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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 때 상투를 틀기 위해 사용하던 머리 장식. 상투가 흘러내리지 않고 갓이나 관모가 바람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는데 정말 중요한 도구였다.2. 구조와 과정
말총이나 옻칠한 명주실을 사용해 만들며[1] 편자, 앞, 뒤, 당 순으로 나누어 짠다.
편자는 망건을 착용한 사람이 머리를 조일 수 있도록 말총을 평직으로 짠 부분이다. 이 편자를 망건골에 묶고 앞뜨기와 뒷뜨기를 하는데 뜨는 방식은 같으나 앞부분은 사람의 이마에 통풍이 되도록 뒤보다 성글게 짜며, 말총이 짧아 한 올로 한 줄을 모두 마칠 수 없기 때문에 뒤의 설단과 앞과 뒤의 연결부분인 설주에서는 한 코에 매듭을 세 번 지어 말총을 이어서 쓴다.
앞뜨기와 뒷뜨기를 하는 과정은 바닥뜨기라고 부르며 바닥을 다 뜬 망건을 몸골에서 당골로 옮겨 당을 걸게 된다.
당은 망건을 찬 사람의 머리크기에 따라 머리 윗부분을 조이는 역할을 하고 망건에서 제일 신축성이 좋은 부분이다.
망건을 다 만든 후에는 망건의 설단과 설주에 이은 말총을 가위로 다듬고 공단으로 마감한 다음 당줄을 건다.
망건의 당이 좁아진 19세기 이후에는 탕건, 갓이 바람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는 턱인 풍잠이 달린 경우가 있다. 상단 사진의 망건 가운데에 달린 나무조각인데, 맨 위 사진처럼 없는 경우도 있다. 망건의 양쪽 끝으로는 끈인 당줄이 4개가 달려있으며 망건을 머리에 맸을 경우 양 옆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당줄을 고정시키는 용도의 단추인 관자가 달려있다. 아래에서 서술하는 관자는 다 이 관자다.
3. 유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며 중국과는 생김새와 제조방식이 달라졌다. 중국의 망건은 명주실에 옻칠을 해서 만들었지만, 조선은 원간섭기부터 말 목장이 많아 말총을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망건의 재료로 비단보다는 말총을 선호했다. 세종실록지리지 2년 경자조에서 마미망건(馬尾網巾)을 명나라 사신에게 증여한 기록이 있고, 1488년(성종 19)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 朝鮮賦≫에서도 조선의 망건은 모두 말총으로 만든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말총을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창안이고, 망건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토착화 된 뒤, 도리어 중국으로 역수출 된 것으로 여겨진다.중국식 망건과 달리 조선식 망건은 제작과정을 마무리한 후 신분과 귀천을 나타내기 위해 반드시 관자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망건에 매다는 관자는 그것의 품질 고하가 신분과 직위를 제도적으로 규정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결국 조선의 말총망건은 명나라의 망건 양식을 전수한 것이지만 그것의 재료와 형태를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조선식의 특수한 수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4. 망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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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건장(網巾匠) |
조선 시대에 공조(工曹)와 상의원(尙衣院)으로 소속되어 망건(網巾)을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사람이다. 구한말~일제강점기를 증언한 구술채록 등에 따르면 제주도 화북~함덕에 이르기까지 망건을 많이 만들었다. 특히 조선의 망건은 말총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현재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망건을 만드는 일은 1980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기능보유자는 제주도 제주시 삼양동에 사는 강전향이다.
5. 착용법
5.1. 매는 위치
위와 같은 그림이 퍼지면서 사극의 망건 착용법은 잘못되었다는 오해가 퍼졌으나 실제로는 정확한 착용법이 정해진 게 아니고 개개인별로 다르다.
조선 후기 현이도 / 영의정 채제공 / 삼도수군통제사 이창운
해방 후 유림 선비들이 망건을 착용한 모습을 보면 높게 매는 법과 낮게 매는 법이 혼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8세기 이전 출토유물이나 전세유물들을 확인해 보면 현재 남아있는 구한말 유물에 비해 당을 높이 걸어서 머리를 온전히 감싸는 형태로 만들어져 정수리에 상투를 틀려면 망건을 이마 중간까지 매어야 했다.[2]
5.2. 매는 순서
망건은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매었던 물건이라 출토 미라부터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사진자료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망건을 맨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의 설명과 달리 보통 상투를 튼 다음 매는 경우가 많다.
1.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어 정리한다.
2. 이마 부분에서 상투의 망건 부분을 댄다. 대는 부분은 시대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으로 이마의 ½ 이상이 드러나도록 올려 맨다.
3. 머리 뒤쪽 아래 부분의 양쪽에 있는 당줄끼리 한번 묶고 남은 부분으로 관자에서 1~2회 감은 뒤 다시 머리 뒤쪽에서 남은 부분을 묶는다.
4. 머리 뒤쪽 윗부분의 양쪽에 있는 당줄끼리 한번 묶고 남은 부분으로 관자에서 1~2회 감은 후 다시 머리 뒤쪽에서 남은 부분을 묶는다.
5. 양손으로 상투의 머리카락을 정리한 다음 한손으로 돌려 감으며 상투 모양을 만들고 남은 머리카락 끝으로 상투의 밑부분을 감는다.
6. 위에서 쓴 당줄의 남은 부분으로 상투 밑부분을 돌려 감아 고정시킨다.
6. 기타
상투를 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착용했어야 하지만 너무 비쌌기 때문에[3] 대부분의 돈없는 서민들은 그냥 수건을 묶어 머리띠를 두르는 식으로 사용했고 그 위에 패랭이 같은 비교적 저렴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망건 쓰다 파장'이라는 속담에서 보듯, 제대로 모양을 잡으려면 꽤나 시간과 노력이 든다. 시장에 나가기 위해 외출하려면 의관을 정제해야 하는데 계속 망건이 비뚤어지고 갓도 덩달아 비뚤어지다 보니 집에서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해가 져서 시장이 문을 닫아버렸다는 이야기.[4] 이 때문에 망건을 제대로 못 쓰고 비뚤어진 갓을 쓰는 모습은 18세기 이후 공명첩 등으로 갑자기 양반이 된 졸부들을 비웃는 문화 코드로 널리 쓰였다.
망건은 갓이나 정자관과 달리 신분에 따른 착용 제약이 없어 구한말 기록사진들을 보면 노비나 평민들도 착용한 경우가 종종 있고, 신분이 높을수록 인모로 만든 고급 망건이나 고급 재료를 사용하여 관자를 단 경우가 보인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머릿수건(두건) 자체도 삼국시대부터 있던 문화이긴 하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남녀 가리지 않고 머리에 천을 두른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옆동네 중국의 복두는 기원전 4~5세기(대략 공자왈 맹자왈 하던 시절)까지 올라가는 것 보면,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종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 명주실로 만든 망건은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드물지만 아예 없던 것은 아니라서 18세기 이익정 묘 출토 망건은 옻칠한 명주실을 결어 만들어져 있다.[2] 능창대군(1599~1615) 묘 출토 망건, 이익정(1699~1782) 묘 출토 망건, 최원립(1618~1690) 묘 출토 망건, 일본 심수관 소장 망건 등의 유물 참조[3] 망건은 말총을 바늘에 꿰서 모든 부분을 수제작하기 때문에 제작시간이 오래 걸리며 값도 비쌌다.[4] 현대 한국의 인식과 달리 이 시기 시장을 봐 오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의 노동이었다. 남녀가 유별해서 여성은 집 안의 일, 남성은 집 밖의 일로 나누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장시가 지역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산짐승이나 도적의 습격 등도 조심해야 했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일례로 옛날에는 마포나루에서 인천 가는 거리 정도여도 지금은 신경도 안 쓰는 야트막한 양천고개가 큰 장애물이었고, 밤에는 호랑이 때문에 고개를 넘기 힘드니 고갯마루 밑에서 하루 쉬어가야 했다. 양천현과 계양현에 관아와 동리가 있었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