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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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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관련 분야별 여담
2.1. 즉위 이전2.2. 성격2.3. 예술 활동2.4. 외모2.5. 건강2.6. 업적 및 폭정2.7. 사망 이후

1. 개요

조선의 10대 국왕 연산군에 대한 여담.

2. 관련 분야별 여담

2.1. 즉위 이전

특진관 예조 판성 유지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그릇을 옮기고", "호조 좌랑 이두의 집에도 여귀[2]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복은 오고 재앙은 물러가라고 비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을 퍼뜨려 주라' 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 라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를 쏘아서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2.2. 성격

2.3. 예술 활동

2.4. 외모

2.5. 건강

그 이후에 면창 증상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있었는데 전과 다르게 심한 증상이 아니고 가벼운 증상이었으며 더군다나 그 전까지는 면창 증상에 대해 언급이 여러 나왔었다. 전에 비해 증상이 조금씩 완화되어가고 있으며[25]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는 간접적으로 완치되가고 있다는 늬앙스의 서술이 있기 때문에 완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산군의 얼굴에 종기(부스럼)가 떠나지 않았다는 내용은 세자 때의 기록이며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병으로 인한 흉터나 자국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이에 대한 얘기는 실록이나 야사에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이덕형[26]이 기록한 수필집 죽창한화를 보면 연산군 피부병은 완전히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터져 전라도에 머문 이덕형이 97세인 한 노인을 만나 그 노인한테서 연산군 외모 묘사를 듣고 자세하게 서술한 기록이다. 어린시절 노인은 당시 한양에서 재위 끝무렵 연산군의 얼굴을 직접 봤으며 그 해 가을에 반정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노인은 연산군이 키가 컸으며 빛은 희고 수염이 적으며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고만 묘사하였다. 이를 볼 때 연산군의 피부병 치료가 제대로 안됐다면 분명 노인은 빛은 희나 용안이 얽었다 또는 곰보 자국과 종기와 흉터(자국)이 있었다고 언급했을 것이다.[27] 그러나 이에 대한 얘기는 일체 언급되지 않았기에 연산군의 종기 질환은 제대로 치료되었으며 만성적인 피부질환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미디어에서 연산군의 피부가 안좋았다는 얘기가 나올 때 질환을 치료한 이에 대한 얘기는 언급이 없고 일생동안 피부병을 앓았다~ 여드름이 많았다 식으로만 알려져있다. 또한 연산군 뿐만 아니라 이복동생인 중종은 얼굴과 몸에 아토피 피부 질환이 있었으며 외모 묘사에도 얼굴이 약간 얽었다는 묘사가 언급되있고 세조 또한 극심한 피부병을 앓았었다. 이 외에도 태종, 세종, 문종, 성종, 광해군, 정조는 종기 질환을 숙종, 현종, 헌종은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다. 이렇듯 수많은 조선 임금들은 유전처럼 종기질환이나 피부병을 앓았었다.
즉위 초 연산군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재위 중반~ 후반에 들어서는 눈병 외에는 다른 병상은 없었고 사소하고 가벼운 증상들만 있었는데 금방 호전되었으며 재위 후반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스트레스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았다고 앞서 언급했었는데 그동안 연산군은 대간들로 인한 스트레스 영향으로 금방 완쾌되지 않았고 완쾌 됐어도 다시 또 재발하는 등 이러한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신하들을 억누르고 나서부터는 신하들의 족쇄로부터 자유를 찾았는지 몰라도 확실히 초기 때와 달리 활기차고 연산군의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운평과 흥청들의 외모를 항상 중요시여겨 부스럼같은 피부질환이 있으면 곧 치료하게 하였다.

2.6. 업적 및 폭정

2.7. 사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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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융은 연산군의 본명이다.[2] 여자 귀신[3] 참고로 정창손은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4] 그러나 정창손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그냥 냅두라고 하였다.[5] 일각에서는 영의정 정창손과 사이가 안 좋아서 귀신도 내쫓을 겸 화포로 정창손도 같이 내쫓자는 본심이 있기에 제안을 했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6] 내훈은 부녀자의 덕목과 훈육에 대해 저술한 책.[7] 만 21세[8] 옷의 겉감과 안찝[9] 광증[10] 연산군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혹시나 궁 밖 바깥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하였으며 자신의 사생활을 궁 밖 사람들이 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11] 궁 밖 사람들이 몰래 엿보는 광경을 들켰을 때는 곤장을 때리고 그 일대의 집을 허물었다고 한다.[12] 흔히 대비에게 박치기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얘기는 야사이다.[13] 참고로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14] 포구악에 맞추어 격구하는 동작의 한가지[15] 연산군의 외모는 선대 왕들에 비해 유난히 곱상했기에, 이러한 자신의 외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는 분석도 있다.[16] 목련으로 만든 향[17] 칡 섬유로 짠 베[18] 삼실로 짠 천[19] 생원·진사에 합격된 때에 입던 예복[20] 다만 연산면의 오계 품종이 천연기념물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21] 당시 기준으로는 못생겨서 연산군이 잘 생겼다라고 기록에 쓰라는 명을 내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 무근이다.[22] 연산군과 더불어 중종이 키가 작았다거나 중키였다는 얘기도 있는데 실제로는 둘 다 키가 컸다는 기록이 있다. 둘의 키가 작거나 중키였다는 묘사는 야사나 실록에 전혀 언급이 없고 온라인상에서 잘못 알려진 정보이다.[23] 본문에서 뜻하는 양기는 심신의 기력을 뜻한다.[24] 부스럼[25] 재위 중반~후반에 넘어가면서부터는 면창의 관한 증상이 도졌다거나 악화되었다는 기록이 언급되지 않았다.[26] 한음 이덕형이 아닌 동명이인이다.[27] 다른 외모 기록에도 연산군 얼굴에 곰보나 종기 흉터자국이 있었다는 얘기는 언급되지 않았다.[28] 실제 연산군 얼굴에는 반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일체 없다.[29] 이 시기의 세계관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순조나폴레옹을 알 정도. 허나 겉으로만 알 뿐이고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 자체가 없었다.[30] 당시에는 음력을 사용하였는데 고종 때부터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년 11월 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하며 이로써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 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31] 이거의 둘째 아들인 이백록이 이순신의 할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