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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6:18:58

돌하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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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하르방
Dol hareubang
파일:external/www.aljago.com/haroobang_03.jpg
제주목 돌하르방

1. 개요2. 특징3. 위치4. 유형5. 유래6. 현대의 돌하르방7. 창작물에서8. 기타

1. 개요

제주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석상이자, 명실상부한 제주도의 상징물.

돌하르방은 제주 방언으로, 표준어로 해석하면 '돌 할아버지'가 된다. 이 명칭은 근대에 나왔고, 그 전에는 우석목(石木)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옹중석(石)이라는 단어로도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1] 이후 어린이들이 돌하르방이라고 부르는 게 널리 퍼지다, 결국 문화재로 지정할 때 돌하르방이 정식 명칭이 된 것.[2]

그 외에 불교미륵 신앙의 영향을 받아 육지에서 큰 돌을 미륵이라 부르는 것처럼 미륵, 돌미륵이라 불리기도 한다.

2. 특징

제주도에서 장승을 대신하여 세워진 마을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아 있는 향토자료를 보면 주로 성문의 입구나 길의 입구에 세운것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오래된 돌하르방이 쓰고 있는 모자는 보통 버섯머리 혹은 벙거지 모양으로 남근 모양과 흡사[3]한데, 이를 토대로 본래 남근석을 세워둔 것이 조선시대로 오면서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사람 모양의 돌하르방으로 고쳤던 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뒷모습도 그냥 제대로 모자 모양을 한 것도 있어서 남근석설을 완전히 신뢰하긴 힘들다.

제주도에서 많이 나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구멍이 뽕뽕 뚫린 것이 특징이다. 그러한 현무암의 특징 때문에 투박하면서도 정감가는 모습이 인상적. 제일 큰 건 사람 키의 2배는 된다고 한다.

또한 돌하르방의 종류는 손의 위치에 따라 상징하는 인물이 달라지는데, 오른손이 왼손보다 위에 놓인 돌하르방은 문인(文人)을 상징하고 왼손이 위에 놓인 돌하르방은 무인(武人)을 상징한다. 양손이 평등한 돌하르방은 평민 또는 근래에 만들어진 것.

3. 위치

4. 유형

2016년 기준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4] 돌하르방은 총 47기로 제주목(현 제주시)에 23기, 대정현(현 서귀포시 서부)에 12기, 정의현(현 서귀포시 동부)에 12기이며 제주도에 현지에 있는 돌하르방은 45기이다. 제주목에 위치했던 돌하르방 2기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기 때문. 이 3곳의 읍성에 세워진 돌 하르방들은 모양새가 각각 다르다.
파일:제주대학교 돌하르방.jpg
파일:external/www.ttearth.com/dolhareubang14.jpg
파일:external/www.ttearth.com/dolhareubang03.jpg

5. 유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이 돌하르방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보통 학계에서는 4가지 가설들이 논의된다.
파일:external/cdn.c.photoshelter.com/Mongolie1735.jpg}}}||
파일:external/2.bp.blogspot.com/mongolia_10_24_2005_3_36_57_p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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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ancient.eu/238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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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섬 석상 볼리비아의 티와나쿠 석상(tiwanaku)
파일:external/www.jeonlado.com/48_00518_28-6.jpg}}}||
조선후기 석장승들

이렇듯 여러 가설들이 제각기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종합설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제주도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한반도 문화권과 상이한 집단이 거주혔을 가능성도 제기되는데[10], 이때 제주도의 원주민들은 남방계 문화의 영향을 일찍이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11] 그러는 한편, 고려시대 이후로 몽골의 직접적인 통치 거점이 되면서 우실하 교수의 주장대로 요나라 등과도 같은 계통인 북방 몽골계 문화가 들어왔고, 조선시대 이후로는 한반도의 장승 문화까지 들어오면서 현재의 돌하르방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위에 나열된 사진들을 보면 지리적으로는 북방기원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고, 돌하르방 손의 위치는 남방기원설로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 어느 한 가지로만 기원을 설명하기에는 해명해야 할 점들이 많다.

예컨대 한반도 장승 기원설을 채택하면 팔이 있는 점, 제주도에도 나무가 있음에도 굳이 깎기도 힘든 현무암을 쓴 점, 유독 자세가 다른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북방 기원설은 지리적·역사적 맥락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으나 굳이 북방계와 다르게 다양한 액세서리는 조각하지 않은 점, 북방계와 달리 서 있는 듯한 모양새가 주류인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결정적으로 북방 기원이 사실이라면 한국 내에서는 한반도 본토가 아닌 제주도에서만 석상 문화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치명적인 난점이 있다. 남방 기원설은 기타 남방계 문화의 뚜렷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남방계 문화를 고대의 기층 문화로 두고 북방계 및 한반도 문화를 상위 문화로 두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석상은 재질 특성상 쉽게 망가져 사라지지 않으므로 오래도록 보존된다. 이것으로 돌하르방의 서 있는 듯한 모양새와 직각으로 꺾여 몸에 붙은 채 앞으로 어긋나게 모여 있는 팔의 형태를 설명할 수 있다. 한편, 몽골계 북방 문화의 유입으로 사라져 가던 고대 남방계 석상 문화가 비슷한 문화의 도입으로 부활했고, 기존 석상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북방계와는 또 다른 형태의 현지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몽골이 물러간 뒤에도 한반도의 문화를 전수받는 과정에서 장승의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장승과 유사한 역할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기원을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합 기원설을 생각하면 고대 남방계 석상 역시 발견되어야 마땅하겠으나 지금껏 그런 사례는 없다.

6. 현대의 돌하르방

파일:external/img.etoday.co.kr/20140526042141_454138_1000_740.jpg
파일:external/cdn.bizwatch.co.kr/9d9f20397778b5d0f75a99ad7be07064144942.jpg
제주도에 위치한 카카오 본사에는 돌하르방이 노트북을 들고 있다. 회사명이 'daum', 'daumkakao', 'kakao'로 바뀜에 따라 노트북에 새겨진 문구도 이에 맞추어 바뀌었다.[12]
파일:난타호텔 돌하르방.jpg
제주도난타호텔 정문에 있는 돌하르방은 칼춤을 추는 듯한 모습으로 유명하다. 독특한 모습 덕분인지 2021년 슈슉 슈숙. 슉. 시. 시발럼아. 같은 인터넷 밈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북촌 돌하르방 미술관의 김남흥 원장이 조각한 것이다.
파일:external/www.mediajeju.com/16427-2-12874.jpg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애리조나주에 각각 한미우호증진의 표시로 기증되기도 했다. 사진은 애리조나주의 세도나에 세워진 돌하르방, 그 옆에 있는 것은 세도나의 상징 코코펠리.[13]

독일로렐라이 언덕 근처에도 돌하르방이 있다. 2009년 제주시와 독일 로렐라이시의 친선우호를 기념하기 위해 제주시가 제작, 기증해서 세운 것. 답례로 로렐라이시는 2010년에 로렐라이 요정상을 제작하여 기증했는데, 제주시 용담 해안도로에 위치한 어영공원에 있다.

일본 아라카와구의 구청사 앞에도 돌하르방이 둘 있다. 앞에 놓인 팻말에는 2006년에 제주시와 아라카와구가 우호도시 제휴를 맺은 기념으로 제주시가 보낸 것이라 쓰였다.

7. 창작물에서

8. 기타


[1] 1754년(영조 30)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 ㅡ 1918년 탐라기년 (耽羅紀年). 여기서 옹중석은 사람을 형상화한 돌조각을 의미한다.[2] 출처 - 1993년 제주일보.[3] 뒷모습이 이 설을 지지한다고 한다. 파일:돌하르방뒷모습download (2).jpg[4] 현대에 장식 목적으로 추가로 흉내내 만든 것은 물론 훨씬 많다.[5] 다른 현들에 비해 30~50 cm가량 더 높다고 한다.[6] 야외에서 풍화에 노출되어온 석조미술의 특성상 대체로 가까이서 자세히 봐야 잘 드러난다.[7] 이스터 섬 문명과 모아이를 만든 민족. 사실 폴리네시아인들이 원래는 중국 남부나 타이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아주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대만 원주민 문서 참조.[8] 다만 가설자체는 그런데로 합당하나, 김병모 교수의 설명이 잘못되었다. 김병모 교수는 폴리네시아인들이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기원했다는 토르 헤이에르달의 주장에 근거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폴리네시아인의 원류인 오스트로네시아인은 남중국 지역에서 기원했다.[9] 장승이 쓰고 있는 것은 조정의 관리들이 쓰는 것이다. 돌하르방의 모자와는 다르다.[10] 한반도에서 한복처럼 직물로 정교하게 짠 옷이 보편화할 동안 제주도에서는 여전히 하의가 없는 가죽옷을 입었다. 즉, 원시부족의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확실히 바뀐 것은 제주도가 한반도에 복속되고 속국을 넘어 한반도 왕조의 일부가 된 이후로, 한국사에서는 중세에 해당할 만큼 늦은 시점이다.[11] 폴리네시아인 등 남방계의 대표주자인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본래 중국 남부의 장강 하류에서 기원했고, 이들이 타이완섬을 거쳐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일본 열도의 일부에도 이들 집단의 한 갈래로 추정되는 문화가 고대에 존재했다. 따라서 오스트로네시아 계열이 제주도에 정착하지 않았으리라 보장할 수는 없다.[12] 추가로 제주도 카카오 T 가맹 택시에 붙은 캐릭터 랩핑도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신체가 돌하르방이다.[13] 본래 한국전통문화원이 세워질 예정이었다고 하지만 마지막 관련 기사는 2006년 한겨레 영문 기사고, 추진자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그곳에는 대신 'Sedona Mago Retreat'이라는 명상센터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14] 장승련 작사 김희정 작곡 <돌하르방>. 참고로 15회 대회 대상은 <반딧불>, 금상은 <들판으로 달려가자>이며 <아빠 힘내세요>는 수상은 못했지만 후에 화제가 되었다.[15] 그래서 맷돌춤이 유행할 당시 돌하르방춤/돌하르방 댄스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