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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02:25:45

청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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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ds/200901/25/70/a0107670_497bf469ac5a9.jpg 파일:회암사 출토 청기와.jpg
고려 왕조의 청자와(靑磁瓦) 회암사 출토 청기와
후원에 연못을 팠다.
그 곳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양이정(養怡亭)이라 했는데,
양이정에 청자를 덮었다.
- 《고려사의종 세가 11년(1157년) 봄 4월 중.
1. 개요2. 청기와 찾아 삼만리3. 관련 속담

1. 개요

청자를 이용해 만든 고려시대 기와, 혹은 청색을 띠는 조선시대 기와.

청자를 만들 수 있던 곳은 중국과 고려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와를 청자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또 청기와 유물은 고려에서밖에 찾을 수가 없다. 한국만의 독특한 건축재료인 셈이다.

고려시대 만월대 전각 중에는 청자기와를 얹은 '양이정(養怡亭)'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1933년 이곳에서 청자와편이 발견되었다. 그 청자와편은 북한이 아닌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 기록을 토대로 박물관 앞 연못에 청자기와를 얹은 정자를 재현하듯이 건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 경복궁의 주요전각, 사찰들에 청기와를 덮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보통 이나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청기와까지 고려시대처럼 기와 하나하나 도자기 그 자체로 제작하였다기보다는 보통의 기와에 청색 안료와 염초 등을 이용하여 푸른 발색을 내고, 도자기를 굽듯이 구워 보통의 기와를 굽는 것보다 더 공들여 제작하였다고 추측된다.

파일:external/www.dapsa.kr/2014_04_15-P4157911.jpg

실제로, 경복궁의 침전 영역 발굴시, 임진왜란 이전에 사용된 걸로 보여지는 다량의 청기와가 발굴된 적이 있다. #
청기와를 구워서 만드는데는 재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사정전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 문소전과 종묘에도 오히려 덮지 못했는데, 어찌 불당에 덮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문종 즉위년(1451년) 2월 28일 기사 중.출처

다만 문종이 안평대군 이용이 청하여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증축해 짓는 암자인 대자암에 청기와를 덮으려 할 때 이런 반대하는 기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청기와는 어지간히 만들기도 힘들고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 경복궁에서도 근정전과 사정전에서만 청기와를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종은 예술가 동생을 아껴 그가 후원하던 절을 더욱 중창하고 싶었던 것인지 신하들의 청을 듣지 않고 그대로 불사를 강행했지만 청기와만은 굽는것을 중지했다고 하니[1] 청기와가 당대에 얼마나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여겨졌는지 알 만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광해군이 각종 궁궐을 중창할 때, 청기와를 재현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으나 전쟁통에 장인들의 명맥이 끊겨 청기와를 제작하는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제작을 하게 되어 인경궁을 중건할 때 정문과 정전, 침전 등 주요 건물에 청기와를 얹게 된다. 이때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심했는데, 조선시대에 만든 청기와에 파란 색깔을 내는데 당시 사용하던 흑색화약의 재료 중 하나인 염초(질산 칼륨)가 상당량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임란 직후 나라살림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귀중한 염초[2]를 왕궁 지붕 올리는 데 낭비했고, 사치도 그런 사치를 부리면 안된다는 신하들의 반대와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 외에는 정치/군사/경제적인 다각적 이유로 널리 사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파일:창덕궁 선정전2.jpg
파일:창덕궁_선정전_근경.jpg
<colbgcolor=#bf1400> 선정전[3]

현존하는 궁궐 전각 중에서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게 청기와를 덮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경궁에서 이건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들과 확연히 두드러지게 대비되는 기와의 청색이 사진 상으로도 잘 보인다.

현재에는 사찰 건물이나 주택건축 등에 건축재료로 사용된다. 청기와는 일반 기와와 달리 겨울에 눈이 잘 안 쌓이고, 쌓여도 금방 미끄러지듯이 빠져서 쌓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단가가 꽤 비싼 점이 흠이라고 한다. 청와대가 청기와를 얹은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청와대를 낮추어 부르는 속어로 청기와 또는 '청기와집'이라고도 한다.

2. 청기와 찾아 삼만리

일제강점기 시절 개성국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한 미술사학자 고유섭 등은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청기와를 애타게 찾았다.

고유섭은 전설처럼 내려오던 청기와의 흔적을 찾아 고려시대 고분이 밀집된 개성을 집중 수색하다 1944년 세상을 떠나게 되고, 제자인 최순우가 그의 유지를 받들어 청기와 찾기 프로젝트를 이어나간다.

1963년 최순우 팀은 고려청자의 흔적을 찾아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조사를 하던 최순우와 정양모 앞에 소쿠리를 든 아줌마가 나타나 자기 집 마당 앞에서 아들이 주운 청기와 파편을 발굴단에게 팔았고 그것이 단초가 되어 그 아주머니가 살던 초가집 마당에서 청기와 발굴 작업을 시행하게 되었다.
"당시 역사 기록에 나오는 청자기와의 실물을 보고 가슴이 뛰어 말이 안 나왔습니다...
우현[4] 선생님, 이제야 선생님이 주신 숙제를 했습니다."
- 미술사학자 최순우 인터뷰 내용

그곳에서 수십년 간 청자의 신비를 찾아 헤맸던 발굴단 앞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 처럼 500편 이상의 청자기 파편,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청기와 10여 개와 함께 거대한 고려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실전되었던 청기와가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였다.

이후 강진을 중심으로 188개에 이르는 고려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르기도 할 정도로 고려청자 중심지로 유명하다.

3. 관련 속담

청기와에 얽힌 속담으로 '청기와 장수'라는 말이 있다. 어떤 기와 장인이 각고의 노력을 들여 청기와를 구워내는 데 성공하고 큰 돈을 벌었는데, 청기와 만드는 비결을 죽을 때까지 자식에게까지도 알려주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으려고 하는 바람에 대가 끊겨 비결이 실전되었고 여기에서 무엇인가 중요한 정보를 저 혼자만 알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사람을 '청기와 장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화.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서도 윤 직원 영감이 어린 기생첩 춘심이에게 버스 무임승차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그런 걸 보니 청기와 장수는 아닌 모양이다"라고 이 속담을 인용한다. 그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채만식은 가히 풍자의 명인이다.


[1] 마침 국가재정의 여유분이 부족한 시기인데다가 세종이 승하하고 사신들이 왕래할 시기라 접대 예산이 필요했기에 신하들이 반대했다고 한다.[2] 실제로 당시 기록을 보면 유황과 숯은 충분한데 염초가 없어서 화약을 못만들고 있다는 내용이 다수 있다.[3] 첫 번째 사진 출처 - 내 손안에 서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4] 고유섭의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