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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전적인 모양새의 합죽선. 국가무형유산 선자장 다산 김동식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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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죽선(合竹扇)은 부채의 일종으로 대나무의 겉껍질로 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 만든다.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인 접선(摺扇)의 일종이며 대나무의 겉대 두 쪽을 맞붙여 살을 만들었다 하여 합죽선이라 부른다.접선 중 가장 품격이 높은 부채로 일반 접선과는 다르다.[1] 기본적으로 대나무의 겉껍질 두 쪽을 민어부레풀[2]로 붙여 하나의 살을 만드는 이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다. 현재는 접부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명사라 접부채라면 그냥 '합죽선'이라고 통칭하면서 일반 접선과 구분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하다.[3] 공정이 상당히 복잡하여 조선시대에는 각 공정별로 육방(六房)이라는 곳을 두어 각 공정 별 전문가로 하여금 공정을 처리할 정도였다. 근대에 들어서 전통 합죽선의 경우 숙련공이 부채 하나 만드는데 약 100일이 소요된다고.
부채의 기본 기능은 본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는 데 쓰지만, 합죽선에는 산수화(山水畵)·사군자(四君子) 등을 그려넣어 미술적 또는 골동품적 가치를 더할 수도 있다. 근래 생산되는 중저가형 합죽선은 기계로 가공한 것들이 많다.[4] 일부 무형유산이 직접 제작한 합죽선은 거의 수공이며,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굉장히 비싸다.
특산지는 전주. 전주의 마스코트 캐릭터인 맛돌이와 맛순이도 이 합죽선과 태극선을 기본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며, 전주월드컵경기장의 지붕도 합죽선을 형상화한 것이다.
2. 역사
서술하기에 앞서, 합죽선은 접부채의 일종일 뿐 접고 펴는 모든 접부채가 합죽선인 것은 아니다.[5][6] 합죽선의 기원은 접부채보다 불분명하므로 심도 있는 연구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래 서술된 내용은 접부채와 합죽선이 혼용되어 있으므로 독자의 주의를 요한다.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도화견문지에는 “고려에서 들어오는 접첩선을 사용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7] 또한 1123년에 송나라 서긍이 고려에 와서 보고들은 바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고려도경”에는“고려인들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하는 신기한 것이다” 고 감탄한 내용이 있다. 이로써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뿐만이 아닌 여러 용도로 쓰였음을 알수 있다.
일본 기원설로는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우리 나라의 기물로서 일본의 것을 모방한 것이 많은데, 접는 부채도 고려는 일본에서 배웠고 중국은 고려에서 배워갔다.”는 내용이 있다. 열하일기에 의하면 접선이 일본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부챗살에 종이를 붙여 접었다 펴서 실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접부채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부채를 만드는 솜씨는 더욱 발달하였는데, 고유의 쥘부채와 방구부채는 외국과의 주요 교역 품으로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10년4월에 왕은 명나라 사신에게 쥘부채 100자루를 주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통문관지”에 따르면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신이 일본에 갔을 때 국교품으로 부채를 상당수량 가져가 전달하였다. 조선시대의 부채는 단순히 생활용품에서 나아가 의례용품이나 예술품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4년 10월 24일 을유 1번째기사
'허침이 아뢰기를, "갓(笠)을 꾸미는 데 모두 금은(金銀)을 쓰니, 그 값이 거의 면포 4, 5동(同)에 이르고, 선자(扇子; 부채) 값이 또한 8, 9동에 이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알겠는가?"'
성종 때의 대신 허침이 왕자들의 사치를 고발하는 대목인데 실록에는 부채라고만 되어 있고 합죽선이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왕자들이 극도로 사치스런 소재로 부채를 만들어 자기 부를 과시했거나 아니면 왕이 직접 보지 못해서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 걸로 봐서 허침이 과장했을지도 모른다. 합죽이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합죽선에 대한 묘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접선은 중국으로 넘어가면 더욱 뻥튀기가 되어 황금으로 거래한다고 한다.'허침이 아뢰기를, "갓(笠)을 꾸미는 데 모두 금은(金銀)을 쓰니, 그 값이 거의 면포 4, 5동(同)에 이르고, 선자(扇子; 부채) 값이 또한 8, 9동에 이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알겠는가?"'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 6월 25일 정사 1번째 기사
예조 판서 신상이 아뢰기를, "지금 좌무위(左武衛)에게 회답으로 준 물건을 보건대, 일본 물건과 값을 비교하면, 3, 4분의 1에 불과하오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의리에 박한 것 같습니다. 더욱 광초(光綃)는 가치가 면포 8, 9필에 해당하며, 부채는 비록 중국에서도 1자루 가치가 황금 2냥쭝에 준하니, 그 값이 지극히 중한데, 지금 호조에서는 광초 1필을 면포 2필에 준하고, 부채 5자루를 정포 5필에 준하였으니, 실로 이는 너무 가볍습니다. 비록 본값에 준하지는 못할지라도 절반으로 주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광초 1필에 면포 5필로 준하고, 부채 1자루에 포자 1필로 하여 다시 마감하여 아뢰라." 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접부채의 가격은 접부채가 화려해지는 조선 후기가 아닌 조선 초기에도 비쌌다.예조 판서 신상이 아뢰기를, "지금 좌무위(左武衛)에게 회답으로 준 물건을 보건대, 일본 물건과 값을 비교하면, 3, 4분의 1에 불과하오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의리에 박한 것 같습니다. 더욱 광초(光綃)는 가치가 면포 8, 9필에 해당하며, 부채는 비록 중국에서도 1자루 가치가 황금 2냥쭝에 준하니, 그 값이 지극히 중한데, 지금 호조에서는 광초 1필을 면포 2필에 준하고, 부채 5자루를 정포 5필에 준하였으니, 실로 이는 너무 가볍습니다. 비록 본값에 준하지는 못할지라도 절반으로 주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광초 1필에 면포 5필로 준하고, 부채 1자루에 포자 1필로 하여 다시 마감하여 아뢰라." 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단오 때 부채를 주고받는 풍습이 있는데, 조정에서 직접 내려주거나 각 관아에서 선물하는 등의 목적으로 만든 부채를 절선(節扇)이라 한다. 절선 중 왕족이나 특별한 신하에게는 살 수가 40~50개 되는 부채인 백첩선, 혹은 속살에 옻칠한 칠첩선을 받았고 그 이하 일반 단오선은 살 수가 낮았으며 평민은 일반 접선을 이용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한 자는 고리에 부채 전용 노리개인 선추를 달지 못했다.
조선 시대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영조 및 정조 시대에 이르러 접부채는 그 다양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재료를 낭비하기로 유명한 승두선이 등장했고 겉대를 바다거북의 일종인 매부리바다거북(대모)의 등껍질로 말아 싼 대모선, 소뿔로 만든 외각선 및 내각선, 소상반죽[8]으로 만든 반죽선 및 이대선, 삼대선 등 부채의 종류 또한 굉장히 다양해졌다. 시간이 더 흘러 양반들이 부채를 이용해 자기를 과시하는 게 지나쳐 대밭이 황폐화되고 평민들의 시름이 깊어지자 조정에서는 부채의 살 수를 줄이고 합죽을 하지 말 것, 크기는 어느 정도 이하여야 할 것 등을 고지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이후 화려해진 부채의 미가 일제강점기 때 값싼 부채의 보급으로 찾는 이가 줄어들고 양반 계층이 몰락하여 맥이 잠시 끊겼다. 자신들의 부채와 비슷하게 속살에 칠을 올린 칠첩선은 조선으로 대량으로 들여와 제작 기법이 단절됐지만 일본에 없는 합죽선[9]은 되려 일본 자본이 지원을 하여 고위층의 선물용이나 수출용으로 계속 제작해 왔다고 한다. 칠첩선과 합죽선 둘 다 최고급 부채임을 생각하면 합죽선이라도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합죽선 기법도 퇴색해 갔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유물을 판단하면 192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조선시대 부채의 기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나[10], 그 이후 부채들은 크기가 작아지고 모양새도 전과 같지 않아졌다. 게다가 장인들은 글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기술을 전승하기 때문에 그 화려했던 기법들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해 왜소한 부채들만 남게 된다.
해방 후 몇몇 장인들이 다시 합죽선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나 잃어버린 기법들을 복원하지 못해 그저그런 부채들만 만들다가 자동기계의 도입과 베이클라이트 같은 신소재의 등장으로 부채의 가격은 획기적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부채의 품질은 매우 조악해졌고 그 와중에 옛 것을 찾아 제대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무형유산들은 자신의 작품에 여러 의미를 붙여 가치를 높이고 있다.[11][12]
3. 제작 공정
앞서 서술하였지만 합죽선은 6개의 제작 공정을 거쳐 생산된다. 그리고 그 공정을 담당하는 곳을 '방'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육방'이다. 육방에서 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다.초조방 - 대나무를 잘라 얇게 깎아낸다.
정련방 - 민어의 부레를 삶아 만든 부레풀로 대껍질 두 개를 하나로 붙여 살을 만든다.
낙죽방 - 속살과 변죽(겉대)에 인두로 문양을 그려 넣는다.
광방 - 광을 내고 속살을 매끄럽게 한다.
도배방 - 부채의 종이를 붙인다.
사북방 -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용 고리인 사북으로 부채를 머리를 고정한다.
4. 합죽선의 종류
아래에 서술한 부채의 종류는 현재 무형유산들의 작품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그 치장 및 재료나 기법, 외형에 따라 나눈 것이다.4.1. 속살에 따른 구분
- 백첩선(白貼扇)
문헌에 백첩선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만, 이것을 큰 합죽선으로 부르는 것이 정설로 되어 가고 있다. 일단, 백첩선은 왕이 하사하였으며 살이 40개 이상인 것이라는 내용이 문헌에 있다.[13] [14] 또한, 이 백첩선은 보통의 부채와 달리 높은 신분이 사용하였거나 왕이 하사한 특별 하사품일 것으로 추정한다.[15][16] 또한 중국 황제의 진상품으로도 쓰였다.[17] [18]
동국세시기에는 이 백첩선이 흰 대나무 살로 만든 부채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일반 접선이 아닌 격이 높은 합죽선으로 추정된다. [19] 때문에 만기요람에 등장하는 오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은 소상반죽 치장 합죽선으로 추정된다. - 칠첩선(漆貼扇)
칠접선(漆摺扇)이라고 하며, 부채 속살에 옻칠한 부채다. 합죽선과는 약간 결이 다른데, 합죽선이 대껍질 두 장을 맞붙여 부채 속살 하나를 만드는 것이라면 칠첩선은 대나무 속살 하나로 부채 속살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속살 제작 공정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전체적인 제작 기법은 합죽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쉽게도 현재 전통적인 제작 기법은 전승되어오고 있지 않다.
문헌에서 옻칠한 접부채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없고, 한국에서 속살에 옻칠을 한 칠접선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시기는 태종실록 10년 경인 4월 26일이다. 기록에 의하면[20] 접부채에 전부 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속살 및 종이에 모두 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 접선은 대나무의 속살로 부채의 살을 만드는데, 대나무의 속살이 무른 탓에 부채의 살이 쪼개지기 쉬웠다.[21] 따라서 장인들은 옻칠을 부채의 속살에 올려 내구성을 강화함과 동시에 살균성, 방수성 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옻칠은 당시에는 귀한 물품이어서 조정에서는 부채 속살에 옻칠한 부채 제작을 엄금하기도 하였다.
부채 속살에 옻칠한 부채를 문헌에서 찾아 보면 여러 이름들이 다양하게 나오는데 그 중 칠첩선은 옻칠 부채 중 급이 제일 높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칠첩선은 순조 때 명온공주에게 진상한 오십죽흑칠첩선이다. 그보다 급이 낮은 옻칠 부채는 칠별선, 칠선 등으로 표현된다.
최근 칠첩선을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부결되었다. 2022년 무형문화재위원회 합동분과 제1차 회의 안건 참조 [22]
4.2. 겉대 치장에 따른 구분
- 별선(別扇)
이름 그대로 특별하게 만들어진 부채다. 이 별선이라는 용어는 오랜 시간 동안 써 왔는데 문헌을 살펴보면 특정한 모양을 가진 부채가 아닌 듯하다. 백첩선이나 칠첩선의 모양이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 승두선이나 사두선, 죽피선 등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모양새를 갖춘 부채가 별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칠별선, 칠유별선, 유별선 등의 이름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속살에 옻칠을 하였거나 종이에 기름을 먹이는 등의 후처리 작업은 선별적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별선은 백첩선이나 칠첩선보다는 급이 낮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호남계록 이라는 문헌을 보면 백첩선이나 칠첩선보다 별선 종류의 진상 수량이 많은 것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 다절선(多節扇)
겉대에 마디가 많은 부채. 죽절선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마디 수가 적지만 견고한 분죽을 사용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마디 많은 맹종죽을 올리고 마디 수가 20절 이상이면 더욱 비싸게 판매한다. 맹종죽은 분죽에 비해 육질이 물러서 부채를 접었을 때 간혹 앞이 벌어지곤 한다.
- 외각선(外角扇)
겉대에 케라틴 재질을 올린 부채. 소뿔이나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주로 사용한다. - 투명한 소뿔을 골라 안쪽에 그림을 그려 겉대에 붙이면 화각선(華角扇)이라고 한다. 유물로 남은 화각선은 조선말 ~ 일제강점기초에 만들어졌다. 화각장 이재만 선생의 말에 따르면 화각은 궁중에서 썼던 것이라고 하며, 최근 김동식 선자장과 이재만 화각장이 협업한 화각선이 등장하였다.
-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쓰면 대모선(玳瑁扇)이라고도 한다.[23] 국립민속박물관에 대모홍접선(玳瑁紅摺扇)이라는 유물이 존재한다. 이 대모선을 뇌물로 썼다는 기록이 존재한다.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39권, 영조 10년 9월 24일 병신 2번째기사이때에 홍치기가 대모(玳瑁)로 부채를 만들어 윤유(尹游)에게 선사하였으므로 서명형이 논핵하였는데, 사문하자 마침내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귀결(歸結)되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만, 홍치기라는 사람이 정말 대모선을 만들지 않았는지, 대모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내각선(內角扇)
겉대 안쪽에 뿔 및 기타 재료를 덧댄 부채. 현재 유물이 존재한다.
- 나전선(螺鈿扇)
겉대에 흑칠을 한 뒤 나전을 붙여 만든 부채. 유물이 존재하며 해당 유물에는 끊음 기법으로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라고 씌여 있다.
- 반죽선(斑竹扇)
중국 소상강 유역에 자라는 소상반죽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부채. 소상반죽은 줄여서 반죽(班竹 으로 표기하기도 한다)[24][25], 상비죽, 상죽, 이녀죽 등으로 불린다. 이 소상반죽은 대나무에 눈물점 같은 원형 반점이 있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26][27] 혹은 소상반죽 무늬를 인위로 만드는 대나무도 반죽이라고 친다.[28]
만기요람에 오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사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등으로 나오는데 여기의 반(斑)이라는 글자가 바로 소상반죽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어피선(魚皮扇)
겉대에 물고기 껍질을 말아싼 부채 문헌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창작품에 가깝다. 최근 몇몇 선자장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제작했다. 가오리나 상어의 껍질을 이용한 어피선은 굉장한 단단함을 자랑한다.
4.3. 선두 모양에 따른 구분
- 어두선(魚頭扇)
선두의 모양이 물고기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끝이 약간 뾰족하다.
- 사두선(巳頭扇)
선두의 모양이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어두선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선두의 끝이 약간 뭉실하다.
- 승두선(僧頭扇)
선두의 모양이 스님(중)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 승두선은 그 특유의 둥그런 등자리 모양 덕분에 쥐는 방법이 약간 다르다고 한다. 보통 펴지는 각도가 좁은 협변선 모양을 하고 있다.
- 유환선(有環扇)
선두 사북에 고리가 있는 부채. 보통 부채는 고리가 달려 있고 여기에 선추를 달아 쓴다.
- 무환선(無環扇)
선두 사북에 고리가 없는 부채.
4.4. 종이에 따른 구분
- 유선(油扇)
종이를 기름에 먹인 부채. 그냥 기름을 먹이는 게 아니라, 특수하게 제조한 가공유인 명유(明油)라는 것을 바른다. 그 기름 제조 비법은 한동안 실전되었으나, 최근 문헌에 바탕을 둔 연구를 통해 부활하였다.
- 협변선(狹邊扇)
부채를 폈을 때 종이가 펴지는 각도가 180도 미만인 것. 대체적으로 140도 이하를 협변선으로 친다.
- 광변선(廣邊扇)
부채를 폈을 때 종이가 펴지는 각도가 180도 이상인 것. 흔치는 않지만 가끔 보인다.
- 대륜선(大輪扇)
별선(別扇)의 일종으로 종이가 표지는 각도라 360로라서 그 모습이 차바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햇볕가리개 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5. 합죽선 구입 및 관리 요령
5.1. 구입
합죽선은 손에서 가지고 노는 쥘부채이므로 가급적 인터넷 쇼핑몰보다는 매장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이 좋다. 내 손에 맞지 않으면 부채를 부칠 때 과도한 힘이 들어가 바람을 일으키기 어려우며 가지고 노는 재미가 없다. 공방, 하다못해 지업사 같은 곳에서라도 내 손에 맞는 부채를 직접 쥐어 보고 구입하면 된다. 합죽선 공방은 전주를 필두로 담양, 인사동과 종로 등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인사동이나 종로의 기프트샵에는 싸구려 중국산도 있으니 주의. 명확하게 '국산/전주 합죽선 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안그러면 가끔 오죽선 비스무리한 퀄리티의 중국산을 내오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싼 게 비지떡이라고 값이 쌀 수록 품질 또한 조악해진다. 특히 수공예품은 더더욱 그러하다. 합죽선은 종이만 교환하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기물이므로 오래 쓸 것 또한 생각해야 한다. 제대로 된 작품을 구매하고 싶으면 무형유산이 직접 제작한 작품 구입을 문의하면 되나, 가격은 상상 이상이므로 신중을 요한다. 이 정도 명품급 합죽선은 외국 선물용으로의 수요가 더 큰 편.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문헌에는 부채 종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만 있을 뿐 그 상세한 모양새는 기록에 없으며, 근래에 발견된 유물들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삼국시대, 고려시대 합죽선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복원" "재현" 합죽선이라고 판매하는 합죽선들은 고증이 되지 않은게 많다. 따라서 "복원품" 또는 "재현품"이라고 하는 제품을 구매할 때에는 반드시 그 원형 유물이 존재하는지 확인 할 필요가 있다.
5.2. 관리
민어부레풀로 속살을 접합하였으므로 비를 맞히면 민어부레풀이 떠서 못쓰게 된다. 비를 맞히지 말아야 하며 또한 겨울에 보관 시 부채 앞 끝을 고무줄로 감아 오동나무 상자 등에 보관하면 좋다. 종이가 찢어졌다 하여 냅다 버리지 말고 공방에 가서 종이를 교환하자. 대략 5천원이면 교환할 수 있다.속살 한두 개가 쪼개졌다 해도 그 부분만 뺄 수 있으니 이 또한 공방에 가 보자.
떨어뜨리면 부채가 상하므로 관리에 주의를 요하며 부채를 펼 땐 소리꾼들처럼 부채 끝을 잡고 떨어뜨리듯 쫙 펼치면 종이가 매우 빨리 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옛날의 소리꾼들이 썼던 부채는 합죽선이 아니다.) 펼칠 땐 점잖게, 접을 때도 조용히. 물론 펴고 접는 것은 자기 취향이다. 어디까지나 '오래 쓰고 싶을 경우'에 한한 문제. 본인이 세게 펴고 싶다면 세게 펴라.
주머니에 넣으면 주머니의 안감이 부드러운 경우 부채 속살의 나뭇결이 거꾸로 들고 일어날 수 있다. 가방 안에 넣거나 손에 들고 다니자.
6. 무형유산
부채를 제작하는 장인을 선자장이라고 부른다. 현재 국가무형유산 선자장과 전라북도 무형유산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 부분의 기능보유자는 아래와 같다.[29]국가무형유산 선자장 김동식 - 2015년 선자장이 중요무형문화재 128호로 등록된 이후 유일한 국가무형유산 선자장이다.
전라북도 무형유산 제10-4호 선자장 엄재수#
전라북도 무형유산 제10-5호 선자장 박계호#
7. 관련 문서
[1] 시중에 많이 돌아다니는 '오죽선' 역시 바로 이런 일반 접선이다.[2] 이 민어부레풀을 어교(魚膠)라고 하며, 동물의 뼈나 가죽으로 만드는 아교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3] 혹시라도 합죽선을 구입하고 싶을 때는 '전주 합죽선'이라고 직접 말해주어야 한다.[4] 제품의 특성상 그 역시도 공장제 '수공업' 형태로 대량생산되는 것이다.[5] 일반인은 많이 헷갈려 하며 심지어 판매자조차 오죽선 등을 합죽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6] 민선, 민합죽선, 오죽선 등은 합죽선이 아니다.[7] 여기의 접첩선은 접고 펴는 접부채를 뜻한다.[8] 중국 소상강 유역에서 자라는 눈물점이 있는 대나무.[9] https://www.breaknews.com/622729[10] 박물관에 전시된 합죽선 겉대 안쪽에 용산공작주식회사 라 찍힌 합죽선이 있는데 이 부채는 기증자가 일본에서 구입한 것이며 따라서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됐음을 나타내는 것이다.[11] 무형유산 고 이기동 선생의 말에 따르면, 합죽선은 고려시대 한 대사에서 유래한다. 출가한 후에도 속세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한 수양이 덜 된 대사가 외로운 수행 중의 노리개 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합죽선을 접어 둔 모양이 여자의 육체와 흡사한 것은 대사가 기녀를 염두에 두고 손으로 가지고 놀 것을 생각한 것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손잡이 부분은 머리이며 양쪽으로 연결된 고리는 비녀를 뜻하고, 그 다음은 가슴 부분이며 아래로 둥그스레 흰 부분은 치마를 의미한다. 그리고 합죽선에 인두로 새겨 넣는 무늬는 박쥐, 국화와 쪽매화가 있다. 박쥐무늬가 뜻하는 것은 박쥐의 활동이 밤이듯이 남녀가 눈이 맞으면 밤에 만난다는 것이고, 국화는 서리 올 때 피어 눈을 맞으며 지는 꽃으로 여자의 절개를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쪽매화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기동씨가 소장한 약 250여 년 전의 합죽선에 쪽매화 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역사를 지닌 셈이다.[12] 그러나 이는 이기동 선생의 재해석일 뿐 정설인 것은 아니다. 합죽선은 혼자 노리개감으로 만들 만한 쉬운 공정이 아니며, 고려시대 합죽선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13]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왕이 하사한 부채 중에는 흰 댓살이 4, 5십 개나 되는 매우 큰 것이 있는데 백첩선(白貼扇)이라고 일컫는다.고운당필기 제4권[14] 또 백첩선(白貼扇)은 으레 50죽(竹)으로 만들어 왔는데 장대(長大)하게 만들려다 보니 만드는 데 드는 죽(竹)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그 값이 매우 많이 듭니다.승정원일기,인조 3년 을축(1625) 2월 18일(정유) 비[15] 때는 바야흐로 한여름이라 임금이 용포자락에서 백첩선(白貼扇)을 꺼냈는데, 흰 명주가 석 자쯤 매어 있었다. 손으로 두세 번 부치더니 이어서 시신에게 묻기를, ‘이 부채를 누구에게 줄 것 같은가’ 하니, 어떤 사람은 정승, 어떤 사람은 주병상서(主兵尙書), 어떤 사람은 종백(宗伯)으로 문형(文衡)을 장악한 사람에게 ……”라고 하였다. 임금이 잠자코 돌아보다가 마침 이모(李某)가 약간 멀리 입시함을 보고 그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네가 가질 만하다.”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사랑 받음을 영광이라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질투하여, 그는 종신토록 벼슬을 얻지 못하고 선전(宣傳)의 직함에서 그쳤다 한다.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16] 하사받은 부채 한 자루를 보낸다. 백첩선(白貼扇)을 어디에 쓰라는 것이냐?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쓸 곳을 알고 싶어서 보낸다.명재유고 제28권 / 서(書)[17] 신들의 생각에는 단자는 한(칸, 청나라 임금)에게 보내는 물건에 쓰고, 화사주는 별단에 내려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백첩선을 더 마련하고 환도를 빼는 일은 다시 부표(付標)하여 들이겠습니다.승정원일기, 인조 6년 무진(1628) 5월 28일(무자) 맑음[18] 사헌부가 아뢰기를, 황조에 진헌하는 물품은 일이 매우 중대하므로 지극히 정밀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난리를 겪은 이후 각사가 태만하여 힘이 미칠 수 있는 것도 재력이 탕진된 것을 핑계로 정성을 다하지 않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어제 성절 방물(聖節方物)을 봉할 때 물품의 대부분이 거칠었으며, 심지어 황모필(黃毛筆) 같은 것은 몹쓸 털을 섞었을 뿐만 아니라 대자루에도 흠집이 많이 있었고, 백첩선(白貼扇)은 제조한 것이 거칠고 조잡할 뿐 아니라 지질도 모두 얇고 촌스러웠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것은 알 만합니다. 해조의 색낭청은 이미 조옥에 가두었으니 응당 추문하여 치죄하겠지만, 당상(堂上)도 홀로 그 죄를 검사하고 단속하지 않았으니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청컨대 공조와 예조 당상을 모두 추고하도록 명하소서.선조실록,선조 28년 을미(1595) 4월 24일(병인)[19] 중국 황제에게 바치는 진상품이 일반 접선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20] 칠한 부채(漆扇)를 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전칠(全漆)은 이어대기 어려운 물건인데, 각전(各殿)에 해마다 바치는 접선(摺扇)에 모두 칠(漆)을 써서 국가의 용도를 허비하니, 금후로는 진상(進上) 이외에는 모두 백질(白質)을 사용하여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21] 합죽선은 이런 문제가 거의 없다.[22] 요약하자면, 합죽선과 제작기법이 거의 같은데 합죽선보다 딱히 뛰어나지도 않고 유물 및 문헌이 부족하며 전승계보도 불확실하다. 또한 제시한 문헌에 근거가 부족하고 오류가 있다 라는 이유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치명타일 수밖에 없는 설명이다.[23] 대모는 원칙적으로 매부리바다거북을 뜻하며, 푸른바다거북이 여기에 포함되는 지는 불분명하다.[24] 경상도 감사가 아뢰기를,“군위(軍威) 사람 도운봉(都雲奉)이 그 후원(後園)에 대(竹)를 심고는 매일 이를 완상(玩賞)하며 즐기다가 운봉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 서(徐)씨는 나이가 28세였다는데, 조석으로 그 후원으로 가서 대나무를 쓸어 안고는 애모(哀慕)하기를 항상 처음 죽었을 때와 같이 하여, 17년간 계속하던 중 하루는 백죽(白竹)이 그 후원에 돋아났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 고대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상수(湘水) 물가에서 슬피 울어서 반죽(班竹)이 난 바 있고, 송(宋) 나라 앙흔(仰忻)이 부모 분묘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효성을 다하여 역시 백죽이 난 상서가 있어서, 군수(郡守) 양반(楊蟠)이 그 마을을 표창하여 ‘효렴방(孝廉坊)’ 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서씨집 뒤에 대가 난 것도 한 상질(常質)의 변이(變異)이오니, 그의 높은 정절을 표창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함으로써, 뒷사람들을 권장하게 하옵소서.”하니, 명하여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0년 무오(1438) 7월 17일(기해)[25] 말하는 자들은, “죽서(竹書)에서 잘못되었다.” 하나 죽서에도 이런 말은 있지 않다. 굴원(屈原)은, “원상(沅湘)을 건너서 중화(重華 순 임금)에게 나아가야지.” 했으니 그 당시 남쪽 지방에 순 임금의 사당이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런데 후세 사람이 이로 인해서 심지어는 반죽(斑竹)이니, 고슬(鼓瑟)이니 하는 노래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는 더욱 심한 것이다.성호사설 제 19권[26] 소상반죽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순임금은 순행을 나갔다가 영주 부근 창오산의 넓은 평야(蒼梧之野)에서 붕어하였다. 이 소식이 그의 두 부인이며 요임금의 두 딸이기도 한 아황과 여영에게 들어가자 그녀들은 순임금을 만나려고 소상강 뱃가로 달려갔다. 그녀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또 하우씨가 배로 건너주는 사람은 사형시킨다고 하여 그들은 건너갈 방도가 없자 피눈물을 뿌렸다 한다. 그 때문에 그녀들은 소상강에 몸을 던졌고 그로인해 ‘소상야우’의 고사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 그 곳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데 그 피눈물 때문에 대나무에 반죽이 생긴 채 자라 그곳의 대나무를 소상반죽(瀟湘班竹)이라 부른다.#[27] 이 전설이 워낙 많이 알려진 탓에 이에 대한 반박글도 존재한다. "하지만 두 여인의 반죽(斑竹) 등에 대한 설은 모두가 근거 없는 허탄(虛誕)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내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순 임금이 유묘(有苗)를 몸소 정벌하는 과정에서 동정(洞庭)에까지 이르렀을 것이고, 교화를 받은 그 땅의 만이(蠻夷)들이 순 임금을 추모하여 제사를 올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을 것인데, 초(楚) 나라 땅의 풍속이 워낙 황당하고 허탄했기 때문에, 순 임금이 붕어하던 해에 실제로 형초(荊楚) 땅에 있었다고 그냥 말해 버린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근사(近似)한 자취가 그래도 있었던 만큼, 내용을 부풀려서 꾸미기도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향산집 별집 제3권[28] 대나무에 반점을 만드는 방법은, 노사(瑙砂) 5전, 반묘(斑猫) 1전, 석회(石灰) 1전을 초(醋)와 개어 대나무 위에 떨어뜨리고 불로 지져서 빛깔을 낸다. 《거가필용》산림경제 제4권[29] 국가무형유산 및 지방무형유산에서 그 보유자(속칭 인간문화재)에 대해서, 공예 분야의 겨우 '기능보유자'로, 공연분야의 경우 '예능보유자'로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