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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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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이덕형
李德馨
<nopad> 파일:/image/032/2007/06/15/7f16k10a.jpg
출생 1561년(명종 16)
한성부 성명방
(現 서울특별시 중구)
사망 1613년 11월 20일 (향년 51 ~ 52세)
(음력 광해군 5년 10월 9일)
경기 양근군 용진
(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묘소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봉호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1]
시호 문익(文翼)
본관 광주 이씨[2]
명보(明甫)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부모 부친 - 이민성(李民聖)
모친 - 문화 류씨 류예선(柳禮善)의 딸
부인 한산 이씨(? ~ 1592) - 이산해의 딸
자녀 장남 - 이여규(李如圭)
차남 - 이여벽(李如璧)
3남 - 이여황(李如璜, 1590 ~ 1632)
장녀 - 정기숭(鄭基崇)의 처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정승.

2. 생애

조선 중기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광주 이씨 출신이다.[3][4] 한성 성명방(誠明坊: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류전[5]의 누이 동생인 어머니 류씨(柳氏)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소년기에는 영의정으로 있던 유전의 집이 있는 경기도 포천으로 가서 성장한다. 자라면서 영특하다고 명성이 돌았으며, 이후 토정 이지함의 눈에 띄어, 그의 조카로 동인의 중진이자 이후 북인의 영수가 되는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다.

1580년 약관 20세 나이에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6] 이후 대제학 이이의 눈에 들어[7] 승승장구 하며, 1591년 예조 참판에 오르고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했다. 당시 이덕형의 학문과 인품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조선 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사신과 교섭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후 청원사로 명나라로 가 만력제를 설득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얻어오는 데 성공한다.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 정책을 수행하였다. 1598년 38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었다. 40살 이전에 정승이 된 케이스는, 세조 때 구성군 이준 이후 최초다. 그나마도 이준은 종친이었고 세조의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서 능력보다는 라인 잘 타서 정승된 케이스. 이덕형 역시 선조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재상이 되었지만 그의 능력이 없었으면 재상이 되었을리 만무하다. 1884년에 갑신정변 당시 홍영식이 당시 만 27세의 나이로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으나 정변을 일으켜 된 것이므로 실력으로 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후 좌의정, 1602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이 영의정 역시 구성군 이준과 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조선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다. 이항복과 함께 현실적인 판단으로 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광해군의 눈 밖에 났다.[8] 이덕형은 편의상 친인척에 따라 남인, 북인과 모두 이어질 수 있는 범 동인 계열로 분류되나 본인 스스로 붕당과 거리를 두었고, 1613년 유일한 동지였던 이항복이 축출되면서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덕형은 결국 이항복 없이 혼자서 무리하게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사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가 역적을 옹호했다는 혐의로 탄핵당하고 삭탈관직되었다.[9]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지면서, 실의에 빠져 시골집으로 돌아간 지 2개월 만에 숨졌다.[10] 이덕형의 죽음을 들은 이항복은 곧바로 이덕형의 사저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을 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할 때 이덕형은 이항복도 함께 해주기를 원했지만 이항복은 거절했고, 삭탈관직된 이덕형은 실의에 빠졌다가 곧 사망했다. 이덕형은 사망한 후에도 눈을 감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 이항복이 찾아와 자신이 함께 하지 못한 이유("이제 곧 폐모론이 일어날 텐데, 그때 반대하다가 죽음을 맞이할 신하가 하나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나")를 설명해 주자 그제야 눈을 감았다고 한다. 실제로는 이덕형이 독촉해서 결국 이항복과 함께 반대 의견을 올리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그 사이에 이항복이 천거한 인물이 광해군 연간을 휩쓴 옥사의 수많은 피해자들 중 하나로 걸려들면서 이항복 본인도 축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복귀한 이항복은 이후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완전히 실각하고 함경도북청도호부유배된 뒤 사망했다. 남인계와 서인계 전반에서 두루 존경을 받던 정치 원로 이덕형과 이항복의 실각과 죽음으로, 두 당파는 광해군과 집권세력인 북인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묘지명은 평생 친구인 이항복이 썼다.링크

3. 기타

4. 대중매체

5. 관련 문서



[1] 인조반정 이후 익사공신, 형난공신 삭제로 인한 삭탈.[2]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3] 이 집안은 조선 초, 중기 최고 권력 가문의 하나였지만 연산군 때 멸문지화라 부를 정도로 크게 타격을 입는다. 자세한 것은 이극돈무오사화이이첨 항목을 확인. 한창 때는 성종이 "아들을 낳는다면 광주 이씨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할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인재들이 많았다.[4]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5]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매우 비상했다고 전해진다. 후술할 유희서의 부친. 활을 쏘던 어떤 무인에게 "그 화살통이 마음에 드니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라고 청했다가, 그 무인에게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로 거절당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그 무인은 뒷날 조선을 구한다.[6] 을과 1위라 2위다. 당시 기본적인 과거 합격자는 등급을 갑과, 을과, 병과로 나뉘어 갑과(제1위라 칭한다)를 3명, 을과(제2위라 칭한다)를 7명, 병과(제3위라 칭한다)를 23명으로 총 33명을 뽑았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등수를 나눠 벼슬을 다르게 하였다. 그러나 별시는 기본적인 정기 과거 시험이 아니라서 왕이 원할 때 치렀고 합격자 인원은 당시 관리 자리가 부족할 때 뽑는 시험이다 보니 그 부족한 만큼 유동적으로 하여 보통 33명보다 많이 적었다. 그러니 실제로는 합격자 수가 더 적어 더 치열했다.[7] 묘지명에도 이항복과 함께 이이의 추천을 받았던 이야기가 나온다.[8] 임해군이 이덕형의 외사촌이자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었다는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덕형은 임해군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했다. 대인배 인증. 하지만 임해군은 어차피 사형당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사형시키려는 이유가 좀 억지여서 그렇지.[9] 계축옥사에 영창대군을 끌어들인 건 누가 봐도 어거지였지만 일단 역모에 말려든 이상 처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 시기의 광해군은 역모 사건이면 거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옥사를 무한정 확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덕형은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국왕이 법을 어기는 행위라며 처형에 반대하고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하였다.[10]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덕형의 본관인 광주 인근인 양근군이었지만,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해당한다. 조안면 송촌리에 이덕형이 말년을 보낸 별장 터가 유적지로 남아있다.[11] 다만 두 사람이 치른 과거는 달랐는데 시험장만 같았던 것이다. 이항복은 성균관 유생만 치를 수 있는 과거 시험인 알성시를 치렀고 이덕형은 성균관 유생이 아니었고 3년에 1번 치러지는 정기 과거가 아닌 왕이 원하는 해에(혹은 관리가 부족한 해) 치르는 별시를 치렀다. 당시 이항복 25세, 이덕형 20세에 시험을 봐서 이항복이 병과, 이덕형이 을과로 급제한다.[12] 그 때문인지 박수동 화백의 만화 <오성과 한음>에서도 오성은 키가 작고 잔꾀에 능한 제리 스타일로 나오는데 한음은 키가 약간 크고 당하는 역할을 많이 맡는 멀대 스타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최후의 일격은 한음이 주로 먹인다.[1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이순신을 비롯한 장수들에게는 1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 없다고 깠다.[14] 당연히 이덕형과 이산해의 집안은 본관이 달라서 동성동본 금혼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관이라는 개념이 없는 중국장군으로서는 조선의 관례를 모르니 오해할 수밖에 없다.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동래 부사 송상현의 첩은 이씨라는 이유로 조선 왕족으로 오인받았다. 이덕형의 부인인 한산 이씨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떠나다가 일본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피난민 무리 사이에서 떠돈 헛소문이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그녀에게 정려를 내렸으며 이덕형은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후 본처를 두지 않은 것은 한산 이씨를 유일한 본처로 여김으로 한산 이씨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도리와 예우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