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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10:20:37

흉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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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조선
2.1. 흉배사진
3. 명나라

1. 개요

흉배(胸背)는 중-근세 한자문화권에서 사용된, 임금의 각종 의복이나 관리의 관복에 앞뒤로 붙인 장식이다. 보(補) 또는 보자(補子), 양당(裲襠)이라고도 한다.

2. 조선

파일:신숙주2.png 파일:채제공 초상.jpg
신숙주의 초상화, 조선 초기 흉배 채제공의 초상화, 조선 중~후기 흉배
조선은 세종 대에 영의정 황희의 강한 반대로[1] 흉배를 사용하지 않다가 단종 2년에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본떠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常服)에 네모난 흉배를 달게 되었는데, 대군기린, 백택, 도통사는 사자, 대사헌은 해치, 문관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 3품은 백학, 무관 1, 2품은 호표, 3품은 웅비를 달도록 규정했다. 명나라 사신과 관복이 똑같아져 구별이 힘드니 개혁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의 인물인 신숙주 초상화를 보면 흉배를 단령에 직접 수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흉배 착용이 시행되었다고 갑작스레 당상관의 관복 전체를 새로 지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조선 최초의 흉배는 대체로 상의원의 지원을 받아 별도로 만들어 지급되었고, 이후에는 각자의 경제 사정에 따라 수놓는 방식과 붙이는 방식이 혼용되었다. 이때의 관리의 흉배는 임금의 것과 같이 옷 색깔과 같은 바탕색에 금실로 짠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관리의 흉배는 바탕색을 옷 색깔에 맞추지 않게 되었고 재료도 금실에서 색실로 바뀌면서 임금의 흉배와 양식이 차별화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별도로 만들어 옷에 붙이는 방식이 일반화되었고 사용된 동물도 기러기, 돼지, 사슴, 거위 등 명나라와 다른 자주성을 보이게 된다. 이후 당하관까지 사용이 확대되어 숙종 때는 6품, 영조 때는 9품까지 쓰게 됐고, 무신의 흉배에 비금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흉배를, 당하관은 백학흉배를 달도록 했다. 그러다 고종 대에 문관 당상관은 쌍학(학 두 마리), 당하관은 단학(학 한 마리)을 달고, 무관 당상관은 쌍호(호랑이 두 마리), 당하관은 단호(호랑이 한마리)를 달았다.

관리의 흉배는 관복 중에서도 예복 개념인 상복에만 달았고, 일상 집무시에 입는 시복은 흉배를 달지 않았다. 그래서 관리들이 항상 흉배 달린 관복을 입는 것으로 묘사되는 한국 사극의 묘사는 엄밀히 말하면 창작물의 반영 오류에 해당된다.

임금의 곤룡포에는 금실로 짠 용흉배를 달았다.[2] 관리가 네모난 흉배를 앞뒤로 하나씩 2개를 붙이는 것과 달리 모양이 둥글고 양 어깨에도 부착하여 총 4개를 붙이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양란 이후 양식이 바뀐 관리의 흉배와 달리 바탕색을 옷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 부착하는 방식이 유지되었다. 어진과 유물을 보면 명나라 멸망 전까지는 용이 정면에서 보면 왼쪽을 바라보는 측면상이었다가, 명나라 멸망 후에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상으로 변화하였다.

왕실 여성의 흉배는 크게 네 시기로 나뉜다. 15세기 전반~17세기 중반까지는 적계흉배를, 17세기에는 적보자를 사용했고, 18세기인 1638년(인조와 장렬왕후가 가례를 올린 해)부터 1751년(영조 27년) 국조속오례의보서례 반포 이전까지는 직금 혹은 자수로 제작한 원형 봉보를 사용했다. 대왕대비부터 세자빈까지 같은 형태였고, 견화도 사용했다. 봉보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상방정례에 나타난다. 그러다 영조 27년에 국조속오례의보서례가 반포되면서 왕비, 세자빈, 세손빈에 한해 남편과 같은 금수용보를 사용하게 되었다. 왕, 왕비, 세자, 세자빈은 원보에 견화까지 달았지만, 세손과 세손빈은 삼조방룡보를 사용했고 견화는 달지 않았다.

참고자료1, 참고자료2

2.1. 흉배사진

2.1.1. 흥선대원군

파일:기린흉배.jpg
기린흉배
파일:거북흉배.jpg
거북흉배

3. 명나라

파일:external/ww3.sinaimg.cn/0065zVshgw1fav9td09owj30fa0a3ju3.jpg
토목의 변 이전에는 조선과 차이가 없으나 토목의 변 이후 정면에 용보를 3개나 부착한 곤룡포가 등장했다. 자세히 보면 용보 속의 용이 머리를 향하는 위치가 전부 다르다. 맨 위의 용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평상시 입는 곤룡포가 아닌 국가 제례 시 입을 수 있게 만든 곤복형 곤룡포로, 명나라 후기에 이르러서는 기존 곤복에서 곤복 형식의 곤룡포로 제례용 복장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평시에는 조선의 것과 같이 용보가 4개인 것, 민무늬 곤복, 곤복 전체에 용무늬가 수놓인 것 등 다양한 곤룡포를 입었다.


[1]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인데 국가가 문승(文勝)의 폐가 있는 듯 하여 항상 염려가 된다. 단자사라(緞子紗羅)는 우리 나라의 것이 아니며, 존비등위는 금은각대(金銀角帶)로 정하고 있으니 굳이 흉배를 하여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2] 일반적으로 임금의 흉배를 별도로 보라고 구분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보는 흉배의 다른 이름이고 용흉배, 용보라는 명칭이 혼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