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예종의 왕자에 대한 내용은 인성대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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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인성군파의 역대 종주 | ||||
인성군가 역사 시작 | ← | 1대 인성군 이공 | → | 2대 해평군 이길 |
조선 선조의 왕자 인성군 仁城君 | ||
봉호 | 인성군(仁城君)[1] | |
시호 | 효민(孝愍) | |
본관 | 전주(全州) | |
이름 | 공(珙) | |
호 | 백인(百忍) | |
부왕 | 선조 | |
생모 | 정빈 민씨(靜嬪 閔氏)[2] | |
부인 | 군부인 해평 윤씨(海平 尹氏) | |
자녀 | 슬하 5남 2녀 | |
생몰 기간 | 음력 | 1588년 10월 29일 ~ 1628년 5월 20일 |
양력 | 1588년 12월 17일 ~ 1628년 6월 21일 | |
묘소 |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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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서7남으로, 어머니 정빈 민씨에게는 장남이다. 전주 이씨 인성군파의 파시조이다.친남매들로는, 남동생으로 인흥군, 누이로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가 있다.
2. 생애
1588년 12월 17일(음력 10월 29일)에 한성부 창경궁에서 태어났다. 5살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평안도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정유재란 발발 시엔 평안도 성천으로 옮겼고, 그 해 음력 12월에 한성으로 돌아온 이후 인성군(仁城君)으로 봉해졌다. 1603년 음력 3월 9일 형조판서를 지낸 해평 윤씨 윤승길의 딸과 혼인했다.[6] 1년 뒤 이복 형 순화군, 이복 동생 의창군과 함께 호성원종공신[7] 1등 중 한 명이 되었다.이복 형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사옹원과 종부시[8]의 도제조[9]를 맡았다. 그러나 1612년 길에서 조정의 대간을 보고도 아무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채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가 탄핵을 받았고, 1615년 8월에는 조카 능창군과 관련된 역모에도 엮여 유배를 떠났으나 모두 광해군이 봐줘서 별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몇 번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인성군은 광해군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편들었다. 우선 영창대군의 폐위에 단순히 찬성하는 것을 넘어서 사사에도 적극 참여했고 아예 영창대군의 죄를 논하는 데에 참석하지 않은 종친들을 파직시킬 것을 주장했다. 또 종친들을 이끌고 인목왕후[10]의 폐출 여론을 모으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한 후에 처벌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인조가 봐주어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한동안 왕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았으며, 간간히 문제가 터진 게 있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인조가 눈 감아주어 별탈 없이 지냈다.[11]
그러나 다음 해인 1624년 11월에 폐주 광해군을 상왕으로 올리고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고변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해 당시 수많은 대신들이 인성군의 유배를 주장했으나, 인조는 인성군이 역모를 주도한 무리에 가담한 흔적이 없어 벌을 줄 수 없다 하여 계속해서 처벌을 미뤘다. 그러나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는 상소는 수도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를 이기지 못한 인조는 1625년 음력 2월, 인성군에게 유배령을 내리고 강원도 간성으로 보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도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물자도 부족하지 않게 했다. 유배 간 날 인조는 인성군의 아들 해평도정에게 직접 인성군이 유배를 가게 된 사정을 말해줬을 뿐 아니라 다음날에는 인성군에게 교자와 어의, 호위병 등을 붙여주었다.
한편 이 해 10월에 검열[12] 목성선 등이 인성군에게는 죄가 없으니 풀어주라는 상소를 올렸고 그 직전에 인성군의 유배지에 다녀온 아들 해평도정이 인성군이 중병을 앓고 있다고 하자, 인조는 인성군을 석방시키도록 명했다. 그러나 곧바로 대간에서 목성선의 상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계속해서 반박을 하는 바람에, 인성군은 풀려나지 못하고 원주로 옮겨졌다. 이후 인조는 인성군에게 지속적으로 의원과 약, 옷감 등을 보내주었고 1년 뒤인 1626년 11월 인성군의 생모 정빈 민씨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인성군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난 1628년 음력 1월 3일, 또 당시 세마[13] 유효립 허유 등을 비롯한 이들이 일으킨 역모에 인성군이 참여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이때는 인목대비까지 나서서 인성군을 처벌하라 했고, 종친들도 매일같이 인조를 찾아와 인성군에게 벌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인성군은 1월 21일 전라도 진도로 유배갔다. 다만 그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받았다.
1628년 음력 3월 4일에 또다시 임취정이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인조 6년 3월 4일 을축 1번째기사
3. 사망
그러나 이미 3번이나 역모에 엮인 왕족이라 위험인물로 찍힌 그가 살 길은 거의 없었다. 대신들은 계속해서 인성군을 죽일 것을 청했고, 결국 1628년 5월 14일 인성군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였다. 6일 후인 음력 5월 20일 인성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향년 41세로 생을 마감했다.인성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인조는 장례를 높은 왕족들의 예로 치를 것을 명했으나 이 역시 대신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그냥 형식적으로, 그러나 부족하지는 않는 선에서만 지내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1631년에 발각된 북인들의 역모사건인 정한추대사건에서 북인 잔당들이 광해군을 복위하고 인성군의 아들을 동궁(세자)으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2월 3일 정미 1번째 기사 참조
한편 계속해서 유배지에 남아있던 인성군의 가족들은 제주도로 옮겨졌다. 이후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1629년에, 1633년에는 인성군의 아들들이 풀려났다. 1637년 3월에 인조는 인성군의 관작도 모두 회복시켰다. 1739년 영조가 그에게 시호 '효민(孝愍)'을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으며 부인 윤씨와 합장한 묘이다. 1986년 3월 14일 의정부시의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받았다.
4. 왜 인조는 인성군을 비호하려 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들에게 왕족들은 잠재적인 위협자였다. 그래서 때때로 아무런 혐의나 죄도 없는데 죽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물며 물론 본인이 직접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14] 이미 역모 사건에 3번이나 엮였던 인성군이다. 더군다나 반정으로 집권한 군주인 인조가 저런 상황에서도 폐모살제 찬동 전적을 가지고 있는 탓에 대왕대비 인목왕후까지 비호하지 않는 인성군을 어떻게든지 살려내려고 했던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아 보인다.다만, 광해군을 폐모살제를 했다는 명분으로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가 재위 초반에 다시 옥사를 일으키기엔 부담을 느껴 그러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왕족들이 이미 수없이 많이 죽어나간 상황에서 남은 종친들마저 죽이기 꺼렸을 수 있다.
이괄의 난에 엮여 죽은 흥안군 이제가 있지 않냐고 할 수 있지만 그 경우는 전혀 다르다. 흥안군은 대놓고 역적 인증을 했기 때문이다. '일어날' 난이 아닌 실제로 일어난 난에서 단순한 추대 대상을 넘어 본인이 내통한 후 직접 이괄의 편으로 투신하여 잠시나마 임시 군주로 있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15]
5. 가족과 후손
군부인 윤씨 사이에서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해평군 이길이며, 차남은 해안군 이억이다. 해안군은 서백부 순화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3남은 해원군 이건, 4남이 해령군 이급, 그리고 5남은 해양군 이희이다. 장남 해평군에게는 아들이 없어 셋째 아우 해령군의 3남 광선군을 계자로 삼았다.광선군은 기안도정, 기성정 두 아들을 두면서 후손이 이어진다. 3남 해원군은 화창군, 화선군, 화산군, 화춘군, 화천군, 화릉군 등 6남을 두었다.
4남 해령군은 광평군을 비롯한 9남을 두었다.
막내 아들인 해양군은 셋째 형인 해원군의 3남 화산군을 입계하여 후손을 이어가고 있다.
인조의 이복동생 능풍군이 후사없이 요절하자 고종 대에 그의 서손자 광천부정 이정이 광천군으로 사후 추증되어 능풍군의 양자로 입적된다.[16]
그의 종가에서는 현대에 상당히 사회적으로 두드러진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인성군의 10대 종손이 바로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상공부 장관을 지냈던 이재형이고 그 동생이 DL그룹 창업주 이재준이다. 당연히 이재준의 아들 이준용과 그 손자 이해욱 역시 인성군의 후손.
5.1. 역대 종주(宗主)
1. 인성군 이공(仁城君 李珙).2. 해평군 이길(海平君 李佶). - 인성군파 1대 사손. 사손(嗣孫)의 댓수는 종주의 댓수에서 '-1' 하면 된다.
3. 광선군 이장(光善君 李漳).[17]
4. 기안도정 이구(杞安都正 李構).
5. 이익현(李益炫).
6. 이백규(李白圭).
7. 이종화(李鍾和).
8. 이약소(李躍沼).
9. 이수붕(李秀鵬).[18]
10. 이규응(李奎應).
11. 이재형(李載瀅).
12. 이홍용(李洪鎔).[19]
13. 이해혁(李海焱) - 현재 사손.
6. 기타
-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 인성군의 집이 있었다. 일대 고개는 인성군의 '부(府)' 가 있단 뜻으로 '인성붓재'로 불렸고, 이것을 한자로 '인성현(仁城峴)'으로 부르다가 줄여서 '인현(仁峴)'이라고 했다. 즉 '인현(仁峴)'의 '인(仁)'이 '인성군(仁城君)'의 '인(仁)'이다.
- 인성군의 막내아들 해양군이 제주도로 귀양갔을 때 제주도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문집 《규창집(葵窓集)》에 기록했다. 현재 이 기록은 당시의 제주도의 모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1] 봉호는 지금의 인천광역시인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서 유래했다.[2] 강화 도호부사 민사준(閔士俊)의 딸로 성종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민자방의 증손녀이다. 인조 연간에 사망.[3] 이재형과 대림산업의 창업주인 이재준의 9대조.[4] 이복 형 순화군의 양자로 출계.[5] 이복 동생 흥안군의 양자로 출계.[6] 이 때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난리를 겪은 직후에 이뤄진 혼인임에도 쓰는 재물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많고, 가례를 담당한 관원들이 사적으로 재물을 챙기면서 백성들의 재물까지 갈취하는 바람에 그 광경이 정말 참혹했다고 맹비난을 하고 있다(...).[7] 扈聖原從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 갈 때 모신 공신을 가리킨다.[8] 조선시대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관서.[9] 도제조는 이런 관서들 내부를 책임지는 자리로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10] 선조의 계비. 영창대군의 생모이자 인성군에겐 적모(嫡母).[11] 출근하던 사헌부의 관리들이 길에서 자신을 보고도 피하지 않자 이를 문제삼고 감찰을 추고하도록 청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함부로 꾸짖고 욕보이는 바람에 또 탄핵을 받았다.[12] 예문관에 속한 정9품의 관직명.[13] 세자 익위사에 속한 정9품의 관직명.[14] 정확히는 종친으로서 폐모살제에 앞장선 것부터 꽤 큰 죄를 지은 셈이지만 그래도 대역죄까지는 아니었고, 광해군부터가 살아남았으므로 주범이 아닌 찬동자에 불과하며 종친이기도 한 인성군 역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전적으로 인해 추후 계속 역모에 오르내리자 대왕대비가 된 인목왕후까지 처벌에 동의할 정도였고 사사 또한 막지 않았다. 적모이자 대비를 함부로 건드린 종친의 말로라고 볼 수 있는 셈.[15] 그리고 흥안군 역시 어쨌든 왕족이라 그랬는지 인조는 도성으로 돌아온 후 흥안군을 처형한 도원수 심기원 일파를 자기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왕자를 살해하였다고 하여 하옥시켰다.[16]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 1874년판에 언급되어 있다.[17] 2대 종주 해평군 이길의 동생 해령군 이건의 아들.[18] 8대 종주 이약소의 5촌 조카. 단 그의 생부 이정소가 6대 종주 이백규의 동생 이현규의 손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이수붕이 입양될 당시 족보로는 이약소의 7촌 조카였다.[19] 2019년 1월 10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