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며 기뻐했다. 그러자 늙은 궁인이 광해군의 말을 부정하며 "대감께서 전날 신하들을 등용하고 내치는데 하나같이 후궁의 비방과 칭찬을 따랐습니다. 이 목사가 일찍이 부정한 길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던 자라면 반드시 옛 임금을 박대하여 지난 저의 행적을 덮으려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기가 이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광해군 재위 시기에는 부정부패가 판을 쳤던 시기인데 그 때 '은혜'를 받았던 속물적인 사람이라면 죄를 덮기 급급했겠지 잘해 줄 리가 없다는 소리. 광해군은 뒤에 제주목사가 이시방으로 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광해군이 숨을 거둔 것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모두 겪고 난 인조 19년 신사(1641) 음력 7월 1일로, 유폐 생활 19년에 제주에 온지는 4년 만이고 병자호란이 있은지는 5년 만이었다. 연산군과 대조적으로 유배지에서 보낸 여생이 재위 기간보다 더 길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인지 천수를 누린 것으로 보이나 60살이 넘은 노년에 제주도로 이송된 뒤에는 척박한 환경 탓에 급속도로 몸이 쇠해져 얼마 살지 못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죽기 직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근처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듯 유언을 말했다고 한다. 사실 광해군을 진짜 어머니처럼 아끼고 키워준 건 선조의 정비이자 자신의 첫 적모인 의인왕후이다. 그러나 사실상 폐모살제로 폐위된 폐군이기 때문에 의인왕후와 사실상 가까이 묻힐수 없었으므로 아쉬운대로 자신의 생모 곁에 묻어달라고 한 것. 다만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무덤 바로 곁이 아니라 그 아래 위치에 자신의 왕비였던 문성군부인 폐비 류씨와 합장되었는데 문제는 광해군의 묘 위치가 풍수지리적으로 워낙 좋지 못해서 유언이 날조된 것 혹은 유언을 악용한 것이 아닌가 보는 시각도 있다. 선대 왕이자 같은 폭군으로 폐위되어 축출된 연산군과 함께 종묘 신위에도 제외되어 종묘에까지도 모셔지지 못한 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인조와 그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에 올랐기에 복권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단 세조의 후손인 숙종이 단종을 복권시킨 사례를 봤을때 조선왕조가 더 길게 이어졌다면 종국에는 광해군이 재평가를 받아서 복권되었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인조실록에 보면 제주목사 이시방은 광해군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한양에 전하게 한 뒤에 이에 대한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광해군이 유폐된 곳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애석해하면서 만류를 뿌리치고 손수 시신의 염습(殮襲)[115]을 행하였으며, 대정현과 정의현의 수령들에게도 광해군이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서 제주목으로 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시방 자신이 제주(祭主)를 맡고 제주향교의 교생을 뽑아 집사를 맡겨서 음력 7월 4일에 시신을 입관했다.
인조는 광해군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나름 조의를 표했고 의외로 광해군의 장례에도 꽤나 신경을 써줬다. 이미 쫓겨난지 20년 가까이 지났고 죽은 사람 악독하게 대해봤자 별 소용없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명목상 '유배지 죄인'이 죽은 것임에도 고관대작이 죽었을 때처럼 3일간 조회를 정지했다. 심지어 인조는 아예 소선[116]까지 하려고 했다가, 신하들이 너무 과하다고 반대하여 하지 않았다. 인조가 소선까지 하려 했다는 말은 달리 바꿔 말하면 광해군을 '폐주'가 아닌 '선왕'으로 취급해줬다는 의미이며 반정 당시 폐모살제를 외치며 광해군을 임금으로도 여기지 않던 모습과 비교하면 달라진 취급을 엿볼 수 있다.[117]
이후 광해군의 부음을 고하면서 예조의 관리들이 불경스럽게도 광해군을 존칭하려 했다는 말이 나왔는지 당일날 예조판서가 급히 달려와 잘못을 비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광해군이 '폐위'된 것을 '손위'했다고 말했거나 다른 죄도 많은데 '민심을 잃은 것'만으로 폐위되었다고 잘못을 축소한거 아니냐는 말이 나온 것. 이에 일부 신하들은 예조가 광해군을 띄워줬다며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으나 인조는 "예조 관리들이 어찌 다른 뜻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겠냐"면서 적당히 논란을 무마시켰다.
이후 인조는 예조참의 채유후(蔡裕後)를 보내 장례를 주관하게 했다. 채유후는 제주도에 도착해 7월 27일에 관덕정 앞에서 대제(大祭)를 거행했고 음력 8월 18일에 영구가 육지로 옮겨졌다. 제주에서 1개월, 남양주까지 가는 2개월 이렇게 시신이 옮겨지는 데는 총 3개월이 걸렸다. 때가 한여름이라 한창 더웠음에도, 여러 신하들의 노력으로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6.4. 광해우 전설
[1] 왕세자를 세움.[2] 심지어 명나라에서조차 선조를 무시하고 광해군으로 왕을 바꾸려 시도했을 정도였다. 당시 명은 기세가 등등하여 일개 장군조차 조선의 왕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광해군과 이순신 정도가 그나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3] 만약 광해군이 세자로 임명되지 않았다면 임금의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불리했겠지만, 영창대군이 태어날 당시 그는 이미 세자로 책봉된지 14년이나 된 이후였다. 조선의 왕세자는 단순한 왕의 아들이 아니라 왕위계승자 직책이가 때문에 이 시점에서 적자니 서자니 따질 이유가 없다.(방계 출신이 왕이 되어도 이전 출신과 상관없이 다른 왕들과 동일하게 대접받는 것과 같다.) 영창대군을 세자로 만들려면 양녕대군처럼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왕세자를 폐세자해야 하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을 심각히 손상시키는 행위이다. 선조 입장에서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떨어뜨릴 이런 행위를 할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다.[4] 참고로 다른 왕자들의 답변을 보면 의안군은 떡, 신성군은 꿀, 순화군은 고기와 같은 지극히 자기가 좋아하는 평범한 대답을 했다 한다. 공교롭게도 이 일화 속 왕자들은 대부분 말로가 비극적이었는데, 의안군과 신성군은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일찍 요절했고, 순화군은 앞의 두 형들과 달리 인간성 자체도 막장인지라 줄기찬 대간들의 탄핵에 따른 유배와 연금 생활 끝에 역시 제 명줄에 못 죽었다.[5] 이방석은 1차 왕자의 난 이후 폐세자되어 살해당한 이후 줄곧 서자 취급을 받았지만 엄연히 후처인 신덕왕후의 아들이므로 적자이다. 숙종 때 임금의 적자에 해당하는 의안대군(懿安大君)으로 추증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부왕 성종의 계비였으므로 역시 적자이다. 선조는 하성군에서 세자로 책봉되지 않고 즉위했다.[6] 《조선왕조실록》선조 25년 6월 13일 기사부터 주 내용이 선조의 요동요동 돌림노래와 그것을 말리는 신하들의 고군분투다.[7] 전쟁 당시 왕위 계승자까지는 아니었던 일반 왕자까지 범위를 더 넓힌다면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왕자의 신분으로 이성계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절제사(節制使)에 임명되어 왜구들을 직접 토벌하고 다닌 이방과의 사례가 있기는 하다. # 농성을 포함한다면 인조도 포함되겠지만 인조는 삼남 지방 쪽으로 도망치려다 산성에 갇혀서 본의 아니게 농성한 경우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임한 경우가 아니라서 예외로 보는 편이다.[8] 단순히 파천하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 나중에 아예 나라를 버리고 중국으로 가려고 하였다.[9] 다만, 함경도는 원래부터 여러 지역 차별들로 민심이 안 좋았던데다가 전라북도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함경북도 회령으로 유배되어 오래 전부터 조선 조정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국경인 등의 순왜들이 부추긴 탓도 있으며 그럼에도 그 함경도마저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과 조선인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는 정문부의 북관 대첩으로 대표되는 의병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10]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위기 상황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공병대에 자원해 군수품 조달에 충실하였다.[11] 실제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기 전에도 의병은 일어나고 있었지만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면서 의병 투쟁이 촉매제를 얻어 더욱 활발해졌다.[12] 당시 기준으로 치자면 16세 이상으로 성인이기는 했지만 결코 분조를 지휘할 정도의 연륜도, 경험이 많을 나이도, 상황도 아니었다. 현대와 성인의 나이 기준이 현저히 다르다고는 해도 이 때 광해군은 지금 현대의 기준으로도 겨우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였다.[13] 전란 때문에 갑작스레 세자로 책봉되었고 심지어 부왕은 어려운 일을 맡겨놓고 국외로 튈려고 했었다.[14] 연배가 비슷한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등은 악명이 너무 높아 그들을 세자로 삼으려다가는 조정이 일치단결해 반발함은 뻔했고 그나마 있는 선조의 권위조차 날아갈 지경이었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은 당파를 초월해서 모든 신료들이 동의하는 사안이었고 죽이지는 말자는 온건파는 한줌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곧 "제가 뭘 잘 몰라서 역적을 용서하자고 했습니다"라고 철회했다. 무능하고 게으른 왕을 원하는 신료들은 있지만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 왕을 원하는 신료는 없기 때문이다. 충혜왕이 왜 폐위되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선조가 총애하던 신성군이 임진왜란 와중 병사한 이상 광해군을 위협할 수 있는 후계자 후보는 전혀 없었다.[15] 당시 명나라의 황제 만력제는 적자가 없고 서자들만 있었는데 원칙대로라면 황장자 주상락을 황태자로 삼아야 하지만 황제가 정귀비 소생의 황삼자 주상순을 태자로 삼을 것을 우려한 명나라 신하들은 광해군을 차남이라고 정식 세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16] 대중매체에서는 영창대군이나 선조에 의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위태했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고 그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선조가 광해군의 눈치를 봤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아버지 선조의 권위는 0에 수렴해버린 반면에 선조가 버린 조정을 이끈 광해군의 권위는 왕(선조)에 근접했는데 왕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였다. 선조가 양위 파동을 많이 일으킨 이유도 그나마 없는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이 때의 양위 파동은 숙종과 영조 시대의 양위 파동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세자 시절 광해군의 위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아이젠하워 원수급이었다.[17] 이 시점에는 이미 광해군의 가장 큰 지원군이었던 의인왕후도 세상을 떠난지 꽤 된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궁궐내에서 이렇게 가시방석에 앉는 처지의 광해군을 다독일 사람이 없었던 것.[18] 인목왕후는 집안 및 성장 배경상 역대 왕비 중에서도 소위 철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중전 시절은 물론 영창대군을 낳고 대비가 되고나서도 광해군의 어그로를 엄청 끌곤 했다. 그런 그녀마저도 광해군의 후계를 인정할수 밖에 없을만큼 광해군의 왕위 계승엔 문제가 없던 것.[19] 임해군의 행실과 당파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신하들이 죽이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정당화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 역모 사건에 한해서는 임해군이 억울했던 것은 맞다. 아예 이항복은 자신의 문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해군이 신원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임해군 옥사에 연류되어 고언백, 박명현 같은 임진왜란 때의 전쟁 영웅들이 임해군의 수하로 몰려 억울하게 숙청당했다.[20] 부왕 선조가 기축옥사 당시 정철을 내세워 동인을 제거하면서도 류성룡과 이산해 등 동인의 영수는 지켜주었고, 옥사 후에는 반대로 이용 가치가 떨어진 정철을 숙청하면서도 목숨은 살려주는 등 능수능란하게 양쪽 파벌을 쥐락펴락하며 특정 세력에 의한 권력 집중을 막고 본인이 정국을 주도한 것과는 확실히 비교된다. 인사에서는 명백히 선조보다 하수였다.[21]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120][121] 작성되고 완성되어[122] 간행되었기에[123]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124] 중 하나로 간주된다.[22] 물론 정조 사망시 추궁 끝에 맞아 죽은 강명길과 같은 예외 및 극단적인 경우는 있다.[23] 정확히는 반정 직후 서인 세력들이 소성대비를 찾아가 광해군의 처사를 결정했는데, 그때 소성대비가 광해군이 간접적으로 선조를 디스하는 정인홍의 상소 등으로 쇠약해진 선조를 홧병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소성대비는 당시 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을 보고는 극도의 흥분 상태로 말이 아니었다. 소성대비의 궁녀, 또는 소성대비 본인이 썼다고 추정되는 계축일기에도 선조가 와병 중 정인홍이 쓴 과격한 상소를 보고 몸이 상해 승하했다는 뉘앙스로 써있다.[24] 동서인들을 적절히 이간질해 자기들끼리 칼춤을 추게 만든 뒤 너도 먹고 나도 먹는 사약 레이스를 연 뒤 슬쩍 중재했다.[25] 남인 내에서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다른 당파보다 많았기 때문인지 《하담파적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은 남인이 역적을 비호하였다며 공격해 남인들 중에 죄를 받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안방준의 《혼정편록》의 기록에서 나온 이귀가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면, 대북파가 소북은 류영경의 당, 서인은 김제남의 당, 남인은 임해군의 당파로 몰아가고 있다며 대북파를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26] 이후의 전개를 보면 마음에 없이 그냥 형식적으로 해본 말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왕에 가까운 왕족의 처벌은 왕의 본심은 어떻든 신하들이 간청하면 마지못해 허락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게 미덕이었다.[27] 사실 이 정도는 일반적인 수순이다. 조선에서 언론 역할을 하는 삼사가 역모 사건에서 형식적인 말조차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28] 향리 출신으로 종2품 병마절도사로 출세할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임진왜란때 도합 257회에 전투에 참여했고 병자호란 때 한명련과 함께 이름이 언급 된 용장이다.[29] 사실 원래 계승 경쟁에서 밀려서 왕족을 죽인 경우 기록상으로는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다. 게다가 암살을 사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들은 '사망자들이 불행히 혹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서 엉엉 울었다는 식으로까지 기록되어 있다. 상대가 빼도 박도 못할 반역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서야 자기가 찝찝해서 죽였다고 그대로 대놓고 보여지기 식으로 기록되었다가는 자신과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윤국형이 광해군 당대에 쓴 갑진만록의 기록에서는 광해군이 임해군을 걱정하여 유배지에 있는 임해군의 안부를 계속하여 묻고 끊임없이 먹을 것을 내려보냈지만 임해군이 병사했다며 광해군이 임해군을 걱정했다는 식으로 광해군을 미화하는 서술을 하였다.[30] 이 때문에 초반에 임해군을 탄핵하는 상소에서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하니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31] 이순신 장군의 부하 안위와는 동명이인.[32] 김제 사람으로, 기사마다 좀 다르게 언급되는데 광해군일기 1권, 광해 즉위년 2월 26일 계미 3번째기사에서는 김위가 수문장이 아니라 남궁연이 수문장으로, 김위는 남궁연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고변했다고 나와 있으나 정작 남궁연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에 따르면 직접 본것도 아니고 남이 봤다고 떠든 것으로 봉군된 것인데, 기사에서도 "근거없이 허황한 것이 이러하였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김위를 수문장으로 쓴 기사는 광해군일기 64권, 광해 5년 3월 12일 경오 3번째기사다. 정작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윤10월 29일 을묘 2번째기사에서는 남궁연도 아니고 정승서가 수문장이며, 김위와 한패라고 적혀 있다. 이후 신율이 죽은 것에 비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김위도 인조반정 이전에 독살당해서 비명횡사했다.[33] 신립의 형 신잡의 아들.[34] 제자들 중에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 고제3 (高弟)[35] 광해군일기 중초본 94권, 광해 7년 윤8월 14일 무오 6번째기사 #[36] 이 말에 광해군이 어이가 없었는지 "대북 사람 중에 노예가 된 자가 누구인가?"라고 따지자 신경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37] 이 때문에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인홍은 자신의 제자인 신경희를 구하기 위해 평번(平反, 피의 사실을 거듭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하거나 혹은 신중히 조사하여 죄를 가볍게 해 주는 것)을 주장하였다.[38]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의 기록에 신경희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의금부가 수색하러 오자 거절하고 내놓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 # 또한 속잡록의 기록에 따르면 신경희가 체포 된 장소가 이이첨의 집이었다고 한다. #[39] 선조 후기에 북인은 여러 갈래로 쪼개져서 대북은 광해군을, 소북 중 탁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실제로 권신 류영경이 영창대군을 선조의 후계로 앉히려 노골적으로 왕위 계승을 교란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대북은 영창대군에 대한 경계가 상당한 편이었다.[40] 그러나 임해군은 실제로 말종이었던 인물이었다. 내키는 대로 살인조차 가볍게 여겼던 인물이었던지라 그에 대한 여론 자체가 정말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영창대군 처벌때는 의견이 갈렸을 때와는 달리 임해군 처벌때는 전은론을 펴던 몇몇만 빼면 죽이라고 주장했을까?[41] 단, 조선 시대식 재조사에서는 위의 분들의 심사와 어긋나는 결과가 나오는 일이 별로 없게 마련이다. 죽을 정도로 패서라도 의도한 결과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42] 박동량은 이때 반역모의는 아니지만 저주를 했다고 시인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고 반정 후 밉보여 귀양을 갔다. 풀려나자마자 사망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아들들의 항의로 복권이 되어 좌의정에 추증된다. 기재잡기의 저자.[43] 중초본 때만 있고,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었다고 한다.[44] 과거 응시 자격 영구 박탈. 사실상 관직에 빨간줄을 긋는 것.[45] 어떤 사람은 이것이 공신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왕권 정치 시절에서 왕위와 관련된 민감한 문제를 백성들이 언급할 수 있을리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6] 이이첨 일당을 제외한 대북까지도 극렬히 반대하고 소북, 서인, 남인 모두가 반대하던 것.[47] 이런 것이 가능해진 것은 더 이상 옥사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도 이이첨이 옥사를 일으키거나 소성대비를 살해하지 못하도록 박승종이 가솔들까지 이끌고 필사적으로 막은 덕분이다.[48] 그러나 광해군 역시 즉위 초 이러한 대규모의 역사와 칙사 접대에 따른 貢·役의 과중함을 주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광해군은 즉위년 3월 비망기를 내려, 조사의 접대에 만반을 기할 것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 지방의 해묵은 逋欠과 급하지 않은貢賦, 군졸들의 逃故, 토호세력의 侵凌 등의 폐단을 일체 견감, 개선하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供上하는 方物과 內需司의 일에 대해서도 감세하도록 지시하였다.20)[125] 당해 5월에 설치된 선혜청은 광해군의 이 비망기로부터 직접적인 설립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선혜청이 설립되기 두 달 전, 영의정 이원익이 사직을 청하자, 광해군은 이조, 호조, 예조의 당상으로 하여금 직접 이원익의 집에 가서 時事를 의논하고 오도록 지시하였는데21)[126], 이때의 주요 논점이 바로 비망기에 언급된 사안이었다. 광해군의 지시가 있던 다음날 좌찬성 柳根(1549∼1627), 병조 판서 李廷龜(1564∼1635), 호조 판서 金信元(1553∼1614) 등은 이원익과 논의한 내용을 광해군에게 바로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전일의 傳敎 가운데 詔使를 접대하는 일이 더욱 긴급하니, 館伴使와 遠接使를 먼저 차출해야 됩니다. 그런 뒤에 儀注·支待·用軍 등에 관계된 일은 마땅히 호조·예조·병조 등과 함께 마련하여 시행하겠습니다. 군졸들의 逃故에 대한 일들에 이르러서는 該曹에서 지금 거행하고 있습니다만 事目은 미처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이밖에 해묵은 逋欠, 긴급하지 않은 貢物 등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에 관계된 것은 일체 견면하고 혁파하고 통렬히 금하라는 것으로 전교가 있었기 때문에 차자에서 하나의 局을 설치하여 전적으로 그 일을 주관하게 하시라고 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차자의 내용대로 백성들의 일을 잘 아는 사람 4, 5원을 차출한 뒤 회의하여 마련해서 시행하게 하소서....”22)[127]...기사의 밑줄 친 부분에서처럼 각 읍의 해묵은 포흠과 긴급하지 않은 공물 등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서 ‘하나의 국’을 별도로 설치하는 방안은 이원익의 차자에서 나온 것이나, 그 논의의 발단이 된 것은 광해군의 비망기였다. 그리고 이 비망기는 사실상 즉위 초 산릉과 조사(중국사신 방문)의 일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번잡한 민역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발의된 것이었다. 위의 기사 첫 부분을 통해 보듯이 광해군은 조사의 접대를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호조, 예조, 병조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케 하는 대신, 사신 접대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다른 부역을 견감시켜주고자 했던 것이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8-10)[49] 대동법의 범주에 대해 한 가지 더 고려해 볼 점은 상정법에 관한 것이다. 대동법이 100여년에 걸쳐 시행되었다고 하는 통설에는 숙종 34년(1708)에 시행된 해서상정법이 포함되어 있다.7)[128] 상정법은 토지결수가 적은 황해도와 함경도에 시행되었으며, 강원도에도 추가로 시행되었다. 상정법은 邑勢를 고려하여 한 도내에서도 과세율에 차등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각도에 부과된 공물·역을 미·포로 대신 거두는 원칙에 있어서는 동일하였다.8)[129] 대동법은 지방민의 과세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제도였기 때문에 지역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시행되었다. 시행과정에서 경기와 삼남의 대동법은 과세율을 12두로 평준화하고, 황해와 강원, 함경도는 상정사목을 개정, 반포하는 등, 대동·상정법은 18세기 후반까지 제도적 보완을 지속해갔다.9)[130] 비록 지방관수로 쓰일 유치미를 충분히 설정하지 않았고, 광해군 스스로 정책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지 못한 점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경기선혜법은 대동법의 뼈대를 갖춤으로써 이후 대동법의 전범으로 인식되었다.10)[131]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4-5)[50] 호서대동사목에는 月課軍器를 제작할 때의 군량미는 경기선혜청의 예대로 停罷하는 대신 이를 대동세에서 지급하도록 정해 놓았다.44)[132]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17)[51] 다만 분호조의 경우, 애초에 명목이 없는 은이나 포목, 곡물 등의 재원을 중앙의 필요에 따라 조도하였던 것과 달리, 선혜청은 공물을 ‘作米’하던 관행을 공식화하여 운영함으로써 외방에서 그때그때 차출해 쓰던 현물과 노동력이 서서히 대동세 안에 수렴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인조대 삼도대동법이 시행되었다가 3년만에 폐지됨으로써 공물작미의 관행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金堉(1580∼1658)에 의해 호서지방에 대동법 시행 논의가 재개되면서 그때그때 적용되던 공물작미 방식은 폐지되고, 각도마다 고정된 대동세를 거두는 방식으로 정비되어갔다. 이처럼 경기선혜법은 17세기 전반 당면한 재정현안을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으며, 경기선혜법을 시행을 통해 정해진 원칙, 즉 공물을 일관된 기준의 대동세로 거두고, 민역 동원을 給價체제로 전환하는 방식은 이후 중앙의 재정구조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29)[52] 그러나 시행과정에서 다소 난항을 겪었던 경기선혜법은 향후 대동법 시행에 중요한 원칙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것은 잡다한 민역을 수시로 동원하는 역체계를 급가체계로 변화시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대동사목에는 각종 요역을 대동세로 지급하는 조항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러한 역체계의 변화는 향후 중앙 뿐아니라 지방재정의 지출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30)[53] 정원이 아뢰기를, "본원은 바로 옛날의 문하성(門下省)입니다. 지위가 매우 깨끗하여 여느 관서와는 자연 구별되므로 삼사(三司)의 장관에도 의망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승지가 계속 균전사(均田使)로 나가고 있으니 이미 옛 규례가 아닌데다가 이번에는 또 승지를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의망하였습니다. 정주가 비록 중요한 곳이기는 하나 일개 수령에 불과하니, 그 사이의 경중이 분명합니다. 어찌 거기에 의망할 만한 적당한 사람이 없어 굳이 근시(近侍)를 의망한단 말입니까. 전례에 없는 길을 한번 터놓으면 내성(內省)이 이로부터 가벼워지고 정사의 체모도 이로부터 매우 구차해질 것입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고쳐 의망하게 하소서. 신들은 측근의 자리에 있으면서 늘 옛 규례가 타락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기에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4년 12월 18일)[54] 사간원이 아뢰기를, "균전사(均田使)를 보내는 뜻이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절목(節目)이 번다하고 호령이 급박하게 내려지면서 허다한 전결(田結)을 조속한 시일 내에 감정(勘定)토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각 고을의 관리들이 한 때의 죄를 모면하려고만 할 뿐 뒷날의 폐단은 돌아보지 않은 채 현장 답사를 해 보지도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등수를 매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삼도(三道)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면서 즐겁게 살아보려는 뜻이 없어진 나머지 혹 다른 지방으로 옮겨 가며 그 동안 해 오던 생업을 버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그들이 생활 수단을 잃고 비탄에 잠긴 정상은 너무 참혹해 차마 보지 못할 정도입니다. 추수할 무렵 균전사를 보내면서 만약 그대로 정해 행하게 한다면 당초 균전하려고 한 뜻이 거꾸로 불균등하게 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한번 장부를 잘못 작성하면 끝없는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이니, 처음 일을 시작하는 날에 불가불 십분 상세히 살펴 신중히 해 가능한 한 균일하게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럼으로써 나라에는 부세(賦稅)가 빠져나가는 걱정이 없고 백성에게는 더 부과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먼저 각도의 감사에게 신칙하여 수령들로 하여금 시일에 구애받을 것 없이 차근차근 현장 답사를 하게 하고, 이에 대한 신보(申報)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경관(京官)을 파견해서 그 허실을 조사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명령이 번다하게 되지 않고 일에 차서가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이번의 토지 측량이야말로 백성들의 행 불행과 직결된 일인데 만약 하루라도 늦추면 백성들의 원망이 그만큼 커질 것이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속히 의논해 처리하게 하소서. 관원들이 공무를 태만히 하는 풍조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군부(君父)가 친히 임해 역적을 국문하고 있으니 지금이 과연 어떤 때입니까. 그런데 대소의 담당 관원들이 긴급한 명령을 보고도 심상하게만 여기면서 봉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정말 경악할 일입니다. 추국이 진행되는 동안만이라도 명령이 일단 내려진 뒤에 예전처럼 태만히 하며 즉시 거행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관례대로 추고만 하지 말고 일일이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광해 5년 4월 28일)[55]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아뢰기를, "기유055)(註 055)(기유 : 1549 명종 4년.) ·경술056)(註 056)(경술 : 1550 명종 5년.) 두 해의 유(劉)·염(冉) 천사(天使) 때의 문부(文簿)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기유년에 궁궐에서 쓰고 남은 쌀 1만 8천 석과 목면(木綿) 4백 동(同)을 그 해 비변사의 계사에 따라 공홍(公洪)·전라도는 토지 1결(結)에 쌀 한 말을, 영남은 쌀 다섯 되를 받아들였고, 그 해 궁궐에서 쓰고 남은 베는 토지 1결에 목면 반 필을 받아들였습니다. 경술년에는 하삼도(下三道)와 강원도의 직로(直路)에는 토지 4결마다 은가(銀價)로 목면 1필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곧 전후 별도로 복정(卜定)한 수량입니다. 대개 경기·황해·평안의 세 도는 실상 책사가 왕래하는 한 길이고, 함경도는 전부터 베를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하삼도와 강원도에 두 해 동안 거둔 베가 한결같이 이처럼 많은 데에 이르렀습니다. 이밖에 갖가지로 복정한 물건의 명목이 매우 많으니, 〈지극히 민망하고 걱정스럽습니다.〉 네 도의 전결(田結)이 통틀어 모두 32만 4천 결인데 토지 3결마다 목면 1필씩을 받아들이면 그 수량이 10만 3천 필이고, 은 1냥마다 목면 4필씩을 지급하면 은자의 수량은 2만 7천 냥이니, 염 천사 때에 쓴 것에 비교하면 반 이상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만일 또 민결(民結)에 더 배정하면 민력(民力)이 지탱하기 어려울까 걱정스럽습니다. 만일 부득이할 경우 강화창(江華倉)에 비축해 놓은 수만 섬의 쌀 중에서 1만 섬을 떼내어 경강(京江)으로 실어다가 은자를 바꾸면 1만 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도(江都)에 쌀을 비축해 놓은 것은 요새지로 만들기 위한 계책이므로 그 수량을 채워 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제사가 관리하는 회록곡(會錄穀) 5만여 섬 중에서 쌀 1만 2천 섬을 떼내어 2천 섬은 뱃삯으로 지급하고 강도로 실어다가 올해 꾸어 쓴 수량을 보충해야겠습니다. 이것도 부족할 경우에는 양호(兩湖)의 공물(貢物) 중 임자·계축·갑인년 조의 올라오지 않은 것과 을묘년 조의 지방 공물(外貢)을 아울러 무명으로 바꾼 다음 원수(員數) 3분의 2를 가지고 지방 공물의 값으로 충당하여 지급하고 1분을 떼내어 은자와 바꾸면 또한 1만여 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밖에 은자를 모집하는 사목(事目)은 호조로 하여금 옛 예를 참조하여 계품 시행하게 하면 거의 만분에 일의 비용이라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각 항의 조건들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이에 분부가 계셔서 대신에게 의논해 보았습니다. 영돈녕부사 이원익(李元翼),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행 판중추부사 심희수(沈喜壽)가 모두 의논드리기를 ‘부득이 관반(館伴)과 원접사(遠接使)의 계품에 따라 시행해야겠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또 중국 사신이 올 때에 써야 될 각항의 물건도 해조로 하여금 속히 그 수량을 따져서 마련하여 계하(啓下)된 뒤에 각도의 감사에게 하유(下諭)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강화는 중요한 요새지이니, 비록 부득이하여 그 곳의 쌀을 떼내어 사용하더라도 통영(統營)의 쌀을 빨리 옮겨다 수량을 채워 놓아야 할 것이다. 또 책사(冊使)가 장차 나온다는 뜻을 하삼도와 강원·함경 감사에게 급히 하유하여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 6년 9월 5일)[56] 호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기유년058)(註 058)(기유년 : 1549 명종 4년.) 웅 천사(熊天使)가 나왔을 때의 문적을 조사해 보니, 상께서 민력(民力)을 해칠까 염려하여 특별히 궁궐을 지을 때 받아들인 나머지의 쌀 1만 8천여 섬과 목면 4백여 동(同)을 제하여 필요한 물건을 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유(劉)·염(冉) 두 사신이 왔을 때에는 비용의 숫자가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별복정(別卜定)한 문부를 조사해 보았더니, 오늘날과 같이 엄청나게 많지는 않았는데,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유·염의 행차에 든 비용의 수가 매우 많기는 하였으나 웅 천사 때의 쓰고 남은 물건이 아직 상당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은(銀)과 삼(蔘) 이외의 범·표범·사슴·노루 등의 가죽과 자리·유둔(油芚)·종이 따위의 물건도 지금 마련하는 숫자처럼 엄청나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마련하는 것은 천사 한 사람의 행차에 쓸 숫자에 지나지 않는데도 이처럼 엄청나게 많으니, 만일 천사 두 사람이 나올 경우 장차 어떻게 마련해 낼 수 있겠습니까. 임인년059)(註 059)(임인년 : 1602 선조 35년.) 고 천사(顧天使) 때의 문부를 조사해 보니 선조(先朝)께서 특별히 각도의 삼명일 방물가목(三名日方物價木)을 취하여 천사가 왔을 때의 쓸 비용으로 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것은 기유년에 상께서 특별히 궁궐을 지을 때 남은 미포(米布)를 취하여 쓰도록 허락한 것과 전후 한 규모로서 지극하고 극진한 일입니다. 광흥창(廣興倉)과 군자창(軍資倉) 두 창고에 비축되어 있는 전세미(田稅米)가 단지 1만 5천여 섬이 있는데, 10월과 정월에 녹봉으로 나누어줄 숫자는 쌀이 2만여 섬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경기도의 갑인년 세미(稅米) 5천여 섬[133]을 10월 안에 바치도록 독촉해야만 겨우 정월에 녹봉으로 나누어 줄 때 부족한 숫자를 채울 수 있습니다. 지금 있는 수를 깡그리 털어서 은을 사더라도 그 숫자는 2만 냥에 지나지 않으므로 의논하는 자는 ‘10월과 정월 두 차례의 녹봉 지급은 장차 못 주게 될 형편이다.’하고, 혹자는 ‘백관의 정상적인 녹봉은 한두 달이라도 안 줄 수 없는 것이니, 비용으로 쓸 은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아 마련하기 어려우면 녹봉을 지급한 뒤에 받은 녹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적당량의 은자를 거둔다면 부족한 숫자를 조금 채울 수 있다.’ 하는데, 이는 부득이한 계책입니다. 의논하는 자는 ‘방물가포(方物價布)를 취하여 쓰는 일은 선조(先朝)께서 이미 시행한 예가 있다. 설사 각 도의 전지 3결(結) 당 거둔 베와 양호(兩湖)의 공물가(貢物價)를 모두 속히 상납하게 하여 은을 마련하여도 필시 4만여 냥에 차지 않을 것이다. 하유(下諭)한 뒤에 한두 달 지연되어 갑자기 강물이 얼어붙게 되면 양호의 공물가가 과연 올라올 수 있겠는가. 지금 이 허다한 물건은 결코 이리저리 주워모아서 합할 수 있거나 혀를 차면서 탄식하여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대단한 조치가 있어야 거의 이룰 희망이 있다.’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들의 계사와 지정한 물건의 계목(啓目)을 특별히 영접 도감(迎接都監)에 내려서 묘당에게 의논하도록 하여 좋은 방도를 따라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서둘러 묘당에게 상의한 다음 지정 단자를 속히 계하(啓下)하고 때에 맞추어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대신에게 의논해 보았습니다. 이원익(李元翼)은 의논드리기를 ‘저축된 재물의 고갈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지금 행할 일을 귀신이 조치하여 마련해 줄 것도 아니고 필경은 모두 백성에게서 취하여야 됩니다. 허다한 지정 물건과 전지 3결당 베를 거두는 외에도 응당 써야 될 비용이 태반이나 부족한데, 방물가목(方物價木)을 거두면 그 비용을 도울 수는 있으나 이는 상께서 재량하여 처치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직 녹봉의 지급을 정지하거나 녹봉에 따라 은냥을 거두는 두 가지 일밖에 없으니, 해부(該部)가 익히 헤아려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심희수(沈喜壽)는 의논드리기를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치 거북이의 털을 뽑는 것과 같습니다. 방물가목을 취하여 쓰자는 일은 혹시 일푼의 급함을 구할 수는 있으나 이 또한 아랫사람이 감히 쉽게 말씀드릴 것이 아닙니다. 백관의 녹봉을 감하고 은을 거두는 따위에 있어서는 똑같은 일이니, 저 방법이건 이 방법이건 간에 끝내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백관의 녹봉을 정지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다. 혹 적당량의 석수(石數)를 감하여 약간의 품은(品銀)을 거두어 쓰는 것이 괜찮을 듯하다. 정조(正朝)의 방물가목은 선조의 예에 따라 쓰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 6년 9월 10일)[57]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호조의 계사에, ‘도감의 삼수량(三手糧)으로 1년에 받아들이는 것이 2만 8천여 석[134]입니다. 금년에 비록 각도에 재해가 들어 견감해 주었고 군사의 숫자를 더 차출하였다고는 하나 갑자기 완전히 바닥이 난 것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5월치의 요미(料米)도 부족하다고 하여 본조에서 빌려다 사용하였는데 지금 또 이와 같이 계청을 하였습니다. 모두가 같은 국가의 비용이니 남의 일처럼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삼수량은 한 달에 방출(放出)하는 것이 2천 4백여 석을 밑돌지 않으니, 1년을 통계(通計)하면 거의 반록(頒祿)하는 숫자와 서로 비등합니다. 국가의 경비(經費)가 해마다 고갈되어 매 분등(分等)의 반록을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는데, 삼수량 같은 막대한 지출을 달마다 본조에다가 책임을 떠맡기면 앞으로의 경비를 참으로 잇대기 어렵습니다. 전일에 본조가, 「삼도(三道)의 삼수량을 매 1결마다 쌀 3승(升) 혹은 2승을 더 거두어 지출을 잇댈 수 있게 하는 방책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계청하였는데, 비변사가, 「도감이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혹 차인(差人)을 시켜 무판(貿販)하게 한 것은 진정으로 이러한 때의 수용(需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도감이 받아들이는 포보목(砲保木)을 미루어 옮겨다 바꾸어 쓰면 잇대기 어려울 걱정이 없습니다. 결코 민결(民結)에서 더 거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계청한 일을 상께서 계하하셨습니다. 본조에서는 다시 손을 쓸 만한 방책이 없습니다. 뒷날은 논할 것도 없이 이달치의 양료(糧料)를 마련해 줄 길이 없습니다. 비변사의 계사대로, 도감의 둔전(屯田)과 어전(魚箭)의 온갖 무판(貿辦)한 목면과 삼수량을 작목(作木)한 것과 포보(砲保)로 거두어들인 목면을 옮겨다 방출하고, 그 나머지 부족한 숫자는 도감이 다시 비변사와 상의하여 혹 쌀을 더 거두어서 별도로 처리하게 하소서.’ 한 일에 대해, 윤허를 내리시어 이문(移文)을 하였습니다. 육도(六道)의 삼수량은 1년에 받아들이는 것이 2만 8천여 석[135]인데, 으레 그해 겨울에 경기(京畿)로부터 시작하여 거두어들여 방출에 충당하는 것이 이미 영구한 법식이 되었습니다. 당초에 삼수량을 설립할 때에는 1년에 방출할 숫자를 가지고 결수를 계산하여 쌀을 거두었기 때문에 지출하기에 충분하였고, 그 당시의 군액(軍額)은 3천 몇 백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뒤 노약자는 도태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고서 잇달아 사람을 모집해 들여 날마다 달마다 증가되어 지금의 원액(元額)은 이미 4천 수백여 명이 넘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방출하는 것이 거의 2천 5백 석에 이릅니다. 이밖에도 장관(將官)의 참상(參上)과 참하(參下) 및 궁전(弓箭), 조총(鳥銃), 화약(火藥), 염초(焰硝), 서적(書籍), 별도로 만드는 신서(新書), 그리고 각청(各廳)의 감관(監官), 장인(匠人), 서리(書吏), 사령(使令), 고직(庫直), 주사(舟師), 수직(守直) 등에게 소요되는 매달의 양료(糧料) 등도 2백 50석을 밑돌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삼수량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해조에서는 매양 이러한 양료들은 삼수량에서 뒤섞어 방출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지만, 이는 도감이 삼수량을 관리하여 거두어들이게 된 뒤에 뒤섞어 방출하기를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당초 둔전을 혁파했을 때에 도감의 수용(需用)이 나올 곳이 없게 되자, 대신의 수의(收議)를 인하여 호조로 하여금 장관(將官)과 장인(匠人)의 양료 및 각종 해용(該用)에 1년 동안 지출할 2천 5백 석을 계산하여 덜어내서 도감으로 이송하게 하여, 용도에 사용하게 하였으니, 이러한 양료를 삼수량에서 방출하는 것은 또한 오래된 일입니다. 군료(軍料)를 통계하면 한 달에 방출하는 것이 2천 7백여 석이고 1년을 통틀어 3만 2천 4백여 석입니다. 이 1년에 받아들일 것으로 그 1년의 비용을 계산해 보면, 원수(元數)가 부족한 것이 이미 4천여 석인데, 지난해에는 윤달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해에 지공할 쌀 2천 4백여 석을 이미 앞당겨 끌어다 사용하였고, 또 흉년으로 인하여 하삼도(下三道)의 전결이 감축된 것이 4만 9천 2백 20여 결로, 작미(作米) 2천 7백 30여 석이 줄었습니다. 합해서 계산해 보면, 금년의 삼수량이 감축된 것이 5천 수백여 석입니다. 그리고 응당 봉납해야 할 것 가운데에, 공홍도(公洪道)의 산군(山郡)과 강원도(江原道) 영동(嶺東) 등의 작미(作米)를 올려 보내야 할 고을들이 혹 이미 올려보낸 곳도 있고 올려보내지 않은 곳도 있는데, 원수(元數)는 60여 동(同)도 되지 않습니다. 경상도는 원결(元結)의 수미(收米)가 5천 7백 10여 석이고 작목(作木)은 4백 50여 동인데, 누차 독촉을 하였으나 아직 수송해 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경기, 황해도, 공홍도, 전라도 등에서 납부하는 쌀 가운데에서 아직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을 계산하여 덜어내고 나면 실제로 봉납한 것이 1만 8천 7백여 석인데, 지난 겨울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삭반료(朔半料)를 방출하는 것도 혹 부족한 때가 있어서 또한 호조에서 빌려다가 사용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바닥이 난 것은 형세가 본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급급한 때를 당하여 만약 변통하지 않는다면 올해에만 그러할 뿐이 아니라 내년에는 더욱 심할 것이고 그 다음해는 더더욱 심해져서 장차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전일의 해조의 계사에, ‘매 1결마다 3승 혹은 2승씩을 더 거두어 지출을 잇댈 방책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일이거니와, 비변사의 계사 안에, ‘도감이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혹 차인(差人)을 보내어 무판(貿販)하게 한 것은 참으로 이러한 때의 수용(需用)을 위해서였습니다. 도감이 받아들이는 포보(砲保)의 목면을 미루어 이송해다가 바꾸어 사용하면 잇대기 어려울 염려가 없습니다. 결코 민결(民結)에서 더 거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 것은 실로 묘당이 백성들을 보존시키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만둘 수가 없는 의논이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비국과 도감은 관장하는 바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실로 도감에서는 추용(推用)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한 것입니다. 둔전의 무판은 혁파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역적 이진(李珒)의 전답만 있어서 처음에는 도감에 소속시켰었는데, 일찍이 충훈부의 계사로 인하여 반을 나누어 이송시켰고, 그대로 도감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그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전답을 빼앗았던 것들도 모두 본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나머지를 본관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 수확으로 1년에 들어오는 것이 몇 백 석도 되지 않습니다. 어전(魚箭)은 단지 하찮은 두서너 곳 있는 것을 또한 본관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는데 거두는 세금 1년치의 작포(作布)가 겨우 두세 동입니다. 서적(書籍)의 무포(貿布)와 선세(船稅)의 작목(作木)도 약간 보탤 것이 있으나 모두 각각 사용되는 곳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군향(軍餉) 이외에, 군중(軍中)의 깃발과 포장(布帳), 군인의 호의(號衣)와 호건(號巾)을 해어지는 대로 개비하는 데에 드는 비용 및 빈한한 각 초군(哨軍)들의 옷감, 북방에 방수 나가는 군인들의 장속 제구(裝束諸具), 거동할 때의 등촉가(燈燭價), 장관(將官)과 감관(監官)들의 부마료(夫馬料), 장인(匠人)과 하인들에게 매달 내려주는 옷감, 기타 온갖 잡물들의 비용이 모두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인데, 오히려 부족합니다. 그리고 각색(各色)에 비록 혹 여러 가지 조판(措辦)하는 일이 있으나 그 조판한 것으로 본색(本色)에 옮겨다 조치하고 나면 그 외의 나머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포보의 역(役)과 같은 것은 단지 군병들의 옷감만 있으니, 군병들이 믿고서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어찌 월삭(月朔)의 봉료(捧料)에 견주어 경중이 있겠습니까. 설사 여정(餘丁)의 사소한 저축이 있더라도 군수(軍需) 한두 가지를 보충하는 일이라면 그래도 혹 가능하겠으나 이것으로 허다한 군료(軍料)에 추용(推用)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호조의 계사는 방책이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고, 도감이 요리한 것도 쌀을 더 거두는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으며, 노약자들을 도태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줄이자는 것은 또한 전일의 해조의 계사가 있었으니, 앞으로의 절실하고 시급한 방책은 이 두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감이 쉽게 의논해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노약자를 도태시키는 것의 편리 여부는 마땅히 도감에서 다시 의논하여 아뢸 것이나, 쌀을 더 거두는 일은 호조로 하여금 다시 묘당과 더불어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그런데 금년 8월의 삭료(朔料)는 한 달이 단지 5, 6일 남았는데, 미루어 조용(調用)하는 일을 서로 떠넘기며 그 굶주리는 것을 멀거니 보고만 있다가 밤낮으로 호위하는 군졸들로 하여금 불만스런 마음을 갖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호조로 하여금 더욱 잘 요리해서 급급히 이송해다가 제급하여 눈앞에 닥친 근심을 구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 8년 8월 25일)[58] 호조가 아뢰었다. "천사가 나왔을 때 분정한 3결포(三結布)가 2천 3백 9동 19필[136]이고, 삼명일 방물(三名日方物)을 작포(作布)한 것이 3백 3동 6필이며, 주사에게 방수를 면제해 주고 거둔 포가 1백 51동 33필이고, 비국에서 이송해 온 여정포(餘丁布)가 2백 동이며, 본조가 계청한 경오년과 신미년·임신년 3년간 거두어 들이지 못한 노비 신공포(奴婢身貢布)를 보충해 쓴 것이 4백 2동 18필이고, 강원도와 하삼도의 감사들이 부조한 포가 38동으로, 모두 합하여 3천 4백 4동 26필입니다. 그런데 인삼을 무역한 것이 8백 58동 8필이고, 면주(綿紬)를 무역한 것이 1백 58동 6필이며, 백저포(白苧布)를 무역한 것이 23동 16필이고, 왜도(倭刀)를 무역한 것이 6동 36필이며, 우롱(雨籠)·선자(扇子)·대절묵(大節墨)·수달피(水獺皮) 등을 무역한 것이 95동 39필로, 이를 모두 제하면 남은 포가 2천 2백 62동입니다. 이 남은 포로 모두 7만여 냥의 은을 사들였으므로 원포(元布)가 부족해서 본조에 보관하고 있던 포 3백 67동을 가져다가 썼습니다." (인조 12년 7월 15일)[59] 호조의 계목(啓目)에, "국가의 경비는 오로지 세입(稅入)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국가로서는 이보다 더한 급무(急務)가 없는 것입니다. 근년에는 1년의 세입이 겨우 4만여석에 이르고 있는데 1년의 경비는 7만여석을 믿돌지 않아 부족한 숫자가 거의 반이나 됩니다. 그리하여 부득이 매년 수미(收米)하는 일이 있게 되고 이에 의지하여 어렵게 지탱하고 있는데 이른바 수미라는 것은 바로 법규 이외의 부세인 것입니다. 1년에 두번 세금을 내므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색목(色目)064)(註 064)(색목(色目) : 세금의 조목.) 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비용이 정도에 지나치므로 곳곳에서 원망이 치솟고 있으니 실로 계속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닙니다. 국가의 용도가 점점 상규(常規)를 회복하고 있는데 이미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수가 없다면 부득불 지출을 헤아려 수입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한 때의 권도(權道)인 것으로 폐할 수 없는 방도입니다. 지난번 양전(量田)에 대한 일은 난이 막 끝난 때에 거론되었었는데 거론되자마자 곧 폐기된 채 수년 동안을 미루어왔으므로 허위(虛僞)와 간람(奸濫)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등제(等第)의 고하와 결부(結負)의 다과가 모두 실제와는 틀리게 되어 있는데 그때그때 두찬(杜撰)하여 책임을 메우기만 힘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옛날의 상품전(上品田)이 지금은 바뀌어 하품전이 되었고 전의 일결답(一結畓)이 지금은 반결답(半結畓)으로 줄었습니다. 세입(稅入)이 넉넉지 못하고 국계(國計)가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이 모두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국가에서 분전(分田)을 함에 있어서는 육등법(六等法)을 두었고 수세(收稅)할 적에는 구등제(九等制)를 두고 있어 규획(規畫)이 매우 엄밀한데도 국가의 법이 시행되지 않고 인정이 타성에 젖어 세상에서 양리(良吏)라고 이름난 사람도 백성들에게 호감을 사고 은혜를 베푸는 것만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등급을 나누고 세금을 매김에 있어 모두 하지하(下之下)를 따를 뿐 중(中)이나 상(上)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답습하여 드디어 상전(常典)이 된 것입니다. 경차관(敬差官)이 복심(覆審)하는 것 또한 한바탕의 겉치레인 것으로, 각 고을에서 영송(迎送)하는 폐단과 전부(田夫)가 지대(支待)하는 비용이 끝이 없는데 반하여 국가의 경비에는 털끝만큼도 유익함이 없습니다. 세입(稅入)을 조사하는데 있어서는 전의 장부(帳簿)만을 그대로 따를 뿐 조금도 가감하는 것이 없는데, 이는 답험(踏驗)을 사실대로 하지 않고 수세를 모두 하지하를 따른 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재(水災), 한재가 지난해처럼 극심했던 경우에도 사실에 따라 급재(給災)065)[137] 함으로써 혜택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관(朝官)을 가려 보내어 재상(災傷)을 복심(覆審)했다는 것은 명칭만 있었을 뿐 실상은 조금도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지금 국가의 경비는 판탕이 극심하니 잠시라도 국가에 이롭고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편의한 권의(權宜)가 있다면 반복하여 강구해서 구시책(救時策)을 만드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각도의 전세(田稅)를 모두 하지중(下之中)으로 한정을 정하고 경차관이 복심하는 법을 제거한 다음 각 고을로 하여금 스스로 부책(簿冊)을 작성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되, 그 가운데 더욱 극심하게 재해를 입은 곳이 있으면 전부(田夫)들에게 고장(告狀)하게 한 뒤 수령이 답심(踏審)하여 그 사실을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며, 감사는 도사(都事)를 보내어 복심하여 사실에 따라 급재(給災)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세입(稅入)이 국가 경비의 근본이 되는 것인 줄 알게 되어 한두 말의 곡식을 더 바치더라도 명목없는 수미(收米) 때와 같이 억울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며, 복심으로 인한 폐단도 제거되어 반드시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1년의 세입으로 1년의 비용을 지탱하기에 충분하여 지금처럼 궤핍(匱乏)된 상황에 이르지 않을 것이며, 명목없이 수미하여 1년에 두 번 세금을 내게 하는 폐단도 이로 인하여 조금은 제거될 것입니다. 따라서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고 민정(民情)을 편리하게 하여 양쪽 모두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경기·강원도의 토질이 척박한 지역과 서북 양계(兩界)의 방비가 급박한 곳에는 1두(斗)라도 재감하여 아랫 백성을 도와주는 의리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 이익 얻는 점과 폐해를 제거하는 것을 따져본다면 몇배나 많을 뿐만이 아니어서 경중과 완급이 마땅함을 얻을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시행하면 폐단이 없을 수 없지만 또한 한 때에 시험해 보면 유익함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이 신규(新規)에 관계되어 경솔히 조처하기가 어려우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탈(定奪)해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호조의 계목에, "계하하신 것을 점련하였습니다. 대신과 의논하니,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복심법(覆審法)은 경솔히 폐해서는 안되고 하지중(下之中)으로 억지로 정하는 것 역시 백성에게 불편할 것 같다. 위의 재결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이 이러하니 위에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복심법은 방헌(邦憲)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니 경솔히 폐할 수 없다는 의논이 진실로 옳다 하겠다. 그러나 법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행하는 데 있어 사실대로 하지 않는다면 단지 백성의 피해만 가중시킬 뿐 실효(實効)에 도움이 없는 것이니, 호조의 계목도 시행해 볼 만한 것이다. (선조 39년 6월 25일)[60] 사간원이 아뢰기를, "금년의 가뭄은 전고에 없던 바입니다. 지난번에 여러 차례 기우제를 지내어 비록 비를 조금 얻기는 하였지만 곧바로 개었습니다. 이에 농가에서는 지금까지도 더욱 괴롭게 비를 바라고 있는데, 제관들은 이미 은상(恩賞)을 받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제관에게 논상하는 것을 거행하지 마소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예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니, 정원은 마땅히 미리 해사를 신칙하여 예물을 살펴보고 잘 정돈해 두고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대신이 빈청에 앉아서 독촉한 뒤에 이르러서도 느릿느릿 포장하였으며, 쥐가 파먹고 색이 바랜 물품이 섞여진 것을 해관(該官)이 삼가지 않은 탓이라고 핑계대면서 범연히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정원이 어찌 잘못한 바가 없겠습니까. 색승지를 파직하고 당해 관원을 잡아다 국문하소서. 신들이 삼가 듣건대, 삼 년 동안 농사지어서 일 년 먹을 저축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을 갖추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 국가의 경비는 7만여 석인데 세입은 4만여 석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해조가 여기저기서 끌어모으고 있으나, 오히려 부족한 숫자를 채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일용의 잡다한 차하(上下)를 만약 조선(漕船)이 오기를 기다려서 받아들이는 대로 지급해 줄 경우, 그 군색한 상황이 형언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십분 줄여야만 거의 계속 이어갈 가망이 있습니다. 나인(內人)들이 내외의 창료(倉料)를 받는 것이 비록 태평할 때의 옛 규례라고는 하나, 난후에는 경비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단지 한 창고의 요미(料米)만 받았는데, 이것도 50석이나 되어 1년 치를 합계하면 거의 7백 석이나 됩니다.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고자 할 경우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나인들에게 단지 한 창고의 요미만 지급하여서 번잡한 비용을 제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나인들이 창고에서 요미를 받는 것은 선조에서 이미 정해놓은 것일 뿐만 아니라, 대궐 안 하인들이 의뢰하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어서 지금 줄이기는 어렵다. 제관에 대해서는, 이미 비가 내렸으니 논상하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색승지는 이미 추고하였다. 이러한 때 파직시킬 수 없다." 하였다. 【이 뒤로도 연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광해 1년 5월 29일)[61] 호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조세가 들어오는 것은 많지 않은데 경비는 날로 넓어져서, 1년 동안 들어오는 쌀로 반 년의 비용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응당 서울로 바치는 수는 겨우 5만여 섬뿐인데 1년에 필요한 쌀은 10만여 섬이며, 불시에 필요한 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일을 담당하는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겨우겨우 마련하여 지탱해가고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인데, 〈실상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미년060)(註 060)(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에는 바닷가의 각 고을이 〈모두〉 매우 심한 흉작이어서 작미하여 〈서울로 바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 한하여 본색(本色)으로 바칠 것을 청하였으므로 본조에서 부득이 허락하고, 그 다음해인 경신년 조는 예전처럼 작미하여 바칠 일로 일찍이 행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건 도감의 계사를 보니 이런 공물의 작미(作米)를 도감에서 갖다 쓰겠다는 일이었는데, 계하하여 본조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대개 도감이 다른 조(曹)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이런 계사가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만약 국가의 경비가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반드시 이런 계사를 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조에 이 작미(作米)가 없다면 백관에게 줄 녹봉과 삼수(三手)에게 줄 요미(料米) 및 잡다한 비용과 뜻밖의 수요를 어떻게 계속 댈 수 있겠습니까. 〈비단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중국 사신의 접대를 모두 이런 공물을 가지고 하였는데, 긴요하고 긴요하지 않은 것에 따라 혹은 쌀·베·은·인삼·종이로 바꾸어서 이쪽을 덜어 저쪽을 보충하는 식으로 형편에 따라 요리하며 지탱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이것을 잃는다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諸道)의 산간 지방 각 고을의 공물은 분호조 참판 윤수겸(尹守謙)과 분호조 참의 이창정(李昌庭) 등이 관할하여 작목(作木)하고 작미(作米)해서 전적으로 서쪽 변경의 군량으로 넘겨주고 있으니 관계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이 정해지기 전에는 또한 다른 용도에 쓰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경비와 군대의 양식은 모두 긴급한 일에 속하니, 대신들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광해 12년 6월 15일)[62] 미세하게나마 일만석 정도가 더 늘었다. 다만 이보다 몇만석 정도가 더 늘었다고 볼 수는 있다.[138] 광해군 말년에는 십만석 정도가 되었던 듯하다.[139][140][63]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141]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142][143] 작성되고 완성되어[144] 간행되었기에[145]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146] 중 하나로 간주된다.[64] 다만 창덕궁 공사 자체는 선조가 시작했고 광해군 2년 대에 완성되었으니 실질적으론 선조가 추진한 공사였다.[65]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147]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148][149] 작성되고 완성되어[150] 간행되었기에[151]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152] 중 하나로 간주된다.[66] 장정수(2020),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 교섭과 ‘藩胡規例’", 《明淸史硏究》 54.[67] 장정수(2020),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 교섭과 ‘藩胡規例’",《明淸史硏究》 54, p. 26~44.[68] 용천에 명 감군어사가 이끄는[69] 장정수(2020), "17세기 초 조선의 대(對)건주여진·후금 교섭과 조(朝)·명(明) 군사공조의 실상", 《역사와 실학》 73.[70] 고윤서(2004), "광해군대 조선의 요동정책과 조선군 포로", 《동방학지》 123; 계승범(2005), "조선감호론 문제를 통해 본 광해군대 외교 노선 논쟁", 《조선시대사학보》 34; (2007),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193; 장정수(2020), "17세기 초 조선의 대(對)건주여진·후금 교섭과 조(朝)·명(明) 군사공조의 실상", 《역사와 실학》 73; (2020), "조선의 대(對)명 후금 이중외교와 출병(出兵) 논쟁의 추이", 《한국사연구》 191.[71] 후방에서 지원하는 보급부대[72]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184~196.[73] 1626년(인조 4년)까지 사용한 누르하치의 인보로, 당시 신여도(申汝櫂) 및 몽학 통사(蒙學通事)는 이를 후금천명황제(後金天命皇帝)로 풀이했다. # 광해군은 처음에 누르하치를 건주위부하 마법(建州衛部下馬法), 건주위 마법 족하(建州衛馬法足下)로 지칭하고자 했으나, 번복하여 후금 황제로 칭하고자 했다. 그러나 《구만주당(舊滿洲檔)》 5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전달된 답신에는 건주위 마파 족하(giyanjo u mafai bethei fejile)로 지칭되었다.[74] 계승범(2005), "조선감호론 문제를 통해 본 광해군대 외교 노선 논쟁", 《조선시대사학보》 34; (2007),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193.[75] 계승범(2007),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193; (2019), "삼전도항복과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 , 《조선시대사학보》 91.[76] 계승범(2007),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193; (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p. 171~172; (2019), "삼전도항복과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 , 《조선시대사학보》 91; (2021), 《모후의 반역》, p. 300;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75~286.[77]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매관 매직 수단[78] 광해군의 이복 동생, 인조의 아버지[79] 정원군의 3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친동생으로 신경희, 소명국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다가 치가 떨려 스스로 자결했다.[80] 인조는 이 탓인지 광해군과는 정반대로 도성 내의 군사를 기르는데 주력했고, 또 이괄의 난까지 합쳐지자 광해군과는 달리 변경에 군사를 배치하려는 일을 정묘호란 직전까지 심하게 꺼렸으며 군사 훈련 역시 막았다.[81] 실록에는 귀영개로 나오고 사실 차남이지만 장남인 추잉이 죽었기에 차남인 그가 적장자였다. 또한 반조선파인 홍타이지와는 달리 그는 친조선파였고 그렇기에 주목했다.[82] 의학적으로 PTSD라 표현하는 그것.[83] 한명기, 광해군, 142쪽 ~ 146쪽[84] 1개도에서 50필 ~ 100필 가량[85] 이로 봐도 당시 광해군 정권은 레임덕이 심각한 상황이었다.[86] 한명기, 광해군, 149쪽~154쪽[87] 한명기, 광해군, 154쪽[88] 경상좌도 양전사(量田使)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평시 원장부에 올라 있는 전결은 16만 9천 5백 75결인데, 계묘년 양전 때에는 시기전(時起田)·잡탈전(雜頉田)을 합쳐서 6만 8천 5백 60결이었고, 금년에 새로 측량한 것은 진기전(陳起田)·잡탈전을 합쳐서 모두 15만 9천 5백 75결이며, 시기전은 10만 1천 4백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2월 28일)[89] 전라좌도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치계하였다. "신이 관장하고 있는 좌도 25개 고을의 타량(打量) 총수는 묵는 토지나 경작하는 토지를 모두 합쳐서 도합 12만 3천 2백 60결로서, 평상시의 총수에는 3만 7천 40여 결이 모자라고, 계묘년 양전 때의 총수보다는 5만 3천 2백 20여 결이 더 많은데, 여기에서 면세전 5천 결을 제하고 나면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실수(實數)는 7만 6천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3월 7일)[90] 하삼도(下三道)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였다. 전라좌도는 12만 4천 2백 62결 2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8만 2천 5백 1결 28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전라우도는 21만 1천 43결 28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1만 9천 9백 27결 92부 9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좌도는 15만 9천 1백 80결 65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1천 8백 48결 8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우도는 14만 2천 5백 44결 7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5천 6백 76결 2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좌도(公淸左道)는 11만 7천 7백 34결 13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5만 8천 7백 69결 1부 2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우도는 14만 7백 26결 65부 2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7만 2천 2백 39결 3부 6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다. (인조 13년 7월 24일)[91] 경상좌도 양전사(量田使)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평시 원장부에 올라 있는 전결은 16만 9천 5백 75결인데, 계묘년 양전 때에는 시기전(時起田)·잡탈전(雜頉田)을 합쳐서 6만 8천 5백 60결이었고, 금년에 새로 측량한 것은 진기전(陳起田)·잡탈전을 합쳐서 모두 15만 9천 5백 75결이며, 시기전은 10만 1천 4백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2월 28일)[92] 전라좌도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치계하였다. "신이 관장하고 있는 좌도 25개 고을의 타량(打量) 총수는 묵는 토지나 경작하는 토지를 모두 합쳐서 도합 12만 3천 2백 60결로서, 평상시의 총수에는 3만 7천 40여 결이 모자라고, 계묘년 양전 때의 총수보다는 5만 3천 2백 20여 결이 더 많은데, 여기에서 면세전 5천 결을 제하고 나면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실수(實數)는 7만 6천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3월 7일)[93] 하삼도(下三道)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였다. 전라좌도는 12만 4천 2백 62결 2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8만 2천 5백 1결 28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전라우도는 21만 1천 43결 28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1만 9천 9백 27결 92부 9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좌도는 15만 9천 1백 80결 65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1천 8백 48결 8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우도는 14만 2천 5백 44결 7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5천 6백 76결 2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좌도(公淸左道)는 11만 7천 7백 34결 13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5만 8천 7백 69결 1부 2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우도는 14만 7백 26결 65부 2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7만 2천 2백 39결 3부 6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다. (인조 13년 7월 24일)[94]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95] 광해군이 반정으로 폐위되고 유배를 떠나자. 한성아이들이 광해군을 조롱하며 부른 노래다. 그간 있었던 광해군의 매관매직과 축재를 비꼰 것이다.[96] 그 세력 중에는 김자점, 이귀, 김류, 심기원, 최명길 등이 있다.[97] 당시 반란의 주도자 중 하나였던 김류는 실패 가능성이 커지자 거사 참여를 미루고 군사를 늦게 출동하는 등 홀로 내빼려던 비겁한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98] 민담에 따르면 광해군이 가족 계획을 위해 만든 부적들도 있는데, 낙태에 효험이 있다는 명성이 드높아 심지어 구한말까지도 최고가에 거래되었다고 한다.[99] 박승종의 경우 오히려 반정공신들이 사형을 반대했지만 인조의 처벌의지가 매우 강했기에 만약 자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100] 실제로 정묘호란의 명분은 "광해군의 복수"였다. 강홍립을 같이 파견하기도 했다.[101] 1위는 영조(81세), 2위는 태조(72세), 3위는 고종(68세).[102]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폐출된 임금은 신자가 감히 형륙(刑戮)으로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도한 임금으로는 걸(桀)·주(紂) 만한 이가 없었으되 탕(湯)·무(武)는 이를 추방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내리신 하교는 신들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자성(慈聖)께서 폐군에 대하여는 천륜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아들이 비록 효도하지 않더라도 어머니로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교는 차마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하였다.(인조 1년 3월 13일)[103] 물론 이전에 치부에 열심이었다거나 영창대군의 옷을 세자처럼 입혔다는 등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적은 있지만 적어도 선조가 전위나 섭정의 명을 내렸을 때부터 폐모론이 일기까지 한번도 광해군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그냥 광해군이 의심병이 도져 자폭스위치를 누른 셈.[104] 옛날의 전례를 복기해서 연산군이 폐위됐을 때를 살펴보자면 반응이 좀 달랐는데 우선 명나라에 연산군이 폐위당한 게 아니라 아들을 잃고 정신병이 생겨서 동생에게 선위하고 띵까띵까 놀고 먹는 중이라고 보고를 해서 명나라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긴 반정이 아니었고 명나라는 정보력이 시망이었는지 아님 워낙 막장짓을 일삼던 연산군의 폐위를 굳이 물고넘어질 이유가 없어서인지 연산이 죽은 지 30년이 넘도록 '연산군 잘 지내냐?'라는 소리나 했다.[105] 광해군 말엽에 후금이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으면서 명나라로 통하는 만주의 육로가 차단돼서 해로밖에 길이 없었다.[106] 여기서 명지대 한명기 교수는 <병자호란 다시읽기>에서 애초에 허울뿐인 반정의 명분도 쇠퇴했다고 평가한다.[107] 정작 그 심기원은 본인이 역모를 꾸미다가 죽었다.[108] 종5품의 관직으로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부지사 겸 제주시장의 위치와 같았다.[109] 판관에게 별도의 관아를 따로 배정한 것은 유일하게 제주목에서만 시행되었던 제도로 지리적으로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어 제주목사가 제주목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체의 행정과 군사를 모두 담당해야 했기에 제주목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주목만의 업무를 판관에게 전적으로 맡긴 결과였다. 그 탓에 제주목사는 주로 정3품 당하관이 목사로 임명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정3품 당상관이 임명되는 '행 목사'인데다가 제주목관아는 정3품 아문이지만 종2품 아문인 감영의 다른 명칭인 포정사의 명칭과 부속건물의 이름으로 감영과 병영에서만 쓸 수 있는 '각'의 사용을 유일하게 허락받았다. 또한 민간에서는 판관이 근무하는 찰미헌을 '이아', 제주목관아를 '상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찰미헌은 일제강점기때 헐려 제주자혜의원이 들어선 후 제주도립병원, 제주의료원을 거쳐 제주대학교병원이 아라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병원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제주대학교 창업보육센터와 예술공간 이아가 자리잡고 있는데 병원으로 쓰이는 동안 지하공간이 개발되어 기단부가 훼손되어 있는 바람에 발굴조사가 불가능한 실정이다.[110] 당상관에 대한 경칭으로서의 '영감'이 아니라, 진짜 요즘 뉘앙스로서의 '영감'으로 번역한 것이다. 즉, 감시하는 자들이 광해군을 노인네야 내지 할아범탱이라고 격하해 부른 것.[111] 광해군이 이배된 것이 인조 15년(1637)이며, 당시 제주목사는 이확. 이확은 폐모론에 반대했으며 반정 당일 돈화문을 수비하던 중 반정이 일어나자 문을 열어 반정군의 입성을 도왔다. 그러나 반정 후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이귀의 만류로 살아남았다.[112] 오기(전국시대)의 말로, 주군인 위 무후가 배를 타고 순시하던 중 험준한 산을 보고 감탄하며 이 험준함이 자국의 보배라고 하자, 옆에 있던 오기가 "(나라가 의지할 보배는) 산세의 험준함이 아니라 덕을 닦는 것입니다. 주공께서 덕을 닦지 않으신다면 이 배에 탄 자들이 모조리 적국이 되어버릴 것입니다."라고 했고, 무후는 "좋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했다.[113] 인조 18년(1640년) 9월부터 인조 20년(1642년) 8월까지 재임했다.[114] 반정 공신 이귀의 아들이고 이시백의 동생이다.[115] 시체가 썩지 않도록 예를 다하여 모시는 일[116] 素膳, 생선이나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상차림을 말한다. 조선 왕조에서 임금은 선왕, 왕실의 친인척, 아끼는 신하 등이 죽으면 소선으로 식단을 짜는 전통이 있었다. 태종이 죽기 직전 세종대왕은 고기반찬이 없으면 식사를 못하니 자기가 죽더라도 소선하지 말라고 한 일화가 유명하다.[117] 사실 인조는 20년 간 임금 노릇하면서 속된 말로 현타가 많이 왔을 것이다. 우선 폐모살제의 명분이었던 인목왕후와 그 딸 정명공주 부부의 한심한 처세술을 보면서, '영창대군이 살아있을 때는 오죽했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을 테고, 국제사회의 냉혹한 법칙을 무시하고 명분만 쫒았다가 두 번의 호란으로 굴욕이란 굴욕은 다 당해보면서 광해군에게 일종의 동병상련 같은 마음이 들었을 듯. 실제로 인조는 인목왕후가 승하하자마자 정명공주 내외를 철저하게 견제했고, 이 부부는 철저하게 숨죽여 살아야 했다.[118] 제주도 민요해설(성문사)에 의하면 관련 민요 가사까지 있다. 발췌하자면 "칠월이라 초하룻날은 칠월이라 초하룻날은, 임금대왕 관하신(돌아가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오람서라.(날이 가물다가도 비가 오는구나)"[119] 실제로 음력 7월에 해당하는 7월 말에서 8월 중순 사이에 제주도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한다.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 기간이라서 이 고기압대 가장자리에 들게 되고, 찬 공기가 유입되면 그 대기 순환으로 소나기성 비가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2014년 음력 7월 1일(양력 7월 27일) 전후 총 나흘간 1㎜의 비가 이어졌고, 2015년에는 음력 7월 1일 이틀 후인 양력 8월 16일 74.6㎜의 많은 비가 내렸으며, 2016년 음력 7월 1일(양력 8월 3일)과 2017년 음력 7월 1일(양력 8월 22일)에도 비가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