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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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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동래성 전투와 전사2.2. 사후
3. 가족 관계4. 평가5. 주요 시설
5.1. 부산광역시5.2. 충청북도 청주시
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宋象賢
파일:external/www.jbknews.com/%EC%86%A1%EC%83%81%ED%98%84%20%EC%84%A0%EC%83%9D.jpg 파일:attachment/송상현광장/3.jpg
송상현 영정(정부표준영정 85호)[1]
2002년. 권오창 화백 제작.
충청북도 청주시 충렬사 소장.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송상현광장에 있는 그의 동상.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 천곡(泉谷)·한천(寒泉). 시호 충렬(忠烈).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관으로, 전쟁 초기 부산 동래성[2]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며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2. 생애

1551년(명종 6) 2월 12일 전라도 정읍현(현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송복흥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진사에, 1576년(선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1584년(선조 17)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한 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 오늘날의 부산광역시장)가 되어 다가올 전란에 대비하였다.

2.1. 동래성 전투와 전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동래성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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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약 30,000명에 맞서서 관민 약 4,000명으로 대항했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었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EC%A0%9C%EB%AA%A9+%EC%97%86%EC%9D%8C55-1.jpg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3] 조복을 갈아입고 북향 사배[4]를 올리고 항전을 이어가다가 1592년(선조 25) 5월 23일 (향년 41세)[5]로 전사했다. 그의 관기 출신 한금섬은 담을 넘어서까지 그에게 달려가 함께 죽임을 당해 절개를 지켰다. 참고문헌

소 요시토시고니시 유키나가는 그가 비록 적수지만 그의 용기에 감탄[6]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7]

2.2. 사후

사후 효종 때에 이르러 이조 판서와 찬성에 추증되었고 '충렬(忠烈)'이란 시호도 하사받았으며(효종실록』 10권, 효종 4년(1653) 3월 4일 경오 6번째 기사) 동래안락서원(安樂書院)과 청주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한편, 동래에 있던 그의 시신은 전란 이후 수습해 청주로 옮겨졌으며 현 위치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행정동으로는 강서1동)의 청주 충렬사 맞은 편 언덕에 모셨고, 신도비[8]도 조성되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여담으로 청주IC 부근에 위치했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계획된 노선이 이 곳을 지나려고 했지만 이를 피하려고 건설한 바람에 옥산면에서 남이JC 부근이 곡선으로 휘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부친인 송복흥(宋復興, 1527~1594)은 송상현이 전사하고 2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헌부 감찰과 지방 수령을 지냈으며, 아들 덕에 사후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송복흥)

부인 성주 이씨(이온(李熅)의 딸) 사이에서 송인급(宋仁及, 1576~1608), 송효급(宋孝及, 1579~?)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송인급은 1605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과 서장관을 지냈고 차남 송효급은 1606년 진사에 올랐다.

한편 동생 송상인(宋象仁, 1569~1631)도 1605년 문과에 급제해 함경도 북평사, 형조 좌랑을 지내다가 1612년 김직재의 옥사로 인해 제주도에 10년간 위리안치되었다. 이 옥사 당시 국문 자리에서 자신은 송상현의 아우로 4대에 걸쳐 과거에 나가 충성을 다했다고 항변(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4년(1612) 2월 22일 정해 3번째 기사)해서 형 송상현의 친구들이 그를 구원해 목숨을 건졌고 인조반정 이후 다시 등용되어 남원부사, 전라도 관찰사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실록위키-송상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송상인)

4. 평가

본래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고 전쟁 초기에 빠르게 전사한 탓에 해낸 일이 없어서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어렵지만 임진왜란 개전 초기 너무나도 열세가 뻔한 상황 속에서 부산진을 지키다 전사한 정발, 다대포를 지키다가 전사한 윤흥신과 더불어 일본군에 당당히 맞선 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일본군마저 그를 높이 평가해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할 정도였다. 따라서 '동래'의 후신인 부산광역시에서는 그와 더불어 정발, 윤홍신과 함께 '부산을 지킨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부산진구 양정동에는 이 문서 맨 위 사진에 있는 송상현의 동상이 있으며 그 주변은 '송공 삼거리[9]'라고 불렸다가 지금은 아예 주변을 광장으로 조성했다.

이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 군부대인 제53보병사단의 별칭인 '충렬부대'의 '충렬'은 송상현의 시호인 '충렬(忠烈)'에서 따왔으며 부산 지역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지역을 빛낸 위인'으로 장영실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다.

5. 주요 시설

송상현을 기리는 시설들은 부산광역시충청북도 청주시에 자리해 있다.

5.1. 부산광역시

파일:attachment/송상현/song.jpg

5.2. 충청북도 청주시

6. 대중매체


[1] 흉배에는 문관은 학, 무관은 호랑이, 임금 및 왕자는 용이 그려진다, 이 초상화에서도 흉배가 학이라 송상현이 문관 출신임을 보여주고 있다.[2] 현재의 동래읍성은 영조 때 고쳐 지은 것이며, 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읍성은 현재의 절반 정도였다고 한다.[3] '부자(父子)의 관계 보다는 군신(君臣)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며 성에서 싸우다 죽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4] 임금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절을 네 번 하는 것.[5] 세는나이 42세.[6] 일각에는 전쟁 전에 이미 송상현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7] 다만, 송상현을 제외한 전사자들과 살아남은 일부 동래성 주민들은 무참히 처형당해 해자에 파묻혔고 이는 2005년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 도중에야 발견되어 해당 역 공사가 지연되었다. 지하철이 정상 개통이 된 후인 현재에는 역사(驛舍)내에 작은 역사(歷史)관이 마련되어 있으니 방문자가 원한다면 그 처절했던 전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8] 1659년(효종 10)에 세운 신도비는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제목인 두전(頭篆)은 이정영이 썼다.[9] 삼거리 이름의 '송공(宋公)'은 '송상현'을 뜻한다.[10] 지정번호 폐지 전 제11호로 지정되었다.[11] 지정번호 폐지 전 제7호로 지정되었다.[12] 현재의 충렬사는 1975년 기존 안락서원을 헐고 정비사업으로 지은 것이라 이를 두고 부산시와 지역 유림들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한다. (관련 기사)[13] 오늘날 이 두 지점 사이를 청주시 3순환로가 가로질렀다. 중간에 작은 길이 있는데, 이전보다 많이 돌아가게 생겼다.[14]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가 있는 여성 배우와는 동명이인의 남성 배우로, 2002년작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58화에서 김두한에게 겁없이 덤볐다가 참교육당한 좌익 수감자 패거리의 두목 감방장 역할을 맡았다.[15] 2002년작 SBS 드라마 야인시대김형사 역할로 유명한 배우이다.[16] 얼굴이 마동석을 닮아서 마동석으로도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