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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7:00:49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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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역사
3.1. 과거3.2. 현대
4. 새를 숭배하는 사상5. 매체6. 관련 문서

1. 개요

최소 청동기, 고조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종교 건축물. 사람하늘()을 이어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의 목에 볍씨가 든 주머니를 매달아 신에게 전달되길 바라며 풍요를 기원하기도 하고 부리에 물을 상징하는 갈대나 물고기 모양으로 깎은 나무를 물려서 화재를 막길 기원하는 등 부적이나 풍수 인테리어 비슷한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나무 솟대 말고도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솟대 유물도 존재한다.

현대에는 특유의 정갈함과 귀여움 덕에 목공예 작품으로도 많이 애용한다.

2. 특징

생김새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횃대에 앉은 새의 모습을 본 뜬 것이고, 이름은 '솟다+막대' 즉 '하늘 높이 솟은 막대'라는 뜻이다. 영동지역 방언으로는 '진또배기'라고 하는데 그 외에도 '짐대'나 '소줏대' 등등 솟대를 가리키는 단어가 여러 방언에 많다.

솟대 위에 얹는 새를 보통은 오리라고 인식한다. 오리는 하늘을 날면서 또한 안팍을 자유롭게 다닌다. 그리하여 고대인들은 오리를 하늘(신)과 땅(사람)과 물 속(용궁)까지 모두 오간다고 여겼다. 게다가 오리는 철새라서 겨울이면 대이동을 하여 사라지는데, 고대인들은 오리가 저승의 세계로 떠났다고 여겼다. 그래서 오리는 이승의 온갖 영역은 물론, 저승까지 못 다닐 데가 없는 영험한 전령으로 간주하였다.[1] 오리가 물새이므로 마을에 물이 부족하지 않게 해주고 불이 나지 않게 막아준다고 해석하는 민속도 있다. 그 외에 지역에 따라서 솟대의 새를 까마귀기러기, 맹금류라고 인식하는 사례도 있다.

경기도충청도에서는 솟대를 장승 옆에 같이 세워두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솟대는 마을 초입에서 잡귀나 잡병을 막을 용도로 세우기도 하며, 장승과 같이 의 사자(使者)로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노릇을 한다. 솟대와 장승이 함께 있는 지역에서는 장승을 상위신격, 솟대를 하위신격 정도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고, 솟대를 상위신격으로 받드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드물다고 한다.[2]

솟대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유물은 보물 제1823호 농경문 청동기(農耕文 靑銅器)이다. 국사교과서에도 실려서 인지도가 높다. 발굴된 유물이 아니라[3] 출토지와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보통은 기원전 5-4세기쯤에 만들었다고 본다. 농경문 청동기의 한쪽 면에 솟대가 있다.

3. 역사

3.1. 과거

파일:external/www.koya-culture.com/art_14900146561386_eed5ae.jpg
농경문 청동기 뒷면에 새겨진 솟대 (왼쪽 위)
파일:external/old.musenet.or.kr/collection_photo2.jpg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출토 조식간두(鳥飾竿頭)[4]

워낙 오래 된 문화라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선사시대 부터 북방민족들이 를 숭배하던 풍습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한시대 때와 그 이전 고조선시대 때 이미 종교적으로 하늘(신)과 땅(사람)을 잇는 매개체라고 생각했었으므로 장승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건 확실하다. 소도와 솟대가 어원이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소도에 세웠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지금도 지방에서는 매년 마을의 솟대를 새로 세워서 고사를 지내는 곳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일부 학계에서 역사민속학 논문집 등을 통해 솟대의 등장시기가 고대 후기라고 늦춰 주장하는 사람들이 극소수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미 그 이전 시기에 솟대 관련 유물이 나오는 데다, 이런 사람은 솟대의 별칭인 짐대[5]와 배(船) 모양 형국을 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에 설치된 솟대/당간지주와 풍수지리 설화[6], 원효나 도선 같은 옛 고승들이 사찰을 창건했다는 설화를 근거로 들기 때문. 사찰창건설화도 엄연히 설화인지라, 실제 해당 승려의 일대기와 맞지 않거나 전혀 상관없는 경우가 많다. 사찰창건설화들을 그대로 믿으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국의 고찰의 90% 이상이 원효, 자장 등 유명한 스님들이 세운 절이다.

솔대ㆍ소줏대ㆍ솟댁ㆍ설대ㆍ새대ㆍ추악대ㆍ거릿대 등 솟대의 다른 별칭들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심지어 사찰창건설화에서 고승들이 나무를 손으로 가공해서 나무새를 만들었다는 내용과 현대에 사람들이 손으로 나무를 깎아 솟대를 만드는 것까지 결부하는 억지를 부리는데, 공작기계가 없는 시대에 당연히 사람이 손으로 나무를 깎지 그럼 뭘로 깎겠는가?

현재 학계의 정설은 솟대 신앙이 후대에 풍수지리와 결합하면서 비보풍수의 한 형태로 풍수적 솟대관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솟대가 전부 배 모양 지세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거릿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낭당이나 장승과 마찬가지로 마을신앙에서 하당신에 해당되어 마을 입구에 같이 배치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파일:kwa03789.jpg

솟대와 관련있다고 보이는 초기 철기시대 새 조각품

파일:dgm361540.jpg

신라에서 만든 청동제 솟대용 새. 가운대에 아예 끼우는 구멍이 있다. 백제에서도 솟대에 끼우는 나무새가 발견된 적이 있다.[7]

파일:32918_30828_4534.jpg

신라 금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있는 디자인이 있다. 고구려에서 표현한 삼족오 처럼 머리에 '볏'이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마한지역의 솟대 신앙을 확인시킨 새 문양

3.2. 현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Sotdae.jpg

파일:attachment/sea_sotdae.jpg

사진은 전라남도 목포시의 해상에 설치된 어느 솟대로, 새 모형을 설치하지 않고 대신 솟대 구조물 위에 갈매기가 앉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솟대를 완성하였다.

파일:솟대.jpg

조식간두를 응용한 듯한 솟대 작품 출처

파일:external/www.ycinews.net/2007062892758.jpg

새만금포항고속도로를 지나가다 보면 금속, 주로 H빔으로 만든 삐죽한 T 모양 장식품을 볼 수 있는데 솟대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내구도는 몰라도 목질 특유의 질감과 구부러진 것들이 없어서 목재에 비하면 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음은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

4. 새를 숭배하는 사상

가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보는 종교적인 인식은 선사시대부터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타났다. 아마도 고대의 조장 풍습에서 사람이 죽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사람을 먹어 그 영혼을 신에게 인도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대표적으로 고대 이집트 사례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기둥 위에 새를 올려놓는 풍습은 전형적인 북방계 문화로, 나무와 새를 보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간주하여 알타이의 조상(鳥像)을 비롯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존재하였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차차 자취를 감추고 현재는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문화가 되었다.

그래도 여기저기 흔적은 남아 있는지 태국의 소수민족 중에서는 마을 입구에 새의 문이라는 나무문을 만들어 새 모양 나무인형을 올려놓거나 솟대와 유사한 조형물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이나 신사 입구에 설치하는 토리이(鳥居)도 명칭이나 용도 면에서 솟대와 유사한 점이 많기에 둘 사이에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있다.[8]

파일:external/www.city.akita.akita.jp/EF5-2.jpg

일본 아키타현 아키타시 지조덴 유적(地蔵田遺跡)에 있는 야요이 취락 복원지 중 출입문 부분. 야요이 시대 유물로 발견된 나무 새와 관련유적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재미 있는 사실은 솟대에 새를 장식하는데, 일본의 신사 앞에 있는 토리이를 한자로 쓰면 鳥居(새가 있다)라는 것이다. 고대에 한반도의 솟대 문화가 일본에서 토리이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중동 지역의 괴베클리 테페에서도 새와 관련한 상징을 지니는 유적을 볼 수 있다.

5. 매체

6. 관련 문서



[1] 일본에서는 오리를 봉황으로 보는 관념도 있다고 한다.[2] 아마도 조선시대 때 동물을 사람 아래로 보던 시각으로 바뀐 영향 탓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3] 1970년대 초반 대전의 어느 고물상에 있던 것이 서울의 고물상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이 입수하였다. 도굴꾼이 도굴하여 팔아넘겼는지, 혹은 다른 경로로 유출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4] 무당이 의례시 지팡이나 장대 끝에 꽂아놓는 장식품 출처[5] 배에 다는 돛대에서 유래한 호칭이라고 주장한다.[6] 어떤 곳의 지세가 배(船) 모양이라 우물을 파는 등 배에 구멍을 내는 짓을 하지 않고, 솟대나 당간지주 등을 세워 배의 돛대 역할을 하도록 하여 지역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전설이 여기저기에 있다.[7] 이필영 저, 대원출판 "솟대" 참고[8] 예를 들면 토리이는 한반도에서 전래한 솟대 2개를 마주보도록 연결한 것에서 변형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