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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1:09:42

야요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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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기3. 특징4. 야요이인

1. 개요

[ruby(弥生, ruby=やよい)][ruby(時, ruby=じ)][ruby(代, ruby=だい)]

일본청동기 시대이자 철기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대. 이전까지는 금속기가 유입되지 않았다가 이 시기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유입되었다.

2. 시기

야요이 시대의 시작 연대는 2000년대까지는 기원전 4세기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었다. 야요이 시대를 3기로 나누어 전기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기는 기원전 1세기 경부터, 후기는 1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 청동기와 철제 무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등장하면서 이 때를 야요이 조기로 보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규슈 북부에서 출토된 토기 1점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이 기원전 10세기경으로 나오면서 이를 야요이시대로 볼것인가의 학설이 대립하였다. 반대 측은 유물 1점의 출토를 토대로 당대 문화가 보편적으로 도입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보는 시각이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은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한반도의 송국리 문화인들의 도래로 시작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었고, 만약 야요이 시대의 개시기가 기원전 10세기로 올라가버리면 한반도 송국리 문화와 연대가 맞지 않게 되어 버린다. 또한 기원전 3세기부터 발견되는 청동기와 철기 유물을 야요이 시대로 보았는데 이러면 야요이 시대와 청동기 철기 유입 시대를 따로 분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리자 일본 고고학계는 방사성탄소연대인 기원전 10세기를 지지하는 파와 기존의 연구 성과와 방사성탄소연대를 절충한 기원전 7세기를 지지하는 파로 나뉘게 된다. 2020년대에 와서는 절충파의 연대인 기원전 7세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한국 고고학계에서도 절충파의 연대를 수용하는 경우가 다수다. 다만 한국에서 송국리 문화의 시작 연대가 기원전 10세기로 상향조정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추후에는 야요이 시대의 개시 연대도 기원전 10세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을 아직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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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을 짓기 시작하고 청동제 무기[1], 제구가 출현했으며 안정적인 수경경작이 가능해지는 등 이전 시대였던 조몬 시대에 비해 급격하게 문명이 발전했다.

야요이 시대 동안 일본 열도에 금속과 농업이 널리 퍼지고 소국들이 생겼으며 이후 고훈 시대로 이어졌다. 일본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이 시대에 활동했다.

1884년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가 도쿄도 분쿄구 야요이초에서 처음 발굴되었다. 토기가 처음 발굴된 곳에는 야요이 토기 발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주변에는 네즈역도쿄대학 혼고 캠퍼스가 있다. 때문에 이 토기를 연구한 도쿄대학 인류학과에서 야요이 토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몬시대와 마찬가지로 토기에 따라 시대를 구분한 셈. 한반도처럼 이 시기의 야요이 토기는 민무늬 토기가 보편적이다.

야요이 시대의 대표적 유적들로는 후쿠오카현 이타즈케 유적, 시즈오카현 도로 유적, 시마네현 고진다니, 가모이와쿠라 유적 등등이 있는데, 경작이 시작되어 농업 관련 유물들이 많이 출토된다. 환호취락이 발달했는데 이는 한반도 남부에서도 흔히 보이는 유적이다. 매장 문화는 조몬 시대와 많이 바뀌어 지석묘, 방형주구묘[2] 옹관, 석관, 목관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4. 야요이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야요이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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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모, 동과 등. 이러한 청동제 무기들은 훗날 제구(제사 도구)로 용도가 바뀐다.[2] 방형주구묘는 이후 일본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한다.